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연금술
잠언 17장 3절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
2006년 10월 22일 - 창조절 8주일 주일예배 설교문
하느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제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들꽃 피는 학교'의 중보기도회에서 설교초청을 받아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후원자들도 모이고 교사들도 함께 모여,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후원가정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자리였습니다. 아이들이 찬양하는 얼굴에도, 대표 기도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에도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마음에 담긴 것은 선생님들의 기도 내용 안에 아이들을 향한 사랑만큼이나 받은 상처와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들꽃을 향한 기적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이었습니다. 13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과 이야기가 있었을까요. 목사님과 선생님들의 노고를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저에게 그 시간은 오늘 말씀처럼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 시간으로 보였습니다. 아니 지금도 들꽃 식구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단련하면서 하느님의 계획을 실천하는 도구로 삼으려는 모습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 자신과 교회를 또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 마치 은과 금을 단련하듯이, 하느님의 연금술을 얼마만큼 느끼고 살아가는가, 하는 물음이 찾아왔습니다. 교회 안 밖으로 올해에 있었던 많은 사건을 넘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연금술이었다는 생각을 해보면, 단순히 아픈 일이거나 재수 없는 일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루어기 위한 필요하고 놀라운 일들로 바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아도 그러하더군요. 나름대로의 연금술을 통해, 오늘의 내가 있음이 보입니다. 완결구조가 아니라 여전히 연금술은 진행형입니다. 계속해서 진행형일 겁니다. 이것은 저만이 여러분들에게 마찬가지겠지요.
그럼 금과 은 같이 왜 그러한 연금술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함이라 생각됩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은 대부분은 시련과 그늘의 연금술을 거친 뒤, 하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슈퍼맨과 같은 그러한 인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루아침은 큰 재능이 생겨 하느님의 일을 한 경우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고, 샐리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세차를 했는데, 구정물을 뒤집어쓴다든가 비가 오는 경우입니다. 평소에는 잘 오던 버스가 막상 내가 기다리면 오지 않죠. 그 외 많은 머피의 법칙이 있습니다.
반대로 샐리의 법칙은 뭔가 엉망인 것 같은데, 결과가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경우입니다. 할인매장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누군가 새치기를 한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 덕분에 그 매장 10만명 째 손님이라면서 사은품을 받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런 머피의 법칙과 샐리의 법칙을 오늘 읽은 본문, 하느님의 단련, 곧 하느님의 연금술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은 결국 부정의 마음을 먹고, 부정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요. 나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부정의 신념으로 맞이하고, 나의 인생을 부정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인생은 늘 머피의 법칙을 달고 삽니다.
반대로 샐리의 법칙은 뭔가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도, 나에게 주어지는 일과 삶의 무게를 하느님의 연금술로 받아들이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경험과 이야기는 고스란히 자신을 질적 성장시키는 촉매라고 믿는 것이죠. 또한 내 인생은 하느님의 연금술로 인해 놀라운 작품으로 만들어질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라는 악기를 통해 아름다운 선율을 자랑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긍정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입니다. 당연히 머피의 법칙를 추종하는 사람들과 삶이 다를 수밖에 없겠죠.
와다나베 가스꼬님의 시 <작으면 작은 대로 피리라>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피리라
민들레가 민들레꽃을 피우는 것은 장미가 장미꽃을 피우는 것만큼 소중 합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꽃을 피운다면 온 세상은 아름다운 꽃으로 덥힐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어 준데서 피어나리라
할 수 없이 된다고 체념해서가 아니라 그저 되는 것이다
핀다는 것은 나 스스로의 행복은 물론 남에게도 행복을 안겨주는 삶이다
핀다는 것은 괴로움 속에서 오히려 아니 괴롭기 때문에 더욱 미소를 잃지 않는 그런 삶이다
작으면 작은 대로 피리라는 마음.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꽃을 피운다는 마음. 무엇보다 하느님이 심어준 데서, 곧 그 자리가 아무리 작고 작은 자리라도 작은 대로 피리라는 마음. 과연 하느님의 연금술을 믿고, 맞이하는 사람들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체념이나 어설픈 운명론이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됨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곧 우주의,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 따라, 정해진 때에 나에게 알맞은 때에 하느님의 악기로 연필로 사용됨을 아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것이야 말로 자신에게도 남들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감이 되시는지요.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연금술에 자신을 열어두고, 하느님이 심어준 데서, 작으면 작은 대로 피리라는 믿음으로 스스로의 꽃을 피워 가시지 않으렵니까. 이것이 진정 자신과 이웃을 위한 일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연금술로 인해, 하느님의 놀라운 도구로 사용되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하느님의 악기로, 때로는 하느님의 연필로, 때로는 하느님의 목소리로, 때로는 하느님의 발걸음으로 말이죠.
한 목소리로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