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고정희 시인을 찾아서
몇 해전부터 계획해왔던 문학기행으로 해남을 다녀왔다. 나의 고향이기도 하다.
일찍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낯선 길을 찾아 떠나는 설레임이 앞섰다.
해남이 낳은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김남주시인과 여성해방문학의 선구자 고정희 시인을 만나기 위해 ...
두 시인의 생가는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와 봉학리인데 서로 간에 500m 이내에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찾아갈 수 있었다.
가을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을 고향에서 느끼다 보니 진도에서 부실하게 먹은 아침은 도리어 넉넉한 배부름을 가져다주었다.
두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 올 수 록 알 수 없는 야릇한 흥분이 날 감쌌고 숙연한 마음이 일렁였다.
먼저 도착한 곳은 삼산면 송정리에 있는 고정희 시인 생가였다. 오래전 우연하게 읽게 된 ‘하늘에 쓰네“ 이 시 한편이
나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
하늘에 쓰네/ 고정희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 시집 <아름다운 사람하나>(푸른숲, 1997)
사랑의 기쁨만을 온전히 노래하고 있는 한 편의 시에 담긴 혼신의 사랑과 믿음 맹세 아!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가? 사랑의 기쁨에 유통기한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픈 마음이 쓸쓸해질 수 있는 이 가을날을 아련하게 달궈주고 있으니 ....
내심 그럴싸하고 반듯한 건물에 잘 꾸며진 곳을 상상했던 내게 시인의 생가는 내 상상에 반전을 주었다. 의도적으로 꾸며놓지 않는 시인의 생가는 평범한 농가주택이라 문 앞에 고정희 생가라는 표지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생가에 들어서니 마당 한쪽에 콩이 널려 있었다. 아마 시인도 이 가을에 콩을 타작하여 이렇게 널어놓았겠지? 시인이 머물었던 방으로 짐작되는 곳 사방이 그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1991년 6월9일 43세의 한창 나이에 지리산 등반 도중 급류에 휩쓸려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시인으로서 여성운동가로 31세에 등단하여 12년 동안 시인의 실천적 삶을 10권은 시집은 말해주고 있다 .
- 필자
책장 가득 빼곡한 책이며 시인의 손때가 묻은 물건 사이로 ‘고행’ ‘청빈’ ‘묵상’ 세 단어가 새겨진 나무 액자가 눈에 띄었다. 세 단어만으로도 시인이 어떤 가치관으로 삶과 문학이 공존하는 삶을 살고자 했는지 느껴졌다.
나희덕 시인은 고정희 시인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성적으로 금기시되었던 시적 언술들을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선구적 역할을 인정받기에 충분함과 동시에 여성의 역사성과 여성과 사회가 맺는 관계방식을 특별한 문학적 가치로 강조하고 이론화 한 작가라고 칭했다.
해마다 해남 “여성의소리”와 “고정희기념사업회” 주관이 되어 고정희문화제 고정희청소년문학상을 주최하며 고인의 뜻을 기리며 시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니 문학인의 한사람으로서 가슴 벅차지 않을 수 없다.
생가를 나서니 가을 추수 끝낸 들녘이 펼쳐졌다.
여전히 암송하지 못한 "상한 영혼을 위하여" 라는 시인의 시 한 편이 스친다.
어느 가을날 들길을 걸으며 시인은 이 시를 썼으리라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니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56]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이 시는 갈대를 통해 질긴 생명력과 시련과 고통을 희망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시련을 극복하면 더욱더 견고해지는 삶이 펼쳐 질 수 있다는 시인은 고통은 외면이 아니라 수용하는 자세로 시혼에 힘을 불어넣었다. 질곡 속의 삶을 긍정적인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하는 시인의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등이 있다. 어떤 시련에도 절망하지 않는 의지로 사랑을 노래한 시인은 83년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다. 유고시집으로《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1992)창작과비평사》가 있다.
다음을 기약 할 수 없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승용차로 5분거리에 있는 삼산면 봉학리에 있는 김남주시인 생가를 향해 가는데 가을 해가 온 들판을 고루 안고 있는 듯 화사한 들녁을 가르며 다다르니 격변의 70년대 유신독재에 맞서 싸운 시인의 생가가 보였다.
70년대 전남대 영문과에 재학하면서 3선 개헌 반대등을 주도했던 인물이자 70년대 유신독재에 맞서 칼날 같은 시들을 발표 80년대를 옥중에서 보낸 시인은 48세 안타까운 나이에 억압과 질곡의 세월을 벗어나 1994년 2월 13일에 짧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생가에 들어서니 시인의 시혼이 담긴 몇 개의 시비가 정오의 햇살 속에 빛나고 있었다.
몇 개의 시비 중에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함께 가자 우리 이길을’ 시비가 가장 눈에 띄었다. 가수 안치환이 시인의 시에 곡을 붙여 부르면서 유명해진 시이기도 하다.
- 함께 가자 우리 이 이 길을 / 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일이면 일로 손잡고 가자
천이라면 천으로 운명을 같이 하자
둘이라면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물이라면 건너주고
물 건너 첩첩 산이라면 넘어주자
고개 넘어 마을 목마르면 쉬어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가시발길 하얀 길
에헤라, 가다 못 가면 쉬었다나 가지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그가 살았던 시대의 혹독한 상황을 드러내는 이 시는 힘있는 어조로 통일의 당위성과 그 길에 동참할 것을 너와 내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함께 이뤄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군사독재 권력을 비판하는 내용의 <함성>, <고발> 지하신문을 만들다 적발돼 고난의 길로 접어들면서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와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암울했던 조국과 민중의 현실을 고발하며 조국의 민주 자유 통일을 위해 투쟁한 시인을 일부에서는 한국의 체 게바라로 칭하기도 한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으나 1992년 건강이 악화되어 사퇴한 뒤 췌장암으로 고생하다 1994년 사망하여,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해마다 많은 문학인들이 시인의 생가와 묘역을 찾아 시혼을 담아가고 그리워 하고 있다니 외롭지는않으리라 .
아래 '자유'라는 시 또한 안치환의 노래로 유명한 시인의 대표작 시로서 시인의 육성 낭송으로 남은 몇 편 안되는 시 중 하나이다.
자유 /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 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 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민주주의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속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시인의 시는 함축없고 공감 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가들과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자유와 정의를 추구한 헌신적인 시인의 사명감과 열망이 글로 머물지 않고 시대적인 고통에 기꺼이 동참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많은 이들은 그의 헌신적인 시인의 사명감과 사회정의를 위한 전 생애를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그리워 하고 있으니 .....
시선집으로는 '사랑의 무기'(창작과비평사·1989),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미래사·1998), '저 창살에 햇살이1·2'(창작과비평사·1992), '옛마을을 지나며'(문학동네·1992) 등이 있다. 수필, 일기, 옥중서신 등을 모은 '시와 혁명'(나루·1991),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시 와 사회사·1986), '옥중서간집-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삼천리·1989)가 시인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가족과 지인들이 엮은 '내가 만난 김남주'(이룸출판사·2000)가 시인을 추억하게 한다.
문병란 시인은 일찍이 “ 이 혼란과 변절의 시대에 김남주시인(1946~1994) 을 말한다는 것은 큰 고통이며 그의 벅찬 삶을 감당한다는 것은 그와 비슷한 흉내라도 내야만 자격이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 또한 지금 이 당에 전개되고 있는 온갖 우스꽝스러운 추태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 그의 시를 읽고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고 시인을 기리고 있다.
2000년 그의 시에 곡을 붙인 안치환의 헌정앨범 〈Remember〉가 발매되었고, 같은 해 5월 광주 중외공원에 〈노래〉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제막되었으며,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신동엽창작기금(1991)과 단재문학상(1992), 윤상원문학상(1993), 민족예술상(1994)을 받았다. 고은(高銀)·신경림(申庚林)·김지하(金芝河)·박노해·백무산 등과 함께 1980년대 민족문학의 기수로 평가되고 있다.
촉박한 일정으로 인해 두 시인의 생가에서 넉넉한 시간을 갖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다시 길을 나서야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해남읍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객지 생활을 하지 않고 해남읍 황산면 연당리 내 고향에서 젊은 날을 보냈더라면 김남주,고정희 두 시인따라
휘청거리는 저 햇살을 내 달리며 내 뜨거운 가슴을 식혔을텐데 ....
해남이 낳은 두 시인은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40대의 생의 한 가운데서 꺽여지니, 어둠의 시대를 살며 자유와 영혼의 구원을 그렸던 들풀로 우리들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오래 묵은 발자국 소리 달려드는 해남에서 통통한 햇살이 인도하는 대로 달렸다. 하늘엔 수시로 문양들이 그려졌다 지워졌다 바쁘다. 금방이라도 시구(詩句) 한 소절 길어 올려 질 것 처럼 시인의 속삭임이 가깝다. 시인의 방에서 들숨 날숨으로 시인과 함께 호흡한다
- 10월7일(토) 김남주 고정희 시인 생가에서 / 박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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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 아시겠지만
제 고향 해남이 낳은 두분의 유명 시인을 소개합니다.
이글을 쓴 박미림 시인도 현재 김포 문협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나이로만 ㅎ)입니다.
저는 그냥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