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임한 첫 날 죽어 나간 사또들 이야기
갑자기 아랑 이야기가 왜 떠올랐을까? 우연일 거다. 내가 모르는 깊은 무의식이 나를 움직였는지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무의식이니 알 길이 없다. 좋은 집에 한사코 들어가기 거부하는 대통령 당선자 때문일까? 아니겠지? 상대 후보에 비해 무려 0.7%나 더 득표한 새 대통령인데 그가 한낱 무속 때문에 입주 거부를 하는 ‘쫄보’일리가 없다. 반대자들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여야 한다. 그래도 아랑 낭자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밀양에 사또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갔던 아랑이 그녀에게 흑심을 품었던 통인(通引·조선시대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던 직책)에게 납치되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아랑을 칼로 찔러 죽이고 시신을 숲 속에 버렸다. 사건은 미제로 남았고 결혼도 안 한 딸이 외간 남자와 정이 나서 도망쳤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수치심에 사또직을 사임하고 낙향했다. 이후 신임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첫날 밤에 아랑이 귀신으로 나타나 자기의 한을 풀어달라고 했지만 겁이 많은, 아니면 여성의 ‘하찮은’ 한풀이로 생각한 사또들은 죽어 나갔다. 밀양은 꽤 큰 고을이었는데 이 소문 때문에 부임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용감한 사람이 자원해 부임했다. 그가 부임한 첫날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며 문이 열리더니 산발한 채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여인이 목에 칼을 꽂은 채 나타났다. 그 여인은 아랑으로, 사또에게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고 그 범인인 통인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 신임 사또가 이튿날 범인을 잡아 처형하면서 더 이상의 죽음은 사라졌다.
아랑 전설(阿娘傳說)은 별도의 책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고 일제 강점기 설화 연구가인 손진태가 『조선민족설화의 연구』에서 처음 소개했다.
흥미롭게도 김영하가 ‘아랑은 왜’라는 소설을 통해 생산한 ‘거짓’들을 정사처럼 받아들이는 인터넷 자료들이 많다. 그는 ‘정옥낭자전’과 명종때 밀양에 부임한 사또들이 죽어 나갔다는 실록이 존재하는 것처럼 소설을 전개한다. 이는 모두 거짓이다. ‘정옥낭자전’이라는 고전 문학도 없으며 실록에도 그런 내용이 없다. 김영하를 탓하는게 아니다. 이는 픽션(fiction)의 영역을 고증이라는 절차로 검증하려는 매우 어리석은 태도다. 2012년 MBC에서 방영된 20부작 드라마 ‘아랑사또전’을 두고 고증시비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타란티노 감독은 2009년 ‘거친녀석들(Inglorious Basterds)’에서 1945년 베를린 함락 직전 자살한 히틀러의 역사를 1944년 파리에서 폭사(暴死)하는 걸로 바꾸어 버린다. 심지어는 건달들(Bastards)의 스펠링을 Basterds로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관객들은 이 가짜 역사와 가짜 스펠링에 열광했다.
다시 말하지만 아랑의 이야기는 손진태가 소개한 단편적인 내용밖에 없다.
유광수(연세대 교수)는 여성의 억울한 죽음과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의 대립 구도로 이 설화를 해석한다. 아버지는 딸의 실종을 ‘부도덕’으로 예단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딸과 절연했다. 그가 낙향한 것은 딸을 대신한 일종의 불명예 세탁과정이며 그래야만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임한 사또들의 죽음도 억울하기는 하지만 그들도 아랑 아버지의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정서는 현대에도 가끔 발견되는데 조선시대에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으리라! 신임 사또들은 과연 아랑 귀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을까? 그렇다면 부임한 사또들은 정말 놀라서 죽었을까? 혹시 아랑이?
2012년 MBC에서 상영된 20부작 드라마 '아랑사또전'
아랑의 아버지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딸의 의문의 실종을 외면했다면 사사기 10장 이하에 나오는 사사(판관) 입다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딸을 희생 제물로 바친 경우다. 오랜 암몬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이스라엘은 지도력 부재를 겪다가 궁여지책으로 건달 입다를 지도자로 세운다. 비천한 출신으로 온갖 수모를 겪으며 살아 왔던 입다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결국 받아 들인다. 뒷골목 싸움에만 능했지 부족의 명운을 건 전쟁을 인도해 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승리를 허락한다면 전장에서 돌아오는 날 처음 보이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전쟁에서 이긴 후 처음 나타난 사람은 딸이었고 결국 제물이 되었다.
성서는 입다의 딸 죽음 이후 이스라엘 여자들은 산으로 들어가서 나흘 동안 입다의 딸을 애도하는 관습이 생겼다고 쓴다(사사기 11:40).
필리스 트리블(Phillis Trible)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는 하나님이 그를 살려 주었고 입다의 딸은 여성이기 때문에 살해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서 전승과 달리 이스라엘 민담(民譚)에서 입다는 결국 죽을 때 시체가 토막나는 징벌을 받았고, 무명의 딸은 샤일라(Shailah)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에서 재인용).
아랑과 샤일라 이야기의 공통점은 (여성을 포함한) 약자의 억울한 죽음이 그 죽음의 구조적 조건을 만들어 낸 세력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다. 아랑은 친부살해는 차마 못했지만 남성 연대에 복수했고, 이스라엘 민담은 입다에게 잔혹한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결국 아랑의 이야기를 들어준 신임 사또에 의해 정의는 회복됐고, 나흘동안 이스라엘 산속을 애도하며 뭉쳤던 여성 연대는 샤일라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J. Cheryl Exum의 말처럼 이 관습은 여성 연대(Female Solidarity)의 표징이다.
세간에 떠돌듯이 청와대 터가 흉터일 수는 있다. 오래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를 박차고 나왔던 한국형 풍수지리 전문가인 최창조도 청와대 터가 흉터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필자는 풍수지리설이나 도참설(圖讖說)을 단 1도 믿지 않지만 그것을 믿는 이들의 용어를 차용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청와대가 경무대이던 시절 저질러진 4.3 제주 학살과 보도 연맹 사건의 원혼들, 박정희 시절의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여러 억울한 죽음의 원혼들, 전두환 노태우로 인한 광주의 원혼들, 충분히 두려울만 하다.
만약 그러한 원혼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신임 사또처럼 용기있게 맞서 그 원한을 풀면 될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청와대에 단 하루도 못들어가겠다는 새로운 당선자한테 그런 결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입다의 딸 샤일라의 친구들처럼 약자끼리 다시 연대해서 새로운 정부에 의해 원한이 쌓일 일(그가 추진하는 일들을 보면 약자들의 원한이 쌓일만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을 없애야 한다. 오히려 그것이 새 대통령을 지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약자들끼리 다시 연대해야 하는 이유..!!
안타깝다...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