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8월8일 중정 요원들이 김대중을 납치했던 일본 도쿄의 그랜드팔레스호텔(왼쪽). 납치 뒤 가까스로 풀려난 뒤 자택으로 돌아와 울먹이며 기자회견을 하는 김대중. |
김대중 ‘납치’ 사건(상)
유신 이후 모두가 침묵할 때 일본에서 홀로 싸우던 김대중중정부장 이후락 납치 지시에 일본 파견관들이 움직였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 훗날 박정희가 말했다지만
“나는 뭐 하고 싶은 줄 아나?” 토로하던 이후락이었다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기 전부터 김대중을 몹시 싫어했다. 1967년 총선에서는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온갖 장밋빛 공략을 내걸고 급기야는 자신이 군중집회의 연사로 나서기까지 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예상 밖의 고전 끝에 김대중에게 간신히 승리하고는 다시는 이런 선거를 치르지 않도록 유신 친위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그때 김대중은 선거 기간 중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와 있었다.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가 끝난 이후 김대중이 일본으로 출국하는 1972년 10월까지 1년 반 동안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김대중 동향내사 보고가 무려 1100여건이니, 대략 하루 두번꼴로 동향 보고를 할 만큼 김대중은 밀착감시를 받아왔다.
71년 대선 뒤부터 김대중을 밀착감시하다
김대중은 야당 의원들마저 잡혀가 고문을 당하는 현실에서 국내에서는 활동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국외에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의 결성을 위해 노력했다.
배동호, 김재화, 정재준, 곽동의 등 민단에서 이탈한 재일동포들과 함께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을 추진해온 김대중은 미국으로 건너가 1973년 7월6일 워싱턴에서 한민통 발기인대회를 마친 뒤 7월10일 일본으로 돌아와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김대중은 대한민국 절대지지와 선민주 후통일 원칙을 고수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김대중은 민단 이탈파 재일동포들에게 조총련과 선을 그어야 한다며 8월15일로 예정된 조총련과의 경축행사도 중지하도록 요구했다.
국내에 돌아가 활동해야 할 김대중은 혹시라도 흙탕물이 튈까봐 이렇게 조심했지만, 민단 이탈파를 베트콩이라 부르던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었다. 주일공사 김재권(본명 김기완)이 책임자로 있던 중정의 일본조직은 김대중이 주한미군 철수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호소했다거나 평양 방문을 추진한다는 등 잘못된 첩보를 본부로 계속 타전했다.
유신 이후 국내의 야당, 학생운동, 재야, 언론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해외에서 김대중만 홀로이 반유신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만 떠들지 못하게 만들면 반유신운동은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풀리지 않는 쟁점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김대중의 납치가 박정희의 지시를 이후락이 실행한 것인지, 아니면 윤필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이 박정희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단독으로 저지른 것인지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건의 원래 계획이 김대중 살해인지 단순 납치인지 여부이다.
필자가 말석을 차지했던 국정원과거사위원회에서도 이 문제를 조사했지만 박정희가 김대중의 납치나 살해를 지시했다는 문건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런 문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지시문건이 없어도 우리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일이 히틀러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조폭의 세계에서도 살인의 교사는 묵시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해치우고 싶은 미운 놈이 있을 때 형님이 아우들에게 저놈 죽여라 하고 꼭 집어 얘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저놈만 보면 소화가 안돼” “나는 저놈만 보면 밥알이 곤두서” 등등 얘기를 하면 밑에서 알아서 해줘야 하는 것이다. 사인을 보내도 반응이 없으면 “귀신 뭐하나, 저런 거 안 잡아가고” 하고 강도를 높이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밑의 사람들을 “밥값도 못하는 놈들”이라고 구박한다.
아우들이 일을 저질러 경찰이나 검찰이 형님을 교사범으로 몰면 펄쩍 뛰며 “나는 그저 소화가 안된다고 했을 뿐”이라며 소화가 안된다면 소화제를 사다 줘야지 왜 애먼 사람을 칼로 담그냐고 짜증을 내면 된다. 박정희 주변 인사들이 입을 모아 김대중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에 박정희가 “이후락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며 짜증을 냈다며 “각하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라고 박정희를 옹호하는 모습은 조폭업계의 형님동생 사이에서 흔히 보게 되는 광경과 매우 유사하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차장보 이철희(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의 바로 그 이철희!)에게 김대중에 대한 특단의 조치(최소 납치)를 지시했을 때, 이철희는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해외공작이 어려워졌다며 펄쩍 뛰었다.
이후락은 열흘 뒤 이철희를 다시 불러 “김대중을 데려와야겠다. 데려오기만 하면 그 후의 책임은 내가 지겠다. 나는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며 강력히 지시하여 이철희는 해외공작국장 하태준과 일본 현지의 중정 책임자인 주일공사 김재권 등을 불러 공작 계획을 수립했다.
이철희의 증언에 따르면 김재권 역시 반발했으나 “내 선에서 처리할 사안이 아니니 반대의견을 부장께 직접 말하라”고 했고, 김대중을 직접 납치한 윤진원도 김재권이 “박 대통령의 결재사인을 확인하기 전에는 공작을 추진할 수 없다”며 버텼다고 증언했다.
처음에 극력 반대하던 이철희나 김재권이 결국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계획 수립과 현지 공작에서 각각 총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이들도 결국 김대중 납치 계획이 이후락 선을 넘어 박정희 선에서 나왔다는 것을 어떤 경로로든지 확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계획은 ‘야쿠자를 이용한 제거’
김대중이 7월10일 일본으로 돌아오자 해외공작국은 주일파견관에게 김대중의 동향을 집중 감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중정이 김대중에 대한 공작 계획을 구체적으로 준비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김대중에 대한 공작은 일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공작 계획의 수립은 본부가 아닌 일본 파견관들이 담당했다. 주일공사 김재권은 주일대사관 일등서기관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던 김동운에게 공작 계획의 수립을 지시했다.
김동운이 본부에 보낸 전문에 따르면 그는 <KT공작계획안>
김대중 납치사건이 김동운이 작성한
윤진원에 따르면 이 계획의 제1안은 야쿠자를 이용하여 김대중을 납치한 뒤 파우치로 데려오는 것이고, 제2안은 야쿠자를 이용하여 김대중을 제거(암살)하는 것이었다. 김동운은 야쿠자를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단순납치 계획을 세운 것으로 살해하는 방안은 검토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윤진원은 아무리 외교행낭이라도 사람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야쿠자를 이용하는 것은 살해든 납치든 정부가 두고두고 야쿠자에게 약점을 잡히게 되어 보안상 불가능하다며 김동운의 계획에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본부에서는 김동운이 제안한 야쿠자 이용 방안 대신, 주일파견관을 동원하여 공작을 실행하는 것으로 하고, 현장의 실행책임자로 윤진원을 추가 투입했다.
윤진원과 김동운이 일본에 온 7월21일부터 중앙정보부는 일본파견관 전원을 동원해 주요 호텔에 잠복하여 김대중의 동향을 24시간 감시했다. 그러나 김대중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대중과 그의 측근들은 김대중의 신변 안전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고, 그의 동선은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주일파견관들은 여러 정보원을 협조자로 활용하면서 김대중을 유인하여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7월31일 밤에는 김대중이 한 식당에 출현했다는 제보에 윤진원과 주일파견관 6명이 긴급 출동했지만, 이미 김대중은 식당을 떠난 뒤였다. 본부에서는 차장보 이철희가 주일공사 김재권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그 물건(김대중) 빨리 해 보내라”고 계속 독촉했다.
중앙정보부는 점차 초조해졌다. 김대중은 8월13일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식을 치르고 곧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할 예정이었다. 김대중이 미국으로 건너간다면 김대중을 처리할 기회는 물건너가는 셈이 된다.
300엔짜리 목장갑만 끼었어도…
김대중 납치 공작의 책임자와 실무자들. 맨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중정 해외담당 차장보 이철희, 해외공작국장 하태준, 일본 현지 중정 책임자였던 주일공사 김재권(본명 김기완), 주일대사관 일등서기관 신분으로 위장해 활동했던 김동운. |
김재권은 8월8일 김대중이 일본을 방문중인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양일동의 숙소 그랜드팔레스호텔 2211호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이틀 전인 8월6일 입수하여, 윤진원 등 행동대가 김대중을 납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재권은 1958년 공군 정훈감 시절 민항기인 KNA기에 탑승했다가 비행기가 간첩에게 납북되는 바람에 평양으로 끌려갔다가 2주일 만에 풀려난 일이 있다. 납치되었던 자가 15년 뒤에 납치범이 된 것이다.
김대중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직접 납치한 사람들은 이미 여러 자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해외공작단장 윤진원, 주일대사관 참사관 윤영로, 일등서기관 홍성채·김동운, 이등서기관 유영복·유충국 등이고, 일등서기관 한춘은 현지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이들 ‘행동대원’은 젊은 말단직원들이 아니었다. 당시 직급으로 윤영로와 한춘은 이사관인 2급 갑, 홍성채·김동운·유영복은 부이사관인 2급 을, 유충국만 서기관인 3급 갑으로 모두 상당히 고위직에 이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정보요원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어설퍼, 납치 현장에 수많은 유류품과 육안으로 봐도 뚜렷이 보이는 지문을 남겨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KT 공작계획>의 작성자 김동운이 남긴 이 어처구니없는 지문을 두고 일각에서는 김대중 납치에 반대하는 정보부원이 일부러 지문을 남긴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했고, 일본 기자들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300엔짜리 사건이라고 비아냥거렸다. 300엔짜리 목장갑만 끼었어도 한국 정부가 그렇게 곤욕을 치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이들은 또 현장에 권총 탄창, 대형 륙색, 마취제가 든 영양제 병 등 여러 점의 유류품을 남겼는데, 그중에는 이북 담배가 포함되어 있어, 정보부가 김대중 납치를 이북의 소행으로 덮어씌우려 했다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정보부원들은 원래 양일동이 묵는 2211호의 옆방인 2210호실을 예약했는데, 마침 앞방인 2215호실의 문이 열려 있어 두 방에 나눠서 요원들이 대기했다. 그중 2215호에 우연히 이북 담배가 있었다는 것이고, 다량의 유류품을 남기게 된 것은, 복도에서 김대중을 배웅 나온 통일당 김경인 의원과 마주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2210호실에 있던 납치대원들이 급하게 김대중을 끌고 내려가면서 2215호실에 있던 감시조가 뒤처리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감시조는 2210호실 상황을 보지 않고 그냥 빠져나와 버렸다. 너무나 어설펐지만 어쨌든 납치는 성공했고, 중앙정보부원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도쿄를 빠져나와 무사히 공작선 용금호가 대기중인 오사카에 도착하여 김대중을 국내로 실어 보냈다.
그러면 김대중 ‘납치’사건은 성공한 공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