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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 포항지진과 수능 시험 연기
교육평론 원고
안재오
1. 서론 : 포항 지진
2017년 11월 15일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에 경북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인해 많은 집들이 무너지고 차량들이 파손되고 인명의 피해가 있었다. 더욱이 문제는 지진이 일어난 날이 수능시험 하루 전 날이어서 수험생들의 문제가 발생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즉시 수능 시험을 1주일 연기한다는 결정을 내려 원래 예정일이던 11월 16일에서 11월 23일로 연기가 되었다. 지진으로 인한 수능 시험의 연기는 수능 시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형평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합리적인 대책이었다.
그런데 이 칼럼을 쓰게 된 동기는 “수능날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려고 이미 일주일 넘게 피임약을 먹어가며 생리 주기를 조절했는데 약을 계속 먹어도 괜찮은 지 걱정이 커진 것입니다” 라는 신문의 기사 때문이었다.
지진으로 처참하게 무너진 한동대 외벽
재난용품 다시 관심…”피임약 또 먹어야 하나” 걱정도
포항 지진 이후 재난대비용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온라인 쇼핑몰마다 앞다퉈 관련 제품을 내놓고 있습니다.
또 피임약을 먹어가며 생리 주기를 조절해 온 여학생들은 계속 약을 먹어도 괜찮은지 걱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이준흠 기자입니다.
수능 특수를 기대하던 각종 공연과 이벤트 업계 역시 타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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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수능 연기에 16일에 맞춰 컨디션을 조절했던 수험생, 특히 생리일까지 미룬 일부 여학생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수능날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려고 이미 일주일 넘게 피임약을 먹어가며 생리 주기를 조절했는데 약을 계속 먹어도 괜찮은 지 걱정이 커진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약을 중단하면 2~4일 안에 생리를 시작하기 때문에 여태 약을 먹던 사람은 계속 먹고, 수능일인 23일이 예정일이라면 늦어도 18일부터 복용하라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부작용 우려가 있어 병원에서 상담을 거친 뒤 복용 여부를 결정하는 게 좋습니다.
연합뉴스TV 이준흠입니다. (연합뉴스TV 11. 16일 기사)
수능 시험을 앞둔 여고생들이 피임약을 먹는 이유는 생리일을 조절하기 위해서 이다. 흔히 여성들이 생리일에 생체 리듬이 흐트러지고 생리통이 생기는 경우가 있어서 수험생들이 그런 불리한 상태를 피하기 위하여 피임약까지 먹어가며 최선의 수험 컨디션을 유지하려는 것은 한국같은 입시위주의 교육 여건에서 충분히 납득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처럼 여학생들이 피임약까지 복용하면서 전국적인 시험을 준비하는 나라는 분명히 정상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국가적인 시험은 우리 나라 역사에서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이다. 그리고 이번처럼 국가적인 재난을 당하면 과거 시험도 연기를 했다는 기록이 종종 나온다.
세종 31년인 1449년에 심한 가뭄으로 과거시험이 봄에서 가을로 연기됐다. 가뭄 피해로 가뜩이나 곡식이 부족한데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에 사람이 몰리면 도성의 식량이 금방 동날 것이란 우려에서였다. 실록에 따르면 한양(서울)에서 시험이 열리는 한성시(漢城試)에는 세종 때만 1000여 명의 응시자가 몰렸다. 이 숫자가 선조 때는 2000명, 인조 때는 4000명, 숙종 때 1만1000명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지방의 선비들은 과거시험을 몇 달 앞두고 상경했다. 한양에서 몇 달씩 하숙하며 시험을 준비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화폐가 유통되지 않았다. 지방의 선비들은 집에서 짠 베를 둘둘 말아 봇짐에 넣어 한양에 왔다. 이후 베를 조금씩 잘라서 팔아 식량을 사는 등 생활비를 충당했다. 흉년으로 곡식이 귀해진 마당에 서울에 몰려온 유생들이 식량을 사들이면 그만큼 백성들은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울 게 뻔했다. 이에 세종은 과거시험을 수확기인 가을로 미뤘다. 세종실록 125권에선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올해는 가뭄이 몹시 심해 볏곡이 잘되지 못했습니다. 백성이 이용할 수 없는 산림에서 새와 짐승이 곡식을 해치니 백성이 새와 짐승을 잡도록 허락해 주소서. 또 내년은 과거가 치러지는 해이므로 봄에 지방 생도들이 모두 서울에 모여들어 베를 팔아 식량을 사게 되면 반드시 곡식이 귀하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가을철에 시험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125권
[출처: 중앙일보] [열려라 공부] 배려 일깨운 ‘수능 연기’
과거시험도 흉년 들면 늦췄다. 2017. 12. 04 기사
세종실록 125권에는 가뭄과 흉년으로 인해 원래 봄으로 예정됐던 과거 시험을 가을로 미루게 된 과정이 설명돼 있다. [사진 문화재청]
2. 본론 : 학벌주의와 순응주의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선 시대에는 과거 수험생들이 모두 서울에 모여 시험을 보았고 그 수가 점점 늘어갔음을 알 수 있다. “세종 31년인 1449년에 심한 가뭄으로 과거시험이 봄에서 가을로 연기됐다. 가뭄 피해로 가뜩이나 곡식이 부족한데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에 사람이 몰리면 도성의 식량이 금방 동날 것이란 우려에서였다”.
조선시대에는 가뭄 때문에 과거 시험을 연기했고 오늘 날에는 지진 때문에 수능시험을 연기 했다는 것은 비슷하나 다른 점은 수능 시험의 연기로 말미암아 예정된 성형수술을 받지 못하거나 미뤄야 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수험생들의 글이 대거 올라왔다는 점이다.
한 수험생은 커뮤니티에 “수능 끝나고 쌍수(쌍꺼풀 수술)하려고 했는데 또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글을 남겼다. 수능 다음 날인 17일에 예약을 했다 미뤘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본격적인 다이어트를 위해 피트니스센터를 예약했던 박모 양도 “일주일 비용을 고스란히 날리게 됐다”고 씁쓸해 했다. 성형외과 등 병원들도 바뀐 수능 일정에 맞춰 수험생 진료 스케줄 재조정에 나섰다.
이런 국가적인 시험은 그러나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정신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물론 과거 시험은 주관식, 서술형이라서 오늘날의 수능시험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그것이 시험이라는 점에서는 근본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출제 경향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출 문제를 공부해야 하고 이를 준비시키는 기관들이 존재 한다는 것 등은 국가의 교육을 결국 과거 시험으로 통제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제 범위 역시 중국의 고전을 비롯한 당시 인정된 한정된 문서들에서 나온 다는 점에서 학벌주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여러 번 강조한 학벌주의 교육이란 출세하기 위해서 혹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학문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교육이 지배를 하게 되면 학문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고 수험생들은 항상 정답 혹은 높은 점수를 받는 데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나 독자적인 사유를 전개할 기회는 적어지고 출제자들의 성향만을 고려하게 된다.
필자는 교육 평론 2008-4월호 월평 <창의력 교육의 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다윈은 적자생존을 말하였다. 가장 환경에 잘 적응하는 종만이 살아남아 번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환경은 항상 변한다. 변하는 환경에 늘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고와 생각이 바르고 빨라야 한다.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우리가 살아남기에 도움이 안 되는, 도리어 방해가 되는 덕목들이다. 고정관념에 대한 반성과 파괴력이 필요하다. 부단히 새로운 환경을 찾아 나서는 것이 창조력이다. 어제 맞던 생각이나 행동이 오늘은 맞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교육은 이런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창의력을 줄 수 없다. 암기식, 주입식 교육은 변화를 싫어한다. 이는 창조와 파괴 모두를 싫어한다. 수능시험 성적하나로 60만 학생을 줄세우는 학벌주의 교육은 변화와 창조를 거부한다. 그런데도 대학들은 오직 수능 성적 하나로 인재들을 평가한다.
이 평가는 지금도 고스란히 현실에 적용이 된다. 이런 획일적인 교육, 정답 위주의 교육, 출제자의 의도를 향한 공부 등은 인간 사고의 독립성과 창의성을 극도로 저해한다. 국가의 관리를 등용하기 위한 과거나 대학 입학의 자격을 평가하는 수능시험 등은 학벌주의 교육의 사례들로서 이런 학벌주의 교육 혹은 시험은 위의 제시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이는 부단히 변하는 현실의 올바른 인식을 방해한다. 그래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 생긴 것이고 최근에는 세월호 사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의 유학이 지도층들의 사고를 경직화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도덕과 명분을 중시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는데 도덕과 명분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 날 무렵의 일본은 토여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을 이룩했기 때문에 일본의 전력(戰力)이 극히 고조된 상태에 있었다. 이런 호전적인 무사와 지방 영주들의 에너지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외국, 즉 조선에 대한 침략으로 돌리려고 했다. 이런 주변 국가를 둘러싼 안보적인 현실을 제대로 인식 내지 인정하기 싫어한 조선 왕조는 결국 임진왜란이란 끔찍한 민족의 고통을 당해야 했다.
병자호란 시기 역시 이런 국제 안보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대의명분 즉, 명나라가 조선을 임진왜란 때 도와주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적국이다, 따라서 조선을 청나라와 화친을 맺으면 안 된다, 라는 형식논리와 대의명분에 얽메어 청나라의 군대와 싸우다가 결국 조선의 왕이 무릎을 꿇는 쓰라린 고난을 당했다. 자국의 위기 시에 도와준 나라, 즉 동맹국을 그들이 필요할 때 도와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한다. 그러나 그 나라도 망할 운명이고 그 나라를 도와 그 나라의 적국과 싸워봐야 자국이 패한다는 것을 안다면 의리를 버리고 과거의 동맹을 배신하는 것이 옳다. 즉 개인 간의 배신은 무조건 나쁘지만 국가 간의 배신은 그렇지 않다. 도덕보다 생존이 앞선다.
이처럼 획일적인 교육과 평가는 학문의 발전도 저해하고 국민들 하나 하나와 국가 지도자들의 판단력을 저해(沮害)시킨다. 결국 이런 교육이 나라를 망치게 한다. 이런 교육과 평가를 우리는 “학벌주의” 라고 규정을 했다.
과거시험이나 수능 시험 등이 이런 학벌주의 사고를 공고히 함을 말했다. 이번에는 주입식, 암기식의 집단적 사고의 폐해를 국내적인 경우에 보면 “세월호” 사건이 여기 적용된다. 이는 필자가 이미 교육평론에 두 번이나 게재한 경우라서 새로울 것이 없지만 한번 더 되새겨 본다면 이렇다. 이는 또 최근에도 비슷한 해난 사고가 발생했기에 다시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12월 3일 영흥도로 가던 낚싯배가 급유선과 충돌하여 22명의 승객 중 15명이 사망한 해난사고
“이번의 사고에서도 사망자들은 거의 모두 구명조끼를 입은 채 선체 안에 머물다가 변을 당했다. 세월호 때에도 구명조끼 하나 바라보고 안내인을 믿고 시키는 대로 선체 안에 머물다가 배가 전복되면서 참변을 당했다. 이는 한국에 만연한 집단적 사고의 위험을 보여주고 있다. 위기 시에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을 해야한다. 시키는 대로 하다가는 죽는다.“ 라고 필자는 어떤 SNS에서 썼다. 학벌주의 사고가 무서운 것은 이처럼 개인이나 국가나 그들의 위기(crisis) 때이다. 이런 때는 정말 교과서적인 사고, 정답이 있는 사고가 통하지 않는다. 이런 때는 당국이나 조직과 기관원들의 지시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정답이나 출제자의 의도가 없다. 이런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학벌주의 교육은 자꾸 출제자의 의도나 정답을 찾도록 만든다.
물론 수학이나 과학 문제 등에 정답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제의 유형을 알아야 정답을 잘 찾을 수 있다는 면에서 이 역시 학벌주의 사고를 키우게 한다.
세월호 사건은 정답위주의 교육, 주입식 교육의 피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세월호 유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거듭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 불확실하다, 정부의 조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이 모호하다 등을 가지고 수차례에 걸쳐 거세게 항의를 했다. 이에 맞추어 정부도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기도 하고 국정조사를 하기도 하고 별 짓을 다해도 의심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영흥도 낚싯배의 충돌-침몰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정부나 대통령이 사건을 빨리 보고받고 이를 지켜보고 또 뭐라 뭐라 지시를 내리는 쇼를 했어도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즉 국가적인 중대한 재난 사고의 경우 대통령이 이를 즉시 인지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는 하나 이것이 사건의 해결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고가 일어난 요소들을 근본적으로 고치치 않으면 그런 사고는 또 일어난다. 이 번 낚싯배 사고는 그런 것을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 당시 해경의 무능을 비판하여 이를 해체하기 까지 했다. 그 뒤 다시 해경이 살아나기는 했지만 이 조직은 크게 변혁이 안 되었다.
해경은 사고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쳤다.
세월호 비극의 가장 큰 문제는 배가 침몰하고 있어도 “안전한 배 안에서 가만히 있어라”고 한 선내 방송과 이를 듣고 가만히 있던 교사들과 학생들이었다. 즉 위기를 맞이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권위자의 말에 순종한 무비판적-순응적-집단적 사고 방식이었다. 이를 필자는 필자의 저서 <한국 교육비판>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필자의 저서 <한국교육비판> 여기서 필자는 한국의 학벌주의 교육이 순응주의를 낳는다는 것을 밝혔다.
“아이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주는 이런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의 또 다른 문제는 이런 교육이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일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산출하는 것은 모두 독창성 없는 베끼기나 모조품 등이다. 일류대, 일류학과를 나온 이 사회의 엘리트들이 하는 짓이 도둑질이요 부정부패요, IMF위기인 것이다. <주간 현대 2003년 8월 10일> 자에서 재미(在美) 정치 평론가인 조영환씨는 입시중심의 교육이 어떤 사회적 폐단을 끼치는지를 아래와 같이 신랄하게 비판한다 :
“기존 지식과 정보를 악랄하게 외워야 법대와 의대에 진학하는 교육은 개인 출세의 지름길이 될 지는 몰라도 국가 발전의 방해물이 될 수 있다. 한참 상상력이 높은 학생들을 몇 권의 교과서에 가두는 교육 자체가 곧 망국을 촉진할 수 있다. 입시교육에 필요한 것은 악랄하게 외우는 것이다. 소위 근면과 성실이 입시교육에서 성공하는 길이다. 그러나 근면과 성실은 디지털 시대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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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주간 현대>의 글에서 조영환씨는 또 “한국 교육은 학생들의 문제 해결 능력과 창의성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한다. 한국 교육은 체제에 안주하는 순응주의자들을 키워내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살인적 암기경쟁에 의존하는 한국의 입시교육은 인간의 창의성과 즉흥성을 제거한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필자의 입장과 일치하는 생각이다. 순응주의자(Conformist)들은 결코 기존의 관행이나 습관을 바꾸지 못한다. 이들은 진정 독자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 항상 그가 속한 집단이나 조직의 지침을 순종하고 특히 권력자나 상급자의 말은 비판 없이 수용한다“. <한국 교육비판 87~88>
하여간 수능 시험을 비롯한 각종 국가적 시험은 이런 위험 즉 정답과 출제 유형 그리고 출제자의 의도를 추적하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사고, 주체적인 사고 더 나아가 창조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위에서 필자가 쓴 것처럼 위기 시에는 “시키는대로 하면 죽는다” 가 한국의 현실이다. 물론 비행기 안에서는 승무원들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만 진짜 비상시에는 이와 다를 수 있다. 상급자나 당국의 지시를 무조건 비판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 역시 잘못을 범할 수 있고 최종 결정은 개인이 독자적으로 내려야 한다는 말이다. 전통이나 관습 혹은 상급자나 윗사람의 말이 대개는 옳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독자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결단하는 주체적인 사고, 창조적인 사고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에서의 교육은 이런 주체적, 독자적, 창조적인 사고를 키워주지 않는다.
위 인용문에서 조영환씨가 말하는 것처럼 “살인적 암기경쟁에 의존하는 한국의 입시교육은 인간의 창의성과 즉흥성을 제거한다”. 이 즉흥성은 위기의 순간에는 습관이나 상급자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순응주의자들은 항상 그가 속한 집단이나 조직의 지침을 순종하고 특히 권력자나 상급자의 말은 비판 없이 수용한다. 이런 순응주의가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 세월호 사건이었다. 즉 학벌주의 교육이 순응주의자를 양산한다.
3. 결론 - 독자적인 사고 창조적인 사고의 함양을 위하여
위 단락에서 필자는 획일적인 교육과 평가 시스템이 결국 인간 사유의 독립성과 창의성을 제거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순응주의를 양산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순응주의는 위기와 국가적 재난의 시기에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순응주의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관습이나 상급자 혹은 권위자의 명령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현실의 급박한 상황은 급박한 행동을 요구한다. 아니 그 이전에 올바른 상황 인식이 필요하다.
이를 극복하고 독립적, 주체적, 창의적인 사고를 위해서는 결국 교육 개혁 밖에 길이 없다. 이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수능 시험 개선이나 영어 절대 평가 혹은 논술 시험, 특목고 설립 내지 폐지, 혹은 입학사정관 도입 등의 얄팍한 개선으로 되지 않는다. 헌법을 바꾸고 공화국을 새로 세우는 정도의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교육의 주체를 국가로 바꾸어야 한다. 사교육을 폐지하자는 말이 아니라 제헌 헌법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제헌헌법 第16條 모든 國民은 均等하게 敎育을 받을 權利가 있다. 적어도 初等敎育은 義務的이며 無償으로 한다. 모든 敎育機關은 國家의 監督을 받으며 敎育制度는 法律로써 定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제헌헌법이 현 독일 헌법과 거의 같으며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감독권을 명시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한국 헌법은 그 후 여러 번의 개정을 거치면서 점차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감독권은 사라지고 사립학교의 자율성만 증대시켰다는 점이다“. <한국교육비판 288>
우리 나라처럼 사학(私學)이 교육에 큰 기여를 한 경우 이를 모두 폐지시킬 수는 없고 단 재정을 지원하고 감독만 정부가 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학원 등도 마찬가지로 하면 된다. 학교 교육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학원 등의 사교육은 저절로 줄어들 것이다.
수능 시험은 폐지를 하고 독일처럼 고등학교 졸업시험(아비투어)을 대학 입학 자격으로 보면 된다. 물론 이 경우 명문대학에 몰릴 수 있지만 대학 자체의 테스트를 통해서 대학 정원은 자율적으로 조정이 될 수 있다.
흙수저, 금수저론이 널리 퍼지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진 오늘 날 한국 사회는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극적인 교육 개혁, 사회 개혁의 요구가 분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