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되돌린 기차 여행
김성백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나들이를 했다. 서울에 사는 맏이 딸네 집에 다녀오기 위해서다. 아내와 함께한 나들이! 얼마만인가? 금년 들어 직장이며 모임에서 몇 차례 나들이를 갔으나 아내와 함께한 나들이는 처음인 것이다. 아내는 김치며 반찬거리를 이것저것 챙겨 담느라고 부산하다. 서울에 올라갈 때는 바삐 고속버스를 타야했고 딸네 집 찾아갈 일이 걱정스러워 둘이 했던 오붓한 여행이 되지 못했다. 3시간을 훨씬 넘게 버스에서 부대끼고 내렸으나 지하철을 타기위해 무거운 보따리와 가방을 들고 물어 물어서 긴 계단을 몇 차례 오르내리기를 해야 했던 나들이 길은 고생길이 되었다. 좀더 일찍 서둘러 기차를 타고 갔으면 고생을 덜 했을 것을……. 하지만, 딸과 사위 외손녀를 보고 막내까지 함께 보았으니 여독이 녹아내린다. 자식과 부모간의 진한 혈육의 정이 아니겠는가?
내려올 때는 아내가 먼저 기차를 타고 가자고 한다. 오늘은 홀가분한 여유로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만에 기차여행을 해볼 참이다. 그것도 영원한 연인의 관계가 되어버린 아내와 함께 말이다.
기차여행 하면 누구나 한번쯤은 추억과 그리움이 있다. 유년시절 타 보았던 기차, 귀청이 터질듯 우렁한 기적소리며 철로의 이음새를 지날 때 마다 덜커덩 덜커덩 힘찬 리듬과 증기기관의 피스톤 소리와 함께 멋진 화음을 만들며 달리는 어릴적 추억의 증기기관차가 있었다. 학창시절 청춘의 필수품인 휴대용카세트와 통키타 둘러메고 친구들과 신나는 기차여행을 떠났던 일이며, 청춘 남녀 연인들의 데이트 열차가 되었던 기차는 디젤기관차였다. 이젠 이들 기관차들은 속도에 밀려 추억의 기차가 되어버렸다.
막내가 승용차로 영등포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역사는 몇 십 계단을 올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KTX기차표를 샀다. 예전에 기차표가 아니다. 얇고 크기도 많이 커졌다. 옛 기차표는 딱딱하고 손안에 쏘옥 들어와 만지작거림이 좋았으며 양복의 윗주머니에 넣어두기 좋았지 않은가? 낮 11시 55분발 호남선 열차다. 플랫홈은 역무원인 듯한 두어 사람 오갈뿐 너무 한산하다. 날랩하게 보이는 유선형의 KTX가 길게 늘어져 있다. 우리는 플랫홈의 가게에서 김밥 하나와 커피 두잔을 사들고 객차에 올랐다. 우리 칸의 객차에는 한 사람도 타 있지 않으니 왠일인가? 늦가을 여행 시즌이 끝나서 그럴까? 아니면 한낮 기차라서 손님이 없는 시간대라 그럴까? 이렇듯 손님이 없어서야 적자운행이 뻔할 듯싶다. 우리 좌석은 좋지 않은 자리다. 창틀과 창틀 사이의 자리로 밖을 관망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이 많은 좌석들 가운데 바라보기 좋은 좌석을 줄 일이지…. 승차권 발매원이 야속하기만 하다.
아내는 “텅텅 비어들 있는데, 좋은 자리에 가서 앉아요.” 하며 좋은 자리를 찾아 먼저 가 앉는다.
“다음 역에서 타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하면서도 나도 따라 앉는다. 서로 마주보는 좌석으로 가운데에 탁자도 있었다. 객차 안은 단 둘 뿐이니 통째로 전세 낸 기분이다. 의자는 팔걸이가 있는 1인용의 비교적 편안한 의자였으나 옛 의자인 두 세 명도 앉을 수 있고 팔걸이에도 걸터앉았던 등받이가 긴 추억의 옛 의자가 더 편했던 것 같다. 안내방송이 나오고 열차는 소리도 없고 미동도 없이 미끌어지듯 출발한다.
오붓하게 마주 앉았다. 아내의 얼굴이 참 밝아 보인다. 아들 손자 기르느라 가볼 곳이 있어도 짬 한번 내어 보지 못하고 무릎이며 허리가 많이 망가진 아내, 그리도 보고 싶었던 딸 아들을 보고 왔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기차가 참 많이 좋아 졌네요.” 아내가 커피를 마시며 운을 뗀다.
“어 그러네, 옛날 기차는 덜컹덜컹 소리도 요란하고 어찌나 요동을 쳤던지 기차 멀미를 한 사람도 많았었제!” 창밖의 풍경은 기찻길 옆 오막살이 모습일 것으로 착각해 보았으나 높고 낮은 건물들만 뒤썩여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처럼 순식간에 뒤로 밀리고 또 밀려 나간다. 완행열차를 타고 기다란 곡선의 철길을 돌아가면서 바깥 풍경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KTX는 직선 철로를 쾌속으로 질주하기 때문에 바깥 풍경을 한가롭게 바라보기 어려웠다. 바깥풍경에 빠져있을 쯤 객차의 문이 열리고 음료수병 부딛치는 소리와 함께 기차 안 손수레 장사가 들어온다.
“도시락이 왔습니다~! 호두과자가 있어요~!” 라고 외치는 옛 기차에서 볼 수 있었던 추억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아쉬웠다. 우리는 오징어포와 캔맥주를 샀다. 낮술이 아닌가? 낮술이면 어떠랴! 우리에게 이런 소중한 추억이 될 기회가 얼마나 있었을까? 맥주를 몇 차례 들이켜 넣으니 속이 뚫린 듯 시원하다. 둘은 연애했던 청춘 시절로 돌아 간 듯 이런 저런 정담들로 지나온 시간들을 밀려 보냈다. 지금까지 아웅다웅 살아오면서 고운정 미운정이 다 들어버린 영원한 동반자 관계가 아닌가? 잠시 창밖에 눈을 돌리는 사이 아내가 갑작스레 묻는다.
“당신, 나 처녀 때 서울 올라갔을 때 울었지요?”
“허, 뭔소리여! 내가 왜 울었당가?”
“울었으면서 거짓말 하지요?” 하며 소녀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어야, 나가 뭣땀시 울었것는가? 자네 못잊어 울었것제.” 아내의 얼굴이 다시 밝아진다. 옛 추억이 되돌려 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목포역, 기적소리가 멀어질수록 나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던 이별의 기차역……!
낮술이라 그런지 취기 오른다. 열차는 도시를 빠져 나온 듯 들녁이 보인다. 늦가을의 한가로움과 여유로움이 있는 들판이다. 벼들이 모두 거두어 들여진 들판에는 소를 먹이기 위해 볏짚을 말아둔 하얀 둥근 뭉치들이 딩굴고 있어 그나마 슬슬해진 들판을 채우고 있었다. 늦가을의 하늘은 맑고 청명하다. 따뜻한 햇살이 창으로 들어온다. 옛 기차에서처럼 창문을 올리고 들녘의 가을 내음과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 마시고 싶었으나 창문은 열릴리 없다. 안내방송이 나온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에 서대전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잊으신 물건…….”
느릿한 방송 멘트는 옛날과 비슷했다. 다만 기적소리가 없을 뿐이다. 옛 기차는 역사에 가까워지면 힘차게 기적을 울렸었는데…. 기우러진 오후의 가을 햇살에 몸이 나른해 지고 졸음이 몰려온다.
인생은 여행길이라 했던가? 가는 길은 있어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여행길이다. 남은 인생 소중한 추억 열차에 가득 싣고 후회 없는 보람된 여행을 계속해야 겠다.
첫댓글 행복한 그림 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