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면 하는 일을 의심하라
- ‘굴뚝 속으로 들어가 의사들’ 서평 -
정현철 시흥안산지역지회 지회장
아주대병원 외과 의사 이국종은 ‘봄이 싫다’고 했다.
“봄이 싫었다. 추위가 누그러지면 노동 현장에는 활기가 돌고 활기는 사고를 불러, 떨어지고 부딪혀 찢어지고 으깨진 몸들이 병원으로 실려 왔다.” (골든아워, 흐름출판)
여기 사시장철 ‘노동 현장’에서 ‘떨어지고 부딪혀 찢어지고 으깨진 몸들’을 마주하는 의사들이 있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 그들은 기꺼이 노동 현장의 굴뚝으로 들어간다. 고장 난 노동자들을 만난다. ‘굴뚝 속으로 들어가 의사들’(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나름북스)이 만난 환자들은 대부분 파견노동자, 이주노동자, 일용노동자, 하청노동자, 현장실습 노동자다. 일상이 재앙인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병든 몸에 새겨진 흔적을 통해 우리 사회 본질과 마주한다.
우리나라는 하루에 6명이 산업재해로 죽고(연간 사망자수 2,062명), 일 년에 15,996명이 업무상 질병으로 고통받는다. 고용노동부에 공식 보고된 죽음이고 질병이다.(2020년, 고용노동부 ‘산업재해 현황 분석’). 작업장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노동자의 건강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굴뚝으로 들어가 의사들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다. 환자가 오면 무슨 일을 하는지 묻는 의사들과 함께 그 단서를 찾아가 보자.
생명과 이윤, 뭣이 중헌디
남미의 아즈텍 제국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지금 누군가 저런 짓을 한다면 어떨까. 산재 노동자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즈텍 기우제가 떠올랐다.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는 이윤으로, 어린아이는 노동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성장을 위해 노동자를 통째로 갈아 넣고 있는지 모른다.
공장에서, 조선소에서, 철도에서, 현장 곳곳에서 이윤 때문에 스러져간 노동자이 있다.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이 만난 노동자들 이야기를 들어보자.
스물셋 젊은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원인은 일사병. 그는 직영(원청) 노동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온갖 것을 감내하며 일해 왔으나, 저열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죽었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숨 막히는 현실을 보여준다.
8명의 태국 노동자가 앉은 뱅이병에 걸렸다. 노말핵산에 중독된 것이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사용물질의 위험성을 전혀 할 수 없는 조건, 배기시설도 없고 개인 보호구도 지급받지 못했던 것, 참다못해 몸의 이상을 호소했으나 묵살당해도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던 것 모두 노말핵산 중독의 원인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8량(열차 차량 개수)의 열차에 혼잡도가 극심한 지하철에서 1인 승무나 무인 승무 시스템을 도입하는 나라는 없다. 1인 승무 제도로 인해 2013년부터 2016년까지 9명의 기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9년까지 100~200건 정도였던 근골격계 질환의 산재 승인은 2000년 1,009건, 2001년 1,598건으로 급증하기 시작했다. 근골격계 질환의 인정 기준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급증했을까. IMF 구조조정 이후 비정규직 증가를 비롯한 노동시장의 변화가 노동강도를 강화했고 이런 노동강도의 강화가 ‘골병’이라 불리는 근골격계 질환의 증가를 가져왔다는 분석이 많다.
대기업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대기업도 그렇게 현장 실습생들을 착취하다니 정말 놀랐다. 가을부터 2월까지는 특성화고 학생을, 1학기 때는 전무대 실습생을 쓰니 1년 동안 신규 노동자를 한 명도 채용하지 않고 잘 굴러가더라”
국가는 없다
국가는 종종 노동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근로복지공단은 1998년 2월 IMF 사태에 따른 예산 절감을 명분으로 ‘IMF 체제 극복을 위한 고통분담 대책 – 산재보험급여 거품 제거 대책’이라는 내부 지침을 일선 지사에 내려보냈다. 이후 산재 불승인 사례와 함께 입원 환자에 대한 강제 통원 전환, 통원 환자에 대한 강제 치료 종결 사례가 급증했다.
아픈 노동자가 있다는 걸 우리는 몰랐다. 석면 관련 질환을 앓고 있는 노동자가 별로 없던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얼마나 더 죽어야 우리 사회가 꿈틀댈까? 노동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히도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사회적 안전 역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역치란 생물이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 세기다. 이 역치를 낮추는데 국가가 필요한 것이다.
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근로계약의 기본이지만, 그 노동력 제공에 노동자 본인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까지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노예노동과 다른 이 사회의 기초 중 하나다. 돈을 준다고 해서 무슨 일이나 시켜도 되는 것은 아니며, 노동자 입장에선 돈을 받는다는 이유로 기초적인 안전 보장도 안 된 곳에서 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메탄올 중독사고를 목격한 의사는 직업병 조기 발견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탄올 중독사고는 우리나라 산업보건 제도의 허점이 드러난 사건이다. 지금의 제도와 시스템으론 수많은 유해물질과 열악한 작업환경으로부터 노동자들의 건강이 지켜질 수 없음을 확인했다.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더 이상 형식적으로 작업장이 관리되거나, 소수의 의사만이 직업병에 관심을 두고 운 좋게 병을 발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일반 병·의원 모두에서 직업병 조기 발견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도 필요하다. 병원과 안전공단, 근로복지공단, 노동부, 지자체가 연계되는 직업병 사고 대응체계 구축도 시급하다.
단 한 명이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절실함
우리의 현실은 산재 신청 조차 눈치 보며 넣어야 한다. 한 노동자는 산재 신청 이야기를 꺼내자 더 외로워졌다고 한다. 얼마나 아픈지, 왜 아픈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고 산재를 정녕 신청할 것인지, 언제부터 제대로 일할 수 있는지 묻기만 했다. “아무도 이렇게 내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없어요. 그렇게 말해준 사람도요.”
이런 현실 속에서 “그러니까 아프면 쉬어야 합니다”라고 뻔하기 이를 데 없는 답을 내놓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그들이 아픈 이유는 고된 일이다. 증상이 질환으로까지 진행하지 않도록 하려면 일을 줄이거나 아플 때 쉬는 게 당연하다. 처음부터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1차 예방, 질병이 발생했을 때 조기에 확인하여 치료받게 하는 것을 2차 예방, 질병을 치유한 이후 원래 자신의 기능으로 잘 복귀하도록 하는 것을 3차 예방이라 한다. 망가질 만큼 일하지 않거나 아프면 쉬는 1차 예방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보통의 노동자가 아플 때마다 쉴 수 있는 직장이 얼마나 될까?
과로가 미덕인 사회에서의 과로 자살, 죽음의 행렬을 멈춰야 한다. 휴가를 내는 건 당연하고, 주말에는 쉬어야 하고, 정시 퇴근이 기본인 사회. 업무량이 많아 추가 노동이 상시로 필요한 경우 인력 충원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정상으로 인식되기란 아직 어려운 일일까?
작업 조건과 환경을 설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일에 사람을 맞추지 말고 사람에 일을 맞추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계에 맞춰 일하는 법을 배우는 초기 노동 경험을 통해 일에 사람을 맞춰야 한다는 작업장의 불문율을 몸에 새긴다. 우리 사회는 이제 ‘어떤 사람을 골라서 쓸 것인가가 아닌, 어떤 일을 골라서 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몸이 아프면 하는 일을 의심하라
혹시 당신을 진료하는 의사가 당신의 직업, 하는 일을 물은 적 있는가. 질병의 정확한 진단뿐 아니라 원인을 알고 치료하는 데에 당신이 현재 하는 일이나 전에 했던 일이 매우 중요하다.
질병의 원인과 분포를 파악해 이를 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역학의 기본 구성 요소 세 가지는 사람, 장소, 시간이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을 파악하는 것이 질병 원친 찾기의 가장 기본이고, 이 세 가지에서 유사성이 있으면 공통의 위험 요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 파악해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병에 걸린 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일하다 다치거나 병에 걸린 노동자들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이 했던 일에서 이게 잘못됐던 겁니다’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세상은 아프도록 일을 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노동자들에게 ‘고맙고 미안합니다’고 인사를 해야 한다. 30년 동안 외쳐 온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일하자”를 이제 멈춰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일을 통해 행복하고 더욱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정현철, 2021.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