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우 외(2003). 『교육과정이론』. 교육과학사.
pp. 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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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論과 實際라는 우리말의 단어는 서양말의 theory와 practice의 번역어이며, 이 서양말의 어원은 희랍어의 theoria와 praxis이다. 이 희랍어의 명사는 각각 ‘보는 것’과 ‘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 theorein과 prattein에서 파생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론과 실제라는 용어는 ‘보는 것’과 ‘하는 것’을 뜻하는 희랍어 단어의 의미와 결부되어 있다. (흔히 ‘가상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행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로 ‘실제로’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지만, 이 경우에는 ‘실지로’가 훨씬 더 적절한 어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과 실제라는 용어의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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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가를 가능한 한 자세하게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제라는 명사형을 ‘이론적’, ‘실제적’이라는 형용사형으로 바꾸어 이 형용사가 다른 단어와 결합될 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론적, 실제적이라는 형용사가 결합될 수 있는 여러 단어 중에 질문과 진술(또는 문장)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가령 1) ‘한국 초등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는 몇 명인가’라는 질문과 2) ‘한국 초등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는 몇 명으로 해야 하는가’라는 두 개의 질문은 모두 초등학교 학급당 학생 수에 관한 질문이지만, 그것이 묻는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우선 문법적인 형태로 보면 앞의 질문은 ‘무엇무엇은 어떠한가’로 되어 있는 데에 비하여 뒤의 질문은 ‘무엇무엇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뒤의 질문은, 앞의 질문과는 달리, 사태에 모종의 변경을 가한다든지 모종의 조치를 취한다는 뜻(‘하는 것’)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질문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30명으로 해야 한다’고 대답한 뒤에 ‘그러나 30명으로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특별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 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질문이 ‘실제적’ 질문이며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실제적’ 진술이다. 여기에 비하여 앞의 질문에는 그런 변경이나 조치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학급당 학생 수가 몇 명인가를 그냥 알려고(‘보려고’) 한다. 이런 질문이 ‘이론적’ 질문이며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론적’ 진술이다. (이론적 질문과 실제적 질문은 전형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각각 ‘어떠한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형태를 취하지만 때로 질문의 문법적 형태와 의미 사이에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 가치문제가 포함된 질문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예컨대 ‘삶은 무엇인가, 도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문법 형태로는 이론적 질문처럼 되어 있지만, 그것이 묻는 내용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행동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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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가’와 같이 ‘하는 것’이다.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아마 이 경우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론적, 실제적이라는 형용사는 또한 관심, 활동, 사태 등의 단어와도 결합되어 사용된다. 이 경우에도 위에서 말한 ‘보는 것’과 ‘하는 것’이라는 어원적 의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론적 관심과 실제적 관심은 각각 이론적 질문과 실제적 질문이 나타내는 관심을 뜻한다. 이 두 가지 관심의 차이는 시각의 방향이라는 공간적인 비유를 써서 설명할 수 있다. 실제적 질문을 할 때 우리의 관심은 앞 쪽(미래)을 향하여 장차 취해야 할 조치를 事前的으로 처방하는 데에 있다. 이 점에서 실제적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답할 때의 우리의 관심을 ‘前向的 관심’이라고 부를 수 있고 그때의 우리의 사고를 ‘前向的 사고’라고 부를 수 있다. 이론적 질문을 할 때 우리의 관심은 이와는 반대방향을 취한다. 이론적 질문은 무엇이 어떻게 되어 있으며 왜 그렇게 되어 있는가를 기술하고 설명하라는 요청이며, 이런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이미 일어난 일, 즉 뒤 쪽(과거)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事後的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앞의 전향적 관심과 대비하여, 이런 종류의 관심을 ‘後向的 관심’이라고 부를 수 있고 그런 관심을 가질 때의 우리의 사고를 ‘後向的 사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 활동은 외부 사태에 변경을 가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활동, 다시 말하여 우리가 바라는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강구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유목적적 활동’, ‘문제해결 활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실제적 활동은 수단-목적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활동이라는 것은 반드시 모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을 뜻한다고 보면, ‘실제적 활동’이라는 표현은 同義語 반복에 해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이론적 활동이라는 것도 없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이것과의 대비를 위해서는 실제적 활동이라는 용어를 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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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활동은 ‘보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실제적 활동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목적’ ― 외부 사태에 일으키고자 하는 변화를 뜻하는 목적 ― 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보는 활동’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또는 ‘활동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는 활동’과 동일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서 하나의 활동을 나타낸다. 만약 이론적 활동에 ‘목적’이라는 용어를 쓴다면 그 목적은 외부적 사태의 변화가 아닌, 내면적 안목의 변화 ― 이때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것, 또는 이때까지 보던 것과는 다른 눈으로 보는 것 ― 이다. 그러나 이 내면적 안목의 변화는 이론적 활동을 ‘수단’으로 하여 달성되는 ‘목적’이 아니라 이론적 활동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수단’이라는 용어는 실제적 활동이 추구하는 목적 ― ‘실제적 목적’ ―에서 정상적인 용법을 가진다.
실제적 활동과 이론적 활동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각각의 활동이 요구되는 사태 ― 실제적 사태와 이론적 사태 ― 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실제적 활동을 하는 데는 반드시 ‘시한’이라든가 ‘시효’라는 것이 있으며, 실제적 사태에 처한 사람 ― 실무자 ― 은 이것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적 활동이 일으키고자 하는 외부 사태의 변화는 그것을 위한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그때까지 현재의 사태는 변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지속된다. 그 조치를 끝까지 미루는 것은 결국 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실제적 활동에는 언제나 ‘끝’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 ‘시한’에 이르기 전에 활동을 끝내야 한다는 긴박성이 있다. 또한 실제적 활동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에는 아무도 확실하게 보장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내적, 외적 요인들 ― 활동을 하는 사람의 능력, 상황적 여건, 그리고 그 활동을 도와주거나 방해하는 다른 사람들 ― 이 관련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 활동은 우리에게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성공을 위한 조바심 같은 것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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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 ― 이론가 ― 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사태에 놓여 있다. 이론적 활동은 사태에 변경을 가하는 실제적 조치가 끝난 뒤에 그것을 뒤돌아보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실제적 활동에서와 같은 긴박감이나 조바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론적 활동의 성격 그 자체가 그러한 ‘여유’를 용납한다. 이론적 활동이 때로 ‘지식인들의 한가한 여가활동’으로 간주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 활동에는 원칙상 ‘끝’이라는 것이 없으며, 그것은 또한 ‘끝이 없어도 좋은’ 것이다. 실제적 사태에서는 실제적 활동이 목적으로 하는 외부 사태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으로 그 사태는 종결되고 더 이상 그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잊어 버려도 좋은’ 것이 된다. 그러나 이론적 질문은 성격상 하나가 대답되면 그것에 뒤이어 또 하나의 질문이 고개를 쳐드는 그런 것이다. 차라리, 이론가는 탐구를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를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해야 한다. 또한, 실무자가 그의 목적 달성에 관련되는 모든 요인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이론가는 그가 다루는 현상의 특정한 측면에만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옳지만 실제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는 말은, 실제적 활동에는 ‘이론적으로 옳은 것’ 이외에도 고려해야 할 많은 요인들이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실제적 사태가 모종의 실제적 결과가 요구되는 사태라면 이론적 사태에서는 무엇이 참(眞)인가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실제적 사태라고 하여 무엇이 참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제적 결과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실제적 결과를 얻는 것이 요구되는 사태에서는 일단 무엇이 참인가에 대한 대답이 대체로는 주어져 있거나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적 활동이 애당초 시작될 수 없을 것이다. ‘실제적 목적으로는 그것이 이러이러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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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쓰는데, 이것은 실제적 활동을 위해서는 그 정도로만 알아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적 목적’으로는 충분한 지식이 ‘이론적 목적’으로는 결코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론적 사태에서는 무엇이 참인가가 그 자체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비록 그것에 끝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등의 지장이 초래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끝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이론적 탐구이다. ‘끝없는 탐구’는 오직 실제적 결과를 내려고 할 때에만 방해가 된다.
이론과 실제를 어떤 말로 정의하든지 간에 그 정의 속에는 위에서 설명한 형용사형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형용사형의 의미에 따라 그 정의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