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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한로(寒露) 절후를 관장하는 우세남(虞世南)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
덕행(德行)과 박학(博學)으로 이름난 우세남
우세남(虞世南, 558~638)은 월주(越州) 여요[餘姚, 현재 절강성(浙江省) 여요(余姚)] 사람이다. 조부(祖父)는 우검(虞檢)으로 양(梁, 502~557)01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왕의 자문에 응한 인물이었고 아버지 우려( , 503~561)는 진(陳, 557~589)02의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모두 이름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세남의 자(字)는 백시(伯施)이다. 그의 숙부는 진(陳) 중서시랑(中書侍郞) 우기(虞寄, 510~579)였는데 자식이 없었다. 우세남이 숙부에게 양자로 가서 대(代)를 이었으므로 ‘맏이가 베풀었다’는 뜻으로 자를 삼은 것이다.
우세남은 561년[진(陳) 문제(文帝, ?~566)03 천가(天嘉, 560~565) 2년]에 아버지 우여가 죽자 너무도 슬퍼하여 상복(喪服) 조차 제대로 입기가 어려웠다. 진 문제는 우여를 높게 평가한 군주이다. 우여가 죽기 전에 동생인 우기가 여러 곳을 떠도는 것 걱정했다. 진 문제가 우여의 말을 듣고 우기를 불러들였는데 이때 진보응(陳寶應, ?~564)에게 억류되어 있던 우기는 소환에 응하지 못했다.
진 문제는 우여의 두 아들이 모두 박학하다는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보살펴주도록 하고 이들이 장성하자 건안왕(建安王)의 법조참군(法曹參軍)으로 삼았다.
우세남은 아버지 우여의 상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 양부 우기가 그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자신이 평안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64년 우기를 억류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진보응이 진 문제의 토벌로 죽고 우기가 돌아왔다. 우세남은 그제서야 베옷을 벗고 고기를 먹었다. 이때 우세남의 나이 7세였다.
우세남은 성격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욕심이 적었다. 어릴 때부터 형 우세기(虞世基)와 함께 오군(吳郡)의 고야왕(顧野王) 문하에서 부지런히 공부했다. 고야왕은 양(梁), 진(陳) 두 왕조에서 태학박사(太學博士)와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낸 사람으로 경사(經史)와 천문(天文), 지리(地理)를 통달하고 그림도 잘 그렸던 유명한 학자였다. 우세남은 고야왕의 문하에서 10년 넘도록 학업에 정진하여 생각을 가다듬었고 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세남은 어떤 때는 10일이나 세수와 빗질을 잊을 정도로 학업에 열중했다.
우세남은 글을 잘 지었는데 복야(僕射) 서릉(徐陵)의 문장을 모범으로 생각했다. 서릉도 문장으로는 당대에 이름을 떨친 유명한 인물이었다. 서릉이 우세남의 문장을 보고 자기의 문장과 동류(同類)라고 말해 우세남은 문명(文名)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군(郡)에 사는 승려 지영(智永)에게 서법(書法)을 배웠다. 지영은 왕희지체(王羲之體)를 잘 썼는데 우세남은 그를 스승으로 삼아 왕희지체의 묘의(妙意)를 체득하였다는 평가를 들었다. 지영은 왕희지(307~365)04의 9대 손(孫)으로 특히 초서(草書)에 능했는데 수양제(隋煬帝, 569~618)05가 지영이 왕희지의 육(肉)을 얻었다고 평할 정도로 왕희지체에 정통했다.
589년 수나라가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자 우세남은 형 우세기와 함께 장안(長安)으로 들어갔다. 이들 형제는 막상막하의 문장으로 당시에 문명을 떨쳐 그들을 논하는 사람들이 형제가 시문(時文)에 능했던 서진(西晉)06의 육기(陸機), 육운(陸雲) 형제에 비기곤 했다. 이때 우세남의 나이 32세였다.
수양제가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에 진왕(晉王)으로 있을 때 진왕(秦王) 양준(楊俊)과 함께 교대로 우세남을 불러들이곤 했다. 수양제가 즉위하고 대업(大業, 605~616) 연간에 우세남은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수양제가 우세남의 재주를 아까워 하였으나 우세남의 곧은 성품을 싫어하여 그는 칠품(七品)의 관직에 10년을 있었지만 승진되지 않았다. 반면에 우세남의 형 우세기는 말재주가 있고 영민하여 수양제의 마음에 들어 날로 귀하게 되었다.
수양제는 스스로의 재주와 학식을 과신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07
수양제는 매번 천하의 선비들에게 교만하여 일찍이 시신(侍臣)들에게 말하였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짐이 남긴 사업을 계승하여 사해를 품었다고 생각하는데 설령 짐이 사대부들과 더불어 선발시험을 치른다 해도 또한 마땅히 천자가 되었을 것이다.”
수양제가 조용히 비서랑 우세남에게 말했다.
“나는 성정이 다른 사람이 간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니, 만약 지위와 명망이 드러난 사람이 간쟁하여서 명성을 얻으려고 하면 더욱 참지 못할 것이다. 비천(卑賤)한 선비에 이르러서는 비록 조금 용서한다 해도 끝내 지상(地上)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수양제의 이 말은 우세남의 진언을 듣지 않겠다는 위협이었다.
우세남은 형인 우세기와 같이 살았는데 형의 처첩(妻妾)들이 왕자(王子)에 버금가는 복식을 하게 되었을 때도 세남은 궁빈하고 검약하게 생활했다.
수양제는 중국의 제왕 중 누구도 정벌에 성공한 적이 없었던 고구려를 복속시켜 천하를 재패한 군주가 되고자 했다. 수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고구려 원정에 나선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원정의 참담한 패배는 내정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혼란의 가장 큰 책임을 진 수양제는 혼란 수습의 의지를 상실하였고 중국 전역은 거대한 도둑의 소굴로 변하였다.
616년 수양제는 수도인 장안을 떠나 강도[江都,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로 향했다. 이때 각처에서 도둑들의 창궐을 알리는 보고가 중앙정부로 올라왔다. 그러나 수양제는 이런 보고를 외면했다. 나아가 제대로 된 보고와 간언(諫言)하는 신하들을 살려 두지 않았다. 우세남의 형 우세기도 처음에는 수양제에게 도적이 범람하니 군사를 발동하여 낙구창(洛口倉)에 주둔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수양제로부터 ‘겁쟁이 서생(書生)’이란 소릴 들어야 했다.
이후 우세기는 수양제에게 제대로 된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수양제는 스스로 귀를 닫음으로서 고립되었고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패망을 자초하였다. 중국 전역이 도적이 창궐하는 상황이었지만 제대로 된 보고를 하고자 하는 신하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보고한 신하들은 연이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는 사이에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수도인 장안과 수양제가 머물고 있던 강도 주변만이 수나라의 통치력이 미칠 뿐 나머지는 모두 반란군과 도적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러한 정국에도 수양제가 향락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친위대 덕분이었다. 그런데 수양제의 친위대는 주로 관중[關中,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지방]이 고향이어서 오랜 객지(客地) 생활을 청산하고자 했다. 수양제는 도적들로 창궐하는 수도 장안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황제의 친위대도 이러한 수양제의 생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도망하거나 반란을 일으켜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수양제의 친위대는 우둔위대장군(右屯衛大將軍) 우문화급(宇文化及, ?~619)08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우문화급은 수양제의 등극에 큰 공을 세운 우문술(宇文述)의 맏아들로 누차에 걸친 잘못으로 사형(死刑)에 처해져야 마땅한 인물이었다. 우문화급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우문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로 인해 죽음을 면했지만 신분이 노비로 강등되었다. 그런데 우문술이 죽자 수양제는 우문술의 공로를 생각하여 우문화급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이때 수양제는 우문화급으로 인해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위대의 반란은 사전에 탐지되었다. 우문화급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는 보고가 올라 왔지만 우세기는 이 보고를 묵살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우세기는 우문화급의 반란을 보고하는 사람이 부실(不實)한 것을 의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09 단지 그 이유가 전부라면 수양제의 죽음과 수의 멸망 그리고 그 자신의 죽음에 실질적인 책임은 우세기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징[魏徵, 입춘(立春) 절후를 관장]이 양제가 우세기를 믿어 망했다고 비판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친위대의 반란으로 죽음에 임박하였음에도 수양제는 여전히 황제였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꾸짖었다. 또한 끝까지 황제로서의 예를 주장했다.
“나는 실로 백성들에게 빚을 졌지만 너희들은 짐의 밑에서 영화와 봉록을 누렸다. 어찌하여 마침내 이와 같이 하는가?”
“천자는 죽는데도 스스로 법도가 있다. 어찌 칼날을 댈 수 있겠느냐! 짐주[ , 독주(毒酒)]를 가져오라.”
수양제의 마지막 요구는 수용되지 못했다. 병사들은 수양제가 건네준 천으로 그를 목매달아 죽였다.
우문화급이 양제를 시해하고 곧 우세기를 죽이려 했을 때 우세남은 형을 껴안고 형 대신 자기를 죽여달라 하였으나 우문화급은 듣지 않았다. 우세기가 우문화급의 칼에 죽고 우세남은 형의 죽음에 너무 애통해한 나머지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우세남의 이와 같은 형제애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우문화급은 양제를 죽이고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세우고 스스로 대승상(大丞上)이 되었다. 권력을 잡은 우문화급이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이밀(李密, 582~618)10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우문화급은 양호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허(許)라 하고 다시금 위주(魏州)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요성(聊城)으로 도망갔다가 두건덕(竇建德, 573~621)11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우세남도 우문화급과 같이 요성으로 갔다가 두건덕에게 잡혔다. 두건덕은 우세남을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임명하였다.
당이 중국을 재통일하는데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었던 두건덕을 이세민(李世民)이 멸하고 우세남을 진왕부(秦王府)로 끌어들였다. 이세민은 우세남을 참군(參軍)으로 삼았다가 기실(記室)로 전보하고 홍문관(弘文館) 학사(學士)를 제수하여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과 더불어 각종 문서(文書)와 서한(書翰)을 담당하게 했다. 이때 이세민이 우세남에게 명하여 『열녀전(烈女傳)』을 병풍에 쓰게 했다. 『열녀전(烈女傳)』은 소실되어 남은 책이 없어서 우세남이 암송하여 썼는데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충언(忠言)으로 정관지치(貞觀之治)에 기여한 우세남
626년[무덕(武德) 9] 이세민이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태자가 되자 우세남을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으로 삼았다. 이세민이 황제가 되자 우세남을 저작랑(著作郞)에 임명하고 홍문관 학사를 겸하게 했다. 이때 우세남은 이미 늙었고 기력이 쇠진하였으므로 누차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 쉬겠노라고 애걸했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당태종은 우세남의 청원을 듣지 않고 직급을 올려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로 삼으려 했다. 우세남이 한사코 사양하자 비서감(秘書監)으로 직책을 고치고는 영흥현자(永興縣子)에 봉했다.
당태종은 우세남의 박학(博學)을 중히 여겼고 매번 중요한 일에 자문을 구했다. 또한 우세남과 함께 담소하고 같이 경사(經史)의 서적을 보면서 토론했다. 우세남의 모습은 유자(儒者)의 풍모에 근엄하였는데 겉보기에는 걸친 옷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마음은 고상하고 충성스러웠으며 그의 주장은 곧고 정확했다.
당태종이 일찍이 이르기를,
“짐이 세남과 함께 고금의 일을 논할 때 어쩌다 한마디 실수를 하게 되면 매우 한스러워 했는데 그의 간절한 정성이 이와 같았다. 군신(群臣)들이 세남과 같다면 천하에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
라며 칭찬하였다.
634년[정관(貞觀) 8]에 우세남의 직급이 올라 현공(縣公)에 봉해졌다. 이때 농우산
이 무너졌고, 큰 뱀이 자주 나타나고 산동(山東)과 양자강(揚子江), 회수(淮水)
에 홍수가 났다. 당태종이 이를 걱정하여 우세남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춘추(春秋) 시대에 양산(梁山)이 무너져 진후(晉侯)가 백종(伯宗)을 불러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백종이 이르기를 ‘국가는 산천을 위주로 하는 까닭에 산이 무너지거나 내가 마르게 되면 군주는 자신의 생일을 거행치 아니하고 백성들에게 옷을 하사하며 거친 수레를 타고 음악을 듣지 아니하며 행차를 할 때면 예로써 산천에 제사하여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양산은 진(晉)이 주재하던 산이었으므로 진후가 백종의 말을 그대로 이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가 없었다고 합니다.
한(漢) 문제(文帝, B.C.E. 179~B.C.E. 157) 원년에 제(齊), 초(楚) 지방의 산 스물 아홉 개가 같은 날 무너지고 물이 엄청나게 솟아 나왔습니다. 문제가 군국(郡國)에 조서를 내려 공물을 바치러 오지 말도록 하고 천하에 은혜로움을 널리 펴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흡족해 했습니다. 이리하여 또한 재앙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해서 연재됩니다>
01 남조(南朝)의 하나. 무제(武帝) 소연(蕭衍)이 자신이 옹립한 제(齊)의 화제(和帝)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세운 나라.
02 경남조(南朝)의 하나. 진패선(陳覇先)이 양(梁)나라의 선위(禪位)를 받아 지금의 장강(長江)과 월강 유역에 세운 나라. 서울은 건강(建康). 5주(主) 33년 만에 수(隋)나라에 망하였음.
03 남조(南朝) 진(陳)의 황제. 이름은 천 , 자(字)는 자화(子華). 시호(諡號)는 문(文), 묘호(廟號)는 세조(世祖). 진 무제[武帝, 진패선(陳覇先)]의 조카. 무제가 죽자 제위를 계승했다. 북주(北周), 후량(後梁)과 경쟁하여 강남의 땅을 소유. 연호는 천가(天嘉), 천강(天康). 재위(在位) 7년(560~566).
04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의 3체를 예술적 완성의 영역에까지 끌어올려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최고의 서예가. 처음에 진(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필법을 배웠고 뒤에 한위(漢魏)의 비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당태종이 그의 글씨를 좋아하여 널리 수집하였기 때문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유행했다. 그의 작품은 진본으로 전하는 것은 없고 <난정서(蘭亭序)>, <십칠첩(十七帖)>, <집왕성교서(集王聖敎序)> 등의 탁본(拓本)이 전한다.
05 수문제(隋文帝, 541~604) 양견(楊堅)의 둘째 아들. 이름은 광(廣) 또는 영(英). 589년[개황(開皇) 9] 행군원수(行軍元首)가 되어 진(陳)을 평정했다. 모략을 통해 황태자 양용(楊勇)을 몰아내고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604년 문제가 죽자 제위(帝位)에 올랐는데, 아버지 문제를 시해하고 제위에 올랐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14년의 재위기간(604~618) 중 만리장성 수축, 운하개설, 이궁(離宮) 건설 등 대규모 토목 사업과 3차에 걸친 무리한 고구려 원정(遠征)을 감행하여 중국을 혼란 속에 빠트렸다. 혼란 수습의 의지를 상실하고 강도(江都)에서 사치스런 생활
을 이어가던 중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죽임을 당했다.
06 후한(後漢) 말기 황건적 토벌과 동탁 타도를 위해 일어선 군벌들이 궁극적으로는 삼국[三國, 위(魏)·오(吳)·촉(蜀)]으로 재정립되었는데 이 삼국 중 위(魏)를 계승한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나라이다. 이를 서진(西晉, 265~317)이라고 하는데 사마염이 280년 오(吳)를 병합함으로써 다시금 중국을 통일하였지만 290년 그가 죽은 후 후임 황제들
이 무능하여 황족들 간의 내란이 일어났다. 이 내란은 북방의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을 불러왔고 이로 인해 서진이 중원을 상실하고 지금의 남경(南京)에 도읍하게 되는 데 이를 동진(東晉, 317~420)이라고 한다.
07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資治通鑑 19』 수(隋)시대, 도서출판 삼화, 2009, 336쪽.
08 수양제의 집권에 공을 세운 우문술(宇文述)의 맏아들. 여러 번 법을 어겨 장안 사람들이 경박공자(輕薄公子)라 칭했다. 수양제가 태자 시절에 호위무관이었고 즉위하자 더욱 관직이 올랐다. 금령(禁令)을 어기고 돌궐(突厥)과 교역하다가 수양제의 노여움을 사 죽을 뻔 하였으나 아버지 우문술의 공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노비의 신분이 되었
다. 우문술이 죽고 우문술의 공로를 생각한 수양제에 의해 다시 대장군이 되어 수양제를 따랐다. 617년[대업(大業)13] 수양제를 수행하던 중 반란을 일으켜 수양제를 죽이고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세웠다가 얼마 뒤 양호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허(許)라 했다. 이밀(李密)에게 패하고 위주(魏州)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요성(聊城)으로 달아났다가 두건덕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09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資治通鑑 20』 당(唐)시대Ⅰ, 도서출판 삼화, 2009, 32쪽.
10 아버지 이관(李寬)의 포산공(蒲山公) 지위를 세습하여 수 양제의 친위부 대도독에 임명되었다. 613년 양현감의 반란을 도왔고 617년 적양(翟襄)의 추천으로 그들의 주군이 되어 자신을 위공(魏公)이라 칭했으나 618년 왕세충에 패하여 당에 귀순하였다. 그러나 이후 당에 반기를 들었다가 당의 복병에 의해 죽었다.
11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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