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날 이야기 -99-
(아버지에 대한 추억 -1- )
누구나 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도 아버지에 대
하여 존 경과 그리움과 원망등 수많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번 나의 형님
께서 아버지의 유고를 정리하여 나의 카페에 올려 주셨다.
유고를 읽으면서 아버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으며 또한 아버지의 살아오신
과거에 대하여 내가 미처 몰랐던 많은 것을 알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그늘
이 나에게 끼친 영향이 너무나 컸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으며 아버지 생전에 좀더 아
버지를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너무나 송구스러운 생각에 아버지의 유고를 근거삼아
아버지를 회상하며 이글을 써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바치기로 한다.
아버지가 출생하신 곳은 충청북도이지만 할아버지 이전은 경상북도로서 13대조께
서 예천(醴泉)에서 의흥(義興)으로 또 청송(靑松)으로 이사하시고 그 어른의 증손
으로부터 6대를 계속해서 7효(孝)가 났다한다.
그로 인하여 순조(純祖)께서 8대조에게 통훈대부장락원정정평부 (通訓大夫掌樂院
正定平府使)로 7대조에 통정대부응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
旨兼經筵參贊官)으로 6대조에 가서 희선대부겸 동지중추부사돈의금(嘉善大夫兼同
知中樞府使敦義禁)으로 5대조에 가서는 대부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
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등 중행직을 내리시니 한때는 이름을 날리는 가문이었으
나 盛衰의 순이랄까 효문불번(孝門不繁)의 탓인지 그 후는 인물과 가세가 공히 궁
핍하여 비참할 정도로 쇠락했던 모양이다.
이에 할아버지께서는 고조부님의 산소가 괘등형(掛燈形)임을 상기하시고 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강아지 사건등) 결연히 경상북도 청송의 고향을 떠나 충청북도로
이주를 단행한 것이라 한다. 소위 남부여대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면서 여러날
을 거쳐 찾아온곳 이 충북괴산(槐山)이였다 한다.
충천북도 槐山은 풍광명미(風光明媚)하고 평 화안은(平和安檼)한 인심 좋은 고향
이었으나 빈한한 처지에 맨손으로 찾아온 타향에서의 생활은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한다. 아버지께서는 1905년6월15일 槐山邑 東部里에서 출생하셨다. 아버지의 어
린 시절은 가난한 집안일망정 할머님의 인자하신 보살핌으로 구김살 없이 잘 지내
셨다고 회고하시고 계셨다.
10살부터 3년 동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셨으며 12세가 되던 해에 신식학교에서
학생모집을 나왔으나 완고하신 할아버지께서는 일언지하(一言之下)로 거절을 하였
으나 선생님은 "한문도 좋지만 성인도 흥세출(興世出)이라」하지 않습니까. 시대변
천에 따라 신학문을 배워줘야 자손이 발전할 것이고 영화를 볼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말로 설득하여 할아버지가 마지못해 승낙을 하시게 되었으며 아버지께
서는 괴산공립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일본과의 합병초기여
서 학교가 군청소재지에 1개밖에 없었다 한다. 군수는 한인이고 교장은 일본인인데
출장에 동행이 되든지 연회에 동석이 되면 교장을 더 우대하는 시대였다.
대라우찌(寺內)총독의 무단정치로 인해 선생님들도 칼을 차고 제복에다 금태모자
를 쓰고 위세가 당당하였다 한다. 입학식날 교장이 일어로 말을 하고 한인선생이 우
리말로 통역을 하고 식이 끝난 뒤에 책과 과자까지 얻어갖고 좋아라고 돌아오셨다
한다.
다음날 등교해 보니 1학년에 상투올린 학생도 있고 20세 내외뿐만 아니라 집에 아
들딸이 있는 학생도 있었다 한다. 며칠후에 머리를 깎게 되는데 기계 끝에 상투가
뚝 떨어지니까 이것을 집어 들고 무어라 중얼거리며 (아마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고 했겠지. 눈물
을 닦고 싸가지고 가는 자도 있었으며 그것을 나이가 어린 애들은 놀려 대곤 하였
다 한다.
아버지께서는 그중 나이가 어린 편으로 정말 어린애 취급을 받지 않을수 없었지만
공부는 언제나 최우수한 성적이어서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고 급장까지 하게 되어
아버지한테는 모두가 특별히 대해 주었다 한다.
3학년 나이 15세 되던 해 기미년 3월초가 되자 만세를 부르자고 상급생(3.4학년)
이 모의를 하게 되는데 아버지께서는 3학년을 대표해 참의(參議)를 하게 되었다
한다.
31만세운동이 경기로부터 시작하여 전국 각지에 봉기하였으며 주모자는 용서 없
이 체포되어 수감된다는 소문이 났으나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감히 싸우자고 단단히 언약을 하였다 한다.
그러나 당일이 되니 할아버지의 엄명으로 외출을 불허하여 방안에서 한발 자국도
못나가고 갇혀 있었는데 집 앞으로 만세를 부르며 지나가는 군중을 문틈으로만 내
다보며 가슴을 조였던 것이 비록 부모님 때문이라 하지만 두고두고 오랫동안 부끄
러운 생각에 사로잡혀 한동안 학교를 가지 않으려했었다 한다.
그러나 엄한 할아버지의 마음을 거슬리지 못하여 등교했다 한다. 아마도 할아버지
께서는 종손이요 외아들인 아버지를 위험한 곳으로 내보낼 수 없었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충청북도에서 1923년 19세 때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30명의 졸
업생은 월봉 40원씩으로 각기 임지로 부임하였으나 아버지는 그중에서 성적이 제
일 우수하다 하여 조선공립보통학교훈도 명 옥천공립보통학교근무월봉42원(任朝
鮮公立普通校여 訓導命沃川公立普通學校勤務.給月俸42원)이란 사령장을 받고 첫
임지인 沃川에 부임을 하셨다 한다.
이때에 면장이 20원~30원 군속(郡屬)이 30원-35원이었고 그 당시 쌀 한말에 5
0전 송아지 한 마리 3원이었다 하니 아주 좋은 대우 였을 것이다. 그 후 충청북도
의 여러 학교를 돌아 다니시면서 교사로 근무하셨는데 충북 단양(丹陽)에 근무 하
실 때 나와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이 그곳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형님과 막내 여동생
은 沃川에서 태여났다.
아버지의 마지막 근무지인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대정리의 간이학교를 창설하시
고 근무하시다가 1938년 온 집안식구와 친척들을 인솔하고 신천지인 滿州로 이주
하게 된다.
滿洲에서도 학교교장으로 또 그 고장 유지로 지주로 사업가로 8년을 풍족한 생활
을 하시다가 해방과 더불어 그곳에 공들여 닦아 놓은 모든 것을 모두다 포기하시고
귀국하셨다. 다행이 한국에는 滿洲로 가기 전에 마지막 근무지였던 충청북도 沃川
의 두메산골에 가지고 있던 논밭과 산이 있었음으로 그곳에 다시 안주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귀국하신 후 교육계의 많은 분들이 다시 나오셔서 해방된 조국을 위하여
일하여 달라고 간청을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시고 시골에 파묻혀서 할 줄 모르는 농
사일을 할아버지로부터 핀잔을 받으시면 서도 85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두메산골
에서 사셨다.
이 옥천군 군북면 대정리는 정말로 두메산골이다. 앞에는 높은 고리산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열두 봉우리를 만들며 끝자락에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으며 서쪽에서
북쪽으로는 충청남도 경계선을 만들며 한 구비 휘돌아 방화산을 만들고 그 끝자락
에서 역행한 산줄기 하나가 우리 집이 있는 안터로 그 앞은 산줄기 위에서 냇물이
휘돌라 흘러내려가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풍수지리로 이 터가 鄭鑑錄에 나와있는 피난처의 터라 하시어
산을 사셨고 그 앞에 있는 논밭을 사 놓으셨다 한다.
그래서 인지 그 처참했던 6.25전란에서 우리 식구는 물론 친척들이 한사람도 다
치지 않았기에 더욱 할아버지의 말씀이 실감나게 하였다.
나의 아버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