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자의 신학
창세기 30장까지의 텍스트에 근거하여
오늘 7번째로 창28장을 공동묵상하였다. 아침 7시-9시 온라인 모임이다.그러나 사실 예수가 없는 창세기를 새로운 실존적 신앙의 눈으로 보고 싶어 시작한 것이었는 데, 참가자들에게 나눠준 공동묵상 가이드와 달리 나의 개인 작업이 점차 생겨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9시부터 30분간 점심시간 빼고 꼬박 5시간 넘게 글을 써서 일차분(창30장까지)을 완성했다. 그것은 아웃사이더로서 본 신학적 접근이다. 나처럼 이스라엘 민족인이 아닌 한국인에게는 이 창세기 텍스트속에서 내 존재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나 만의 질문이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참가자는 일반 교인들이게 그에 따른 공동묵상 가이드를 제공하였지만 나는 20여회차 동안에 점차 이에 대한 문제에 집중하게 되어어왔고 틈틈히 자료를 모으다가 오늘 아예 의자에 눌러앉아 해야 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생각을 일차 정리하게 되었다. 더 뒤로 가면 아얘 생각에 혼란이 올 것 같아서 1부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것이기에 내 마음에 들고 내 것이기에 이 생각에 감사를 드린다. 그 내용은 성서에서 말하는 히브리 신앙의 핵심인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주흐름에 속하지 않은 인간, 즉, 타자(the Other)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의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말고 원전인 텍스트로부터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가? 비록 온전하지는 않을 지라도 성서에 그런 가능성이 있다면 이 나이에 아웃사이더로서 내 신앙에 대한 기반이 있게 되는 셈이어서 안심이나 기쁨 혹은 잠재적 가능성앞에 더 능동적으로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일차 내가 정리한 창세기 30장까지 '뒷역사'에 있던 이들과 교류하면서 -그리 깊게는 아니지만- 나에게 열려진 새로운 호흡에 감사를 드린다. 만일 이 '타자의 신학'이 나만 아니라 나와 같은 이가 있을까 생각이 들어 긴 글을 따로 올린다. 그에게 도움이 될수 있기를...
2026.3.15. 박성용
*****************************
계약 바깥의 얼굴들—창세기 30장까지가 말하는 타자의 신학(1부)
들어가며: 우리가 놓친 이야기
창세기를 읽는 전통적인 방식이 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언약의 계보를 중심축으로 삼고, 나머지는 배경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선택받은 자들의 이야기, 약속의 성취를 향해 직진하는 서사. 그러나 그 읽기 방식이 창세기의 절반을 지워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오래 외면해왔다.
창세기 1장부터 30장까지를 다시 읽어보면, 언약의 계보 바깥에 있거나 그 안에서 주변화된 인물들이 놀랍도록 자주, 놀랍도록 중요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아비멜렉, 하갈, 리브가, 에서, 라반, 레아, 헷 족속의 여인들. 이들 중 일부는 언약의 반열에 들지 못한 자들이고, 일부는 언약 안에 있으나 그 구조 안에서 소외되거나 주변화된 자들이다. 그런데 성서는 이들을 단순한 엑스트라로 다루지 않는다. 이들은 언약 공동체의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들의 고통이 기록되고, 이들의 선함이 인정되고, 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창세기 저자가 의도치 않게 남긴 흔적이 아니다. 이것은 창세기 신학의 심층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오늘 한국 기독교가 가장 절실하게 들어야 할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 가지 미리 밝혀둔다. 이 글은 창세기 1장부터 30장까지의 텍스트에 한정한다. 31장 이후—야곱과 라반의 결별, 야곱과 에서의 재회, 얍복 강가의 씨름—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훨씬 더 심층적이고 변혁적인 국면으로 전개된다. 특히 33장의 야곱과 에서의 포옹 장면은 '타자와의 화해'라는 주제를 전혀 다른 깊이로 열어준다. 그 이야기는 별도의 자리에서 더 깊이 다루어야 한다. 지금 여기서는 1-30장의 텍스트 안에 이미 놓여 있는,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읽지 못했던 타자 신학의 씨앗들을 발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브라함의 출발과 타자의 첫 등장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떠남'으로 시작된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이 '떠남'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세계—익숙한 신들, 친숙한 공동체, 안전한 정체성—로부터 벗어나 미지를 향해 몸을 던지는 실존적 결단이다. 아브라함이 향한 것은 '원복(原福)'—창조의 본래적 복,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도하신 충만한 삶—이었다.
그 출발의 언어를 히브리어로 보면 더 선명해진다. "렉 레카(לֶךְ לְךָ)"—직역하면 '너 자신을 위해 가라', 혹은 '너 자신에게로 가라'이다. 이것은 단순한 이동 명령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실존으로 향하는 내면의 여정을 동시에 함축한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은 외부 세계를 향한 출발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내적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처음부터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가득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마자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있었더라"(12:6)는 문장이 나온다. 선택받은 자의 여정이 이미 거기 살고 있던 타자의 땅으로의 진입임을 텍스트는 숨기지 않는다. '렉 레카'—너 자신을 향한 여정—은 타자와의 공존이라는 문제를 처음부터 안고 시작한다.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는 길이 타자를 통과한다는 것, 이것이 창세기가 서두에 던지는 실존적 명제다.
아비멜렉: 계약 바깥의 선한 타자
창세기 20장에서 아비멜렉은 사라를 취했으나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경고하자 즉시 반응한다. 그의 항변이 인상적이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는 내 누이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20:4-5). 아비멜렉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한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하였으므로 나도 네가 내게 범죄하지 아니한 줄 알았노라"(20:6).
여기서 핵심어는 '타밈(תָּמִים, 온전한)'이다. '타밈'은 흠 없음, 완전함, 내외가 일치하는 온전함을 뜻한다.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이 단어는 흠 없는 제물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노아를 묘사할 때도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타밈)"(6:9)라고 쓰였다. 그 '타밈'이 이제 이방 왕 아비멜렉에게 쓰인다. 언약의 사람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한 그 자리에서, 언약 바깥의 왕이 '타밈'—온전한 마음—을 가졌다고 하나님이 인정하신다.
26장에서 이삭과 아비멜렉의 만남도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이삭 역시 아버지처럼 리브가를 누이라 속인다. 아비멜렉이 다시 도덕적 우위에 선다. 그리고 이삭이 블레셋 땅에서 우물을 파며 쫓겨 다닐 때, 아비멜렉이 먼저 찾아와 평화 조약을 제안한다. 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26:28). 언약 바깥의 왕이 이삭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본다.
이 장면이 열어주는 철학적 지평이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le visage de l'autre)이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정확히 그 역할을 했다. 그는 언약 공동체의 얼굴을 향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타자의 '타밈'이 내부자의 '미르마(속임수)'를 폭로한다. 타자 없이 자기 인식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아비멜렉 이야기의 신학적 핵심이다.
하갈: 배제된 자의 목소리
하갈은 이집트 여종이다. 사라의 소유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계획—자녀를 얻기 위한 대리모 계획—을 위해 동원된다. 그녀의 동의는 묻지 않는다. 그녀의 감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데 하갈이 임신하자 사라와의 갈등이 폭발하고,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자 하갈은 도망친다. 광야에서 홀로 샘 곁에 앉은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다(16:7). 이 장면의 충격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자가 언약의 당사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도망친 이집트 여종에게 나타난다. 언약 공동체로부터 배제되고, 학대받고, 쫓겨난 자에게.
이 장면의 핵심어는 '아나(עָנָה, 학대하다, 짓누르다)'와 '라아(רָאָה, 보다)'의 충돌이다. 사라는 하갈을 '아나'—짓눌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짓눌린 자를 '라아'—보셨다. '아나'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당한 억압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바로 그 단어다(출 1:11). 창세기는 놀라운 복선을 깔고 있다. 훗날 이집트에서 억압받을 이스라엘이 지금 하갈을 억압하고 있다. 억압의 구조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단순히 나누지 않는다. 그것은 순환한다. '아나'의 사슬은 언약 공동체 안에서도 작동한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말씀하신다. 그녀의 아들에 대한 약속을 주신다. 그리고 하갈은 그 신을 이름 짓는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엘 로이, אֵל רֳאִי)"(16:13). 창세기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이름을 붙이는 유일한 사례가 바로 이 하갈이다. 그것도 언약 공동체 밖의 이방 여종이. '엘 로이'—나를 보시는 하나님. 이 이름은 신학사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창세기 신학의 가장 급진적인 선언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새롭게 계시받은 자가 모세(출 3:14)만이 아니다. 광야의 쫓겨난 여종이 먼저 하나님의 새 이름을 불렀다.
21장에서 하갈은 다시 쫓겨난다.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광야에서 물이 떨어지고 아이가 죽어가자,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 두고 멀찍이 앉아 운다. "내가 아이의 죽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21:16). 이 어머니의 절규가 텍스트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신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샤마, שָׁמַע)"(21:17). '샤마'—들으셨다. 레아의 고통을 들으셨던 그 동사, 라헬의 절규를 들으셨던 그 동사가 여기서 먼저, 광야의 이방 아이에게 쓰인다.
하갈의 이야기가 열어주는 신학적 지평은 위르겐 몰트만의 '십자가의 하나님' 개념과 공명한다. 몰트만은 하나님이 고통받는 자와 함께 고통받으신다고 했다. 하갈의 '엘 로이'는 그 신학의 성서적 뿌리다. 하나님은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서 발견된다. 배제된 자의 광야가 하나님의 임재 장소가 된다. 이것은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경험적 사실로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리브가: 계시를 사건으로 바꾼 여인
리브가는 언약의 계보 안에 있다. 이삭의 아내, 야곱의 어머니. 그러나 리브가를 단순히 언약 계보의 조연으로 읽으면 텍스트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을 놓친다. 리브가는 창세기에서 가장 능동적으로 신앙을 '사건'으로 만든 인물이다.
리브가 이야기의 출발점은 임신 중의 계시다. 두 아들이 태중에서 싸우자 리브가는 직접 여호와께 묻는다. "어찌하여 이러하니이까?"(25:22).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예사롭지 않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이런 방식으로 직접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리브가는 자신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신학적 질문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히브리어 원문은 '라브 야아보드 차이르(רַב יַעֲבֹד צָעִיר)'—'더 큰 자가 더 작은 자를 섬기리라'이다.
여기서 핵심어는 '다아트(דַּעַת, 앎, 인식)'와 '쿰(קוּם, 일어나다, 결단하다)'의 연결이다. 리브가는 이 계시를 단순히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다아트'—깊은 앎, 실존적 인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수십 년을 그 앎을 안고 살았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려 할 때, 리브가는 즉각적으로 '쿰'—일어남, 결단—의 자리로 나아간다.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하라"(27:8). 그녀가 야곱에게 명령할 때 쓴 동사가 바로 '쿰(קוּם)'이다. "일어나 하란으로 도망하라"(27:43). '쿰'은 28장에서 다시 등장한다. 야곱의 여정을 촉발한 그 '쿰'은 리브가의 결단에서 시작되었다.
리브가가 한 것은 계시의 단순한 전달이 아니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실존 안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만들어낸 신학자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관습은 장자에게 축복이 흘러가도록 요청했다. 그 흐름을 그대로 두었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리브가의 가슴속에서 죽은 언어로 남았을 것이다. 리브가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계시는 수동적으로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살아내는 것—이것이 리브가 신앙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리브가를 너무 빨리 영웅화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방식은 '미르마(속임수)'를 포함했다. 그녀는 야곱을 이삭 앞에 세워 거짓말을 하게 했다. 그 방식의 윤리적 문제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창세기는 이 불편한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리브가의 결단이 언약의 흐름을 살려냈다는 사실 또한 그대로 기록한다. 신앙의 결단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깔끔한 형태로 오는 것이 아님을—창세기는 그것을 직시한다.
더 깊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아브라함은 '렉 레카'의 부름을 받아 떠났다. 이삭은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파며 언약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삭의 신앙은 어느 순간 '마트암(맛있는 것, 감각적 욕구)'—에서가 가져오는 별미—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 했다. 이삭의 신앙이 살아있게 된 것은 리브가가 그 신앙을 '사건'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리브가 없이 이삭은 언약의 흐름을 막는 자가 될 뻔했다. 이삭이 믿음의 조상 반열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리브가의 신앙적 능동성이 그 자리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행위(action)'를 인간 실존의 핵심으로 보았다. 행위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능력, 기존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방향을 여는 자유의 표현이다. 리브가의 '쿰'—그 결단과 행위—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그녀는 언약의 흐름이 관성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굳어지려는 순간, 그것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방향을 열었다. 계시를 단순히 이어받는 자가 아니라 계시를 살아있는 사건으로 만드는 자—그것이 리브가가 보여준 신앙의 형태였다. 그리고 그 형태는 언약 공동체의 남성 중심 서사 안에서 여성이 신학적 주체로 행동한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다.
에서와 헷 족속 여인들: 배제된 자들의 인간성
에서는 창세기 서사에서 '실패한 자'로 읽혀왔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어리석은 자, 언약의 복을 빼앗긴 자. 그러나 에서를 그렇게만 읽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폭력이다.
에서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단어는 '체아카(צְעָקָה, 절규)'다. 27장에서 야곱이 축복을 훔쳐 나간 후 에서가 돌아와 축복을 요청할 때, 이삭이 진실을 말하자 에서는 "심히 크게 울부짖었다(체아카 그돌라 우마라, צְעָקָה גְּדֹלָה וּמָרָה)"—크고 쓰라린 절규를 터뜨린다. '체아카'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압제 아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쓰이는 바로 그 단어다(출 3:7). 에서의 절규와 이스라엘의 절규가 같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언약의 백성이 광야에서 터뜨릴 그 절규를, 언약 바깥의 에서가 먼저 터뜨린다. 텍스트는 에서의 고통을 이스라엘의 고통과 같은 무게로 기록하고 있다.
에서가 헷 족속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한 것(26:34)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이 되었다. 그런데 28장 6-9절에서 에서는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고 밧단아람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가나안 여인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한다. 이 장면 안에 담긴 에서의 인간적 몸부림을 보아야 한다. 에서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그 욕구가 그로 하여금 이스마엘의 딸—역시 언약 바깥의 혈통—을 아내로 맞이하게 한다. 에서는 끝까지 인정받으려는 인간이었다.
이 에서의 몸부림이 가리키는 것이 있다. 폴 리쾨르는 '인정투쟁(la lutte pour la reconnaissance)'을 인간 실존의 핵심으로 보았다. 인간은 타자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인정이 거부될 때 인간성은 훼손된다. 에서는 그 인정을 끝내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포기하지 않음 안에 인간의 존엄이 있다. 언약 바깥의 에서가 언약 안의 야곱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인간적이었다는 것—창세기는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헷 족속의 여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텍스트는 그들을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거리로 기록하지만, 그 여인들 자체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에서를 선택했다. 언약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에서를 선택한 그 여인들의 이야기는 창세기가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 자체가 하나의 신학적 질문이다. 계약 바깥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의 사랑과 고통과 선택은 어디에 기록되는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그것이 이미 타자 신학의 첫걸음이다.
라반: 계약의 아웃사이더가 가르친 것
라반은 창세기의 가장 복잡한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야곱의 외삼촌이자 착취자다. 야곱을 20년간 이용했다. 계약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31:41). 그는 탐욕스럽고 교활하다. 그러나 라반은 동시에 야곱의 훈련소였다.
라반 이야기의 핵심어는 '나카르(נָכַר, 알아보다, 확인하다)'와 '미르마(מִרְמָה, 속임수)'의 충돌이다. 야곱이 라반에게 처음 도착했을 때 라반은 야곱의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너는 내 골육이로다"(29:14)라고 말한다. 그러나 라반은 그 '골육'을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다. '나카르'—알아보는 행위—가 진정한 인정이 아니라 계산으로 작동할 때 관계는 착취가 된다. 라반은 야곱을 알아보았으나 그를 이용했다.
그런데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미르마(속임수)'의 결과를 온몸으로 배웠다. 27장에서 야곱이 아버지에게 행한 것을 라반이 야곱에게 행했을 때, 야곱은 비로소 속임수의 실존적 무게를 알았다. 신혼 첫날 아침 레아의 얼굴을 보았을 때 야곱이 느낀 것—그것은 이사악이 속임을 깨달았을 때 '하라드(심히 떨었다)'로 기록된 그 전율의 야곱 버전이었을 것이다. 라반은 야곱의 도덕적 스승이 아니었다. 그러나 라반과의 20년이 없었다면 야곱은 앞으로 나올 얍복 강가의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계약 바깥의 교활한 타자가 언약의 사람을 빚어내는 도구가 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라반의 마지막 등장이다. 야곱이 몰래 도망치자 라반이 추격하는 장면(31장)에서, 하나님이 라반에게 꿈에 나타나 "너는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31:24). 언약 바깥의 라반에게도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신다. 28장에서 야곱에게 술람의 꿈을 주셨던 하나님이 이제 라반에게도 꿈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소통 방식은 언약의 경계선에 막히지 않는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선언이다. 계시는 독점되지 않는다.
헤겔의 변증법이 여기서 울린다. 야곱(정)과 라반(반)의 20년 충돌이 없었다면, 그 합(合)으로서의 이스라엘—야곱의 새 이름—은 불가능했다. 타자와의 갈등과 마찰은 자아의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가 더 깊어지는 과정이다. 라반이라는 타자 없이 야곱은 야곱으로 머물렀을 것이다.
레아: 계약 안의 배제된 자
레아는 언약 공동체 안에 있었다. 그러나 레아는 그 안에서 가장 소외된 자였다. 야곱이 원한 것은 라헬이었다. 레아는 속임수로 끼어든 자, 사랑받지 못하는 자, '스누아(שְׂנוּאָה)'—혐오에 가까운 냉대를 받는 자였다. 레아는 언약 공동체의 공식 일원이지만, 그 안에서 타자의 자리에 있었다.
레아 이야기의 신학적 심장은 '라아(רָאָה, 보다)'와 '샤마(שָׁמַע, 듣다)'의 반복이다. 하나님이 레아의 태를 먼저 여신 것(29:31)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다. 그것은 신학적 선언이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라아)"—신이 개입하는 지점이 공동체의 중심이 아니라 공동체의 변두리임을 이 '라아'가 말한다. 레아가 아들의 이름을 통해 '라아'와 '샤마'를 고백할 때, 그것은 단순한 감사가 아니다. "공동체가 나를 보지 않을 때 하나님은 나를 보셨다"—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우선적 선택(preferential option)'의 성서적 원형이다. 하나님은 중심보다 주변을, 강자보다 약자를, 사랑받는 자보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를 향해 먼저 움직이신다. 이것이 레아 이야기가 담고 있는 신학의 방향이다.
그리고 그 레아로부터 유다가 태어났다. 유다로부터 다윗이 나왔다. 다윗의 계보로부터 메시아의 서사가 흘러내려 온다. 사랑받지 못한 레아의 몸에서 구원 서사의 중심 줄기가 나온다. 이것이 창세기의 가장 깊은 역설이다. 공동체가 배제한 자를 하나님이 선택하신다. 배제의 구조와 선택의 구조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시몬 베이유는 "고통받는 자의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했다. 레아를 향한 하나님의 '라아'—그 보심—이 바로 그것이다. 주의를 기울임. 공동체가 외면한 얼굴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는 것. 그것이 레아 이야기가 오늘 신앙 공동체에게 요청하는 자세다.
타자 신학의 윤곽: 창세기 1-30장이 말하는 것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함께 놓고 보면, 창세기 1장부터 30장까지에는 하나의 일관된 신학적 패턴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활동 반경은 언약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선다. 아비멜렉에게 나타나고, 하갈에게 나타나고, 라반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은 언약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분은 경계를 가로질러 움직이신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이름 '엘 올람(אֵל עוֹלָם, 영원하신 하나님, 26:33)'—이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도 아비멜렉과의 우호 조약 직후다. 언약 바깥의 타자와의 평화 체결 장면에서 하나님의 새 이름이 불린다.
둘째, 타자는 언약 공동체의 도덕적 거울이다. 아비멜렉의 '타밈'은 아브라함의 '미르마'를 비추었다. 에서의 '체아카'는 야곱의 속임수가 낳은 고통의 크기를 증언했다. 라반의 속임수는 야곱이 자신의 속임수를 몸으로 배우는 거울이 되었다. 타자 없이 자기 인식은 불가능하다. 레비나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타자의 얼굴이 나의 윤리를 소환한다.
셋째, 배제된 자의 고통은 하나님의 최우선 관심사다. '아나(짓누르다)', '체아카(절규)', '스누아(혐오적 냉대)'—이 단어들이 타자들의 경험을 묘사할 때 쓰인다. 그리고 그 단어들이 울리는 자리마다 '라아'와 '샤마'의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보고 들으시는 하나님. 선택의 신학이 배제의 신학이 아님을 이것이 증명한다. 선택은 나머지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머지를 향해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한 것이다.
넷째, 타자로부터 배움이 가능하고 필요하다. 아비멜렉의 '온전한 마음'은 아브라함이 배워야 할 것이었다. 에서의 넉넉함은 야곱이 갖지 못한 것이었다. 하갈의 '엘 로이'는 언약 공동체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얼굴이었다. 리브가의 '쿰'은 계시를 수동적으로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결단으로 살아내는 신앙의 형태를 보여주었다. 언약 공동체가 타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전제—창세기는 그 전제를 반복적으로 무너뜨린다.
다섯째, 신앙은 전승이 아니라 사건이다. 리브가가 보여준 것이 이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에게 흘러온 언약의 복은 단순히 이어받는 것으로는 살아있지 않는다. 그것은 매 세대가 자신의 실존 안에서 '쿰'—일어남과 결단—을 통해 새롭게 사건으로 만들 때 살아있게 된다. 이것은 전통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전통을 죽은 유산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로 만드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오늘의 신앙인에게: 배타성을 넘어
한국 기독교는 오랫동안 날카로운 경계선을 그어왔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선택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진리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 그 경계선이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계선이 타자를 향한 감수성을 마비시키고, 배제된 자의 고통에 눈을 감게 하고, 타자로부터 배우는 가능성을 차단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창세기는 처음부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출발점—원복을 향한 '렉 레카'—은 자신이 복의 독점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3)"—'베레카(בְּרָכָה, 복)'는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었다. 선택은 독점이 아니라 통로였다.
그 흐름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창세기 1-30장은 보여준다. 아비멜렉 같은 '선한 타자'를 통해 언약 공동체는 자신의 실패를 직면했다. 하갈 같은 '배제된 타자'를 통해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는지가 드러났다. 리브가 같은 '결단하는 타자'를 통해 계시가 죽은 전통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건으로 만들어졌다. 라반 같은 '교활한 타자'를 통해 야곱은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했다. 레아 같은 '내부의 타자'를 통해 구원 서사의 예상치 못한 통로가 열렸다.
오늘의 신앙인이 신념적 타자—다른 세계관을 가진 자—앞에 서거나, 종교적 타자—다른 믿음의 길을 걷는 자—앞에 설 때, 창세기의 이 패턴은 하나의 성서적 근거가 된다. 타자는 나의 적이 아니다. 타자는 나의 도덕적 거울일 수 있고, 나의 교사일 수 있고, 하나님이 먼저 찾아가신 자일 수 있고, 하나님의 새 이름을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방식으로 부르고 있는 자일 수 있다.
이것은 경계선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정체성을 포기하자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경계선 너머를 향한 감수성을 되찾자는 말이다. 아비멜렉의 '타밈'을 알아보는 눈, 하갈의 '체아카'를 듣는 귀, 리브가의 '쿰'을 배우는 결단의 자세, 에서의 절규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고통의 크기를 아는 정직함, 레아의 소외 속에서 하나님이 어디를 향해 먼저 움직이시는지를 보는 것—이것이 창세기가 언약 공동체에게, 그리고 오늘 이 땅의 모든 신앙인에게 건네는 실존적 요청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존적 경험은 삶의 흐름에서 채워가고 새로 인식되어져 가는 과정을 여정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부터 30장까지에 이미 새겨진 이야기다. 우리가 읽지 않았을 뿐이다. 아니, 읽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창세기 31장 이후—특히 야곱과 에서가 마주하는 33장의 재회 장면—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전혀 다른 깊이로 전개된다. 20년의 원한과 두려움을 안고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두 형제, 에서가 야곱을 향해 달려와 껴안는 그 장면은 단순한 화해를 넘어 타자와의 실존적 통합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자리에서 더 깊이 다루어야 한다. 1-30장의 씨앗들이 어떻게 꽃피는지를 보려면, 그 이후 서사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나가며: 엘 로이의 하나님
하갈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엘 로이—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불렀을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창세기 신학의 핵심을 고백했다. 하나님은 살피시는 분이다. 그 살핌은 언약의 경계선을 따라 작동하지 않는다. 배제된 자, 쫓겨난 자, 보이지 않는 자를 향해 그 살핌은 움직인다.
이 글을 쓰는 나는 한국인 기독교 신앙인이다. 이스라엘의 성서 전통—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언약의 계보—은 내 혈통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 원주류 바깥에 있다. 이방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비멜렉에 더 가깝고, 하갈에 더 가깝고, 에서에 더 가깝다. 언약의 정통 계보가 아니라, 그 계보의 주변부에서 신앙을 살아온 자의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창세기 읽기는 나에게 단순한 학문적 작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성서 전통이 원복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그 계보의 견고함과 아름다움—에 나는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 흐름이 없었다면 이 텍스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흐름의 바깥에 있는 자들의 이야기에 자꾸 눈이 간다. 쫓겨난 하갈의 광야, 절규하는 에서의 눈물,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의 밤—그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말한다. 배제된 자가 열외가 되지 않는다고. 하갈은 쫓겨났지만 '엘 로이'를 만났다. 에서는 축복을 빼앗겼지만 그의 '체아카'는 하나님의 텍스트 안에 영구히 기록되었다. 레아는 사랑받지 못했지만 '라아'와 '샤마'의 하나님이 그녀를 먼저 보셨다. 그리고 리브가는—언약의 내부에 있었지만 그 구조가 잘못된 방향으로 굳어지려 할 때—'쿰'으로 일어서서 계시를 살아있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계약 바깥에 있다는 것이 하나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약 안에 있다는 것이 신앙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창세기 1-30장이 이방인 신앙인인 나에게 열어주는 문이다.
닫힌 줄 알았던 문이 열려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열려 있었는데 우리가 그 문을 보지 못했다. 언약의 정통 계보가 아닌 자리에서 신앙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종교적 타자, 신념적 타자, 문화적 이방인—에게 창세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의 자리가 배제의 자리처럼 보여도, 엘 로이는 이미 거기 있다고. 광야가 하나님의 부재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공간이었음을 하갈이 먼저 발견했듯이.
'렉 레카'—너 자신을 향해 가라—는 결국 이 방향을 가리킨다.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는 길은 타자를 통과한다. 아비멜렉의 얼굴에서 자신의 거짓을 보고, 하갈의 눈물에서 하나님의 새 이름을 듣고, 리브가의 '쿰' 앞에서 계시를 수동적으로 이어받는 것과 능동적으로 살아내는 것의 차이를 배우고, 에서의 절규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고통의 크기를 알고, 라반의 교활함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배우고, 레아의 소외 속에서 하나님이 어디를 향해 먼저 움직이시는지를 보는 것—이것이 창세기 1-30장이 언약 공동체에게, 그리고 오늘 이 땅의 모든 신앙인에게 건네는 실존적 요청이다.
배제된 자가 열외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위로의 수사가 아니다. 창세기 텍스트가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때로는 불편할 만큼 솔직하게 증언하는 사실이다. 엘 로이는 광야의 하갈을 살피셨다. 그 같은 하나님이 오늘 우리 각자의 광야를—우리가 서 있는 이 배제의 자리, 이 이방인의 자리를—살피고 계신다. 그 살핌 안에서 신앙을 산다는 것, 그리고 그 살핌을 받은 자로서 우리 주변의 또 다른 배제된 타자들을 향해 같은 시선을 돌린다는 것—그것이 창세기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만이 아니라, 그 바깥의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베레카(복)의 통로'가 되는 삶이다.

첫댓글 이번 창세기를 공부하며 저에게 다가온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저는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한 명의 크리스천입니다. 다만 신앙은 제 삶을 움직이는 중심이고, 성경은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로 — 하나님께 붙어 있음으로 보다 자유로운 구원의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성경에 대한 감흥이 없어졌었습니다. 대학 시절 열심히 파고든 신학 공부가 사회에 나온 후 역동적인 세상 속에서는 더 이상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창세기에서는 뭔가 완전체가 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계보만이 아닌, 세상 전체를 볼 수 있는 관점을 열어주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공부하던 중 어느 순간, 성경이 역사가 아닌 세상의 일을 설명하는 완벽한 메타포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28장 5-9절의 에서에 대한 언급은 그야말로 전율이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우리 일상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지난주 27장의 막장 드라마 속 네 주인공의 마음들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계보를 잇는 축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지만 악하지는 않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이어서)
그리고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된 것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그다지 별볼일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엄청난 축복을 받았지만, 그들이 누린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매우 힘들게 자식을 얻었고, 그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위기를, 두 아들이 피터지게 싸우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겨우 사라를 묻을 땅 한 뙈기를 얻은 아브라함이나, 별미(מַטְעַמִּים)에 눈이 어두워 말년에 엄청난 실수를 한 이삭이나 — 세상의 권력이나 부귀와는 꽤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어떤 복을 바라는 것이었을까?' 깊이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제 결론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하지 못하는 평화 속에서 겸손하게 하나님과 행하는 삶. 야곱을 보니, 그 경지에 가려면 지난한 세월 고난을 통해 내 안의 때를 벗기는 과정이 필요한 듯합니다. 저도 그 과정을 거쳐 왔고, 여전히 그 과정 중에 있습니다. 여전히 새로워질 것이 남아 있고, 여전히 과거의 때로 괴롭기도 하면서도 — 그러면서도 또 조금씩 진화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하는.
(이어서)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이 입체적인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찾아온 내면의 평화입니다. 세뇌되고 입력된 하나님의 상이나 보수 신학을 뛰어넘어 — 내가 경험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성경의 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 인한 평화. 내 생각의 그릇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을 담을 수 없다는 자각 — 그것이 오히려 제게 엄청난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납득해야만 믿을 수 있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것이랄까요. 이제야 비로소 창조자 앞에 피조물로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아비멜렉, 하갈, 리브가, 에서, 라반의 이야기까지 통합해서 바라보았을 때 — 비로소 창세기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은 완전체로 다가옵니다. 주연과 조연 모두를 동등하게 이해했을 때,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성경은 아주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이 주연과 조연들을 바라보다 보니, 나 역시 이들 중 어느 지점의 혼합체로 인식됩니다. 드디어 성경의 메시지를 세상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작은 기쁨이 샘솟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언약 안의 사람과 바깥의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우월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이제는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언약 바깥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이제야 내 인식의 차원을 훨씬 너머에 계신 — 온전히 알 수 없는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 박미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