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이름 찾아 떠나는 여행 64>
우암동(牛巖洞)
마을 이름의 유래는 바닷가 한 바위에서 시작됩니다. 그 생김새가 소와 비슷해서 '소바위' 혹은 부산 사투리로 '소바우'라고 불렀는데, 관청에서 행정지명으로 기재하면서 우암(牛巖)이라 했습니다. 초량왜관 설치 기간(1678-1875)에는 이곳에 조선과 일본 양국 표류민의 지정 접수처였다고 합니다. 일본인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다 풍랑으로 길을 잃고 조선에 표류하면 이 마을에 수용했다가 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조선의 관리는 교통편을 마련해 일본의 어부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는데, 이를 표민수수소(漂民授受所)라고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왜장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상륙했던 곳이 이곳 우암포라고 합니다.
1678년 이후의 한일 양국 외교문서인 <대마도문서(對馬島文書)> <조선사무서(朝鮮事務書)>등에 우암포라는 이름이 자주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조선 숙종 이전에 우암포라는 지명이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래부지(東萊府志)>에는 ‘남촌면 우암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894년에 부산을 찾은 한 일본인이 쓴 <십이봉외사(十二峰外史)>에는 ‘牛巖浦’란 제목의 시가 있는데, ‘큰 바위가 바다를 굽어보는데 형상이 철우와 같다(巨巖府海形如鐵牛)’고 하였습니다. 원래 철우(鐵牛)는 중국 고사에 전하고 있는데, 우(禑) 임금이 수환(水患)을 막기 위해 철우를 만들어 강물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암포의 지세는 동천(東川)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 이 지역에 수재(水災)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아 소바우[牛巖]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부산지명총람)
지금은 부산항 제8부두가 들어선 곳에 풍화작용으로 붉게 변한 절벽이 있어, 일본인들은 적기(赤崎 · 아카사키)라 불렀는데, 부산항을 근대적인 항구로 만들기 위해 적기만의 많은 지역을 매축하였습니다. 부산항 7부두와 8부두가 들어선 것도 그때의 일이고, 우암동의 상징과 같았던 소바우가 사라진 것도 이때(1925년)의 일입니다. 부두가 지척인 입지조건을 눈여겨 본 일본인들은 이곳에 소 막사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소들을 공출하여 일본으로 실어갔었는데, 일본으로 가기 전 일단 이곳에 모였습니다. 막사를 만들어 전염병 여부를 감별했다고 합니다. 통과된 건강한 소만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후, 버려진 외양간을 차지한 것은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와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널리 알려진 흥남철수 때의 실향민들은 일단 거제도로 갔다가 다시 이곳을 찾아와 판자와 볏짚으로 집을 지어 연명했는데, 그때의 실향민에게 우암동의 소막사는 삶을 이어갔던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소막마을이라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부산에서 변호사를 할 때 자주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부모가 흥남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암동에는 그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맛집인 60년 전통의 내호냉면도 흥남철수 때의 실향민이 1953년 3월 이곳에서 개업해 부산 밀면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냉면과 밀면을 파는 이 집은 우암동 역사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내호냉면의 전신인 동춘면옥의 단골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터지자 피란민들이 우사(牛舍)에 들어가 살았던 이곳 소막마을은 ‘피란수도 유적지’로 선정되었으며 세계문화유산 예비 잠정목록에도 선정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