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조성진은 앳됐다. 장염 때문에 살이 빠졌다지만 통통한 볼살도, 뽀송뽀송한 솜털도 여전했다. 인터뷰나 공연 포스터 촬영 때 한 번도 메이크업을 해본 적 없다는 이유를 알겠다. 호기심 가득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을 듯 말 듯 한 특유의 표정으로 들어서는 조성진의 걸음걸이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무대에 입·퇴장할 때 양팔을 옆에 딱 붙이고 걷는 걸음걸이가 긴장 때문이 아니었군요.
후훗. 네, 원래 걸음걸이가 이래요. 무대에서 많이 긴장하는 편이 아니에요.
거장 플레트네프 앞에서의 공연이라 부담감이 컸을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플레트네프가 워낙 저명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데다 차가운 편이라 힘들겠다고요. 그런데 아니에요. 젠틀하시고 나이스하게 해주셔서 굉장히 편하게 연주했어요. 깜짝 놀랄 만큼 잘 맞춰주세요. 타이밍 같은 것도 그렇고, 제 마음대로 연주할 수 있게 배려해주셨어요.
이번 공연(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에 대해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
음악을 점수로 매기는 건 어려운데요, 공연은 되게 만족스러웠어요.
A 제로 이상?
(웃으며) 네.
협연할 때 지휘자의 주문에 잘 따르는 편인가요, 아니면 본인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편인가요.
한 지휘자 선생님이 ‘너는 칠 때마다 다르게 쳐서 힘들다’고 하셨어요. 모르겠어요. 연주하다 보면 즉흥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뉘앙스를 바꾸고 싶거나 자유롭게 연주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플레트네프는 그런 것까지 배려해주셔서 정말 마음대로 연주할 수 있었어요.
‘자신보다 작곡가가 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겸손하게 음악을 하겠다’고 말했지요?
연주자의 스타일보다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한 연주를 추구할 것 같은데, 의외입니다.
저는 악보대로 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라흐마니노프의 콘체르토 음반을 들어보면, 자기가 작곡한 곡인데도 악보대로 치지 않아요.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게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해주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악보에 숨어 있는 것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쇼팽과 베토벤, 라흐마니노프와 라벨 등 전혀 다른 스타일의 곡을 단기간에 소화해 연주했습니다. 어떤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더군요.
평소 음악관도 그렇고, 연습할 때에도 작곡가의 의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연주에 몰입하면 그런 걸 다 잊어버려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에 연주자가 나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연주하거든요. 무대에 오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다 잊어요.
열한 살 때 금호아트홀에서 독주회로 데뷔했으니, 어느덧 무대 경력이 8년이 됐습니다.
늘 ‘신동, 영재, 최연소’라는 말이 따라다니고요. 조성진군에게 나이는 특권이자 부담일 것 같습니다.
특별히 나이를 의식하지 않아요. 신동은 확실히 아니에요.(웃음) 피아노를 워낙 늦게 시작했어요. 여섯 살 때 친구들이랑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거든요. 그 때 소나티네를 치고 있었어요. 콩쿠르에 나가보면 제 또래 다른 아이들은 쇼팽을 쳤죠. 콩쿠르마다 다 떨어졌어요. 시작은 늦었지만 성장은 빨랐던 것 같아요.
피아노를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레슨을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독주회 무대에 설 실력을 갖춘 거군요.
예술의전당 영재아카데미에서 배운 게 큰 도움이 됐어요. 피아노를 전공하겠다고 결심하고 예술의전당 영재아카데미 시험을 보게 됐죠. 소나티네로 우연히 합격했어요. 박숙련 교수님한테 중학교 때까지 계속 배웠는데요, 처음으로 교수님께 레슨을 받게 되어서 많이 긴장했어요.
치열하게 연습을 했나 봅니다.
당시에는 굉장히 많이 한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하루 2~3시간 연습했거든요. 제가 어떻게 연습했냐 하면요, 메트로놈을 한 바늘씩 움직여 속도를 키워가면서 하논을 연습했어요. 어렸을 때 바흐 인벤션을 많이 연습해서 기본기는 돼 있었어요.
출발이 늦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피아노를 전공하겠다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온 건가요.
후훗. 저는 항상 잘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최고가 될 거라는 이상한 믿음으로 멋모르고 시작했죠. 부모님도 음악을 잘 모르셔서 무조건 저를 지지해 주셨어요. 부모님이 이 분야를 잘 아셨다면 달라졌을지 모르죠.
조성진 집안에는 음악가의 DNA가 없다. 아버지는 건축업에 종사하고, 어머니는 주부다. 친척이나 3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음악 쪽에 종사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조성진 어머니는 외동아들 조성진의 그림자 같은 지원군이다. 앞에서 이끌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조성진을 따라다닌다. 동석한 어머니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편안한 미소로 아들의 말을 경청했다. 어머니에게 “조성진군이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어떤 심정으로 허락했나요?” 물었다.
“본인이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대학에 보내겠다는 욕심 같은 건 없었습니다. 콩쿠르에 첫 출전하면서 연주한 곡이 소나티네였어요. ‘너는 외우는 걸 잘하니까 소나티네를 잘 외워서 한번 나가보자’ 한 거죠. 아빠 엄마가 잘 몰라서 내보냈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쉬운 곡이었지만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연주했어요.”
조성진군의 연주는 온몸으로 곡의 감성을 전달하는 느낌이 듭니다. 섬세한 손놀림, 배우 못지않은 표정과 몸짓 등 그 풍부한 감수성의 원천은 뭔가요?
글쎄요. 어렸을 때 많이 놀아서 그런가? 여행도 많이 다니고 친구들과도 많이 어울렸거든요. 집이 분당이어서 에버랜드에 자주 갔어요. 7년째 연간 회원권을 가지고 있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에버랜드에 가서 신나게 놀아요.(웃음) 방학 때마다 여행을 많이 다니고요. 피아노를 심각하게 배워본 적이 없어서인지 피아노가 그냥 좋아요.
그 좋아하는 피아노가 평생의 업이 되면 싫어질 수 있을 텐데요?
어느 순간 ‘피아노가 정말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은 들어요.
음악 장르에 대한 편식이 있나요?
클래식 위주로 듣지만 가요도 좋아해요. 음반을 많이 사는 편인데 가요 음반은 잘 안 사게 되더라고요. 아, 이적 음반은 있어요.
아이유와 태연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볼이 발그레해지며) 하하하. 비주얼을 좋아하는 거예요. 무슨 노래가 있는지는 아는데 많이 듣지는 않아요. 친구들이랑 가끔 노래방에 가면 부를 줄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어요. 뒤에서 조용히 박수만 치죠.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많지 않아 아쉽겠습니다.
네. 동년배 친구는 별로 없고요, 주로 형들과 많이 어울리죠. 동혁(피아니스트 임동혁)이 형이랑 친해요. 형도 집이 분당인 데다 관심 분야가 같아서 잘 통해요. 성격은 많이 달라요. 형은 굉장히 예민하지만 저는 무덤덤한 편이거든요.(웃음)
평범한 삶에 대한 동경은 없나요?
중학교 때에는 아쉬운 게 많았어요. 손가락 다칠까봐 농구・배구 같은 구기종목은 대부분 못 했거든요. 피아니스트에게 허락된 유일한 구기종목이 탁구예요. 그런데 지금은 만족해요. 제가 나이로는 고3이잖아요? 우리나라 고3이 얼마나 힘든데요. 후훗.
9월에 프랑스 파리고등국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가죠?
왜 파리인가요? 조성진군은 바흐・베토벤・브람스 같은 독일 음악가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유럽으로 가고 싶었어요. 독일도 생각했지만 프랑스가 유럽 문화예술의 중심지라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음악은 미술과도 연관이 깊잖아요. 그런 문화적인 체험을 두루 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가 파리라고 생각했어요.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주는 낭만적인 이미지가 참 좋아요. 피아노 스킬을 배우거나 그런 것보다는 문화 체험을 하면서 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요.
지금 조성진군 머릿속에 있는 화두는 뭔가요?
음악이죠, 음악 전반. 어떻게 하면 피아노를 잘 칠까보다는 어떤 음악을 추구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옛날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다 보면 진짜 좋은 음악은 ‘시대의 미’가 살아 있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쇼팽 시대의 피아노는 지금의 피아노가 아니잖아요. 그 시대의 피아노 소리를 똑같이 연주하는 건 불가능하죠. 21세기에는 현 시대에 맞는 음악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내가 지금 하는 연주가 100년 후에도 납득이 될까? 하는 고민도 많이 하고요.
피아니스트로서 어느 지점에 와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직 출발도 안 한 것 같아요.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요?
잘 치는 것과 유명한 건 다른 문제잖아요. 저는 둘 다 아닌 것 같아요. 다만 무대에 오르면 내가 이 세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고 연주해요.
어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가요?
글쎄요. 그건 너무 먼 훗날의 이야기라서…. 그냥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큰 업적을 남기기보다는 죽을 때까지 음악에 빠져서 피아노 치는 사람으로요. 요즘 레옹 플라이셔의 전기를 읽고 있어요. 미국의 80대 피아니스트인데, 오른손을 다쳐서 왼손으로만 연주하죠. 이 사람이 어떤 음악관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지 궁금해요.
피아노를 전공하기 전, 조성진은 장래희망란에 ‘만능’이라고 적었다. 뭐든 잘하는 사람. 그는 사진 모델도 잘했다. 사진기자의 요구에 따라 10대 소년과 20대 청년을 오가며 천연덕스레 ‘연기’했다. 웃을 듯 말 듯한 미소로 정면을 빤히 응시하면 10대 소년이었고, 셔츠 앞섶 단추를 두 개쯤 풀어헤치고 상념에 잠겨 있으면 20대 청년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조성진 역시 이 지점이다. 작곡가와 연주곡에 따라 소년과 청년을 넘나드는 시기. 쇼팽을 연주하는 조성진은 싱그러웠고,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조성진은 제법 노련했다.
6월 연주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고국에서의 연주가 없을 것이라는 보도가 퍼졌지만, 아니다. 그새 공연이 줄줄이 잡혔다. 조성진은 7월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라벨의 ‘라 발스’로, 11월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국내 관객 앞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