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 白起 ]
백기(白起)는 미읍(郿邑) 사람이다. 그는 용병(用兵)에 뛰어났으며 진 소왕(秦昭王)을 섬겼다. 소왕 13년에 백기는 좌서장(左庶長)이 되었으며, 군대를 이끌고서 한(韓)나라의 신성(新城)을 공격했다. 이해에 양후(穰侯)가 진(秦)나라에서 승상이 되었으며, 대역사(大力士)인 임비(任鄙)를 발탁해 한중(漢中)의 군수(郡守)로 삼았다.
그 이듬해, 백기는 좌경(左更)이 되었으며, 이궐(伊闕)에서 한,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공격해 24만 명을 참수하고, 또 위나라 장수인 공손희(公孫喜)를 포로로 잡았으며, 5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이 공로로 백기는 국위(國尉)가 되었다. 뒤이어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안읍(安邑)에서부터 동쪽을 취해 간하(乾河)에 이르렀다. 이듬해에 백기는 대량조(大良造)가 되었다. 위나라를 함락시켜 크고 작은 61성을 취했다. 이듬해에 객경(客卿)인 조(錯)와 원성(垣城)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5년 뒤에 백기는 조(趙)나라를 공격해서 광랑성(光狼城)을 함락시켰다.
7년 뒤에 백기는 초(楚)나라를 공격해 언(鄢), 등(鄧) 등 5성을 함락시켰다. 그 이듬해에 재차 초 나라를 공격해서 영(郢)을 함락시키고, 이릉(夷陵)을 불태웠으며, 동쪽으로 경릉(竟陵)에 이르렀다. 초 경양왕(楚頃襄王)은 두려워서 언영(鄢郢)을 떠나 동쪽의 진(陳)으로 옮겨갔다. 진나라는 영에다 남군(南郡)을 두었다. 이 공로로 백기는 무안군(武安君)이 되었다. 무안군은 승세를 타고서 또 무군(巫郡), 검중군(黔中郡)을 취했다.
진 소왕 34년에 백기는 위나라를 공격해 화양(華陽)을 함락시켰고, 망묘(芒卯)를 패주시켰으며,
삼진(三晉)의 장수를 포로로 사로잡고, 13만 명을 참수했다.
조나라의 장수 가언(賈偃)과 싸워서는 황하에다 가언의 병졸 2만 명을 수장시켰다.
소왕 43년에 백기는 한나라의 형성(陘城)을 공격해 5성을 함락시키고 5만 명을 참수했다.
소왕 44년에 백기는 남양(南陽) 태행산(太行山)의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공격해 끊어버렸다.
45년에 한나라의 야왕(野王)을 공격했다. 야왕이 항복하자 한나라에서 상당(上黨)으로 가는 길이 끊어졌다.
상당의 군수(郡守)인 풍정(馮亭)이 그곳의 백성들과 상의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한나라의 도성인 남정(南鄭)과 길이 끊어졌으니 한나라에서는 필히 우리를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秦)나라의 군대는 나날이 다가오고 있고 한나라에서는 맞이해 싸울 수가 없다. 허니, 상당 전체가 조나라에 귀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만약 조나라에서 우리들을 받아들인다면, 진나라는 분노하여 분명히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조나라가 공격을 받게 되면 반드시 한나라와 친교를 맺게 될 것인데, 한나라와 조나라가 하나가 된다면 진나라를 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보내어 조나라에 통지하니 조 효성왕(趙孝成王)은 평양군(平陽君), 평원군(平原君)과 숙의를 했다. 평양군은 “받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받아들인다면 화가 득보다 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평원군은 “받을 어떤 이유가 없는데도 한 군(郡)을 얻게 되는 것이니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 했다. 결국 조나라에서는 이를 받아들였으며, 풍정(馮亭)을 화양군(華陽君)으로 삼았다.
46년에 진나라는 한나라의 구지(緱氏), 인(藺)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47년에 진나라는 좌서장(左庶長) 왕흘(王齕)에게 한나라를 공격하게 해 상당을 취했다. 이에 상당의 백성들은 조나라로 달아났고, 조나라는 군대를 장평(長平)에 진주시켜 상당의 백성들을 안무(安撫)했다.
4월에 왕흘이 이 일로 해서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에서는 염파(廉頗)를 장수로 삼아 맞아 싸우게 했다. 조나라의 군사들이 진나라의 척후병(斥候兵)들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조나라의 비장(裨將) 가(茄)가 죽임을 당했다. 6월에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 군대를 격파해 2개의 요새를 취하고 4명의 위(尉)를 포로로 잡았다.
7월에 조나라 군대는 보루를 쌓고 수비했다. 진나라에서는 또 그 보루를 공격해 2명의 위(尉)를 포로로 잡아 진세(陣勢)를 허물고서 서쪽에 위치해 있던 보루를 취했다.
염파는 보루를 더욱 견고히 해 진나라 군대를 기다렸고, 진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조나라 군대는 보루를 나가지 않았다. 조나라 왕은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염파를 책망했다. 이때에 진나라 쪽에서는 승상인 응후(應侯)가 첩자들에게 천금(千金)을 휴대시켜 조나라로 가서 이간질하게 했다.
첩자들은 조나라로 가서 “진나라에서 두려워하는 바는 마복군(馬服君)의 아들인 조괄(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일 뿐이다. 염파는 상대하기가 쉽고, 또 머지않아서 항복할 것이다.”라는 말을 퍼뜨렸다.
조나라 왕은 이미 염파의 군대가 손실이 많을 뿐 아니라 싸움에 여러 차례 패배했는데도 만회하려 하지는 않고, 오히려 보루를 굳건히 하며 감히 싸우지 않으려는 것에 분통하고 있던 차에, 또 진나라에서 이간질하는 말까지 듣자, 곧 조괄로 하여금 염파를 대신하게 해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진나라 쪽에서는 조괄이 장군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은밀히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왕흘을 그의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그리고 군중에는 이러한 사실을 누설하는 자가 있다면 바로 사형에 처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조괄은 도착하자 바로 출병시켜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진나라 군대는 거짓으로 패주하면서 두 곳에 복병을 배치해 습격준비를 하게 했다.
조나라 군대는 이런 속사정도 모르고 추격해 진나라의 보루까지 이르렀다. 진나라의 보루는 함락되지 않았고, 이런 와중에 진나라의 복병 2만 5천 명이 조나라 군대의 후방을 차단했다. 또 진나라의 기병(騎兵) 5천 명이 진영 사이로 뚫고 들어와 조나라의 군대는 양분되었으며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 아울러 진나라 쪽에서는 경무장 병사들을 출동시켜 공격했다. 조나라 쪽에서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보루를 쌓아 견고하게 수비하면서 구원병을 기다렸다. 진나라 왕은 조나라 쪽의 식량 보급로가 끊어졌다는 전황보고를 받고서, 친히 하내(河內)로 행차해 그곳의 백성들에게 작위(爵位) 1등급씩을 내리면서 15세 이상 되는 남자들을 전원 징발해 장평(長平)으로 보내어 조나라 쪽의 구원병과 식량이 오는 것을 막았다.
9월에 이르자 조나라의 군사들은 밥을 먹어본 지가 46일째에 접어들어, 안으로 은밀히 서로를 죽여 잡아먹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진나라 군대를 공격해서 탈출하고자 4개의 부대를 만들어 4~5차례에 걸쳐 시도했지만 성공하지를 못했다.
마침내 조괄이 정예 병사들을 출병시켜 친히 싸웠지만 그 자신이 전사하고 말았다. 조괄이 죽자 그의 군대 40만 명이 무안군에게 투항했다. 무안군은 이 상황에 이르러서 심사숙고했다.['장평대전']
전에 상당을 함락시켰을 때 그곳의 사람들은 진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조나라로 귀순했다. 지금의 조나라 사졸들도 장차 마음을 바꿀 것이니 다 죽이지 않으면 뒤에 난을 일으킬 것이다.
이에 속임수를 써서 그들을 모두 구덩이에 매장해버렸으며, 단지 어린아이 240명만을 돌려보냈다. 이로써 전후(前後) 합쳐 참수되고 포로가 된 사람이 무려 45만 명에 달하니 조나라 사람들은 크게 공포에 떨었다.
48년 10월에 진나라는 다시 상당군(上黨郡)을 평정했다. 이어 진나라는 군대를 둘로 편성해서, 왕흘은 피뢰(皮牢)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사마경(司馬梗)은 태원(太原)을 평정했다.
한과 조 두 나라는 두려워서 소대(蘇代)에게 후한 예물로써 진나라의 승상 응후(應侯)를 달래게 했다.
“무안군(武安君)이 조괄(趙括)을 죽였습니까?” “그렇소이다.” “곧 한단(邯鄲)을 포위하실 작정입니까?” “그렇소이다.” “조나라가 망하면 진나라 왕은 천하의 제왕이 될 것이고 무안군은 삼공(三公)이 될 것입니다. 무안군은 진나라를 위해 전승(戰勝)해 70여 개의 성을 취했습니다. 남쪽으로는 언(鄢), 영(郢), 한중(漢中)을 평정했고, 북쪽으로는 조괄의 군대를 격파했으니, 비록 주공(周公), 소공(召公), 여망(呂望)의 공훈일지라도 이것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왕이 천하의 제왕이 되면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三公)이 될 것인데, 그대는 그보다 아랫자리에 서 계실 수 있습니까? 비록 그보다 아랫자리가 되지 않으려고 해도 좀처럼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일찍이 한나라를 공격해 형구(邢丘)를 포위하고 상당(上黨)을 곤경에 처하게 했는데, 상당의 백성들은 오히려 조나라로 귀부(歸附)했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이 진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조나라의 북쪽 지역의 사람들은 연(燕)나라로, 동쪽 지역의 사람들은 제(齊)나라로, 남쪽 지역의 사람들은 한과 위 나라로 귀부할 것인즉, 그대가 얻는 백성들은 얼마 되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한과 조 두 나라에게서 땅을 일부분 할양받는 것으로 일을 매듭지어 무안군의 공이 되지 못하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이에 응후가 진나라 왕에게 “진나라의 사졸들은 지금 피로한데, 만약에 한과 조 나라가 땅을 일부분 할양해 화평을 구하는 것을 허락해주신다면, 사졸들은 쉴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응낙해 한나라에서는 원옹(垣雍), 조나라에서는 여섯 개의 성을 할양받는 것으로써 강화했다. 이리하여 정월에 모두 군대를 철수시켰다. 뒤에 무안군이 이 내막을 듣게 되어, 응후와 틈이 생겼다.
9월에 진나라에서는 다시 출병시켜 오대부(五大夫) 왕릉(王陵)에게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에 무안군은 병이 들어 출정하지 못했다. 49년 정월에 왕릉이 한단을 공격했으나 별로 얻은 것이 없어 진나라에서는 지원군을 급파했다.
그러나 왕릉은 다섯 부대를 잃었을 뿐이었다. 무안군의 병에 조금 차도가 있자, 진나라 왕은 무안군에게 왕릉을 대신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안군은 사자(使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사양했다.
“한단은 실로 공격하기 쉬운 곳이 아니다. 또한 제후들의 구원군이 날로 다가오고 있는데 저 제후들은 우리 진나라를 원망한 지 오래되었다. 지금 우리 진나라는 비록 장평(長平)에서 적군을 격파했다고는 하지만, 사졸들 중에서 전사한 자가 과반수이므로 국내는 텅 비어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원정해 한단을 공격한다면 조나라와 제후의 군대들에게 협공을
당해 필히 패하고 말 것이다.”
이에 왕이 출정할 것을 친히 명했으나 무안군은 응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응후(應侯)로 하여금 청하게 했으나 그는 끝내 사양했다. 무안군은 병을 핑계대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진나라 왕은 왕릉을 왕흘(王齕)로 대체해 무려 8~9개월여에 걸쳐 한단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초 나라는 춘신군(春申君)에게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과 함께 수십만의 병력으로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무안군이 “진나라 왕은 나의 계모(計謀)를 듣지 않더니만 지금 어떠한가!”라고 탄식했다. 진나라 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무안군에게 출정할 것을 강요했으나 무안군은 병이 중하다고 하며 응하지 않았고 응후가 청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진나라 왕은 무안군을 면직(免職)시켜 사졸로 격하해서 음밀(陰密)로 옮겨가게 했다. 그러나 무안군은 병 때문에 바로 떠나지 못하고 석 달을 더 체류했다. 이때 제후들의 공격이 치열해졌고 진나라 군대는 거듭 퇴각했다. 급보를 알리는 사자들이 연일 함양에 이르렀다. 진나라 왕이 화가 나서 사람을 시켜 무안군 백기(白起)를 몰아내자, 그는 더 이상 함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무안군이 함양 서문(西門)에서 10리쯤 떨어진 두우(杜郵)에 이르렀을 때, 진 소왕(秦昭王)은 응후를 비롯한 군신들과 백기에 관해서 상의하면서 “백기가 떠날 때 불만에 가득 찬 원망하는 기색으로 말을 했다.”라고 말하고, 사자에게 검을 내리어 무안군에게 자결하게 했다.
무안군이 검으로 자결할 즈음 “내가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탄식하고, 이윽고 “나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장평의 전투에서 조나라 사졸 수십만이 항복했거늘 내가 속여서 구덩이에 묻어버렸으니, 내가 죽지 않는다면 누가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안군이 죽었을 때에는 진 소왕 50년 11월이었다. 비록 그가 죽었으나 그의 죄가 아니어서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고, 향읍(鄕邑)에서는 모두 그를 제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