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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 [09/04/12] 이주일의 팝 아티스트 - Frank Sinatra | 2009-04-05 오후 6:36:01 |
이기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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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fe 두레박 이주일의 팝(가요) 아티스트(가수) 자료 - 2009년 4월 12일(일) : Frank Sinatra
프랭크 시나트라 ( Frank Sinatra, 1915 - 1998, 미국 )
라디오와 전쟁이 만든 최초의 아이돌 스타. 프랭크 시나트라 프랭크 시나트라의 본명은 'Francis Albert(Frank) Sinatra'로 1915년 12월 12일 뉴저지주 호보켄(Hoboken)에서 이탈리아 이민 2세로 태어났다. 시나트라의 부모는 그들의 아들이 엔지니어가 되길 희망했지만 그는 학교에서 운동을 즐겼고, 다른 아이들과 종종 드잡이질을 해대서 지역 경찰서의 주목받는 대상이 되었다.
수업이 끝난 뒤 그는 지역신문사에서 일했는데, 눈치 빠르게 적응해서 처음엔 단순한 사환으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스포츠부분의 신입 리포터로 일하게 되어 종종 고등학교 경기들을 취재했다(그는 거의 대부분의 스포츠에 능통한 편이었는데 특히 권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의 관심과 여유시간은 다시 노래부르는 일에 돌려졌다. 그는 종종 학교수업 시간을 빼먹고 당시 가장 인기있던 스타. 빙크로스비(Bing Crosby)의 노래를 연습했고, 지역에서 개최하는 노래자랑에 출연하기도 했다. 1938년 당시 유명한 라디오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그는 러스틱 캐빈이라 는 뉴저지의 한 클럽에 급사장겸 MC로 고용되었다.
어린 시절의 프랭크 시나트라, 그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의 2세로 태어났다 그는 25세 때 이미 해리 제임스 악단과 토미 도오시 악단의 전속 가수를 거친 당시 1년 수입 25만 달러의 인기 가수(당시 물가를 고려해보면 엄청난 액수)였다.
그는 여유 시간에는 다시 지역라디오 방송에 나가 노래를 불러 푼돈을 벌었고, 젊고 가난한 가수로 지내는 동안 악전고투하며 오랫동안 여자친구로 지낸 낸시(Nancy Barbato)와 1939년 2월 결혼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에게 운명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1939년 6월의 어느날 그가 일하는 러스틱 캐빈으로 베니 굿맨(Benny Goodman)의 반주악기 연주자로 일했던 해리 제임스(Harry James)가 나타난 것이다. 해리 제임스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는 당장 해리 제임스 악단의 새로운 멤버로 고용했다. 이들은 6개월이 채 못되어 마이너 싱글 앨범 <All or Nothing at All>을 발표하게 된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같은 해 7월 13일 해리 제임스 악단과 뉴욕에서 대망의 첫 레코딩 데뷔를 하게 된다. <From the bottom of my heart>, <Melancholy Mood>를 비롯해서 해리 제임스 악단 시절 모두 10곡을 녹음하지만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해 말 제임스 악단과 시카고 공연 도중 프랭크 시나트라는당시 시카고에 와 있던 당대 최고의 인기 밴드 중 하나였던 토미 도오시 밴드의 오디션에 응모하여 합격점을 받는다. 해리 제임스는 프랭크 시나트라와의 계약기간이 1년 반 가령 더 남아 있었지만 그의 장래를 생각하여 흔쾌히 계역기간을 파기하여 주었다고 한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1940년 1월부터 토미 도오시 악단에 참가하게 된다. 그는 같은 해 2월 시카고에서 '더 스카이 펠 다운'과 '투 로맨틱'을 시작으로 도오시 악단과는 42년 7월 2일까지 모두 83곡의 스튜디오 녹음을 남겼는데 이중에서 몇 곡의 탑10 싱글에 랭크되는 성과를 낸다. 훗날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 기간을 회상하며 "트럼본으로 노래의 레슨을 받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그는 도오시의 트롬본 주법에 맞춰 숨을 길게하는 호흡 조절과 프레징을 익히며 가수로서의 자신을 단련시켜 나갔다. 토미 도오시 악단에 있는 동안 그에겐 잇따라 행운이 찾아왔다. 그 중 하나는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육군으로 징집되지만 고막에 이상이 있어 병역이 면제된 것이다(음, 요새 "꼬옥 가고 싶습니다."라는 CF로 원성이 자자한 모 제약회사가 있는데, 뭐 어쨌든 이때는 확실히 전쟁 중이었다).
마피아와 공산당 연루설로 반미행위위원회에 회부된 The Voice 프랭크 시나트라는 토미 도오시 악단에 몸담고 있는 2년 반 사이에 가수로서의 기량을 연마하게 된다. <I'll Never Smile Again>을 필두로<Oh, Look at Me Now> 등 많은 레코드가 히트하며, 1941년 <다운 비트> 지의 인기 투표에서는 그의 오랜 우상이자 1937년 이후 줄곧 이 분야에서 부동의 1위를 지캬왔던 빙 크로스비를 대신해 남성 가수 인기부분의 탑에 랭크되었다. 그는 이런 성공에 힘입어 1942년 1월 처음 자신만의 이름으로 <Night & Day> 등 4곡을 녹음했고, 같은 해 9월 도오시 악단을 탈퇴하여 솔로 싱어로 나서게 된다. 그는 1943년부터 "럭키 라이크 히트 퍼레이드"라는 대중적인 라디오 방송에서 솔로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그는 확실히 빙 크로스비의 인기를 넘어서는 일류 가수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그는 미국 10대 소녀들의 아이돌 스타가 되는데, 이들은 그가 나타나 노래하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소리를 지르고, 실신했다. 심지어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매고 있는 나비 넥타이를 서로 잡아당겨 질식사할 뻔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중 최고의 사건은 1944년 콜럼부스데이(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을 기념하는 날)에 그가 맨해튼의 파라마운트 극장에 출연했을 때 일어났다. 2만 5천여명의 소녀들이 몰려들어 흡사 폭동같은 난리를 일으켜 700명의 경관이 긴급출동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런 일련의 소동들과 관련해 미국 의회로부터 "미국 내 소년 비행의 주된 선동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의 소녀팬들은 바비 삭서(bobby-soxer : 학생용 양말을 신은 이들이라는 뜻에서)라는 명칭으로 불리우게 된다.
틴 팬 앨리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프랭크 시나트라
1943년의 전반기엔 미국의 뮤지션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녹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그가 1939년 해리 제임스 악단과 녹음한 지난 앨범인 <All or Nothing at All>을 그의 이름으로 발매하게 되는데 발매를 시작하자마자 밀리언 셀러의 대히트를 기록한다. 그는 계속 승승장구해, "The Voice"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그는 20대 초반에 당시까지만 해도 최고의 빅스타였던 빙 크로스비를 능가하는 대스타의 반열에 올랐으며 연수입 25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부자가 되었다.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 2세대의 자식으로 태어나 동네 경찰들의 눈초리를 한 몸에 받는 문제아에서 구름 같은 소녀팬을 몰고 다니는 10대 아이돌 스타가 되었다. 살아 생전 마지막 대선에 임하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선거운동에 그의 이런 젊은 층에 대한 상징적인 인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1947년 프랭크 시나트라는 72곡의 신곡을 녹음했고 거의 백만 달러에 가까운 수입을 올려 고가의 차를 사들이는 등의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아직 불안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같은 해 몇 가지 심각한 추문에 휩싸이게 되는데 2월에 그는 쿠바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이때 이탈리안 갱단두목 럭키 루치아노(Lucky Luciano)와 함께 있었다고 보도되었고, 4월에는 할리우드 가십을 주로 다루는 옐로우 페이퍼의 저널리스트가 그가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얼마 뒤 그 기자의 얼굴을 갈겨 버렸다. 시나트라는 이런 사실들을 부인했지만 반이탈리안 정서를 가진 이들을 통해 그후로도 몇 년 동안 줄곧 시달려야 했다.
1951년 11월 7일 세기의 섹시스타 에바 가드너와 결혼하는 프랭크 시나트라 매우 즐거운 듯 웃고 있지만 이 무렵 프랭크 시나트라는 최악의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보다 심각했던 것은 당시 음반계 혹은 쇼비즈니스계의 풍조였다.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당시 틴 팬 앨리를 장악하고 있던 메이저 음반사들은 마치 기계로 찍어내는 듯한 곡 스타일로 몇몇 인기 가수들을 혹사시켰다. 그는 계속되는 쇼 행사, 레코드, 영화, 라디오에서의 활동을 통해 인기를 얻었지만 동시에 꽉 짜인 스케줄과 이 무렵 빚어진 몇 개의 사적인 트러블과 의혹이 불거지면서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에게 일어난 스캔들은 마릴린 먼로 이전 당시 최고의 섹시 여배우로 주목받던 에바 가드너(Ava Gardner)와의 염문과 본처와의 이혼 문제였다. 결국 그는 첫번째 부인이었던 낸시와 결별하게 된다. 1949년 그는 반미행위조사위원회로부터 마피아와 공산당과의 문제로 소환당해 조사 받게 된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갑작스레 소속 레코드사로부터 계약이 파기되었다는 일방적인 통고를 받게 되고, 그가 출연하가로 되어 있던 라디오 쇼는 취소되고, 그가 소속되어 있던 연예 에이전시는 그를 해고해 버렸고, 그가 출연하기로 했던 MGM사와의 영화계약도 파기되어 버렸다.
바로 얼마전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마피아와 공산당 연루자라는 의혹 하나로 제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사건 이후 프랭크 시나트라는 연예계에서 잊혀지는 듯 보였고, 그는 에바 가드너로부터 돈을 빌리는 신세가 되어 돈을 낭비하고 써 버렸다. The Voice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그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미성에 가까웠으나 오랜 시간 꽉 짜여진 스케줄과 반미위원회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매스컴이 연이어 그를 공격해 왔고, 대중의 음악에 대한 취향도 변화해가면서 프랭크 시나트라는 계속 곤경에 처하게 된다. 1949년 말 <다운비트> 지의 인기투표에서는 오랫동안 독점하다시했던 남성가수 인기부문 탑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때 그가 겪은 시련이 얼마나 혹독했던 것인지 1950년 5월 1일 뉴욕의 '코파카바나' 무대에서의 공연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연이어 좋지 않은 일들만 일어났고, 그것이 최고조를 이룬 것이 1952년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제임스 존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제작된다는 소식이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이 영화의 중요한 조역인 마지오 이등병을 역을 따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년) - 슬럼프에 빠져 최악의 상태에 있던 시나트라는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몽고메리 클리프트에 안겨서 죽어가는 미군 병사 역을 맡으며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재기에 성공한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탈리아 출신 이민 2세였다. 그런 그에게 미국은 다른 미국 이민자들과 그들의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칸 드림의 희망을 믿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하던 매카시즘의 마녀 사냥에 한 때 표적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와 이탈리아계 마피아 연루설은 이때 이후로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나올 때마다 불거지곤 했다. 그는 연예계에 데뷔한 초창기부터 민주당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거 운동에 나섰고, 같은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계 이민 후손인 존 F. 케네디의 선거에도 물심양면으로 지지를 보냈다. 그가 정치적인 야심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의지는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대륙 이민에 뒤늦게 뛰어든 아일랜드 이민들과 이탈리아 이민들은 선주민을 학살하고 신대륙 사회의 주류를 이루어 원주민 행세를 하는 앵글로 색슨계 이민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그런 피해의식이 의식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겠지만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의혹을 받아 반미행위위원회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은 그의 경력에 대해 프랭크 시나트라는 그것이 어떤 약점이 될지 몸으로 충분히 체험하여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가수 시네이드 오코너는 오랫동안 유럽의 변방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인의 자의식(그녀는 공개적으로 IRA를 지지했다)과 더불어 남성 지배 사회의 약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자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가수로 인정받고 있다. 가톨릭 성가대 출신이었다는 시네이드 오코너는 1992년 <Saturday Night Live>에 출연하여 교황의 사진을 찢어 버렸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가톨릭적인 엄숙주의에 반발한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 뒤 밥 딜런 트리뷰트 콘서트에서 그녀는 미국인들의 야유 속에서 무대를 내려왔다. 그것은 그녀가 교황의 사진을 찢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얼마전에 열렸던 뉴저지 스테이트 아트센터에서 열린 콘서트 무대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되었다는 이유로 무대를 내려온 것에 대한 미국인들의 항의였다. 그리고 다시 얼마 뒤 프랭크 시나트라는 한 신문에 글을 기고해 그녀의 행위에 대해 '미국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다며 시네이드 오코너의 엉덩이를 걷어 차 주고 싶다'는 비난을 가했다. 이 말을 들은 시네이드 오코너의 반응은 한 마디로 기도 안 찬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프랭크 시나트라와 관련한 글을 모두 믿는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협박당한 최초의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라며, 그녀는 프랭크 시나트라에 얽힌 과거의 추문들을 연상케 하는 말을 하여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복수했다.
프랭크 시나트라를 위한 변명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우리는 종종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통박당하는 경험을 한다. 4.19세대가 6.3세대에게, 그들은 다시 뒤이어 오는 세대에게 통박당하고, 앞선 세대는 또 그 뒤이어 오는 세대를 걱정한다. 누구보다 맹목적인 국가주의, 애국주의에 대해 쓰라린 고통을 당한 적이 있었던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시네이드 오코너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프랭크 시나트라의 반응이 옳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어쩐지 그의 심정은 진심으로 시네이드 오코너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세대론의 갈등, 세대 차이라는 것은 더 이상 문화적인 것, 사회적인 것의 범위를 넘어서 정치적인 갈등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최근 <시민의 신문> 한 기사에서 과거 빨치산 경력이 있는 화가 오치호를 이회창 판사가 5.16 군사법정에서 재판했던 것이 기사화된 적이 있는데, 이때 일을 취재한 기자가 오치호 선생의 아들에게 과거 친일 부역한 경력을 가진 화가들에 비해 이들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치호 선생의 경력은 오히려 오점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의 아들은 그 문제에 대해 한 번도 동의하지 않았다는 취재 후일담을 남기고 있는 것을 읽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 개인에 가해진, 그것도 매우 오랜 기간 지속된 국가적 폭력에 노출된 이들이 세월이 변했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 속 이야기를 흉금없이 털어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통제가 되어 나중에는 그들의 신념처럼 변화해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프랭크 시나트라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다. 그가 정치적으로 충실한 민주당원으로 살았던 것, 권력자와 늘 가깝게 지내고자 했던 것의 이면에는 그런 불안감이 잠재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한 때 목소리에 이상이 생기고, 갱 럭키 루치아노 등과의 연루설 등에 휘말려 인기가 급락하고, 레코드 계약사, 영화 계약사의 계약이 일방적으로 파기되는 등의 경험을 한다. 이 무렵 에바 가드너와도 헤어지고 만다.
프랭크 시나트라, 지상에서 영원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개봉될 무렵과 비슷한 시기에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또 한 편의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테렌스 멜릭 감독의 <씬 레드 라인>이 그것이었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로부터는 격찬을, 관객들로부터는 다소 엇갈린 평가를 받은 영화였는데, <씬 레드 라인>의 원작자 제임스 존스의 다른 전쟁 소설 <지상에서 영원으로>는 비평가와 관객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이 영화는 몇 가지 점에서 유명했는데 하나는 버트 랭카스터와 데보라 카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이 시작될 무렵 해변에서 나누는 키스신이 영화사상 최고의 키스신 중 하나로 꼽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이 영화에서 마지오 이병 역으로 출연하여 재기에 성공했고,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의 프랭크 시나트라는 그야말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에바 가드너와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낸시와 이혼했지만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고, 공산당 연루설, 마피아 연루설 등으로 그는 사면초가에 몰려 있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는 흥행은 물론 작품성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간 노래만 잘 하는 혹은 십대 아이돌 스타에 불과했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프랭크 시나트라는 재기에 성공했다. 이 영화는 이듬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무려 13개 부문에 후보로 그 중 8개를 수상했다. 남우 주연상은 몽고메리 크리프트와 버트 랭카스터가 한 영화에서 주연으로 맞붙어 결국 <제17포로 수용소>에서 좋은연기를 펼친 윌리엄 홀덴에게 돌아갔고, 여우주연상은 <로마의 휴일>로 오드리 헵번이 차지하게 된다. 계약사였던 콜럼비아로부터는 일방적인 계약 파기 선언을 들었고, 그와 관련되어 있던 모든 쇼비즈니스 사업이 줄줄이 파기되었다. 그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프랭크 시나트라는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출연에 목을 매달았고, 결국 출연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보기좋게 역전 홈런을 쳤다. 이 영화는 그에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안겨 주었다.
그는 그동안 감미롭고 가냘프기까지 했던 목소리에서 좀더 중후하고 힘있는 창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그를 버린 콜럼비아 레코드를 대신해 1953년 4월엔 또다른 메이저 레이블인 캐피톨 레코드와 계약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오랫동안 그와 함께 고비들을 헤쳐나갈 중요한 파트너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노래들을 편곡하고 지했던 넬슨 리들이었다. 넬슨 리들은 이 무렵의 프랭크 시나트라는 "바이올린 같은 허약한 소리가 이제야 훌륭한 첼로 사운드로 바뀌었다"고 회고한다. 오랜 고민과 고통이 그를 좀더 성숙시켜 주었고, 그는 빙 크로스비 스타일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발라드 창법에서 재즈적인 감각을 받아들여 이후 퓨전적인 음악 지향을 보여 나가게 된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허비 행콕 이전에 이미 음악의 퓨전 실험을 한 가수라고 말한다. 캐피톨 레코드와 계약하여 만든 <Young and Heart>가 히트하고, 연이어 그의 앨범들이 대중과 비평가 양쪽으로 호평을 받아낸다. 그는 도리스 데이, 루이 암스트롱, 그레이스 캘리, 빙 크로스비 등과 함께 공연하였고, 1955년에는 영화 <The Man with Golden Arm>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다. 그는 씬 레드 라인에서 다시 정상으로 날아오른다.
1960년대 프랭크 시나트라는 쇼 비즈니스계의 거물로 성장했다. - 사진은 한 TV쇼에 출연한 프랭크 시나트라, 빙 크로스비, 딘 마틴의 모습이다. 자신의 레코드 사를 설립한 프랭크 시나트라와 랫팩(rat pack) 프랭크 시나트라는 캐피톨 레토드사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이 무렵의 그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캐피톨 레코드는 그에게 좀더 팝적인 녹음들을 요구했다. 그러나 프랭크 시나트라는 다시 메이저 레이블의 꼭두각시 노릇은 하기 싫었다. 그는 1961년 캐피톨 레코드를 떠나 자신의 레이블 리프라이즈를 설립한다. 가수가 자신의 레이블을 만든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지만지금까지 현존하고 있는 레코드 레이블은 드물다. 그는 쇼비즈니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자신이 미국 연예계의 대부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는 1960년대 들어 자신이 직접 주도하고 기획한 행사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공연하여 음반을 남겼고, 65년과 66년 연속으로 그래미상 최우수 앨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1967년에는 자신이 설립한 리프라이즈 레이블을 통해 자신의 딸과 함께 음반을 녹음했다.
음악계에서는 그야말로 거물급 스타들이 세션맨을 맡아 연주하는 것을 일컬어 수퍼 세션(super session)이라고 하는데, 영화판에서는 그것을 초호화판 캐스팅이라고 말한다. 1990년대 말엽부터 할리우드 영화에서 초호화 캐스팅이라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 중에서도 <오션스 일레븐>에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줄리아 로버츠 등이 출연한 것은 뉴스였다. 사실 이 영화는 1960년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었다. 당시 출연했던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프랭크 시나트라, 딘 마틴(Dean Martin), 새미 데이비스(Sammy Davis)Jr, 피터 로포드(Peter Lawford) 등 당대의 일급 연기자들이 출연하여 대중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이들은 프랭크 시나트라와 평소 잘 어울려 다니던 그룹으로 일명 '랫팩(rat pack)'이라는 닉 네임으로 불렸다. 랫팩이란 못된 직이나 하고 다니는 패거리라는 그다지 좋지 않은 뜻이었는데, 훗날 험프리 보가트의 아내가 된 로렌 바콜이 라스 베가스에 자신들의 아지트 격인 술집을 만들어 놓고 즐기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불러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에바 가드너와 결혼생활을 오래 지속시키지 못했고, 로렌 바콜을 비롯해 무용수 줄리엣 프로스 등과 염문을 뿌렸다. 그는 곧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당시 21살의 어린 여배우 미아 패로우와 결혼한다. 그러나 정작 이들 그룹이 유명해진 것은 단지 유명한 배우들이 패를 지어 영화에 출연해서이거나, 흥청망청 놀고 다녔기 때문이 아니었다. 거기엔 미국의 최고 권력자, 아니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 운동에 이들이 특히 열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라이프>지에 등장한 것은 50세 때와 55세로 은퇴했을 때이다.(훗날 은퇴를 번복한다)
프랭크 시나트라, 마릴린 먼로, 존 F. 케네디 그들은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피터 로포드는 존 F. 케네디의 동생인 팻 케네디의 남편이기도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자신보다 1년 6개월 가량 어린 하버드대학 출신 정치가를 좋아했고, 대통령이 된 뒤 그에게 마릴린 먼로를 소개했다고 한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자신의 정부인 유디트 엑스너(Judith Exner)를 케네디 대통령과 공유했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이를 통해 어떤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케네디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문제는 케네디도 프랭크 시나트라를 매우 좋아했다는 것인데, 그가 프랭크 시나트라를 좋아한 이유는 '여자' 때문이었다는데 있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럭키 루치아노 뿐만 아니라 마피아 두목이었던 샘 지앙카나(Sam Giancana)와 절친한 사이였고, 조니 로셀리니 등에게도 여자를 소개해주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낮의 대통령과 더불어 밤의 대통령과도 매우 친했던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죽고 나서 그의 밑에서 15년간 개인비서로 일해왔던 조지 제이콥은 그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책을 냈는데, 그 책의 내용 중에는 당시 미성년자였던 나탈리 우드와의 성관계를 비롯해 프랭크 시나트라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제이콥에 의하면 케네디의 아버지는 먼로를 케네디 곁에서 떼어내기 위해 무진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시나트라는 케네디를 좋아하기는 했으나 직접 만나는 것은 꺼려했고, 그 대신에 개인비서인 제이콥을 케네디에게 자주 보내 필요한 것을 묻곤 했는데, 한번은 제이콥이 케네디에게 필요한 것을 묻자 "할리우드의 모든 여배우들과 관계를 가져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재클린이 케네디가 죽자 오나시스와 재혼했는지를 의문스럽게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케네디 곁을 지켰는지가 더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1962년 8월 5일 아침. 당시 나이 36세의 금발 머리의 글래머 여배우가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채 자택에서 발견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세기의 섹스 심볼로 추앙받았던 마릴린 먼로였다. 세상엔 마릴린 먼로의 사인은 약물과용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으나 그녀의 죽음이 약물과용에 의한 사고사인지 아니면 그녀가 의도한 자살인지, 아니면 케네디 형제와의 스캔들에 둘러 쌓인 의문의 살인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논란이 있다.
그녀의 죽음에 케네디 형제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최소한 이 두 형제가 마릴린 먼로를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와 부적절할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조 디마지오와의 재결합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여러 가지 정황증거로 보아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느날 갑자기 약물과용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증거들이 사라지는 등의 의문점을 남기고 있으며, 그녀가 죽기 얼마 전에 로버트 케네디와 통화를 시도하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마릴린 먼로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마릴린 먼로를 정치인들에게 소개하여 그들의 정부가 되도록 이끈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런 탓에 사람들은 존 F. 케네디에게 마릴린 먼로를 소개한 것도 그이고, 마릴린 먼로를 다시 로버트 케네디에게 넘기도록 한 것도, 그녀를 죽게 한 것도 프랭크 시나트라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최소한 그가 그런 오해를 받도록 행동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프랭크 시나트라 - My Way 프랭크 시나트라를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함께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원래는 1967년 프랑스의 클로드 프랑소와가 샹송 <평상처럼 Comme D' Habitude>이란 제목으로 만든 노래였는데, 폴 앵카가 즐겨 불렀었다고 한다. 그런데 1968년 프랭크 시나트라가 연예계 은퇴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이 곡에 영어로 가사를 붙여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선사한 것이다. 이 노래는 1969년 발표 당시엔 싱글 차트 27위에 진입하는 평범한 반응밖에 얻지 못했지만, 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곡이 되었고, 프랭크 시나트라 자신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이 곡을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헌사한 폴 앵카는 <My Way>는 "프랭크가 노래해야만 빛을 발하는 곡"이라고 말하고 있다. 1971년 월 13일 프랭크 시나트라는 L. A의 아만슨 극장에서의 자선공연에 출연한 것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러나 그는 1973년 11월 그를 위한 TV스페셜에 출연하고, 동명의 앨범 <올 블루 아이즈 이즈 백Ol' Blue Eyes Is Back>을 통해 다시 컴백한다. 그는 이후 다시 은퇴를 선언하지만 1993년에는 그의 가까운 친구들(주로 후배들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평소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U2의 보노가 그와 함께 듀엣에 참가했다는 것이다)과 함께 <듀엣>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3백만장의 판매고를 넘겼고, 이듬해인 1994년엔 <듀엣2>를 제작해서 발표하는데 1995년 그래미상 트래디셔널팝 퍼포먼스 상을 수상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삶의 흔적을 살펴 보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 2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빙 크로스비와 같은 가수가 되길 꿈꾸었던 프랭크 시나트라. 그는 빙 크로스비를 능가하는 가수가 되었고, 영화에도 출연하여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때 그를 버렸던 쇼 비즈니스계를 뒤에서 조정할 수 있을 만한 실력자로 컸다. 그는 정치적으로 리버럴한 입장을 지닌 정치인들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국내 우익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98년 5월 14일 LA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자신의 유산 중 일부를 학대받는 아동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살아 생전에는 미성년자였던 나탈리 우드와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I'm losing"이었다고 한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살았던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전쟁과 학살, 혁명과 반동이 일어났던 시대였다. 그런 20세기의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는 기간을 살다 간 한 명의 가수로서 그는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때로 그의 삶의 행적에서 성공과 출세를 향한 야심으로 가득한 한 인간의 일그러진 욕정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의 노래를 듣지 않는 일, 그의 삶과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음악이 지닌 의미 미국과 유럽 등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라디오의 양적인 팽창을 경험하게 되고, 라디오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인종음악(Race Music)이라고 펌하당하여 가정에서 듣지 못하게 했거나 들을 수 없었던 흑인음악들, 리듬 앤 블루스와 블루스를 경험할 수 있게 되고, 전쟁 기간 동안 경제력과 사회적 위치의 상승을 경험한 흑인들은 반대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자양분과 능력을 축적하게 된다. 종전을 눈앞에 둔 1943년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에 올린 <오델로>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무어인 주인공 오델로 역에 흑인이 주인공을 맡는 일이 생겼고 사람들은 흑인의 연기에 박수를 보냈다. 이렇듯 서로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살았던 미국 사회가 만나 만들어낸 대중음악이 바로 록큰롤이었다. 그러나 이런 화학 반응이 일어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고, 아직까지는 백인 중산층들의 음악인 틴 팬 앨리(Tin Pan Alley)가 대중음악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라디오가 그간 서로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았던 서로 다른 미국 사회의 구성원들끼리를 마주보게 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100% 풀가동하게 된 미국의 산업, 그것도 군수산업의 호황을 통해 미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놀라운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4년 동안에만 미국의 개인 소득 총액(GNP)은 960억 달러에서 1710억 달러가 되었고, 공장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주급 23.5달러에서 47.08달러로 거의 2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10년간의 대공황을 경험한 미국인들에게 이것은 놀라운 호황이었고, 군수물자는 물론 소비물자 생산도 12% 이상 증산되어 국민들은 아낌없이 소비를 위해 돈을 지불할 수 있었다. 진주만 공격 3주년 기념일에 뉴욕 메이시 백화점은 사상 최고의 매출기록을 달성했고, 극장은 철야로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제2차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은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결정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제 미국의 대중음악은 새로운 흐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초기엔 로커빌리라고 불렸고, 나중엔 록큰롤, 그리고 다시 록음악으로의 진화였다. 그리고 그 음악은 버디 홀리,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즈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다.
아내와 어머니 역할에 중압을 느끼던 여성들은 전쟁을 위해 유럽과 아시아의 밀림으로 떠난 남성들을 대신해 조선소와 사회 곳곳을 메워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되고,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틴에이저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 그들 중 일부는 다시 사회에 진출해 쉽게 고소득을 얻을 수 있는 임시직 일자리를 얻어 부모의 감시로부터의 자유는 물론 경제적인 자유도 얻게 된다. 그렇게 틴에이저들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속속 만들어나가게 된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기성세대가 어두운 공간 속에서 몰래 추는 춤으로 인식되는 지르박(원래는 지터박)은 원래 이 무렵 이들 틴에이저들이 만들어낸 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찾아낸 최초의 몰입 대상은 다름아닌 프랭크 시나트라였다.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들이 1990년대 초반 서태지의 등장에 대해 경악하며 이런 서태지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떨던 오도방정을 기억한다면 당시 미국 기성 세대들이 틴 에이저들의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전쟁의 억압 때문에 생겨난 애정결핍증세의 결과로 판정짓고 말았다. 고막이 찢어진 탓에 징병검사에서조차 불합격 당한 호보켄 항구 마을 출신의 이 훌쭉한 청년을 에워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의 심리학자들은 짐작도 못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일어난 열광적인 소동이었기 때문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현대적인 미국 팝음악과 이전의 대중음악 사이에 가교를 놓았던 인물이자, 대중의 시대, 매스미디어의 시대에 적응해가는 쇼비즈니스의 인물로서의 한 표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의 하위 문화, 잡종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되었던 미국의 대중문화는 코카콜라와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코카콜라의 단물에 젖어들었던 사람들은 이후 어떤 형태로든 그것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백인 중산층 주류의 대중음악을 의미하는 틴 팬 앨리, 그것은 포스트모던 후기 사회에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스탠다드 팝이라 불리며, 록큰롤과 함께 세계를 주름잡는 미국식 대중음악이 되어(프랭크 시나트라와 닐 세다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의 음악도 결국 이 틴 팬 앨리의 새로운 변종들이다) 불사신처럼 살아남았음을 증명한다. 우리는 아직도 프랭크 시나트라가 적응해야 했던 제국의 울타리 속에서 살고 있다. 바야흐로 대중의 시대, 새로운 제국의 시대에 우리들은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아니면 대항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영광이 컸던 만큼 그늘도 깊었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삶도 20세기와 함께 저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