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10 - 단노우라 해전에서 죽은 어린 일왕(천황) 을기리는 아카마신궁에!
시모노세키역 광장에서 죠후(초후) 長府(장부) 가는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서 오른쪽으로
해변을 끼고 10분을 달리면 아카마진구 赤間神宮 다음인 단노우라 정류장 에 도착하는데...
우리는 8월 12일 죠후 까지 가서 신사와 절에 옛 무사 저택을 구경하고는 돌아오다가 내립니다.
단노우라 정류장 에 내려서 바다로 내려가니 혼슈 남단과 규슈 북단 사이 간몬해협 関門海峡
에는 간몬대교 関門大橋 (관문교) 가 높다랗게 걸려 있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 입니다.
단노우라 정류장 에서 골목길을 걸어 해안으로 내려가면 먼저 나타나는 것이 해변가 에
조그만 사당 인 데 어찌나 작은지..... 이걸 사당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하노이 에 갔을 때 호치민 박물관 앞에 일주사 ( Chua Mot Cot 못꽃 ) 라는 "기둥
하나에 세운 절" 을 본 기억이 떠오르는데, 오로지 기둥 하나 에 세운 "절" 을
보고 너무나 작아 이게 정말 절이 맞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하노이 일주사 ( Chua Mot Cot 못꽃 ) 절은 왕의 꿈 에 관음보살이 아기를 품고
나타난데서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무릎을 꿇고 지극 정성으로 치성 을
드리는 베트남인들을 보면서 우리네 절 이랑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베트남 은 중국에서 한자와 중국 문화 를 받아들였으니... 민간은 불교 신앙 이고 나라에서는 유학
을 장려하니 공자 사당을 짓고 유학자 선비들은 사서삼경을 익혀 과거시험 을 통해 관리
로 진출하고 나라가 망할때 친불파 사대부들이 나라를 팔고 의병 이 일어난 것도 조선 과 같습니다.
사당 이 있는 단노우라 해안 은 1185년 일본 역사상으로 가장 유명한 "겐페이(源平) 해전"
이 벌어진 바로 그 단노우라 壇之浦 인 것이니 3대 해전 중에서도 단연 중요합니다!
일본은 해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 중에서도 일본 역사를 바꾼 유일한 해전 이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1555년 모리 모토나리 가 스에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섬 으로 유인해 벌인 전투이고
또 1576년 오다 노부나가가 오사카 이시야마 혼간지 를 공격할때 구키 요시타카의 토바수군 이
오다 편에 참전해서 모리편인 무라카미 타케요시의 수군 과 싸운 키즈가와구치 전투 가 있습니다.
12세기에 두 무사들 의 세력 중에 미나모토(源, 겐지) 씨를 쳐부수고 교토의 조정 을 장악한
다이라(平) 씨 는 권력이 최고조에 달해 일왕(천황) 마저 유폐 하는등 횡포를 부립니다!
일본에서 한자를 읽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으니 큰 "大" 자를 한국 처럼 漢(한)나라
시대의 중국 발음 그대로인 "음독"으로 "다이" 로 읽으니 "大名" 을 "다이묘"
로 읽는 것이고... 두번째는 한자를 일본 고유의 뜻 으로 바꾼 "訓讀 훈독"
으로... 큰 "大" 자를 "오오" 로 읽으니 "大阪" 을 "오오사카" 로 읽는 것입니다!
해서 平(평) 씨는 음독으로는 다이라 이나 훈독으로는 헤이케 이며, 源(원) 씨는 음독으로는
미나모토 이나 훈독으로는 겐지 라고 읽는 것인데.... 한국과 일본 은 자기 문자를 만들지
못하고 말로만 지내다가 훗날 중국 한자를 도입 하는데 음독만 있는 한국 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니까 한국은 훈독이 없고 음독만 있으니 우리말인 뫼 를 2천년전 중국 한(漢) 나라사람들의 말 인
산(山) 으로 읽어 "흰머리뫼를 백두산 白頭山" 이라고 하고, 가람을 중국말인 강(江) 이라고
하니 "큰가람을 한강 漢江) 이라고 하며 또 중국말인 동서남북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잊어버렸는데
강원도 어부들이 동풍을 샛바람이라 하니 중국말 "동해 東海 의 우리 말은 샛바다" 였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왕(천황) 은 원래 성씨 가 없는데, 미나모토 源(원) 씨는 세이와 淸和 왕(천황) 의
손자 인 쯔네모토왕이 분가 하면서 하사받은 성씨 이고 다이라 平(평) 씨는.....
889년에 간무 桓武 왕(천황) 의 증손자 인 다다모찌가 분가 하며 받은 성씨 라고 합니다.
몰락한 미나모토 源( 원, 겐지) 가문 의 13살 난 아들 요리토모 는 동쪽 이즈에 유폐
되었으나 이후 용케도 현지 호족 호죠씨의 사위 가 되어... 30살 나이에
거병하여 초기에는 병력의 열세로 패해 도망쳤으나 이후 대의를 펼쳐 병력을
모은후 천신만고 끝에 교토를 점령한 후에 동생 요시쓰네를 서쪽으로 진격 시킵니다.
이치노다니 절벽 을 넘은 미나모토 요시쓰네 군 은 대승하고 추격하여 야시마섬
마저 점령하니, 다이라(平)씨 는 간몬해협 히코시마 섬 앞인.....
바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곳 단노우라에서 최후의 결전 을 준비했던 것이지요!
미나모토(源) 요시쓰네 의 함대는 700척 인데 비해 다이라(平)씨 헤이케 군은 500척
으로 병력은 열세였으나, 초반에는 조수를 이용해 선전 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조수가 서쪽으로 바뀌자 전세가 불리해 패색 이 짙어지니, 다이라
(平)기요모리 의 딸 로 황태후인 외할머니 도루코 는..... 아직 8살로
어린 외손주 인 "안토쿠왕(천황) 을 안고 바다에 투신" 을 하기에이릅니다.
이때 8살 어린 안토쿠왕(천황)이 어디로 가느냐 고 물으니..... 외할머니 다이라노
(平) 도키코 는 “ 고통스러운 이승을 하직 하고 극락세계 로 갑니다."
"이 깊은 바다 속에도 용궁, 아미타불 극락 이 있다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는 데, 후일 영화화 되었을 때 관객들 중에 울지않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투신할 때에 소위 천황(일왕) 의 3종 신기 도 함께 빠졌는데, 거울과 구슬은 수습(?) 했으나
스사노오의 쿠사나기 검은 잃어버려.... 이세 신궁의 신기는 모조품 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안토쿠왕(천황) 의 넋을 위로 하는 해안의 작은 사당 을 뒤로 하고 도로를 올라 언덕위에 역시
비명에 죽은 안토쿠 安德 왕(천황) 을 기리기 위해 세운 아카마진구 赤間神宮 로 찾아 갑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여기 아카마진구 赤間神宮 는 이름 그대로 핏빛 붉은색 이라 검은색
일색의 보통 신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를 풍기는데 봄에는 마쓰리 가 열린다고 합니다.
한편 일본왕(천황) 의 절대권력은 세월이 지나면서 약해지고 헤이세이쿄(나라)
에서 794년에 헤이안쿄(교토) 로 천도한 이후에는 평화가 지속되면서....
대귀족으로 외척 인 후지와라(藤原) 씨가 국정을 좌지우지 하는 시대로 접어 듭니다.
866년 태정대신 후지와라 요시후사 가 세이와 왕(천황)의 섭정 이 된 것을 시작으로 정치를
총괄하는 관백(關白) 이 되었고 11세기에 이르면 일왕(천황) 은 유명무실해 지게 됩니다.
12세기에 스토쿠 상황(上皇) 이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 로 세우려 했으나 도바
법황(法皇)이 스토쿠의 동생 을 세우니 고시라카와 왕 (天皇 천황) 입니다.
( 조선조의 태조나 태종 처럼 천황이 은퇴해서 물러나면 상황 이 되고, 마저
은퇴 하면 법황 이 됩니다, 하지만 태종 처럼 실권 은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
아버지인 도바법황이 죽고 스토쿠 상황이 군사 를 모으자 1156년 7월 일왕(천황) 측의
군대가 오히려 야습 을 감행해 오니 360년 교토의 평화가 깨지고 전란 이 발생합니다.
상황(上皇) 측 에 인사는 좌대신 후지와라 요리나가, 다이라 다다마사, 미나모토 다메요시
이고 일왕(천황) 측은 섭정 후지와라 다다미치, 다이라 기요모리, 미나모토
요시토모 이니.... 왕실에 이어 후지와라씨, 다이라씨에 미나모토씨 까지 양분된 것 입니다?
시라카와궁에 화공 을 가하여 승리하는 보원의 난 과 그 이후 평치의 난 으로
대귀족인 후지와라씨 대신에 이번 전란에서 주축이 되었던.... 무력을
가진 무사 다이라(平) 와 미나모토(源) 씨 가 자신들의 힘을 확인하며 득세 합니다.
1159년 논공행상에 불만 을 품은 미나모토 요시토모 가 궐기해 일왕(천황)을 감금 하자
다이라 기요모리 가 군대를 수습하여 반격해서는 쳐부수고 정권을 장악 하게 됩니다.
이때 13세 였던 요시토모의 아들 미나모토 요리토모 는 체포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져
이즈로 유배 되고 2세였던 요시쓰네 는 어머니 품에 안겨 도망치다가.....
결국에는 발각되어 체포된 후에는 구라마산에 연금되어 승려 수행을 강요 받았습니다.
다이라(平) 기요모리 는 태정대신 에 오르는등 일족이 후지와라씨를 제치고 권력을 독점
하게 되는데 이때 기요모리가 부인의 간청으로 인정을 베푼 것이......
훗날 미나모토씨의 아들들 이 장성해 반란을 일으켜 오히려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지요?
태종이 아우들 을 죽이고 세조가 단종 을 죽이고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게 모두 이런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 함이라? 히로시마의 미야지마섬 바다에 도리이를 세운 이쓰쿠마 신사 를
세운 것도 이 무렵이니... 권력뿐 아니라 중국 송나라와 무역도 독점하여 부 를 쌓았던 것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 에 놀란 법황이 견제 를 하자 다이라 기요모리는 반발 하여 시라카와
법황을 유폐 하고 자신의 외손자를 즉위 시키니 바로 안토쿠왕(천황) 입니다.
기요모리 가 안토쿠왕(천황) 을 모시고 후쿠하라에 새 수도 를 지어 천도하자 헤이안(교토)
의 귀족들은 비통해 하니...... 다이라가에 협력자였던 미나모토(源) 요리마사 가
일어섭니다. 법황의 차자 모치히토를 새 일왕(천황) 에 추대하고 다이라(平)씨 토벌
을 선포하는데, 병력 이 다 모이기도 전에 다이라씨의 공격으로 두사람은 전사 하게 됩니다.
그러자 13세의 나이로 이즈에 유배 되었던 미나모토(源) 요리토모 는 호족 호죠
도키마사의 딸 마사코 에게 장가들어 세력을 얻으니 당시 30세 였습니다.
1180년 8월 17일 미시마 명신에 제사를 지내던 날 장인 도키마사와 짜고
300명의 군사를 모아 교토로 향하는 길목인 야마키관 을 급습해서 점령 합니다.
그러자 다이라(平) 기요모리 측인 오바의 3천 군대 가 이토군과 합세헤 야마키관을 포위
하니 7, 8기로 탈출해 아와 에 도착해 안사이에게 조정 파견관리를 칠 것을 명합니다.
이에 야심을 가진 동쪽 무사들이 모여드니....... 무사시노(도쿄) 에 이르러 가즈사
의 곤노스케는 무려 2만 병력 을 모아 복속해 오니 되돌아서서 가마쿠라에 입성 합니다!
삼면이 산이고 동쪽은 바다인 요새 가마쿠라 에는 미우라씨의 성도 있고 또 미나모토
(源)씨의 조상이 일찍이 하치만궁 신사 를 지은 적도 있으니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교토에서 동해도(東海道) 를 따라 진출한 고레모리 가 이끄는
수만명의 기요모리군 에 대해 요리토모군은 미나모토 다케다군과 연합해 대치 합니다.
이때 2살로 절에 들어갔던 동생인 요시쓰네 가 19살로 성장하여 멀리 동북 오슈 에서
달려오니 10월 20일 다케다군의 야습으로 기요모리군을 격퇴 했으나.... 동쪽
히타치의 사타케군 이 배후를 노리므로 병사를 돌려 토벌하니 관동지방을 손에
넣었는데, 한편 요리토모의 사촌 요시나카 가 북륙에서 거병 하여 일본은 3등분 합니다.
다이라 기요모리가 병사 한후 조정의 고레모리는 10만 병력 을 동원해 우선 북륙
으로 진격해 가가와 엣츄 경계 도나미산에 이르자...... 요시나카는 햇불을
단 황소떼를 돌진 시켜 혼란에 빠진 8만명의 적병을 사살 하고 여세를 몰아
교토로 진격 하니 다이라(平)씨는 안토쿠왕(천황) 을 모시고 서쪽으로 퇴각 합니다.
그러자 일왕(천황)의 할아버지인 고시라카와 법황 은 엔랴쿠사에 들어가 또다른 손자인
다카나리를 고도바왕(천황) 으로 세우고 미나모토(源) 요시나카 에게 귀부 합니다.
요시나카가 거친 행동 을 하자 법황은 동국의 미나모토(源) 요리토모 와 손을 잡다가
오히려 유폐 를 당하니 이에 요리토모 는 서진하여 우지강에서 요시나카에게 승전 합니다.
1184년 1월 오미 아와즈의 최후 결전에서 미나모토 요시나카가 전사 하니 교토를 차지한
미나모토 요리토모 는 다이라씨 토벌 을 위해 동생 요시쓰네를 서쪽으로 진격 시킵니다.
이치노다니 절벽 을 넘은 미나모토(源) 요시쓰네군은 대승하고 추격 하여 야시마섬 마저
점령하니 다이라(平)씨 는 간몬해협 히코시마섬 단노우라에서 최후의결전 을 했던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