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싸움 승리 위해 기꺼이 허리 굽혔던 이순신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넘어섬’의 경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때 명분은 가도입명(假道入明), 즉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속셈은 조선을 정벌하고 명나라까지 점령해서 영파라는 곳에 본부를 두고 조선과 명, 일본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조선은 일본군의 파죽지세의 공격 앞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조선은 명에 구원을 요청했다. 명에서도 급했다. 명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이라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명에서 온 장수들은 하나같이 거만하고 방자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산동반도에서 수군 5000 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도착한 도독 진린은 난폭하기로 소문났다.
그는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선의 관민들을 때리고 욕했다. 마치 짐승을 다루듯 했다. 진린은 강화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머물고 있는 고금도로 가지 않고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들어와 임금으로부터 기어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1598년 6월 26일 진린 일행은 선조를 비롯한 수많은 중신들로부터 송별인사를 받았다.
포악하게 행동했으나 나중에 이순신의 진가를 알아봤던 명나라 원군 도독 진린의 실제 모습을 그린 초상화다.
진린은 송별 자리에 조금 늦게 참석하였다는 이유로 찰방(역참의 하급관리) 이상규의 목을 짐승처럼 새끼줄로 묶어 끌고 다니는 행패를 부렸다. 이상규의 얼굴은 피투성이로 변했고, 보는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굴렀다. 보다 못한 영의정 유성룡이 나서서 진린에게 선처를 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며 곧 그와 합류할 이순신을 걱정했다.
진린, 이순신 전사하자 공적 기리는 장계
유성룡뿐 아니라 다른 조정대신들도 근심이 태산 같았다. 진린의 비위를 거스른 조정 대신들이 온갖 수모를 당하고 심지어 곤장까지 맞았던 터였다. 진린의 본대는 곧 고금도로 향했다. 이때가 1598년 7월 16일이다. 그런데 이때 이순신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서 진린의 고약한 성격을 미리 안 이순신 장군은 나름대로 대책을 세웠다. 군사들을 풀어 산에서 사슴과 멧돼지를, 바다에서 온갖 물고기를 잡게 하고 많은 술과 음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휘하 장교들과 함께 수십 리 길을 마중 나갔다. 진린을 보는 순간 “대제독, 어서 오십시오”라며 크게 허리 숙여 절을 했다. 그리고 진영에 들어오자 미리 준비해놓은 음식으로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명나라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취하게 했다. 이틀 후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한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명나라 측의 전과는 없었다. 화가 난 진린이 술잔을 집어 던지며 날뛰었는데 이때 이순신 장군이 넌지시 말했다. “이곳에서의 승리는 모두 노야(상대를 높여 부르는 말)의 것입니다. 오늘의 수급을 모두 노야에게 드리겠으니 그것으로 첫 승전 보고를 귀국 황제에게 하면 매우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진린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순신 장군의 손을 잡고 “중국에서부터 이미 장군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보니 장군에 대한 모든 칭찬이 거짓이 아니었구려!”하며 탄복했다. 원칙주의자, 강직한 인물의 대명사인 이순신이 왜 허리를 굽혔으며, 왜 수급을 양보했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나라를 위해서다. 진린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고, 나라를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불과 4개월 후,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대첩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몰래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은 이들을 모조리 섬멸하기 위해 진린과 함께 조·명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노량으로 향했다.
1598년 음력 11월 18일 밤 10시쯤이었다. 이순신은 진린의 배가 너무 작아서 그를 위해 특별히 조선의 튼튼하고 거대한 판옥선 두 척을 내주었다. 이튿날 새벽, 이순신의 조선함대 83척은 일본수군을 향해 맹렬히 화공을 벌였다. 이때 진린의 명나라 수군은 안전한 죽도 일대에서 사태를 지켜보면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세가 조선 쪽으로 기울어지자 조선함대를 돕는답시고 뱃머리를 관음포 방향으로 돌렸다. 그런데 명나라 부장 등자룡이 탄 판옥선에 불이 붙었다. 겨울에 가까운 시기였고 새벽녘이었기에 몹시 추웠다. 그래서 갑판 위에 모닥불을 피웠다가 배에 옮겨 붙었던 것이다.
명나라 수졸들이 불을 피하기 위해 소란을 일으키며 한 곳으로 쏠리다가 배가 기울어졌다. 그 틈을 타서 일본 수군이 잽싸게 배에 올라타서 등자룡의 목을 베어버렸다. 등자룡이 죽자 일본 수군은 배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곧 그 옆에 있던 진린의 판옥선으로 뛰어들었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은 부상을 당하면서까지 몸을 날려 일본군과 함께 바다에 뛰어 내려 죽었다. 진린의 목숨도 경각에 달려 있었다. 이것을 이순신이 봤다. 아무리 진린이 얄미운 짓만 골라서 했지만 이순신이 누구인가? 공(公)은 공(公)이고 사(私)는 사(私)다. 대의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순신은 주저 않고 기함을 돌려 진린의 배로 갔다. 일본군의 지휘선에서는 진린의 배를 나포하라고 큰 소리로 지시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숙달된 명궁의 실력으로 급히 화살을 쏘았다. 일본 장수 한 명이 “꽥!”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바다에 뒹굴어 떨어졌다. 이를 본 일본 수군들이 황급히 지휘선을 보호하기 위해 포위망을 풀었다. 이때를 틈 타서 진린의 배는 무사히 빠져나와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다. 이순신은 이렇게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고 죽음의 포위망 속으로 뛰어 들어가 진린을 구한 것이다. 진린은 감복했다. 그래서 이순신이 일본군의 유탄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통곡했고, 그 후 명의 황제에게 장계를 올려 이순신의 공적을 기렸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이렇다. “폐하, 애통하여 붓을 들기가 어렵고 떨어지는 눈물로 먹을 갈아 올리나이다…(중략)…7년에 걸친 참담한 전란 중에 섬나라의 도적들이 그 이름만 듣고도 떤 것은 오직 전하의 충성된 신하, 순신이었으니…(중략) 다시금 북받치는 애통함에 붓을 들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일찍이 순신이 소장의 목숨을 구하였으나 소장은 죽음이 순신을 데려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나이다. 폐하, 소장을 용서하시옵소서.” 진심은 사람을 움직인다. 아무리 포악하고 이기적인 진린이었지만 이순신의 진정한 충정 앞에 무너졌다.
진정한 전략가는 경쟁과 승리 넘어서야
이순신과 같은 사람을 두고 손자병법 작전(作戰) 제2편에서는 “백성의 생명을 돌보는 자요, 국가의 안위를 좌우하는 주인공(民之司命 國家安危之主也)”이라고 한다. 이순신이 진린을 처음 만났을 때 허리를 굽혔던 행위는 손자병법 시계(始計) 제1편에 나오는 “나를 낮추어 상대방의 교만을 부추긴다(卑而驕之)”는 병법에 기인한다. 일반적인 세상의 이치는 겸손하면 흥하고 교만하면 망한다. 그래서 상대방을 망하게 하려면 그에게 교만심이 발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순히 진린을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임으로써 보다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긴급한 전쟁의 와중에 명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진린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 강직한 이순신이 허리를 굽혔던 것이다. 자존감은 지키되 자존심은 버렸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전략적 대범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순신은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진린은 조선의 장수 이순신에게 미묘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경쟁을 넘어섬으로써 경쟁에서 이겼다. 최고의 경쟁은 경쟁을 넘어서고, 최고의 승리는 승리를 넘어선다.
경쟁이나 승리는 단지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러한 경지를 잘 알아야 진정한 전략가라 할 수 있다. 이순신은 1595년 1월 1일자 난중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정직하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혼자 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가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이순신은 혼자 있을 때 나랏일을 생각했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떤 날에는 맨가슴을 치며 펑펑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이 위장된 의(義)를 내세워 저마다의 목소리를 높일 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의 말을 증명했고 실천했다. 그렇기에 유한의 생명을 넘어 불멸이 되었다. 마음을 둘 곳 없고 나라가 흉흉할 때마다 이순신을 찾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세 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자. 나는 살면서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허리를 굽혀 봤는가? 나는 혼자 있을 때 주로 무슨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가? 나는 단 한번이라도 나라를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는가? /노병천 한국전략리더십연구원장 2012.06.17
동아시아 패권 지형 바꾼 ‘국제戰’
임진란 7周甲…소설로 본 임진왜란의 ‘불편한 진실’ - 故 김성한 작가 ‘7년 전쟁’ 복간
조선을 거쳐 명을 치고 멀리 인도까지 정벌하겠다는 야망에 불탄 일본 실권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십만 군사를 파견해 조선을 침략했다. 1592년 일이다. 일본군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을 함락했다. 의주로 몸을 피한 선조가 명에 구원을 요청했다. 명과 일본은 조선을 배제하고 긴 기간 휴전 협상, 화의 교섭을 진행했다가 결렬했다. 재침략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본국으로 철수했다. 이때가 1598년이다.
긴 전쟁이었지만 임진왜란에 대한 이미지는 다소 단편적이다. 이순신이 활약했고, 거북선이 제작됐으며 곽재우·사명대사와 같은 의병이 활약했다는 정도. 인구 3분의1이 죽어나갔고 건축물·서적·미술품 등 문화재가 소실됐다. 경제 파탄과 관료 부패가 횡행하면서 조선 역사를 100년 전으로 후퇴시켰다. 단순히 ‘임진년에 왜놈이 일으킨 난리’쯤으로 인식하기에는 영향이 상당하다.
고 김성한(1919~2010) 작가의 대하역사소설 ‘7년 전쟁’(전 5권·산천재 펴냄)은 임진왜란을 ‘동아시아의 패권 지형을 변화시킨 국제전’으로 이해한다. “이 사건을 한국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동양 전체의 입장에서 조감하고 인간의 운명, 민족의 운명을 다시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원래 이 전쟁은 무대가 한국·일본·중국으로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화전(和戰)의 내막도 복잡다기 이를 데 없었다.(중략) 가능한 범위에서 3국의 사료들을 상고하여 당시의 참모습을 그려 볼까 한다.” 작가가 1984년 동아일보에 이 소설을 연재하면서 쓴 말이다.
첫 연재 때 제목은 ‘7년 전쟁’이었지만, 일부 독자들이 ‘왜란’이라고 하지 않은 데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면서 1년 뒤 ‘임진왜란’으로 바뀌었다. 1990년 단행본도 같은 제목으로 나왔다가, 최근 원제를 달고 복간됐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이 소설의 서술은 마치 선조실록을 한 줄 한 줄 따라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증에 굉장히 충실해 소설의 수준을 넘어 2차 역사서 자료로도 손색이 없다.”고 설명했다. 김 작가는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무명로‘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제1회 동인문학상, 아세아자유문학상 등을 받았고 사상계 주간,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하다. 2012-07-14
이순신·류성룡은 왜 탄핵 당했나
이번영 작가 ‘왜란:소설 징비록’
임진왜란 하면 ‘징비록’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 문신 류성룡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의미로 전쟁 당시를 기록한 책이다. 명과 일본에서 발간된 문헌에 표현된 ‘졸렬하고 수동적인 조선’이 이 기록으로 이미지를 상당부분 쇄신했다. ‘왜란:소설 징비록’(이번영 지음, 전 3권, 나남 펴냄)은 ‘징비록’을 토대로 역사적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웠다.
작가는 10여년 동안 국내외 사료를 살피고, 명량해전·한산대첩·노량해전 등 격전지를 수십차례 찾아 소설을 완성했다. 소설은 임진왜란의 전말을 풀어내면서, 당시 임금과 신하들은 무엇을 했는지, 백성들은 어떤 피해를 봤는지, 명나라는 과연 조선의 우군이었는지, 이순신과 류성룡은 왜 탄핵당했는지 등 불편한 진실을 입체적으로 그렸다. /최여경 2012-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