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희망과 사랑
구스타프 클림트는 다혈질이었고, 살아생전에 명성을 누렸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루마니아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1월 11일 아침, 클림트는 자기 집에서 옷을 갈아입으려 하다가 뇌일혈 발작으로 오른쪽 반신이 불수가 되고 말았다. 그의 부친도, 그의 동생도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므로, 클림트는 늘 자신도 그같이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는 '60세까지는 살고 싶다'고 되풀이하여 말했다고 한다. 그의 증세는 잠시 동안 꽤 호전되었으나, 스페인 독감이 폐렴에 이르러 결국 2월 6일 아침 6시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리지 않았고,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평생 자신을 죽게 만들 병으로 뇌일혈을 걱정했지만 그를 죽게 만든 것은 그런 뇌출혈이 아니라 '스페인 독감'이었다.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비엔나 종합병원의 해부병리학과 지하실에서 그의 사체를 화폭에 담았다. 클림트의 저주였을까?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만다.
황금색의 황홀하고, 몽환적인 그림으로 카페의 벽 어딘가 남녀가 부대끼는 장소에 걸려 있을 법한 그림 1순위에 오르는 화가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어디 있었을까?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겠는가.
생전의 구스타프 클림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그는 동료 화가인 에밀 쉰들러의 딸 '알마 쉰들러'(훗날 구스타프 말러,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내, 오스카 코코슈카의 연인이었던 알마 말러)부터 에밀리 플뢰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인을 품었고, 그 결과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을 세상에 남겼다. 그 중 '미치 짐머만'은 클림트에게 두 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고, 마리아 우치키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두 여인 모두 첫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구스타프'라고 지었다. 믿던 그렇지 않던 간에 자신의 모델이 된 여성과는 꼭 잠자리를 했다는 풍설이 있을 만큼 그를 둘러싼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성하다. 그의 작품 중 임신한 여인을 그린 세 개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희망Hope I>의 작품에 등장하는 임신한 여성 모델이 바로 '미치 짐머만'이다. 제목은 희망이지만 마치 해골과 적의를 띤 남성들에 둘러싸인 채 창백하게 질려 있는 듯하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자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대신해 상속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클림트를 만날 당시 18살이었던 에밀리 플뢰게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생전의 클림트가 시시콜콜하게 적어 보낸 엽서들 (가령, "여기는 바르셀로나요. 이곳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고 난 탓인지, 어제는 당신 꿈을 꾸었소." 같은 것) 만이 남겨졌다. 결국 에밀리 플뢰게가 죽은 클림트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남겨진 유산을 분배해주어야만 했다.
생명의 활력과 죽음의 그림자 사이에서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비엔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구스타프 클림트,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 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고, 모친인 안나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구스타프는 아들 셋, 딸 넷 중 장남이었는데,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에른스트는 2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형을 도와 미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8세 때 양친을 따라 비엔나로 이주하여 동판 조각사가 되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탓인지 워낙 다혈질이었던 탓이었는지 평소에는 친절하고 다정했으나 종종 격노하여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클림트는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회고처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녀와 막내딸을 잃은 양친은 남은 다섯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잘 길러보려 했지만 장남인 구스타프를 짐나지움(독일계 학제에서 짐나지움은 우리식으로 하자면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의 삶이 예정된 고등공민학교인 '뷔르거'슐레(슐레는 실업계 직업교육학교)에 입학시킨다.
Gustav Klimt, Hope I, 1903, Oil on canvas, 189 x 67 cm,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 그의 작품 중 임신한 여인을 그린 세 개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희망Hope I>의 작품에 등장하는 임신한 여성 모델이 '미치 짐머만'은 클림트의 사생아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프리카풍의 스먹(Smock)을 입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 -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동생의 처제인 의상 디자이너 에일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명상과 휴식을 즐겼다.
이토록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 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1876년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전문적인 미술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와 같이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며 링 거리의 교회 창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바트 온천장의 천장화, 라이헨헤브크 국립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의 그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였다.
그는 동생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콩파니'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구스타프 클림트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극장 장식, 피우메의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을 함께 해나갔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수상자가 되는 등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1892년 그에게는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이자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크가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하고, 그 얼마 뒤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에른스트 마저 뇌일혈로 사망하고 만다. 아직 한창 젊음을 구가해야 할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늘 공존하는 까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