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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의 현장
흰 쟁반 위의 검은 포도들
사울 이바르고옌
I.
누가 여기 이 은빛 쟁반에 담비의 발 같은 포도송이를 담았나
왜 여기서 난, 나의 유년시절 호수에서 뿜어졌던 고향의 안개를 맞이하는가
접시 한 쪽엔 아름답고 높은 땅이 자란다
소나무소리가 돌로 된 사원의 뿌리를 침투하고
응결된 물방울이 바위에 한 방울 두 방울 역사의 구멍을 내며
청동으로 된 누에고치가 태생적 광채로 실과 소리를 녹여버린다
II.
수천의 세상의, 수천의 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넌 나에게 들려줄 수 있겠나
각자 인간의 그림자를 위해 덧없는 자리가 생겨나고
그 그림자는 몸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리라, 넌 답할 것이다
너의 천 개의 눈들이 나를 바라보지만
난, 단지 두 개의 눈으로도 널 바라볼 수 없구나
너의 수천 개의 손가락들의 움직임.
왜 난, 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단순한 몸짓 쪼가리 하나마저 느낄 수 없는가
말해보아라
네 전에 이미 너 자신 존재했는지
네 첫 번째 탄생 이전에 너 태어났었는지
네 상의 금빛 피부는 또 무엇인지……
목탁에서 흘러나오는 떨리는 공명과
가냘픈 연기, 드리는 향불 속의 기도는
사바와 도솔천이 함께함을 일컫는지
III.
포도들은 다시 어린 시절 나의 입천장과 잇몸 사이를 지나가고
즙이 많은 배, 주홍색의 복숭아들, 온갖 풀들은
그림자의 향기와 함께 태양 아래 휴식을 취한다
수 천 개의 눈,
수 천 개의 손,
수 천 개의 얼굴이
응시한다
만든다
비춘다
하나 흰 쟁반 위에서 천 개, 그리고 하나의 탄생을
- 「한국 경주에서」 2005년 9월
사울 이바르고옌
멕시코, 우루구아이 시인. Sogem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주임교수. Excelsor지의 문예부 주필과 출판사 Eón의 주간 역임. 시집 『El escriba de pie』, 『El poeta y Yo』외, 50여 권이 있으며, 9권의 장편소설, 6권의 단편소설집, 그리고 19권의 희곡 및 수필집 등 도합 80여권의 작품집을 낸 그는 아르헨티나 시인 Juan Gelman과 더불어 현 중남미 대표 시인으로 꼽힌다. 그의 작품은 우루구아이, 멕시코 등 중남미는 물론이고, 미국과 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에서도 출판되고 있다. ‘Casa de las americas'상, ’Carlos Pellicer‘상, ’San Juan del Rio‘상, ’aBrace' 남미문학상 등을 수상함.
멕시코로부터 온 편지- 따뜻한 시인,
이바르고옌
이 글을 쓰기 약 한 달 전 멕시코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용은 크리스마스와 신년인사를 겸한 것. 디지털시대에 손가락의 온기가 전해지는 수기편지를 펼치는 느낌은 자갈 위에서 노릿하게 굽히고 있는 군고구마를 집어 드는 기분. 보낸 이는 사울 이바르고옌(Saul Ibargoyen). 나이는 여든 셋, 나와 30년 지기다.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움, 미안함, 아쉬움……. 본지 오래기에, 소식전한 지 오래기에, 보고 싶어도 가고 싶어도 극과 극에 위치해 있기에 그 온기가 채 식기 전 이글을 끝낼 수 있었으면 한다.
사울 이바르고옌은 우루구아이 몬테비데오 태생으로 안헬 라마(Angel Rama)가 지적하듯 60-70년대 위기의 시대의 작가에 해당한다. 비평가 지오바네티(Hugo Giovanetti Viola)는 그의 시선집 『시인과 나』(“El poeta y Yo")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울 이바르고엔은 시인으로서 정통적인 계보를 이어가면서도 아주 독창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을 해왔다. 1930년, 우루구아이 몬테비데오에서 출생한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남미에 불기 시작한 사회주의의 폭풍에 휘말려든다. 우루구아이 파쇼독재 정부에 저항한 결과 마침내 1976년 멕시코로 추방당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의 조국이 독재정권으로부터 해방이 된 1984년 다시 조국을 찾게 되지만, 당시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의 국가의 연속적인 붕괴는 그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실질적이고 현상적인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또 한 번 조국 우루구아이를 빠져나와 멕시코로 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발적이다. “왜 너는 그렇게도 방황하니? 여기서 못 찾는 것을 거기선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죽마고우 라몬 히메네스가 안타깝게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은 시 구절로 답을 대신한다.
“달루Dalu새가 땅 위에서 방황하듯, 난 초원에서 방황한다./별들이 좀 더 어두워지기라도 했단 말인가?/제발 내 눈들이 태양을 응시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한 낱 잠을 자기 위해 내 머리는 땅의 가슴속에서 조용히 쉴 수 있을까?/
밝음이 나를 삼키도록 내버려 두어라/빛이 다시 피어날 때, 어둠은 갈수록 꺼져간다./죽은 자들이 어찌 들끓는 태양의 밝음을 눈치 챌 수 있단 말인가!”
파블로 네루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옥타비오 파스 그리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들은 한국에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중남미 작가 4인방이다.
이바르고옌은 공교롭게도 이들 네 사람의 특성을 골고루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시인임과 동시에, 소설가, 단편소설가-중남미에서는 소설가novelista와 단편 소설가cuentista를 구별함- 그리고 희곡작가, 즉 멀티아티스트란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코스모폴리턴한 그의 성품, 즉 개방성 때문이다. 네루다와 이바르고옌, 이 두 사람은 제 3세계의 특히 수많은 정치, 사회적 문제점과 험난한 역사적 사건들로 점철된 중남미의 민중시인일 뿐만 아니라, 서정성과 자신들의 작품을 전통과의 투쟁의 산물, 새로운 표현체계를 발견하고자하는 끝없는 탐색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초현실적 미학적 가치가 빛나는 넓은 스펙트럼의 시인들이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 사이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표면적 차이는 네루다의 시는 세칭 쉬운 시요, 이바르고옌 시는 어려운 시란 것이다. 이바르고옌의 시가 난해하게 다가오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은 그의 특이한 시어선택에서 비롯된다. 그가 성장한 곳은 우루구아이와 브라질의 국경지역인데, 스페인어와 포르투칼어 그리고 원주민어인 구아라니어가 서로 얽히고설키어, 아주 독특한 방언이 형성되는 곳이다. 그는 문법을 무시한다. 주어, 동사, 목적어의 순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접속사 없이 글을 이어나가기에 그의 시는 난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바로 ‘시에 있어 언어는 차선이다. 오히려 시인은 언어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그의 완강한 시론과 끓임 없는 지적 호기심이 유발하는 투철한 실험정신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시를 사물과 시적 대상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라고 칭한다. 그의 시집은 자그마치 50여권이나 된다. 그동안 그는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사물들에게 세례를 해주었을까. 네루다와 이바르고옌, 저항시인이요 민중시인이란 점뿐만 아니라 순수 서정주의에서부터, 실험적 아방가르드를 거쳐 현실참여에 이르기까지의 그들의 행적에는 유사한 점이 참으로 많다.
파스와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쓰기’보다 ‘듣기’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시란 예로부터 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인간 내면의 목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쓰기 위해선 먼저 그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우려야 하며, 그‘소리’에 귀기우림이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현재의 소리’를 청취하는 것이라 한다. 이 두 사람은 ‘열린 작품’(Laobra abierta)을 지향하는 철저한 개방주의자로서- 이면에서는 사실 보르헤스가 으뜸이지만-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강조한다. 즉 바르트가 말하는 독자 또한 단순한 수용자에서 벗어나 작가의 기호와 자신의 독서행위간의 대화를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맛 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바르고옌은 어쩌면 네루다와 파스를 양극에다 두고 그 사이를 줄타기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두 말 않고 네루다라고 답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 두 시인의 절충점인 알폰소 레이에스라는 지문 밖의 답을 건넨다. 시의 형식이나 시어보다는 시정신을 중시하는 이바르고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하다.
소설가로서의 이바르고옌은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를 양극으로 둔 채 그 사이를 오간다. 누구를 더 좋아하나 물으면, 마르케스라고 답한다. 지식이나 반짝이는 기지보다는 시원적인 신화와 샤만을 더 좋아하는 까닭이다. 멕시코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미의 망명 작가라는 외양적 유사성 외, 그들 사이에는 내면적 닮은꼴도 존재한다. 여기서 닮은꼴이란 소설의 테마와 소재면에서의 유사성을 말함이며, 두 작가 공히 탈식민주의 소설을 쓰면서도 문학 장르로서의 소설을 가족사를 정리하는 행위라고 폄하하듯 정의하는 것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바르고옌의 소설엔 마술적 사실주의가 없다. 그가 라틴아메리카 붐 소설가 대열 밖에 놓이는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이바르고옌과 보르헤스의 공통점은 둘 다 엄청난 지식인이란 것 외 다작가란 것, 그리고 네루다나 파스, 마르께스와는 달리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 등이다. 상이점은 역시 이바르고옌의 것과는 달리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는 이데올로기가 파고들기 힘들다는 것인데, 보르헤스의 기발한 상상력이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허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보르헤스는 생전에 ‘노벨상을 언제 탈 것 같은가’ 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도 내게 노벨상을 주지 않았다 말인가”(Todavia no me lo dieron?)라고 노벨상을 비꼴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바르고옌 역시 그 면에서는 보르헤스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 자존심은 자만심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이바르고옌은 항상 약자 편에 선다. 경제적이던, 정치적이던 제국주의를 혐오한다. 불의를 못 참으며, 민주라는 이름을 가진 파쇼정부의 거짓말을 싫어한다. 이는 ‘가장 감동적인 작품은?’이란 어느 인터뷰 상 질문에, “돈키호테”라고 서슴지 않고 답한 것과 무관치 않으리라.
끝으로 한국시인들을 위해 보내온 그의 서한 한 통과 몇 해 전 한국, 특히 경주를 둘러본 뒤 쓴 그의 시 한 편을 ‘시와 표현’ 독자 분들에게 소개하기로 한다.
존경하는 한국 시인들에게 /
사울 이바르고옌Saúl Ibargoyen
- 「시인의 사명과 책임에」 관하여
몇 해 전 포르투칼의 호세 사라마고는 이 시대를 왜곡된 사회주의와 퇴폐적인 자본주의 사회에 끼어있는 정체불명의 이데올로기 시대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과학적, 기술적 발달과 일반화된 경제적 불안, 지역주의와 세계화의 대립, 물질적 문화와 정신적 문화, 넘치는 정보홍수 속에 늘어나는 비정보화와 상대적 문맹, 등 새로운 대립구조가 자아내는 신 갈등의 시대라 부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다른 예가 더 많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정도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詩的 시간은 인간이 설정 혹은 만들어 놓은 다른 시간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 이 詩的 시간과 현실적인 시간과의 간극을 줄일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부제가 다소 모호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시가 그 무엇인가에 책임이 있다고 하려면, 먼저 시란 무엇인가, 즉, 시의 정의에 대한 역사적 견해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시가 그 무언가에 책임이 있다고 하려면 우선 알레고리적으로 시가 정의, 사랑, 민주, 자유 등의 관념적, 철학적 이미지를 원천적으로 내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시는 과연 이러한 윤리적이고도 희망적인 이미지만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고전적인 이미지 외, 저는 또 다른 이미지가 있음을 느낍니다. 그것은 동상들에서나, 소위 메이커제품들, 은행의 지폐 등에서 꿈틀거리는 권력내지 물리적 힘에 기대려는 시의 이미지입니다.
5천년 역사를 지닌 시는 21세기에 들어,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예측불가능한 시대로 불규칙적이고, 불균형적인 문화위기의 시대입니다. 詩, 홀로 이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럼, 현대시가 품고 있는 오류는 과연 무엇일까요? 만약 시가 과오를 범했다면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저는 과오나 속죄 그리고 손실이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미완성 혹은 미숙, 공포, 회의, 후퇴 등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결국 망각과 죽음에 대항해 싸우는 창의성에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것들이지요. 덧붙여 시의 책임을 말할 때, 우린 시를 우리의 몸과 같은 유기체로 생각할 수 있냐하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예술 장르로서의 시가 시인을 떠나, 언어, 정적 등을 넘어 홀로 책임을 질 수 있을까하는 문제 말입니다. 저는 시가 정신적, 역사적인 산물임을 고려할 때, 시는 일종의 시스템, 즉 제도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소크라테스와 이온과의 대화를 정리한 플라톤의 대화록 중 ‘자석과 세 개의 쇠 반지의 비유’에 관한 이야기가 그 좋은 예가 되리라 봅니다. 즉, 신성함(La divinidad)에 해당하는 자석이 첫 번째 반지인 시인에게 영감을 주면 두 번째 반지인 음유시인(El rapsoda)이
그 시를 세 번째 반지인 민중(El demos)에게 전달해준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자연의 영역에 속하는 것 뿐 아니라 문화에 속하는 것까지도 모종의 시스템을 지니고 있습니다. 박테리아로부터 고래에 이르기까지, 파리 눈알에서부터 끝없는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시에 있어서는 단지 소리 한 마디, 이미지의 덧없는 광택, 창백한 꿈 한 자락, 반짝이는 아이디어 한 조각 등,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이 모여 냇물 같은 행을 이루고 합쳐져 강 같은 연이 되고, 바다라는 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이처럼 아주 간단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복잡한 것으로 전이되며, 간단한 것은 아주 작은 원자의 입자처럼 거의 空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문화는 이러한 우주법칙을 하나 둘 따르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복잡해진 자신이 세운 법칙을 스스로 파괴, 환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詩的 시스템에 가장 충실했던 시인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라울 곤살레스 투뇬이라 생각합니다. 그에게 있어 시란 곧, 시인, 시, 독자를 의미합니다. 즉, 상호 커뮤니케이션적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죠. 창작의 힘들이 모여 글이 되고, 글은 다시 독자에게, 그리고 마침내 작가에게 피드백이 되는 것입니다. 투뇬의 이론에 의하면, 지금의 독자는 아메노피스 4세의 “태양의 찬가”와 길마메쉬의 “대서사시” 등을 통해 일반적인 시적 시스템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며, 기타 중세의 음유시인들, 볼레로나 꼬리도 등과 랩, 탱고, 삼바, 보사노바 등 분류하기 힘들 만큼 많은 후기모더니즘 산물들, 기술적이고 정보적인 새로움, 반 서정시적 전위주의 등, 기타 여러 시대의 창작물들도 당연히 현대시에 포섭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와 현상세계 사이에는 끓임 없는 작용과 반작용이 존재합니다. 시의 입장에서 보면 현대물질주의 문명의 확장 분위기는 달갑지 않습니다. 시는 물질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제 이러한 간극의 극복을 위해 시인들 간에 모종의 합의가 있어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연의 변화는 대부분 자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이뤄집니다. 예술, 종교, 사회, 철학, 과학, 정신적, 물질적 문화에 있어서의 변화들 역시, 사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공격당하고 지워져버립니다. 사회적 선택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며, 권력 지향적입니다. 사회는 가치와 도덕윤리 그리고 기본적인 제도들을 그 사회를 위해 재생산 해냅니다. 그러나 시는 다릅니다. 순수하고 심미적인 예술장르로서의 시는 혁신을 주창해왔지만, 평면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약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아주 다른 두 개의 사고가 놓여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적, 역사적 보수주의에 의해 기만적인 형식을 채택하려는 사고이며 -그곳에선 계층과 단체 그리고 국가의 이익이 혼동 되고 맙니다.- 또 다른 하나는 끝없이 변화를 시도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발전을 꽤하려는 사고입니다.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사고인가는 명약관화합니다. 그리고 시의 책임 중 또 다른 하나는 명확하게 새로운 반사고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변증적으로 말하자면 바람직한 신테제의 도출을 위한 안티테제가 되겠지요. 이 안티테제는 이미 알려진 것보다 훨씬 능동적이며, 테제에 해당하는 기만적인 형식의 사고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그 주된 임무가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언어의 다양성을 위해 매일 미적 제안과 의문을 제기하는 적극적인 사고를 의미합니다. 사실 개념으로서의 반사고 자체는 오래 묵은 것입니다. 오래되지 않은 건 바로 그 시스템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반사고 작업에 역동적 화면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인가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기존의 시의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며 미래지향적인 비젼을 제시하는 혁신적 프로그램으로서의 반사고와 그것을 제도적으로 실행에 옮기려는 의지와 필요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모계사회로 환언하는 정도의 변화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 변화들은 기존의 시의 내용적인 면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 없이는 발전이 없겠지요. 창조적인 문제제기, 지식의 카테고리에 추가할 모든 것들이 합에 이르는 시의 변증에 최소한 타산지석내지 필요악 역할은 할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 할 수는 없습니다. 시는 살아있는 시스템, 즉 신진대사를 하는 유기체이며, 이 모든 것이 시가 풀어야할 과제요, 책임입니다. 수천 행의 “왕들의 책”, 단 일 행의 “그라피티의 시”……, 네루다, 로트레몽, 사포, 에밀리 디킨슨, 레오나르도 코엔…… 세상의 모든 시인들의 책임입니다. 지금은 동서의 모든 시인이 단결해야할 시점입니다. 한국의 존경하는 시인 여러분, 우리 모두 노력합시다. 시의 르네상스를 위해, 살 맛 날 문화세상을 위해!
구광렬
1986년 멕시코 문예지 『마침표(El Punto)』, 『마른 잉크(LaTinta Seca)』 등단
시집 : 『불맛』, 『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 외 장편소설 : 『뭄(Sr.Mum)』 외 오월문학상 NAM동인상, 멕시코 문협상 외
현 :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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