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제2 종단인 태고종이 변하고 있다. '94년 조계종의 개혁이 수구와 진보의 첨예한 갈등으로 인한 필연적인 역사의 귀결이었다고 한다면 태고종의 개혁은
신구세력의 협조와 양해 속에 조화롭게 바뀌고 있는 화합의 개혁이다. 이 양대 개혁은 여타 종교계나 사회 전반에 있어 주체적으로 변혁을 이끌어 내는 불교의 신선한 자정 능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태고종 개혁에 있어 주체세력이라고 할 만한 인물의 면면을 보면 그 개혁의 지향이 그리 단순한 문제에 그치진 않겠구나 싶게 젊다. 젊어서 변화의 욕구는 그만큼 힘차고 그 지향점이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물씬 느껴진다. 그 가운데서도 개혁의 이념을 제안하고 앞으로의 개혁을 실천하는 데 있어 그 중심에 서있는 스님, 현 태고종 총무원의 총무부장 법현 스님을 만났다.
젊어지는 태고종
성북동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심우장이 구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바라보는 북쪽 골짜기 끈, 그 의미 심장한 곳에 우리 불교의 제2 종단 태고종의 종찰 태고사가 자리잡고 있다. 만해를 이야기하면 조금도 조심스러울 필요 없는 곳이 태고종이요 오히려 가장 자랑스런 전통이요 역사로 여겨 드러내놓고 추앙하는 사람들이 그 종도들이다. 태고사 위치가 만해 스님의 심우장에서 바라다 보이는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으니 그런 속깊은 까닭까지 살펴 들여다 보면 역사의 필연이라 할까.
성북동길에서 된비알을 10분 남짓 올라가면 막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는 곳, 크지 않는 땅에 경제적으로 건축해서 오밀조밀한 맛이 느껴지는 태고사다. 서로 연결된 두 동의 건물 중 뒷편 한 동은 태고종에서 운영하는 동방불교대학이요 다른 한 동이 총무원 건물이다. 부산했다 다시 한산했다를 거듭하는 3층 사무실은 평균 연령이 40대 초반인 젊은 부장스님들 탓인지 활력이 느껴졌다. 떠안고만 있기엔 벅차기 십상인 묵직한 태고종 전통에 조금도 주눅든 모습이 아니었다. 전통에 눌려 있기보다 그것을 운용해 움직여 보려는 시도와 용기가 오늘의 태고종 개혁을 이끄는 핵심적인 열쇠라면 열쇠였다.
법현 스님은 분명 이 활기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핵심 그룹의 한 사람이다. 무릇 스님의 출가담에는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향함에 있어 얽히게 되는 수많은 사연이 내재해 있고 마음의 갈등을 뿌리치고 한 생각 크게 먹어 실행으로 옮기는 기상찬 용기가 느껴져, 차마 아음이 있어도 실행치 못하는 범인들에게는 호기심과 흥미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법현 스님의 그것은 자신의 말대로 단순하고 재미없다.
"중이 출가하는 데는 깨달음이라는 목표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말처럼 그냥 불교가 좋고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목표 의식으로 밋밋한(?) 출가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스님이 출가하는 가장 기본적인 동기가 그것 아니면 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밋밋한 것이 아니라 출가 정신을 가장 정확하게 가진 것 아닐까? 그렇지만 물론 이 출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몰고 온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 주변을 한아름 둘러싸고 있다.
외아들에 장남이었던 스님은 어려서 고아원에서 자랐다. 부모가 있는데도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란 것이다. 사연인즉, 부모님께서 일찍이 고향 화순에서 상경해서 자리잡은 곳이 평택이었다. 부모님은 평택에 소재하고 있는 천혜보육원에 고용되었고 스님은 그곳에 고아로 등록되어 살았던 것이다. 종종 여러 고아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자신을 보며 부모와 자신, 출생과 삶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자연스레 고민해볼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생각이 깊었던 스님은 <자유교양대회>라거나 독서감상 등의 대회에 도맡아 나가면 자연스레 불교서적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등하교 길에 매일 지나치던 명법사에서 불교학생회 창립 법회를 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찾아갔다. 부처님 성도일 하루 전날이기도 했던 그날 법당 안을 가득 메운 여학생과 그들의 후원자인 어머니들, 그 수많은 여성들 사이에 홀로 스며들어가 철야정진을 하며 명법사 불교학생회 창립회원이 되었다. 이후로 이 명법사와의 인연은 굵은 동아줄처럼 두터워져 '79년에는 어린이지도교사가 되었고 '80년에는 학생회 지도간사를 역임했으며, 같은해 청년회 창립과 동시에 회장을 맡기도 했다.
밋밋하지만 명확한 출가동기
초,중 고등학교를 각각 이 평택의 성동초등학교, 동중, 동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중앙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하면서 중앙대 불교학생회장을 비롯 대불련 서울지부 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재학중이던 '77년 처음 출가를 생각했으나 여러 가지 여건의 미비로 포기하고 직장을 다니다 '85년, 선배였던 정상우(현 도성스님), 김정묵(법사) 씨의 소개로 태고종 총무원에 입사하여 종무원으로 일하게 됐다.
이것은 잠시 잊고 지내던 출가에 대한 미련을 일깨우기에 충분한 계기로 작용했다. 흔쾌하게 출가를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 형제를 모실 수 있는 친사회적인 종단"이라는 태고종만의 조건 때문이었다.
출가후 그동안 대불련 활동이나 어린이지도교사로서 해왔던 활발한 사회 활동을 인정받아 총무원의 교무간사에서부터 교무과장, 교무국장 등의 소임을 맡아 보는 가운데 틈틈히 YMCA 레크레이션 대학에 나가 불교네크리에이션 강사로서의 소질을 갈고 닦기도 하고 경실련이나 경불련에서 중앙위원, 정책위원으로 불교인권위원회에서도 핵심위원으로 광범위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 가운데 레크리에이션 포교를 하게 된 까닭은 이렇다. 스님 자신이 들었던 법문 가운데 가장 쉽고, 좋았던 법문이 어려서 명법사에서 듣던 그 법문이라는 생각이 항상 머리 속을 지배해 왔는데 그 이유는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교가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고, 유익하게" 포교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화두처럼 틀어 안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찾은 길이 fp크리에이션 포교였다. 하지만 타종교 단체 외에는 이렇다할 교습소가 없었다. 사람에게 형체가 없는 무엇인가를 전하는 일에 대해 타종교에서는 일찍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신청해서 들어간 곳이 YMCA였다. 물론 들어가면서 사정 얘기를 다 하고 교육과정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거나 하면 강력하게 항의도 하면서 배웠다고 한다. 배우며 알게 모르게 놀이방법 속에 스며 있는 서구식, 기독교식의 사고 체계를 동양식, 불교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벌여왔다.
《삼국유사》에 보면 경흥국사가 몸이 아파 누워 있는데 비구니스님께서 춤을 추어 그것울 보며 웃고 즐기다 병이 나았다는 구절에서 불교적인 레크리에이션의 전통을 발견하기도 하고, 모세가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며 여기저기 노숙했던 것에서 기원을 찾는 '캠프' 의 개념을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들에 둘러싸여 모닥불 피워놓고 하셨던 야단법석에서 기원했다고 불교적인 해석을 이끌어 내면서 불교적인 레크리에이션 개념의 확립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런 열정 때문인지 스님은
'91년부터 현재까지 불교레크리에이션 포교회의 회장을 줄곧 맡고 있기도 하다.
사회적인 '무명'을 없애는 길
스님은 종교도 사회문화 제현상 가운에 일부분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문화 제현상을 편협하게 종교적인 규범이나 원칙으로 재단하려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사회문화 제현상에 대해 관심갖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직접 참여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을 쉬지않고 경주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사회 속에 뛰어드는 이유를 물으니 간단하게 "무명(無明)해소를 위해 그런다"고 말씀하신다. 본래 하나인 나와 남의 공동체에서 무명은 어디에 끼어 있든지 공동체의 진리를 가리는 무명일 뿐이다. 그렇게 보니 사회활동을 통해 얻는 것도 무명해소요 잃는 것도 무명밖에 없다.
올해는 스님의 출가후 꼭 10년 되는 해이다. 그 10년이란 세월은 길다면 강산이 변할 만큼 신 세월이요 태고종처럼 법랍 높은 스님이 많은 곳에선 짧다면 형편없이 짧은 세월이다. 스님은 그 10년의 경험을 다 쏟아 부어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점차 퇴락해가는 태고종의 개혁을 주창했다. 해방직후 아니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찬란했던 종단의 위상이나 개개인 스님이 한국불교계에서 가졌던 드높은 위치가 30여 년이 지나며 허물어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잘 들여다보면 스님의 이런 생각은 오해 들어 갑자기 추진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보현도량 결사를 했던 '90년도까지 되짚어 올라가 거꾸로 거슬러 내려오면 스님을 비롯한 젊은 스님들의 행적을 쫓는 것이 순서다. 6년 전이었던 '90년, 법혜, 영원, 법안 스님과 법현 스님을 포함한 네 분의 스님은 전통종단 태고종의 발전방안을 보색하고 젊은 스님들 사이에 연구하고 수행 정진하는 풍토를 만들겠다는 취지하에 보현도량을 결성했다. '91년에 창립한 조계종의 선우도량이 종단 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진스님들의 결사였다면 이 보현도량은 그야말로 젊은 학승들의 모임이었다.
창립 당시의 회원은 10여 명에 그쳤으나 이내 많은 사람이 호응해 옴에 따라 35명으로 늘어났다. 모여서 토론회를 갖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삼았는데 처음에는 토론 주제로 스님들의 관심을 모을 만한 '승려의 결혼관' 등 다소 부담없는 주제서부터 시작해서 '종단의 교육계획'이나 '종단발전방안' 등으로 확대해갔다. 그렇게 논의를 누적시키고 종단 내 젊은 스님들 사이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지난 2월 13일 결과물로 내놓은 것이 문건 <종단발전 개혁방안>이다.
A4 용지 10장에 달하는 이 문건에서는 현재 태고종단이 처한 현실을 진단해보는 백서를 발간할 것과 장기적인 종책수립과 그것의 일관성 있는 추진 그리고 행정의 투명성 확보 및 진정으로 종도를 위한 종무행정을 이룰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건의가 담겨 있었다. 이밖에도 총 70항목에 달하는 크고 작은 발전방안이 담겨 있는 이 문건은 이후 새로 태고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신 혜초 스님에 의해 전격 수렴되어 종단발전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제반 법령 정비 작업에 들어갔으며 파격적으로 총무원 집행부를 보현도량의 회원 중심으로 임명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과정은 지난 4월 이후 시작되어 아직은 구체적인 개혁의 성과로 언급할 만한 것은 없다고 말씀한다. 하지만 겸손의 말씀이다. 이미 몇몇 사안은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 괄목할 만한 변화로 지적되는데, 혜초 스님의 총무원장 취임식이나 개혁 이후 첫 태고종 독자행사를 치룬 월드컵 유치기원 영산대법회 등은 이전과 비교해서 사회적인 관심을 모아내는데 성공했으며, 신문이나 방송 등의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다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태고종의 장래와 개혁
지난 6월 10일 있었던 태고종 주요전통사찰주지협의회에서 태고종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의 관계에 대해 "더 이상 분규는 없다"고 피력 할 수 있었던 것도 종단개혁으로 얻은 자신감과 밝게 서광이 비치는 종단의 비전을 내다보며 비롯되었을 것이란 짐작이다. 이 해묵은 문제를 어떻게든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더 이상 교섭이나 결과물 없는 논의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어차피 30년 이상 지속된 현실의 소유권을 스스로가 먼저 자신 있게 인정하고 선포해야 한다는 입장의 표명으로 보여진다.
법현 스님은 이 문제를 포함한 조계종과의 관계를 양측이 모두 좀더 큰 안목에서 바라보길 원했다. 즉, 해방 이후 미군정을 비롯한 이승만, 박정희 등의 친외세 매판 정권이 당시의 가장 큰 민족주의 진영이었던 불교권을 이간하고 분할하려는 정책으로 양 종단을 갈라 놓았으니 양 종단 모두 민족불교라는 공통의 입장에서 공동 피해자였다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양 종단이 위해나갈 입장도 서로 갈등할 부분보다 협력해서 함께 풀어나갈 부분이 더 많다는 얘기다. 이런 현실에서 큰 종단인 조계종이 30년 넘게 지속되어온 태고종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식으로 지엽적인 부분에 대한 양보를 해나가는 것이 필수적이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람인 듯싶었다.
어쨌든 이 문제는 그 해결까지 요원하고 복잡한 문제요 당장 앞으로 벌여나갈 태고종 개혁의 목표는 우선 종도들에게 실직적인 도움을 주는 종단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위해 재무구조를 견실하고 투명하게 해나갈 것과 전체 종단의 행정을 전산화 할 것 등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한 종단이 대사회적으로 벌여나갈 가시적인 사업으로 남북통일에 기여하는 연구단체를 종단차원에서 설립하고 정보화, 지방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연구단체를 설립할 것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구체적인 종단 내 사업으로 동방불교대학의 각종 학교설립인가를 따내는 것과 종도들이 기도, 연수의 장으로 활용할 새로운 도량을 건설하는 일 등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주요한 사업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태고종 개혁을 바라보는 여러 눈들이 있다. 그중에는 우려가 드리운 비관적인 눈에서부터 새로운 비전을 미리 그리며 희망에 설레는 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 다양한 눈들은 태고종이 보여주는 전체적인 모습을 통해 그 같은 판단을 내리고 나름대로 입장을 견지하겠지만 오히려 구체적인 힌 부분, 바로 법현이라는 스님 한 분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태고종의 미래를 유추해 본다면 스님에게 많이 부담스러울까?
법현 스님뿐 아니라 개혁의 주체로 나선 스님들 모두가 그 정도의 부담은 느끼며 역동적인 한국 불교를 건설하시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