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목 : “행복결심(4) 주님이 쓰시겠다 하라!”
+ 본 문 : 마가복음 11장 1절 - 10절 (신약성경 73쪽)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아멘!
말씀의 이해를 위해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과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해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예배드리러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대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신 그 길은, 며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서 가실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며칠 후에 있을 일을 알지 못한 채, 다만 예수님께서 위대한 세상의 왕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은, 우리로 하면 광복절과 같은 최대 경축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의 출애굽을 갈망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도자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 하셨지만, 애굽 왕 바로가 막고 나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피, 개구리, 이, 파리, 온역, 종기, 우박, 황충, 암흑… 등 열 재앙을 내립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사람의 장자는 물론, 모든 짐승들의 첫 새끼까지 죽이는 무서운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유월 - 건너뛰었다 하여,
넘을 유, 넘을 월 - 그래서 유월절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지키는 가장 큰 명절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진 유월절에 있었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입니다.
여러분의 집 문에 교회의 교패를 붙이는 것도, 유월절을 기억하여 표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의 교패는 "이 집은 예수님을 믿는 해남중앙교회 성도님의 집입니다.
이집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집입니다." 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집 문설주에 피를 발랐던 것처럼, 우리도 교패를 꼭 붙여야 합니다.
아직 교패가 안 붙어 있는 집은 사무실에서 달라하여, 유월절 피를 바르듯 꼭 붙이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냉수 한 그릇 정도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가장 행복한 결심 - 주님을 위해 온전히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가장 행복한 결심 -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누구며, 무엇을 드렸는지를,
생각하면서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여전도회 회원들이나,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 첫째로,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나귀를 드린 삶을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가장 크게 드린 사람은 나귀를 드린 사람입니다.
그렇게 크게 드리는 헌신을 하고도, 성경에는 그 이름조차도 기록되지 않은 무명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두고, 구약성경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이룬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귀가 있는 곳을 알고 계셨고, 나귀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이름을 몰라 그의 헌신을 몰라주어도,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어도,
가장 크게 드린 - 나귀를 드린 그 사람의 이름을 예수님이 아셨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됐잖아요.
사람이 꼭 알아야 하나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드리고도 주님만 아는 것으로 만족한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나귀가 있는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왜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직 믿음으로 심부름을 간 제자들이, 정말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당시 사람들의 생활은 무척 가난했고, 먹고 살기도 힘든 바로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나귀는 그들의 생계 수단이었고, 수송, 통신 수단으로 귀하게 사용되던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제자들이 가서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예수님이 쓰시겠다고 말을 하니까,
두 말 없이 나귀의 주인은 쾌히 승낙하고 나귀를 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한 번 물어 봅시다. 지금 여러분이 처음으로 새 자동차를 뽑았습니다.
아직 한 번도 타보지도 않았는데, 제가 그 차 참 좋다하면서, 이 차를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시니,
공짜로 달라고 하면, 정말로, 진짜로, 선뜻 자동차를 제게 주실 수 있는 분만, 손들어 보십시오.
손을 든 분 고맙습니다. 딱 보니까, 그럴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으니까, 그냥 든 분도 한 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이 쉽지, 나귀의 주인이 예수님께 나귀를 공짜로 내 준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이 쓰시겠다는 말씀에, 두 말없이 나귀를 내놓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중 하나인,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삶입니다.
우리는 곧잘 이런 찬송을 잘도 부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찬송가 50장).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찬송가 213장).
그러나 솔직히 우리의 드리는 헌신의 삶은, 우리 입술의 고백과는 전혀 다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삶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만,
골치 아픈 일이나, 내게 손해가 되는 일이 있을 때는, 슬그머니 빠지려합니다. 집어치우려 합니다.
"내가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오니 나를 써 주소서." 하지만 조건이 좋을 때만 그렇게 합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이 쓰시기를 원하는 “나귀 같은 것들” 을 많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실 때에 내놓을 수도 있고, 내놓지 않을 수도 있는, 나귀 같은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나귀가 우리의 시간일 수도 있고, 돈, 지식, 기술, 체면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자고 할 때, 우리 가운데 아무런 조건 없이 '아멘' 할 사람이 몇 분이나 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가진 나귀는 무엇입니까? 시간, 명예, 기술, 지식, 돈… 등등,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가진 그 나귀를 예수님이 쓰시고자 할 때에,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시며, 사람들, 그리고 나를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셨고, 바울은 디모데, 실라 등을 선택하였으며, 제자들은 집사들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회자인 저도 심각하게 기도 많이 하고,
여러분만이 가지고 있는 나귀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 할 것을 강력하게 말씀드릴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있는 사람에게는 시간의 나귀를 드려 충성하라 하고, 재능의 나귀를 가진 사람은 재능으로,
헌신을 하라 하고, 물질의 나귀를 가진 사람에게 물질을 드려 하나님의 일을 이루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런가 하면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셀 목장의 목자와 부목자로, 때로는 주방일로, 화장실 청소로,
헌금위원 안내위원, 그리고 우리교회의 여러분야의 사역자로 드리는 삶을 살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때론 그 일이 귀한 일이기도 하지만, 때론 그 일이 천하고 구진 일이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부탁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대부분이 아끼고 귀한 자신의 나귀를 드리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더 드릴 나귀가 없어 안타까워하시는 분들을 보면, 눈물이 나게 고맙기도 합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분들은, 자신에게 있는 나귀를 감추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합니다.
“목사님! 제게는 주님을 위해 쓸 나귀가 없어요. 시간도 돈도 없고요. 그런 재능도 재주가 없어요.
저는 그런 일을 해 보지도 못했고요. 그래서 저는 감당할 자신도 없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 시키세요.”
그래서 많이 기도하고 부탁했던 제가 너무 민망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깊이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쓰시기 위하여 우리의 것을 요구하실 때, 여러분은 얼마나 아멘했고, 얼마나 거절했습니까?
여러분! 이걸 분명히 아십시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나귀는 짐을 많이 실어 본 경험이 전혀 없었고,
더더구나 어린아이라도 태워 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해보지 않은 나귀 새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쓰시기를 원하셨을 때, 나귀의 주인은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렸습니다.
♡ 둘째로,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겉옷을 드린 삶을 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입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겉옷의 개념은, 우리의 겉옷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속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고, 기꺼이 겉옷을 벗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부끄러움, 자신이 당하는 손가락질, 모욕도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그리고 길바닥에 놓아, 예수님으로 밟고 가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존경하는 가장 행복한 결심이기에,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겉옷을 드린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겉옷을 벗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겉옷을 벗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 앞에 우리의 지식의 겉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좀 배웠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지식으로 성경을 판단하고, 해석하고, 마음대로 난도질 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느낀 점은 “정말로 제대로 배우고, 진짜 많이 배운 분들은 온유하고 겸손” 합니다.
그런데 조금 배운 사람들, 아는 게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아는 척하고 교만합니다. 정말 꼴불견입니다.
이런 분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작은 지식의 겉옷도 벗어 던지고, 십자가만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신분의 겉옷도 벗어 던져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신분 표시가 아닙니다.
집사보다 권사가, 권사보다 장로가 높고, 장로보다 목사가 높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 직분을,
계급이라고 생각하는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와 같은 교회 직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맡겨진 직분일 뿐입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사역을 겸손하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감정의 겉옷, 체면의 겉옷, 자존심의 겉옷도 벗어 던져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참고, 예수님 때문에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진짜 일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정의 겉옷, 체면의 겉옷, 자존심의 겉옷을 벗을 때, 예수님께서 높아지시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높아지는 일이기에, 우리는 감정, 체면, 자존심의 겉옷을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자랑하기 쉬운 나이의 겉옷과 좀 괜찮은 생활의 겉옷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집에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교회의 궂은일에는 자원하여 나서야 합니다.
제발 그놈의 나이, 선후배 따지지 말고, 낮아져서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자리에만 있어야 합니다.
♡ 셋째로, 예수님을 위해서 호산나 찬송을 드린 삶을 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 10절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말씀에서 보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고 외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호산나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호산나라는 말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찬송소리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찬양을 올려 드리고, 또 드려야 합니다.
드리는 삶 가운데, 가장 최고의 것은 찬양과 천하하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구원입니다. 아멘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귀를 드렸던 이름 없는 사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드렸던 사람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쳤던 사람들처럼, 온전히 드림의 삶을 살아갑시다.
내려놓는 삶, 베푸는 삶, 드리는 삶의 길은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길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의 내려놓는 삶, 베푸는 삶, 드리는 삶의 길은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내려놓는 삶, 베푸는 삶, 그리고 드리는 삶의 길인 십자가의 길은 좋은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이 낭패와 실망의 길도 아닙니다. 가지 못할 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다 할 수 있고, 걸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내려놓는 삶, 베푸는 삶, 드리는 삶의 길인 십자가의 길은 보람된 길이며 승리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로 못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일을 할 만한, 그 사역을 감당할만한 경험도 없습니다.” 라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가진, 나귀, 겉옷, 찬송입니다.
그런데 이걸 아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드리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주셨음을 말입니다.
새끼 나귀처럼 처음 것, 깨끗한 것, 죄 없으신 정말 순수한 생명을, 우리에게 전부 다 주셨습니다.
우릴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 예수님은 수치를 무릅쓰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다 주셨습니다.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천국과 영생을 허락하시려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온전히 자신의 나귀를, 자신의 겉옷을 자신의 찬송을 먼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예수님께서 지금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 나귀를 주었고, 겉옷을 주었고, 찬송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얼 주었느냐?
나는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너희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하려고, 몸 버려 살을 찢기고,
마지막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내어 너에게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얼 주었느냐?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를 짐으로, 너희들에게 영원히 살 길을 주었는데, 넌 날 위해 무엇을 주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예배시간을 통해 주님이 여러분에게 물으시는 이 물음에,
여러분은 무슨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일이지만, 그래도 제 나귀만은 내놓을 수 없습니다.
제 겉옷 내놓으면, 발가벗은 내 체면은 뭐가 되며, 내 자존심 다 구겨져, 부끄러워 어떻게 삽니까?
그리고 교회에서는 찬송하고, 좋은 일 있을 때는 찬송을 드릴께요. 사람들 있는 데서는 못해요.”
그런 여러분에게 지금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주느냐?"
찬송 중에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헌신의 삶을 결단하는 마음으로,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라는 찬송가 311장을 다함께 부르며 결단하도록 하겠습니다.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