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장군의 노래
Song of General Kim Il-Sung! (English Lyrics)
작사 리찬 작곡 김원균
https://www.youtube.com/watch?v=-N_2qjqZJMA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하라
밀림의 긴긴 밤아 이야기하라
만고의 빨찌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로동자대중에겐 해방의 은인
민주의 새 조선엔 위대한 태양
20개 정강우에 모두다 뭉쳐
북조선 방방곡곡 새봄이 온다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2012/10/02 [05:20]
신문고뉴스
군산시 삼학동에 사는 채주은(85) 할머니는 문득 스물두 살 인공(한국전쟁) 때 북에서 쳐들어온 인민군들이 마을 고샅을 행진할 때나 갈대밭을 헤치고 다니면서 부르던 노래가 생각난다며 가사를 소개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유/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유/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우에(위에)/ 영여끔 비춰주는 그득한 자유// (후렴)···
귀에 익은 가사여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북에서 부르는 '김일성 장군 노래'였다. 채 할머니는 '자욱'을 '자유'로 '역력히'를 '영여끔'으로, '거룩한'을 '그득한'으로 불렀고, 김일성 장군이 들어간 '후렴'(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은 부르지 않았다. 고의적으로 뺐는지, 깜빡 잊었는지 할머니 마음까지는 알 수 없었다.
출처: 팔순 할머니 갑자기.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유.. - 신문고뉴스 -
한민족의 종산宗山 , 백두산白頭山(2,750m)
남측은 ‘민족의 영산’, 북측은 ‘혁명의 성산’…
백두에서 보는 일몰과 일출, 생각만 해도 설레
10월 말 결빙이 시작되고 있는 백두산 천지.
백두산 천지의 석양.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백두산맥白頭山脈의 주봉인 장군봉(2,750m)이 최고봉이다. 그 외에도 2,500m 이상 봉우리가 16개 있으며 향도봉(2,712m), 쌍무지개봉(2,626m), 청석봉(2,662m), 백운봉(2,691m) 등이 있다.
고려시대 이전에 백두산은 불함산不咸山, 장백산長白山, 도태산徒太山, 종태산從太山 등의 여러 가지 이칭異稱으로 기록됐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백두산 혹은 태백산으로 잠깐 언급된다.
Song of General Kim il Sung
https://www.youtube.com/watch?v=A8TZsTjhyCE
백두산(白頭山)
장백산(중국어 간체자: 长白山, 정체자: 長白山, Chángbái shān 창바이산)
최고점고도 2,744 m (9,003 ft)
Baitou_Mountain_Tianchi
A crater lake at Tianchi (Heaven Lake, 天池) at Baitou (Chinese Changbai Shan)
at the border of China and North Korea
长白山 줄기 줄기 피어린 자욱
백두산 白頭山 , 혹은 장백산 长白山 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정부는 최근 들어 장백산을 ‘중국 10대 명산’에 포함
정상에 천지라는 거대한 화산호가 있고 최고봉은 장군봉 혹은 병사봉이라고 불리며, 높이는 해발 2744m다. 많은 사학자들은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개국한 태백산 신시가 바로 백두산 기슭이라고 보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불함문화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불함산도 백두산을 가리키는 별칭 중 하나다.
고려말 목은 이색은 ‘곡주공관신루기(谷州公館新樓記)’에서 “우리 나라의 영토는 삼면이 큰 바다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장백산에 이른다(我國壤地。三面大海。北連長白山)”고 썼다.
청을 건국한 누루하치는 자신들 만주족의 시조는 백두산 천지에 내려와 목욕하던 천녀가 신령한 열매를 먹고 낳은 아이라고 선언했다. 이 아이에게서 자신의 조상 아이신고로(愛新覺羅) 씨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를 포함해 만주 지역을 영유했던 모든 민족은 백두산을 영산으로 섬기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다산 정약용도 지인 신광하에게 준 글에서 ‘백두산은 산해경에 불함산, 각종 지리지에는 장백산으로 소개된다’며 ‘청 황제가 전통적인 명산을 말하는 오악(五嶽)에 백두산을 더해 육악으로 삼고, 때를 맞춰 제사를 지내니 존귀함과 중대함이 옛날에 비할 비가 아니다’라고 했다. 백두산, 아니 장백산이 중국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진 산이 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1458년 신숙주가 집필한 ‘국조보감’의 세조 초 기록에도 “삼각산을 중악,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으로, 지리산을 남악으로, 장백산을 북악으로 삼자고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같은 산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백두산이 95회, 장백산이 40회 나온다.
1712년, 청태종은 사신 목극등 등을 보내 백두산을 기준으로 조선과 청의 국경을 구분하는 정계비를 세우게 했다. 여기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 즉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송화강의 상류)을 국경으로 삼는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두만강 이북의 광활한 간도 지역을 조선 땅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청은 이 토문강은 발음이 비슷한 두만강이라고 우기며 간도 탈취의 야욕을 불태웠고 1909년 일본은 만주 철도 이권을 차지하는 대가로 간도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해버린다. 이 간도협약이 체결되고 일제시대를 맞으면서 두만강 이북의 우리 강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62년 북한과 중국 정부가 맺은 변계조약에 따라 한국과 중국의 국경은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