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무>
우리 앞에 하나의 나무가 있습니다.
가을이 돼 바람에 씨가 흩날립니다.
씨 하나는 비옥한 옥토에, 다른 씨는 돌이 많은 척박한 땅에 떨어집니다.
씨는 떨어진 자리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땅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부모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우리 생명이 싹트는 자리입니다,
오직 거기에서만 싹틉니다.
씨가 옥토에든, 박토에든 어디에 떨어져 자라든, 씨는 옳은 나무가 됩니다.
또한 열매도 맺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그 나무의 씨는 또 흩어집니다.
같은 나무가 여러 장소에서 다르게 성장합니다.
우리가 정말 성장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연결된 자리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 자리가 어떠하든지 동의해야 합니다.
그 자리가 "유리"하든지 또는 "불리"하든지, 모든 자리는 특별하게 성장하길 강요합니다.
모든 자리는 특별한 기회와 어떤 한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어디에서 자라든 순수입니다.
<온전한 생명>
이제 우리는 생명을 남녀관계에 적용합니다.
남녀가 자녀를 갖습니다.
자녀에게서 남녀는 연결돼 부모가 됩니다.
이제 많은 어머니나 아버지는 자녀가 자신을 따라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순간 무엇이 발생합니까?
자녀의 생명이 경시됩니다.
아버지를 통해 온 생명이 온대로 옳은 것처럼, 어머니를 통해 온 생명도 온대로 옳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이걸 파악하자마자,
아버지는 자녀에게서 생명을,
어머니로부터 온대로의 생명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자녀에게서 생명을,
아버지로부터 온대로의 생명을,
사랑합니다.
부모가 갖는 모든 특별함과 함께 사랑합니다.
이게 겸허입니다.
상대에게서 온 생명을 존중함으로, 우리는 전체의 생명에 고개를 숙입니다.
부모 중 한 분이 자신에게서 온 생명이 상대에게서 온 생명보다 더 좋다고 하는 사람은 생명을 자신의 손에 쥐려고 합니다.
생명을 개인의 것으로 보기에 그는 생명 위에 자신을 세워 거만합니다.
그럼 그 영혼은 해를 입습니다.
남녀관계뿐 아니라 자녀도 해를 입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