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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적 비 제 막
광 산 도봉공파 김 씨
양간공(대파) ‧ 퇴촌공(중파) 담암공(입향조) ‧ 도봉공(소파)
⊙ 일 자 : 2009년 6월 28일
⊙ 장 소 : 경북 안동시 풍천면 신성동 덕신애
⊙ 편집과 글쓴이 : 김선국
광산김씨 대종회 홈페이지 http://www.kwangsanki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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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식 순
2. 종 훈
3. 종 가
4. 표 어
5. 항 렬
6. 퇴촌공파 세계도
7. 사적비 건립에 대하여
8. 제막식 초대
9. 사적비문 전․후면
10. 사적비 석물축문
11. 광김성지 평장
12. 5대 파조
양간공파, 낭장동정공, 문숙공, 문정공, 사온직장공
13. 퇴촌공 휘 열
14. 충목공 휘 여석
15. 담암공 휘 용석
16. 담암공 유허비
17. 담암공 묘사절요
18. 담암공 묘사진설도
19. 도봉공 휘 득렴
20. 추기경 휘 수환
21. 안동구담 담암공 후손 도봉공파 후예들
22. 수목장
식 순
◦ 종 기 입 장
◦ 사 적 비 제 막
◦ 기 념 식 수
◦ 국 민 의 례
◦ 5대조 양위분 봉분 합토 예식
◦ 환 영 인 사
◦ 축 사
◦ 사 적 비 건 립
경위보고 및 이용방법
◦ 발 원 문 수 집
◦ 감 사 제 사
◦ 음 복
퇴촌공파 세계도
연(양간공파조) 규(낭장동정공파조) 주정(문숙공파조) 수(감찰어사)
태현(문정공파조) 태일(통사참군)
17세 천리(밀직 부사) 안리(판서) 성리(사온승) 영리(군기감사) 광리(전리판서) 영(사온직장공파조)
19세 숭지(전직) 탄지(서령) 약시(충정공 두문72현) 약황(대사성) 약채(관찰사) 화(현감)
21세 효려(증 참판) 효원 달손(직장 증 참판) 달전(공신 지평) 달도(영흥판관) 철산(광성부원군)
23세 부(생,륜,신,인) 부(필,의) 인석 용석(호 담암 성균진사) 이석(공조정랑) 여석(충목고 이조판서)
24세 지(참봉) 관․범․주(진사) 시(성주목사) 균(습독관) 황(진사)
25세 언박(진사) 언령(군자감판관) 언기(호유일재) 언수(생원) 언구(호 쌍벽당) 언련(장사랑)
26세 익(참봉) 득의(청취헌) 득연(갈봉공의병) 대희 득려(잠계) 득률 득렴(도봉공의병)
27세 인수(군자감검정) 광원(호석당진사) 광주(생원) 여종(귀산검사) 백웅(의병제장) 함
28세 옥구(호당곡 (당곡공파조)
24세 기(참봉) 당(사마) 장(예조참의) 상(참봉)
27세 대주(도호부사) 상지(통덕랑) 경조(호 퇴유헌 세마)
(이괄난 공 해평군) (세마공파조)
27세 수일(증 통정) 효일(승사랑) 충일 대일(증 검정) 경일(현감) 선일(호 난곡 증 참판)
28세 건(첨중추, 중추공파조) 영 (겸절 교위공파조)
22세 주(호 지헌 판관) 지(호 도남공 하양현감) 격(사복시정)
23세 향(평양 판관) 광주(평야서윤) 호문(호 우재 현감)
24세 기(호 남호) 우관(호 율포 좌부장) 환(호 송암 판관)
(남호 공파조) (율포공파조) (송암공파조)
23세 원우(부사직) 우근(사헌부감찰 증 참판) 우서(역호당 대사성)
(부사직 공파조) (감찰공파조) (대사성공파조)
사적비 건립에 대하여
<비문 건립 동기>
우리 가문의 분파조 (행두, 35대)께서 가업창업의 문호를 여신지 이백여년의 역사입니다.
담암선조(입향조)의 명망과 선조들의 음덕으로 번성해 왔던 집안들이 동서남북으로 떠난 지금 고향을 지키고 있는 집안은 없습니다. 오직 깊은 산중에 영면하고 계신 선조들의 유택만이 연중 한 두 차례 찾아오는 자손에게 옛 영화를 일깨워 줄뿐입니다.
고령의 주손 내외분만이 고향을 지키고 종사를 받들고 계시니 위안 중의 위안입니다. 객지에서 태어난 자손들이 근본을 찾아 부모의 고향을 찾는다 해도 이백년 세거지의 우리 가문을 기억해줄 분들의 여생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두세기 동안 영화와 번영을 누려온 한 가문이 떠난 고향 땅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누구나 인생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큰집 형님(선익)이 주손답게 큰 단안을 내렸습니다.
아버지가 고령(88세)이지만 아직 근력이 있으시고 또 금년에 윤달이 든 해라 길일을 잡아 아버지 살아 생전에 선조들의 추모비를 세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경비 문제를 논하자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대순의 사업이 번창한 것이 조상의 음덕이라 그 덕에 보답하기 위해 대순이가 경비 일체를 제공할 것이니 집안들에 폐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건립과정>
비를 세울 터도 이미 작업해 놓았고, 비문을 지을 사람도 선정해 놓았으니 가문 내력의 자료를 정리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료 수집 정리가 절반의 일인데 그럴 바에는 내가 쓰겠노라 청했습니다.
고려, 조선 조 때 출사한 선조 오천칠백여명의 이력을 기록한 [광산김씨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용이 어렵게 되어있어 누구라도 알아보기 위해 재편집하는 과정에 신도비, 묘갈문 등 수많은 비문의 내역을 정리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도비나 묘갈문 등은 입신한 고인의 업적을 드러내고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세우는 기념비입니다. (조선조 : 3품 이상은 신도비, 이하는 묘갈문)
이런 비문을 조선 초기에는 타 가문의 입신하여 명망있는 분이 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후기에 이르러 종친일지라도 문행이 있거나 명망이 있는 후손이 써도 무방하는 변찬사를 알 수 있습니다.
비문도 쓰는 공식이 정해져 있어 이 분야에 관심있는 분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신도비나 유허비는 글자수에 제한을 받지 않고 쓰지만, 우리 사적비에는 들어갈 글자수가 150자 내외로 정해 함축성있는 작문을 하라고 하니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비문 전면에는 가문의 근원과 비를 세우게 된 명(銘:알리다, 경계하다)을 작문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비 후면에는 분파조를 시작으로 직계 모든 후손과 배우자까지 기록하였습니다. 이백년 세거지에 후손은 살지 않지만 선조들의 넋이 서려있는 곳이요, 생존해 계신 절반이 태어난 고향이라 이름을 새겨 후손들에 화목하고 단합된 조상상의 면모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적비도 세월이 흐르면 추모단이 될 것이고 가문의 성역으로 자자손손 계승될 것입니다.
사적비를 중심으로 가문의 모든 의식들이 이루어질 것이고 후손들은 가풍을 계승할 것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장례문화(수목장, 화장)로 사용될 용도와 돌아가신 분을 염두에 두고 비문을 작성하니 추도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비문에는 살아계시는 분이 대부분인데 비문의 본질과 작문의 내용이 동떨어졌습니다.
큰 고모부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더니 살아있는 사람의 중심이니 사적비로 표기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추모에 대한 작문은 쓸데없게 되었고 다시 사적비 명에 대한 작문이 현 비문입니다.
비문이 완성된 후 대구 향교에 봉사하시는 종친 대부님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주손가에서 분파 소종손가(小宗孫家)로, 그리고 회전>
민법은 가족(또는 혈족)을 8촌까지 인정하고 6촌까지 혼인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8촌까지 가족관계가 지속되며 9촌부터 일가라 호칭하며 일가를 거느리는 주손은 위상이 분파종손가(이하 종손이라 칭함)로 바뀝니다.
우리 가문도 대순이 자녀와 선준이 자녀가 10촌간이라 주손가에서 종손가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 있습니다.
종가로 위상이 격상될 주손은 집안과 일가를 합심일체(合心一體)로 이끌 수 있는 구심점을 마련해 집안에 활력소를 불어 넣을 수 있는 책무도 있습니다.
여타 가문이 시작한적 없는 우리 문중이 처음 시도하는 족보 사적비 건립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화합과 결속을 다지는 구심점 역할을 할 것입니다.
검은돌(오석)의 우람한 위용을 와서 보십시오.
혈족의 이름을 돌에 새기니 바위 족보가 되어 고귀(高貴)한 일족이 되었구나.
자자손손에게 화합과 축복의 마당을 열었으니 품위있는 조상이로구나.
수 백 년 세월의 풍상속에 의연하게 버티어낼 생명의 근원을 알리는 족보비여!
참배하는 후손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오고가는 길손은 "예문종가(禮門宗家)의 광김이 또 다른 모범을 보이구나" 하는 칭송소리 또한 끊임없이 울려 퍼지리라.
먼 후일 얼굴 모르는 후손이 한 자리에 모여 [숭조돈목(崇祖敦睦)],[가전충효(家傳忠孝)],[예본덕행(禮本德行)]의 종훈(宗訓)을 생활의 실천으로 고매하고 큰 사람이 될 인재가 수도없이 태어나 큰 축복을 받을 것이니 사적비는 만복 발원처의 명성으로 천하에 알려지리라.
2009년 6월 28일 사적비의 제막식으로 종가로 집입하는 귀틀을 다지고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는 날이 될 것이다.
3대 양위분의 묘사를 받들 회전(會奠)을 열 논의도 필요합니다.
가문의 번영과 외손 집안들의 번영을 위해 하느님과 조상님께 감사드리며 축복을 청하는 의식을 올리니 오셔서 함께 참배드리고 기쁨을 나누며 각 가정의 안녕과 번영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소서.
<만복 발원처>
축복받은 자신을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로 만드신 분이 부모님이요, 생명의 근원을 알려주는 족보비는 만복 발원처라 할 수 있습니다.
양(陽:살아계신 분)과 음(陰:돌아가신 조상님)의 조화로 이루어진 세상에 단 하나 우리만의 사적비는 상서로운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발원문을 통해 자신의 이름에 기운(氣運)을 불어넣는 의식(儀式)으로서 음덕(陰德)의 에너지가 넘치는 생명력을 지닌 족보비로 변하였습니다.
사적비 한번의 참배에 이백열다섯분의 거대한 에너지로 뭉쳐진 덕담을 가슴속에 담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족의 염원으로 뭉쳐진 상서로운 기운은 자자손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안식처의 등대 역할을 할 것 입니다.
부모에 효도하고 이웃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로 사회에 존경을 받은 인재가 수없이 나온다면 사적비는 만복발원처로 세상의 이목이 집중될 것입니다.
(이용방법)
‧ 바라던 소원이 한 단계씩 성취될 때마다 조상님의 음덕에 감사하는 참배를 드리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 가십시오.
‧ 사적비에 기록된 직계손과 출가손의 자녀는 고인의 산소 흙 한줌을 가져다 비 주위에 뿌려주십시오.
‧ 매장을 원하는 집안의 유족은 매장 후 산소 흙 한 줌을 가져다가 사적비 주위에 뿌려 주십시오.
‧ 화장을 하는 집안의 유족은 고인의 분골(粉骨)을 사적비 주위 나무에 수목장을 하든 산포를 하든 자유의사 입니다.
‧ 출가인 내외분도 고인이 된 후 사적비를 이용하셔도 무방합니다.
2009년 6월 1일 침락회 총무 선국 드림
광산김씨 도봉공파 사적비
신라국 왕자 휘 흥자광자 공께서 국난을 피하시어 광산 서일동에서 백성속에 묻히시니
광산김씨의 시조공이시다.
휘 연(14대)은 양간공파조이시며 5대 대파조의 한 분이시다.
휘 열(20대)은 퇴촌공파조이시며 중 시조가 되신다.
휘 용석(23대)은 담암공파조이시며 한양에 거하시다 구담에서 문호를 여신 입향조이시다.
휘 득렴(26대)은 도봉공파조이시며 우리 집안의 파조이시다.
휘 행두(35대)는 집안분파조이시며 주손 대순(42대)의 자녀까지 8대로 이어진다.
입향조 유허비가 낙동강변 구담 중심에 우뚝 솟아 길손들에 가문의 내력을 알리니
집안의 소개는 여기서 그친다.
명(銘)하노라
봉화산 키뫼벌에 가업창립 이백여년 문호창성 하였건만,
일족 떠난 고향 산천 인걸은 간데없고 흔적조차 지워졌네.
선조들의 유택만이 외롭게 옛 영화를 말씀하니 애닮구나!
후손들이 근본을 잊지 않고 불효를 경계하려 바위에 새겨 일깨우노라.
너희 조상들의 넋이 만복 발원처
안동 풍천 신성 덕신애 사적비(事蹟碑)에 함께 머무르신다.
오너라. 참배의 길은 힘겨워도 너는 하는 일마다 큰 축복을 받으리라.
시중 차남 선국 글
2009년 6월 28일
가족 성명(비후면부)
35세 행두(도협 넷째)
36세 창헌
37세 영규
38세 응수, 동수
39세 용득(이노미), 용화(김한이, 전옥란), 용징(배복남),
(응수) 용욱(박장희), 윤익현(용희), 장영문(용태),
(동수) 용준(박필교), 용성(노주덕, 강끝분), 용락(이사임),
용규(고돌석), 노재학(용연)
40세 시중(이춘희), 점중(서외향), 김홍식(희중, 홍윤식),
(응수) 권석기(순중), 고정열(양묘), 태중(김인숙),해중(조이호),
성중(김경순), 완중(고옥란) 석중(권기옥), 정재락(정숙),
남영기(점순), 학중(양화옥), 배용열(영숙), 춘중(이명진),
김태진(덕중), 혜숙, 진숙, 혁중, 익중
(동수) 건중(배원근), 억중, 김국환(분중), 이명수(영중),
권대성(정강), 원중(이옥희), 안한진(매희), 이용기(현중),
신예현(명중), 권오현(명자), 김택현(점자), 유현감(춘자),
노민갑(현자), 서윤재(현미), 갑중(현복순), 창중(조애신),
호중(이명순), 윤중(윤정옥), 장성규(계중), 손성호(정중),
남병숙(점화), 상중(김선희), 진환(김현옥), 이일룡(옥중),
김대연(향중), 김상용(정중), 박수철(월중)
41세 선익(신육숙), 선국(박명희), 선용(김교화),
(응수) 김상희(계숙), 선오(박미희), 김상수(선행), 선우(김유경),
선홍(김혜원) 신세원(미영), 선희(황연화), 선호(김민정),
선대(남영인), 선일, 선주, 은주, 미경, 이이구(선미), 선학,
선기(하영주), 선봉, 선황, 선구, 송희, 선도, 지애, 선규,
윤지, 선엽, 선준
(동수) 선규, 김윤태(선자), 장화수(선민), 선웅, 탁성국(선영),
최민재(미선), 곽경수(선교), 선향, 선준(이영주), 장미,
대근(김미자), 최성용(선화), 정원재(선희), 정윤, 선경,
선욱, 다운, 선우, 호진
42세 대순(정영미), 손인동(연순), 지현, 원현, 유순, 태순, 주영,
기영, 창민, 인순, 영은, 재욱, 효주, 유선, 서이, 서하, 태훈
43세 예다
건립위원 : 점중, 선용, 성중, 춘중, 혁중, 건중, 원중, 창중, 호중, 상중
건립자 주손 : 시중, 선익, 대순
사적비 제막식 초대
서울,대구 총무 문안인사 드립니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생존하기 힘든 세상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가문 각 집안의 안녕과 후손들의 번영을 위한 사적비를 제작하여 하느님과 조상님께
소망과 감사의 제사를 드릴 예정입니다.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각 자신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 고귀한 선조로서 영구히 보존하는,
본인들에게는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영광스러운 행사가 될 것입니다.
가문의 화목과 번영을 위해 모든 비용은 큰집 주손 대순이가 제공하오니
부담없는 마음으로 참석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인쇄물로 대체하오니 상세히 읽어 보십시오.
장소 : 경북 안동군 풍천면 신성동 덕신애(제궁뒤)
일시 : 09년 6월 28일, 일요일(당일치기) 제막시간 : 오젼 11시(시간엄수)
지참물 : 복장 정장, 돗자리(자동차 소지자)
: 발원문(아래설명)
오시는길 : 신성에서 구호방면 - 홍정자 지나 120m쯤 탐마 들어가는
다리건너 ->바로 좌회전 ->제궁 뒤 800m지점
침락회 회비 : 오만원 예상
◎식사준비 관계로 참석 여부를 총무에게 알려주십시오.
※발원문 ?
오실때 직계손이든 출가손이든 사적비명에 기록되어 있는 분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소망을 적어 오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내용은 현재나 미래 자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 즉 발원문( 덕담, 소망, 기도 등)을
생각나는 대로 간단하게 적어 봉투에 넣은 후 봉인해 주세요.(미성년자는 제외)
의식을 올린 후 봉인된 채 바로 태울것이니 다른 분들을 의식하지 말고
소신 것 소망의 내용을 꼭 적어오세요.(잘 탈 수 있는 종이에 적어 주세요.)
사적비 석물축(事蹟碑 石物祝)
유세차(維歲次) 서기 2009년 6월 28일 광산김씨 41대손 선ㅇ이가 인간의 길흉화복과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천지신명)과 음덕(陰德)으로 자손들의 발복을 베푸시는 조상님 전에 감히 밝혀 아뢰옵나이다.
분파조이신 35대 할아버지의 직계 후손들과 일가 어르신들이 함께 이 자리를 축하해 주시려고 오신 소중한 손님들이 함께 모여있사옵나이다.
조상님께서 안식처로 계시는 복지의 땅 경북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 덕신애 산중 언덕에서 문중의 족보 사적비를 세워 감사의 제막식 제사를 드리오니 미흡하오나 즐거이 받으옵소서.
분파조께서 키뫼벌을 세거지로 정하신 후 이백여년의 가풍을 이어 왔건만 안타깝게도 고령의 주손 내외분이 천수를 다하는 날 번성(繁盛)하던 문중의 집안이 한 집도 남아있지 않을 안타까운 현실의 빈 공간을 비보(裨補)책으로 사적비를 세웠나이다.
입향조 할아버지의 숭고한 뜻과 선조님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백년 세거지에 후손들의 사실(事實)이라도 남아있어야 풍성한 음덕으로 보살펴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고, 저희 자손들의 번영(繁榮)과 융성(隆盛)에 기력과 용기와 희망을 북돋우어 주기 위함이옵나이다.
저희들이 물려주신 터전을 지키지 못하고 동서남북으로 떠나살고 있지만 변함없는 음덕을 베푸시어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들이 되게 보살펴 주시옵고 행사에 참석하신 소중한 손님에게도 복을 주옵소서.
인간의 발복을 주관하시는 하느님(天地神明)과 음덕의 샘(泉)이신 조상님께 저희들의 염원을 졸필의 시(詩)로나마 고(告)하오니 즐거이 들어주시고 기억하시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혈족의 이름을 돌에 새기니 바위 족보가 되어
품위(品位)있는 일족이 되었구나.
자자손손에게 화합과 축복의 마당을 열었으니
고귀(高貴)한 조상이로구나.
수 백 년 세월의 풍상(風霜)속에 의연하게 버티어낼
생명의 근원을 알리는 족보비여!
참배(參拜)하는 후손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오고가는 길손은 "예문종가(禮門宗家)의 광김이 또 다른 모범을 보이구나" 하는 칭송소리 또한 끊임없이 울려 퍼지리라.
먼 후일 얼굴 모르는 후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숭조돈목(崇祖敦睦)][가전충효(家傳忠孝)],[예본덕행(禮本德行)]의 종훈(宗訓)을 생활의 실천으로
고매하고 큰 사람이 될 인재가 수 도 없이 태어나
큰 축복을 받을 것이니
사적비는 만복 발원처(發源處)의 명당으로
천하에 알려지리라.
상 향(尙 饗)
글쓴이 : 선국
광김(光金)의 성지(聖地) 평장동의 유래
광김의 성지(聖地)인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 지세의 형국과 복거하신 후의 유래를 상고해보면 평장동은 노령산맥의 태조봉을 줄기를 한 산이다.
서남쪽으로 몇 백리를 뻗어 내려온 산맥이 불태산(彿台山) 적은봉에 이르러 넓고 힘차게 펼치면서 형세가 깃발과 창과 칼을 세우는듯해 특이하면서도 아름답다.
38개의 장군봉으로 나뉘어져 크게 둘려 쌓여 수백리 흘러온 황룡강 물과 서로 안고 돌아가니 산과 물의 정기가 빼어나 또 한곳으로 뭉쳐 있으니 이곳이야 말로 지운이 솟구쳐 오르는 명지이다.
천하의 명당으로 문무겸전의 인물이 대를 이어날 명당으로 세인이 이르되 만고의 큰 터전이라 칭찬한다.
시조 왕자공(휘는 흥 자 광(興 字 光))의 단소에서 바라보이는 서석산(瑞石山)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도 웅장하며 연원이 길고 먼 강물이 서로 합쳐 흘러가니 산줄기와 물의 흐름이 살아서 움직이는 형상이라 집터나, 묘지에 분별없이 이곳이야 말로 자손만대에 문무(文武)와 부귀(富貴)가 끊이질 않은 명당이다.
이 지형의 국세를 비봉포난형(飛鳳抱卵形)으로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
소조봉인 대불산을 등지고 좌우로 산맥이 갈라져서 병풍을 펼쳐 놓은 것과 같고 좌측을 청용이라 이르니 단소(壇所)의 자리가 앞으로 뻗어 나가면서 좌우로 다시 산맥이 갈라져 우측 백호의 줄기가 여덟 겹이다.
좌측 청룡줄기는 일곱 겹으로 전체의 형국을 보면 단소의 안쪽이 태극형을 이루고 있다.
좌우의 청룡 백호가 양쪽 날개와 같기에 대불산 봉우리는 봉황의 머리에 비우해 전체 전경국세 봉황이 알을 품는 형상으로 표현한다.
이렇듯 산세가 웅대하고 좌우로 싸고돌아 금성철벽을 이루니 높은 벼슬자리가 대를 이을 것이고, 서남쪽 방향이 아름답게 빼어나 부귀공명은 하늘이 정한바요, 산봉우리마다 높고 고상하여 자자손손 후손이 흥왕하며 문필봉(文筆峰)이 겹겹이 쌓여 서로 비추니, 문장과 큰 선비가 많이 나고 문과급제자가 대대로 이어져 끊이지 않는 명지이다.
평장동(平章洞) 명기의 총평을 하면 안산인 서석산은 호남 제일의 명산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우뚝 솟아 사방을 제압할 기상을 띄었고, 손신방에 문수봉이 우뚝 솟아 큰 학자와 큰 선비와 고관대작 즉 정승판서가 끊이지 않을 명당중의 명당의 형국이다.
옛날 경문에 이르되 「건산건향(乾山乾向) 수류건(水流乾)」하면 「삼원불패지대지(三元不敗地對地)」라 하였다. 시조공의 단소는 우리 광 김이 대대손손 패하지 않을 대지이니 시조 왕자공의 밝게 살피심이 자손에 음덕을 끼치심이 크다 할 것이다.
평장동 지운의 여음으로 고려조 3세 휘 길께서 고려태조 왕 건이 삼국을 통일할 때 창업의 공훈을 세워 삼중대왕사공(정승직위 일품직)되시었다.
5세 휘 책은 문정공의 시호를 받으셨고, 7세 문안공 휘 양감께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로 추존되시었다. 그 후 크게 번창하여 14세에서 15세, 17세 이르러 5파로 분계되니 고려 왕조의 명신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15세 휘 태현)와 여조의 권신 (문숙공:14세 휘 주정)을 파조로 한 「문숙공파」, 첨의시랑 찬성사로 치사(致仕)한 양간공(휘, 14세 연)을 파조로 하는 「양간공파」, 낭장동정(14세 휘 규)을 파조로 한 「낭장동정공파」와 사온서직장을 지낸 17세 휘 영을 파조로 한 「사온직장공파」와 여타 파벌로 나눈 파로서 크게 번창하였다.
고려조에서 8대 12평장사(장관급 2품)와 조선조에 문묘에 배향되신 사계(長生) 신독재(集) 부자분과 청백리에 녹선 되신 분이 네 분, 정승을 지낸 오상신과 문형(대제학)을 지낸 여덟 분이 계신다.
부조의 은전을 받으신 분이 열세분이고, 봉신 시호를 받으신 분이 51명이요, 문과급제자(조선조) 265명으로 많은 인물과 큰 선비 유현들이 대대로 이어가니 광 김을 해동명벌(海東名閥:동방의 이름난 문벌의 집안)로 지칭하게 되었다.
이는 시조 왕자공께서 끼쳐주신 음덕과 평장동 지운이 상호 응기하여 우리 김씨는 신라 천년 사직의 제왕가요, 고려‧조선양조 천년에 정상가로 빛난 문벌로서 조선조 양반 계급제도 하에 타문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문으로 통칭되었다.
광산김씨종보 96. 9. 1.
9. 고려의 선조와 5대 파조
시조공 흥광(興光)
광산 김씨 시조공 흥자 광자께서는 신라국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으로 신라에 태어났다.
신라 말엽 나라가 어지러워짐을 미리 아시고 무진주 서일동에 옮겨와 사시면서 광산 김씨의 시조가 되시고 이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신라 45대 신무왕 3자라는 설과 49대 헌강왕 설이 있으나 어느 쪽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왕자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시조공이 뿌리내린 서일동에서 고려 때 후손들 중에서 평장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동명이 평장동으로 바뀌고 현 행정 주소는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이다.
2세 식
벼슬이 각간이니 평장사(정2품) 품질이다.
3세 길(佶)
고려 태조 왕건이 3국을 통일할 때 학행이 높고 지략이 뛰어난 공이 기위한 계책으로 왕건을 도와 민족통일을 도운 공으로 삼중대광사공을 지냈다.(고려사)
최근 학자들의 연구로 중국의 사서인 책부원기(중국 사료집)의 외신부 조공조 청태원년(934) 8월에 고려조 김길의 선박이 산동성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광산 김씨 약사)
4세 준(峻)
아버지는 길이며 벼슬은 삼중대광 좌복야(정2품)였다.
5세 책(策)
아버지는 준이며, 한림학사 평장사를 지내고 시호는 문정이다.
고려 광종 9년(958)에 처음으로 충당대 문을 열고 학문에 조예가 깊고 어진 선비를 뽑았다.
이때에 왕융과 서희와 김책 등 뛰어난 인재들이 모였다.(최자의 보한집 서문)
광종 15년(964) 3월에 한림학사 조익을 상시관으로 삼아 진사(進士)를 뽑을 때에 김책이 급제하니 광종이 덕천전에 거동하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김책에게 베옷을 벗게 하고 공복으로 갈아 입혀 잔치에 참여케 하였다.
잔치가 끝이 나고 헤어질 때에 말을 타고 의봉문을 나가도록 허락하였다.
급제한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의전의식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려사)
벼슬은 평장사(정2품 장관급)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시다.
6세 평장사 휘 정준
아버지는 문정공 책이다.
고려 정종 2년(1035) 전중시어사에 제수, 정종 7년 이부원 외랑과 권지승성(임시직)이 되다.
문종 4년(1049) 중추원사와 판어대사를 거쳐, 문종 8년에 참지정사, 문종 10년에 내사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문종 12년 평장사로 치사할 때 어구마 한 필을 하사받았다.
문종 12년(1051)에 식목도감 최충이 “급제한 이신석이 씨족을 기록치 아니하여 등조(登朝)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하였다.
시랑 김원충과 탄어대사 김정준이 아뢰기를 “씨족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그 조부의 과실이요, 신석의 죄가 아닌데 힘써 공부하여 임금의 연전에서 급제하였고 몸에 허물이 없으니 신하의 반열에 참여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께서는 공의 상소대로 등용시켰다.
7세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 양감
고려 전기의 문신이며 유현. 아버지는 평장사 정준이며 시호는 문안공이다.
문종 6년(1051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종 25년 「상서우승좌 간의대부」와「서북로병마부사」가 되었고 이듬해「상서좌승지어대사」로 제수되었다.
문종 27년 태복경이 되어 송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다.
문종 29년(1074년) 산기상시를 역임하고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부상서로 송나라 사신의 접반사가 되었다.
판상서병부사와 서경유수사주국을 겸하고 중추원사를 거쳐 좌복야가 되었다. 1083년 중서시랑 평장사로서 시정의 득실을 따졌다.
선종 4년(1086년) 문하시랑 평장사가 되어 이듬해 다시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으며, 판상서 호부사로서 그해 7월 선덕전에서 또다시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다.
12월에 수태위가 되고 여러 요직을 거쳐 수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송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학문을 널리 알리고 예절을 지키는 법도를 배웠고, 심오한 글과 깊은 뜻을 정자문에서 배웠고 태묘(왕가의 사당)와 태학(최고 학부 대성전)을 그려오고 경전(사서삼경)을 싣고 돌아와 성현의 연원을 닦고, 공자의 사당을 집 뒤에 세워 봄․가을 제사 지내니 동국문묘가 시작된 것이 처음이고 이로서「동박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송나라에서 돌아올 때 시인 소동파가 공에게 전별시를 지어 보냈다.
알거라 금마의 손님이 때로는 벽계방에 꿈꾸더라(似知金馬客時夢碧雞坊).
빙설은 난잡에 살아지고 연좌는 고향으로 풍기더라(氷雪消殘臘烟波瀉故鄕).
우는 말 방울소리 위의를 갖추었고 서서 있는 말은 오래도록 배회하네(鳴鐢自容與立馬久回).
비노니 삼한의 사신은 신도가 낙랑에 도착하리니(翔乞與三韓使新圖到樂浪).
유문(遺文) 1
병든 손이 한적한 절에 들리니(炳客投肅寺)
시원한 그늘이 상쾌하도다(淸陰滿意凉).
스님을 만나도 침묵이요(逢僧無一語)
바람은 푸른 연꽃 향기를 보내주네(風送碧荷香).
시2
세상일이 유유하니 마침내 무엇이 될꼬.(世事悠悠意若何)
부질없이 낙서대로 창파만 희롱하네.(謾將漁竹弄滄波)
이제 강남에서 또 이별하니.(如今又作江南別)
석양에 뱃노래 소리 더욱 구슬프다.(落日難堪廳槕歌)
성리학을 고려 사회에 실용학문으로 널리 보급한 공으로「동박이학의 조사」로 불리는 회헌 안유 선생께서 문안공에 드리는 감모시가 있다. 이 감모시는 안향 선생께서 양감공이 세운 공자의 사당을 보고 지은 시로 추론된다.
향과 등불을 밝혀 곳곳마다 부처에게 빌고(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통소와 젓대로 신령을 섬기도다.(簫管家家盡事神)
두 어 칸 공부자(孔夫子)의 사당이 홀로 서 있는데(獨有數間夫子廟)
봄 나무들은 뜰 안에 가득하고 인적은 적막하네.(滿庭春草寂無人)
․ 가학 태조 남능비명의 글은 전해 오고 있다.
실기 출화해사전동방 사문 연원록
김문안 선생의 이름은 양감이요 광주인이니 벼슬은 문화시중 감수국사요 평장사 정준의 아들이다.
원운곡이 말하기를 “기자께서 동방에 온 후 설총(홍유후)이 있었고 그 뒤에 최 문헌공(치원)이 중흥하였고 김문안공이 끊어져 가는 계통(系統)을 잇고 성현 연원의 묘를 세우고 중국에 들어가 경전을 가지고 와서 우리 동방후학의 길을 열어준 공이 컸다.
그 실천 궁행한 공부는 문집에 기재되어 있을 것인데 문집간행이 넓지 못하여 홍유후와 문헌공의 유집은 널리 전하여지지 못하였는데 또 정중부의 난리에 불타 없어졌다. 선비들도 그 유고를 얻어보지 못하였거늘 천박한 나의 식견으로 잘 알 수 없으니 중부사가 사문에 해를 끼침이 어찌 그리 혹심하였던고....”하였다.
김정이 범복애(북송 때 명신)께 보내는 글에 말하기를 “아! 나는 이유현 선생과 선고(先考: 영리(英利))에게 들었고 선생님과 선고는 운월재 문정 선생에게 들었으니 그 글이 이르되 ”우리 동방에 성도는 단군께서 아들을 도산에 조회하였으므로 처음 전하여 크게 밝았으니 오랑캐를 면하였다.
기자(箕子)께서 처음 오셔 중국의 도통을 전하고 오륜을 밝히므로 도를 지키고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많았다.
홍유후와 문원공의 도학이 가장 뛰어나서 학문의 탁월함이 적지 않으나 그 마음은 기자의 유풍, 여운에서 깨달았고 그 도는 경전에서 넓혔으나 이에 유지(遺旨)가 요령에 대강일 뿐이다.
김문안공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을 때 자세한 말과 깊은 뜻은 정자의 문하에서 받았으니 귀로 듣고 직접 배웠다.”
그러므로 문안공은 일찍이 말씀하시되 “내가 심법[心法:송대에 유학자가 심체(心體)를 존양(存養)하고 심용(心用)을 성찰(省察)]하는 도(道)는 본래 우리나라 선생에게 배웠으나 그 학문이 넓고 간략하며 자상하고 깊은 뜻은 송나라 정자 문하에서 친히 배웠고 소식(호 소동파) 선도(仙道)와 술석(불도)을 하니 이름은 유자(儒者)이나 행하는 것은 묵적(전국시대의 노나라 사람, 이단학설인 겸애설을 주장)이라, 진리를 좀먹고 문란케 하는 줄 알았으나 제후국(작은 나라) 사람으로 감히 그에게 거슬리지 못한 것은 그는 대국인(중국인)이라 서로 틈이 생기면 우리 나라에 근심을 끼칠까 염려하여 극히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문장과 충절은 가상함으로 내가 사랑하였고 소식(소동파)도 또한 나를 아껴준 일이 많았다 하였으니 한자(漢子: 유자)가 소주에서 수십일 곽주에서 태전당과 술 마신 일이 한자의 본뜻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하였으니 이 말은 대개 문안공을 사문의 정통이라 함이 지나침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이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 문안공의 유결(遺訣)이 불에 타고 전하여지지 못하였으니 사문(斯文)에 미친 화액이 어찌 그리 심한고.
간재 선생이 제자들을 명하여 노선생(불원재)이 원나라에 갔을 때 문안공이 송나라 정자와 문답한 말과 또 최문헌의 일을 수집하여 온 것을 <화해대사전>에 기입하였는데 사전(師全)도 또한 여러 번 난리를 겪었으므로 비슷한 말 한마디도 세상에 남아있지 아니하였다.
다행히 들으니 법문정(복애)이 원처사(元處士)와 같이 약간 남은 글을 보관한다 하기에 글을 올린다 하였다.
비록 문안공의 사적에 그럴 만한 문헌은 얻지 못하였으나 편말에 기록하여 사문에 만 분의 일이라도 발명될까 한다.
주(註) 설총(유후) 최충 (문헌) 원천석 (운곡) 범세동 (부애) 신현 (문정) 신득청 (이유헌)
8세 사청공 휘 약온
1059년(문종14)-1130년(인종9) 고려 전기 문신, 구명은 의문, 자는 유승.
시호는 사청, 아버지는 문안공 양감, 어머니는 증 서해군 대부인 최씨.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 1년 평장사 검교사도와 수사공상주국을 지냈다.
수태부 문하시중 판호부사(종1품)로 치사하였다.
이때에 문벌귀족의 대표적 가문인 인주 이씨가 문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80년간 세력을 장악하였다. 이자겸이 대표적 인물로서 정준(6세)의 외손자였다.
공께서는 성품이 공손하고 청렴하시어서 세도가인 이자겸과 인척간이면서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남에게 교만한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시호는 사청(思청)이다. 아들 선(9세)은 벼슬이 병부시랑이었다.
선의 아들 정(10세)은 고려 충혜 왕조에 호부시랑 호부사로 재임 중 유배되어 자손이 이곳에 살았다.
8세 충정공 휘 의원
1066년(문종21)-1148년(의종3) 고려전기 문신. 시호 충정공. 아버지는 문안공 양감이시며 어머니는 증 서해군대부인 최씨이다.
문종 37년(1082) 성균시에 급제하여 아버지 문안공의 음덕으로 장사랑과 군기시주부동정이 되다.
예종 6년(1088) 수어도감판관을 지내고 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어사가 되다.
예종 4년(1108) 길주 관외에서 여진족을 정벌하여 다량의 철갑과 궁마를 노획하였다.
예종 9년 형부시랑으로 요나라에 가서 우리나라 조제(弔祭)한테 대한 사례를 하였다.
인종 2년(1123) 예부시랑지어사대사에 제수되었고 인종11년 호부상서로서 삼사사를 겸하였으며 금자 광록 대부 태자태사를 증보하고 특진되어「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시호는 충정이다.
특진 금자 광록대부 태자태사 호부상서 겸 삼사사 사자금어대 충정공 묘지명
공의 휘는 의원이고 나주 광양현인이다. 기선(基線:시조공)은 신라에서 나와서 말기에 난을 피하며 이곳에 은거하였다.
아버지는 양감이니 수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요, 어머니는 최씨인데 상서우복야 중추원사 연하의 따님이니 증 서해군 부인이요, 조(할아버지) 정준은 수사도 문하시중 평장사요. 증조는 책(策)이니 좌복야 한림학사요. 고조는 준이니 삼중대광이요, 준의 부는 길이니 삼중대광이다.
길(佶) 이상은 구속(舊俗)에 족보가 없었으므로 이름이 실전하였다.
공의 성품이 엄격하고 용모가 준수하고 기력이 뛰어나 남의 위급함을 보면 반드시 구원하여 주었고, 젊었을 때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제주(祭酒) 김근이 시관으로 있을 때 성균시에 급제하니 공의 나이 17세라 아버지의 음덕으로 장사랑 군기 주부동정이 되고 23세에 수어도감 판관을 지내고 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어사로 연주자사가 되었을 때였다.
예종께서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동으로 여진을 정벌할 때 공으로 병마판관을 삼았다.
공이 화살과 투석을 무릅쓰고 병사들 앞에서 여진을 쳐서 군공을 자주 세웠다. 그 후 적병이 날로 강성하여 길주를 침범함에 원수(元帥)가 공을 불러 이르되 “길주가 위태하여 구원할 일이 없으니 전술이 능한자가 아니면 적에게 성을 빼앗길 것이니 공에 가서 지켜라”하였다.
병마사 이관진. 병마판관 허재와 함께 길주성을 지켰는데 적이 원근에 사나운 무리를 모아 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수개월을 물러나지 않았다.
공이 사졸들과 같이 어려움을 같이하며 밤낮으로 수비를 굳게 하더니 때 마침 원수의 구원병이 오다가 적에게 패하였다.
적은 하루사이 승세를 이용하여 사다리를 걸고 성을 공격하여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성이 무너져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공이 칼을 빼어 들고 적 한 사람을 격살하고 호통을 치니 적의 무리는 후퇴하고 날이 저물었다.
공이 사졸들을 독려하여 밤사이 중성 26칸을 쌓았다. 다음날 아침 적이 바라보고 모두 탄복하고 사기가 떨어져서 화친을 청하였으나 공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조정이 화친을 허락하였다.
적이 성을 싸고 공격할 때 군사들이 모두 실색하되 공이 홀로 안색이 태연하여 군사들을 독려하니 사졸들이 모두 의기와 용맹에 감탄하였다.
고립무원의 약한 군사로 성을 지키되 적병 백만으로도 성을 빼앗을 뜻을 저버리고 화친을 청함은 모두가 공의 힘이더라.
회군할 때에 길주도 병마원에 조서하여 예를 갖추어 복명케하고 임금이 간곡히 위로 하였다.
논공행상(論功行賞)하는 자리에 장병들이 공을 서로 다투되 공을 그 자리에 참관하지 않았다.
형부원의랑과 중부랑중을 엮임 하였다.
계사에(1113) 글안에 사신으로 들어갔는데 큰 사신을 능히 맞아 줄 사람이 있어 공을 후한 예로 대접하고 모든 범절이 풍족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외국의 귀한 손님이라 하고 관(館)에 나아가 비밀리에 바라보았다.
환국할 때 국경까지 전송하는 일행 관원들이 공의 덕에 감동하여 울면서 작별하니, 사신을 대접하는 절차 성(盛)함이 근고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공부시랑이 되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여 병부시랑 지다방사를 제수하고「지어대사 호부상서 지추밀원사」에 발탁되었다.
이때에 외척이 정사에 참여 터니 병오년(1126)에 궁궐에 화재가 있었다. 공이 규탄할 수 있는 직위에 있어 시어사 송근과 전중시어사 이중 등으로 방화 용의자를 찾아 고발하려하니 용의자가 듣고 미리 방해를 하였다.
공(公)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더니 외척이 패(敗)함에 공도 외척이라 하며 양주자사라를 보내니 그 꺼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놓게 함이더라.
공이 덕으로 정사를 함에 백성이 그 덕을 칭송하였다.
1128년에 임금이 외척으로 허물이 없음을 알고 안변도호부로 옮기고 1132년에 공부상서 대도호부사를 제수함은 다 치적이 있었음이더라.
늙어서 집에 돌아가기를 고하니 호부상서겸 삼사사를 겸하고「금자광록대부」에 특진되었다.
무진년(1148) 11월에 병을 얻어 12월 5일 성동 임천사에서 돌아가셨다. 왕이 듣고 슬퍼하여 부의를 보내어 장사를 도우니 19일에 진봉산서강에서 화장을 하고 계유(1153) 12월 7일 유해를 임강현 북산서록에 장사 지내니 향년 83세이다.
초취부인은 국자 좨주 이석의 따님이니 1녀를 생산하여 예빈 소경에게 출가하였고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후취부인은 예부상서 지추밀원사 이작인의 따님인데 3남 4녀를 낳았다. 장자에 광중이요. 차자 대균을「문림랑 전중내급사 동정」이며 다음은 대용이니「문림랑 위위주부동정」이라 장녀는 예부상서 지추밀원사 최윤의에 출가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후 4년에 졸하고 공의 남은 따님도 모두 명문거족에 출가하였다.
명(銘) 하노니
오직 공의 선조는 신라로부터 낳으셨고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왕가(王家)에 복로(服勞)하였도다.
공의 출사는 우등으로 사과(士科)에 급제하였고, 흉막(군진중)에 종사함에 군사를 통솔함이 인화(人和)를 이루었네. 흉적이 놀래어 창을 거꾸로 잡고 도망하였네.
웅주, 길주, 양성을 지킴에 공의 열성을 다하였고 본조(本朝)에 우뚝 서서 한결같이 다른 뜻도 없었도다.
관에 임하여 정사를 행하심에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을 쉽게 만들었도다.
태산의 무너짐은 천명이라 어찌하리오.
돌에 새겨 전하노니 산하와 같이 무궁하리로다.
9세 간의대부 휘 광중
고려 후기 문신. 아버지는 충정공 의원, 어머니는 이씨로 예부상서 자인의 딸이다.
의종 18년(1163)급사 벼슬로 있다가 병마부사로 승진되어 실지를 회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하여 그 집을 불사르고 병사를 주둔시켜 농사를 지으면서 방어하는 둔전을 두었다.
의종 25년(1170) 비서감이 되었고 8月 정중부의 난에 박광승의 밀고로 화를 입었다.
비어대 휘 광중 사실
의종 18년 가을에 급사중 광중이 병마부사가 되어 국경을 회복하려고 군사를 보내어 금국인(金國人)을 쳐서 그 사는 집을 불사르고 그 지역을 지키면서 둔전을 두었다.
의종 23년(1168) 3월 지문하성사 김영윤을 공지거(과거 시험관)를 삼고 김광중으로 동지공거를 삼아 장영재 등 27인과 경서에 밝은 4인을 뽑았다.
의종 25년(1172) 8월에 왕이 보현전에 행차하였는데 무신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이 난을 일으켜 호종한 문관과 환관을 죽이고 군사를 보내어 성안에 있는 문신도 죽였다.
이고와 이의방 등이 순검군을 거느리고 밤거리에서 외치되 문인(文人)으로 의관(衣冠)한 사람을 비록 아전일지라도 모조리 죽이라 명하였다.
병졸들이 몰려다니면서 일일이 수색하여 판이부로 치사한 최부이와 비서감 김광중 등 50여명을 죽였다(고려사).
공께서 금나라를 쳐서 둔전(농사를 지으면서 방어하는 군대)을 설치한 뒤에 김장(金莊)이 사신으로 금나라에 가니 금나라 임금이 꾸짖어 “요사이 변경에 소요가 있으니 너의 임금이 시켜서 하였는가?”
만일 변방 관원이 자의로 한 일이라면 마땅히 징계하여야 할 것이다.” 하거늘 장이 돌아와 임금께 아뢰오니 임금이 그 섬에서 방수를 철폐하라 하였다.
일찍이 몸종처럼 부리던 박광승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를 사랑하여 다른 사람에게 청을 넣어 대교(종9품)라는 벼슬을 시켜주었다. 정중부가 난을 일으키자 전 주인의 은혜도 무시한 채 자기 집으로 광중을 유인하여 숨겨놓고 발고하여 살해되게 하였다.
그 뒤 공의 아들 체(10세)가 순안 현령(종5중)이 되었는데 마치 배순석이 군사를 모집함으로 체가 군사를 훈련하려고 응접하러 가다가 광승이 제고사로 온다는 말을 들었다.
먼저 사람을 보내어 울주에 가서 광승의 아비를 체포하고 또 광승을 잡아서 순안에 이르러 부자가 서로 보게 한 다음 먼저 그 아비를 죽였다.
그리고 광승에게 말하되 “네 아비 죽음을 보니 슬프냐.”고 물으니 광승이 대답하되 “슬프다.” 하거늘 체가 말하되 “아비를 애모하는 것은 한가지거늘 어찌하여 은혜를 배반하고 내 아버지를 죽게 하였느냐“ 하니 광승을 대답을 못하였다.
드디어 그 팔을 끊어 군중(軍中)에 가두었다가 여러 고을에 조리를 돌리고 죽였다.
<여사열전>
10세 체(광중 유사에 병기)(인물 열전 참조)
11세 주영
고려 후기 문신으로 벼슬은 금오위 중랑장 동정행 대정(정5품)이었고 호부상서 상장군(정3품)에 추증되었다.
아들 광존(12세)은 흥위위 별장동정(정7품)이었고, 판예부사 상호군(정3품)에 추증되었다.
광존의 아들 대린(13세) 금자광록대부(종2품) 문하시랑 평장사로 추증되었다.
대린의 아들 연(14세)은 양간공파조이다.
11세 위(位)
송나라에서 상서령으로 추봉되었다.
아들 광세(12세)가 신호위 중랑장이었고 황국에서 상서 우복야에 추봉 받고 신호위 대장군(종3품)에 추증되었다.
광세의 아들 경량(13세)은 금오위 대장군(종3품)이었고 문화평장사에 추증되었다.
경량의 아들 주정(14세)은 문숙공파조이다.
14세 감찰어사 휘 수
옥구군(沃溝郡) 대부인 고씨 할머니 수 배(配)
옥구군 대부인(大夫人) 고씨 열부전을 어느 맥에서 누가 될까 옷깃을 여미고 각급족보, 영광군지, 탐라지, 광산 김씨가 기타 문헌을 참조하여 삼가 기록하나이다.
대부인 성은 고씨며 그 세계(世系)는「조청대부 여빈경」으로 사퇴한 휘 정의 따님이요,「국자감 대사성 한림원 시강학사 지제호」조 휘 통의 외손이며,「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태학사 판례부사」김 휘 수(須)의 처이며「수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이사사」를 역임한 문정공(태현)의 자친이다.
출가 전 친정에서는 삼가 공손하시고 심성이 곧으시고 유순하시어 모든 언행에 있어서 조언(造言)하거나 단정하지 못한 일이 없으셨다.
출가하신 후에 시부모님을 섬길 때나 자녀와 노비를 통솔하실 때나 원근친지간에 친화(親和)하며 어제든지 온 집안을 화락(和樂)하고 근엄하신 자태를 연중 변함이 없으셨다한다.
여기에서 그 숭고하신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참지정사」이신 부군(수)이 일찍 밀칙을 받들고 서해도(황해도) 금륵장에 감사차 나가셨다.
이때 젊은 사람이 부군(수)의 명이라고 사칭하며 목탄(숯)을 여러차 가지고 왔다.
이를 본 대부인이 말씀하시기를 그 어른께서 도의에 어긋난 것이면 일찍이 타인으로부터 터럭 끝이라 할지라도 탐을 내어 거두어들인 일이 없거늘, 하물며 특파된 감찰관의 신분으로 비리를 묵인하고 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필시 잘못된 계책이라 직감하시고 대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시었다.
밤이 되자 청년은 목탄을 담장밖에 두고 가버렸다.
그 당시 권신인 김인준의 아들이 사악한 증오심을 품고 부군(수)을 중상하려고 그 애비 인준에게 찬언을 구함으로 인준이 부하를 시켜서 엿보게 하였다.
목탄은 그대로 야적된 채 방치한 상태로 놓아두니 이를 경비하는 자가 없으므로 이에 감복하여 더 이상 감히 추궁하지 못했다.
「감찰어사공 휘 수 장군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을 간략히 소개하여 본전의 맥을 같이 하고자 한다.」
원종 11년 경오(1270) 9월에 어사공이 영광부사로 재임 중 당시 반란군인 삼별초의 괴수 배중손, 김통정 등이 강화도로부터 진도를 거쳐 탐라(제주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원종이 중신을 모아 물어본 즉 모든 신하들이 김수 장군이 아니면 양 괴수를 무찌를 수 없다고 하였다.
원종은 매우 기뻐하며 안무사 권저에게 명하여 관군 200명과 어사보검을 하사하시고 탐라국에 원정하여 수호함과 동시에 양 괴수를 참 하라는 어명을 받아 김장군은 배중손과 그의 선봉장인 이열 등 적장을 무찔러 평정하였다.
왕자가 그 공훈을 찬양하고 큰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 후 김통정과 배중손의 막하인 이문경이 명월포로 잠입하여 군영과 토성을 구축하여 횡포가 날로 심해였다.
이를 공격하여 누차 승리하고 고여상, 김유성과 합세하여 진격하니 괴수 김통정과 이문경의 말을 거꾸러뜨리고 거의 생포하려는 찰나 적군의 화살에 맞아 김장군께서 순절하시니 하늘이 명하여 일사보국의 충절을 다한 것이다. (고려사 및 탐라지)
감찰어사공께서 순절하신 후 고씨 대부인께서는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수륙 삼천리 먼 길을 걸어서 어사공을 찾아 나섰다.
때로는 달구지를 이용하고 노숙이나 인가의 사랑채 등에서 노독을 달래며 40여일을 걸쳐 개성에 당도하니 그 노정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담하시었다.
삼별초 난 때 어사공이 영광 군수로써 군사와 더불어 탐라로 출정하신 후 겨울이 되어 의복을 보내려 하였다.
동료자가 은자(銀子)를 증상하면서 생계에 보태 쓰도록 간절히 청하였으나 대부인께서는 끝내 사절하셨으니 세상 사람들이 숭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공께서 전력을 다하시어 싸우다가 전사하시여 과부가 된 후에 힘들고 긴 60여 년간에 가족과 더불어 친척과 화목하시고, 노복과 비첩들을 자비로 어질게 사랑하시기를 공께서 생존 시처럼 똑같이 하셨다.
슬하에 두 아드님을 두었으나 모두 어리어 교양에 각별하신 신경을 집중하시었다.
그 교목(敎目)으로 청렴정직하고 언행이 예절과 법도에 어긋남이 없고 또한 남의 원성을 들은 일도 아니하며, 친구를 함부로 사귀지 말게 했으며 항상 옳은 방향으로만 교육을 하시어 출세시키셨다.
큰아들 태일은 관직이「신호위록사참군」이었으나 일찍이 돌아가시었다.
둘째 태현은 15세에 사마시에 수석으로, 다음해 문과에 뒤이어 전시에 급제하였다.
태현의 10세에 부친을 사별한 고난을 겪고 한 시대를 걸어 관직이「첨의중찬」에 이르렀다.
태현을 낳을 때 대부인 고씨께서「샛별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원종 2년 신 유(1261)에 낳으셨다.
10세에 아버지를 사별하는 슬픔을 이기고 학문에 용맹 정진하여 어린 나이로 문학에 통달하였으며 풍채와 외모가 그림같이 수려하였다 한다.
위와 같이 엄격한 교목(敎目) 밑에 대부인 고씨 모친의 절의 60여년과 일편단심 강직 하게 걸어오신 그의 아들답게 숙부이신 문숙공(주정)이 그의 학문의 모든 면이 뛰어남을 보시고 말씀하시길「우리 형님 감찰 어사공께서 비록 돌아가시기는 하였으나 우리 집 가문을 현양하고 빛내줄 사람은 나와 조카 태현이니 형님이 죽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기뻐하시며 칭송하였다.
대부인 고씨께서 위로가 되셨으나 국가와 가문을 위해서 더욱 훌륭하게 길러야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더했다.
오호라! 대부인은 명가의 영애로서 절부와 인자로운 어머니가 되어 그의 부군으로 하여금 청백리 열장부가 되게 하셨다.
그의 아들로 하여금 이름 있는 학자로서 명재상이 되게 하였다.
망(亡)한 금국(金國)의 대정 3년 병술에(1226) 2월 21일에 탄생하시고 원의 4년 정유(1327)년 7월 1일에 백하고도 이세의 천수를 누리시고 돌아가신 동월 12일 무신에 송림현 죽암서초에 안장하였다.
추고하건대 대부인이 훈서 하심에 듣는 이들 모두가 감탄하였으며 인간의 욕구 중에 수명만한 것이 없고, 하늘이 사람에게 보시함에 제일 애석히 여기는 것 또한 수명만한 것이 없는데, 대부인께서 고종명 하시도록 보고 듣는 것이 총명하시고 강녕하셨으므로 오법오복 중의 삼복(三福)을 겸비하셨다고 보거늘 필시 그 소치가 원이라 하시겠다.
명(銘)하노니,
쌍명당(고영중)과 아회(雅會)하는 시우(詩友: 조통)들과 세상 사람들은 신선이라 불렀다오, 뜻이 크고 집착 없는 고씨와 조씨는 그 인품의 현철함이 견줄만하네.
옥 같은 고운 나무에 가지가 나가고 감미롭고 맑은 샘 물줄기 가려 아! 대부인께서 집안밖에 경사로운 복이 한데 모였구나.
친정에서 부모님을 효성으로 모시고 그 용모 단아하고 성품 온화하여 경과 신으로 정성 다하여 구고를 받들었네.
낭군님 여의어도 그 절개 빙설같이 굳으니 그윽한 향기 난혜같이 방분하구나.
의(義)아닌 재물은 아예 버리시니 그 아름다운 덕행이 역사의 수에 빛나리라...
용감한 낭군님 한 몸 버려 나라에 받치고 절의에 돈독하여 고운님 여의어도 일평생을 사곡(邪曲)함이 없으셨네.
아비 잃을 아들을 곱게 키워 가르쳐 세 임금 재상으로 부조(父祖)의 이름을 날리셨네.
하늘이 길상을 내려 형수백(亨壽百)이요, 또 둘이 쉬고 명군이 가상하여 국록을 하사하셨네.
아! 대부인을 누가 따르랴 명(銘)을 새겨 광속에 묻노니 길이 멀리 빛나리(익제 이제현 선).
종보 91. 9. 1.
14세 문숙공파조 휘 주정
고려 후기 문신으로 자는 지숙, 아버지는 증 문하평장사 경량이다.
1264년(원종6) 문과에 급제하였고 해양부녹사를 거쳐 이부시랑을 지내고 충렬왕 1년 대부경 좌사의 대부로 승진되었다.
충렬왕 5년 행정도감사가 되어 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서 고려에 주둔해있는 원나라 군대에 바치는 공물을 면죄케 하였다.
김방경이 공을 세웠음에도 억울하게 유배된 것을 상소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충렬왕 8년(1281) 원나라 세조가 제 2차 일본정벌의 계획을 세우자 소용대장군 우부도통에 특진되고 이어 동지 밀직사사가 되었다.
일본 정벌 때 고려 원연합군의 부원수를 지냈고 연합군이 일본에 침입하였으나 태풍으로 실패하고 광정대부 도청의사(정2품)를 지내고 시호는 문숙공이다.
아들 유(15세)는 수문전 태학사를 지냈다.
유의 아들 윤장(16세)은 밀직부사를, 중간(16세)은 밀직사사였다.
14세 양간공파조 휘 연
1215년(고종3)-1291년(충렬18) 고려 중기 문신, 초명은 중룡, 자는 기지.
시호는 양간(良簡), 아버지는 증 평장사 대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 김씨.
천품이 준수 비범하였고 눈썹은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았으며 어릴 때부터 내시가(시중드는 아동)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셨다.
고종 13년 시어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네 고을에 치적을 남겼으며 병부시랑 추밀원 부사를 거쳐 형부상에 이르렀다.
충렬왕 2년(1275) 경상도 지휘사가 되어 려‧원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전함 900척 건조자의 총책임을 맡았다.
이때 어느 날 밤 꿈에 허리에 찬 금어대(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스스로 해몽하기를 “몸에 장식이 이미 갔으니 오래 머무를 수 없다.” 하고 사퇴하니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정2품)로 치사되어 물러났다.
초상화가 있었으나 임진란 때 불타 없어지고 화상찬만 남아있다.
1261년(원종2) 발행한 호적이 후손 부필(23세‧후조당 예안파)의 종가의 유물관인 숭원각에 보관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적으로 보물(1018호)로 지정되어있다.
내용은 1271년 공의 나이 47세 때 작성된 것으로, 본인의 증조, 외가의 외조, 처가의 처증조까지 기록이 되어있다.
여자는 소사로 칭하고 남자는 이름과 나이, 여자는 나이로만 기록되어있다.
천성이 순후하여 모든 경사나 조상하는 일에 친소에 관계없는 사람이라도 간격이 없어서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78세에 수를 마치니 시호는 양간공이다.
양간공의 화상찬
높고 훌륭한 평장(平章)이여, 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눈썹은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도다.
일찍이 내시로 임금을 가까이 모셨도다.
용이 아니면 봉이니 상서롭게 세상에 나리었도다.
나이 삼십이 못 되어 약관의 나이에 황금인패(조복)를 찾도다.
시주에 애휼을 끼치니 백성이 선정에 감사 노래하네.
정승자리에 오르니 곽양분의 부귀를 누렸도다.
아들, 사위, 생질이 조정에 가득하니 영화가 이어져 조무가 상접하니 문호가 휘황하게 밝았도다.
청풍만고에 길이 영당에 걸어 모시리라.
집에서 세 사람의 화상이 한 폭으로 되어 각각 찬(贊)이 있으니
한분은 중산대부 국학대사성 보문서학사로 치사한 김찬이요
둘째 분은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 판판도사로 치사한 김연이요
셋째 분은 증산대부 판비서성사 보문서학사로 치사한 김제이다.
김찬의 찬은 전하여 지지 않고, 김연의 찬은 위와 같고, 김제의 찬에는 조부가 동복이 있고 아버지 또한 그러하더니 공의 형제에 와서는 칠폭홍천(병풍)이 있다하였으니 다 문벌의 화려함을 성대히 칭찬함이다.
그러나 김찬과 김제는 김연의 일가인 듯 하나 상고할 수가 없다.
선조 26년 임진란에 화상이 소실되었으니 원통하도다.
14세 낭장공파조 휘 규
고려 중기 문신, 아버지는 평장사 대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 김씨.
낭장동정(정6품)의 벼슬을 지냈고 낭장공파조이시다.
15세 문정공파조 휘 태현
문정공은 휘(諱)는 태현, 자는 북기, 호는 쾌헌 또는 설암이니 고려 후기 학자요, 명신이다.
아버지 감찰어사공 수(須)와 어머니 옥구군 대부인 고씨의 둘째 아드님으로 원종 3년(1261)에 태어났다.
일찍 15세 때 사마시(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하시고 이어 16세에 문과급제하고 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충렬왕 28년(1302)에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갔을 때「황제의 명으로 모든 진공사는 연경에서 대기를 명하자 “황제의 명을 어길지언정 황제가 있는 곳에 가는 것은 우리 군주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니 중서성이 허락하여 행재소에 가게 되었다.
황제는 그의 충성을 치하하여「동동 행중서성 좌우사랑 중」으로 임명하였다.
충렬왕 32년(1306)에 「지도첨의 사사」로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왕부자간을 이간시키려는 무리의 흉모를 밝히고 돌아와 벼슬이 중찬에 이르렀다.
충선왕 3년에 다시「판삼사사」에 배명되었고 그 후 상위관제가 폐지됨으로 퇴관하여 10년간 집에서 유유자적 심신을 정양하고 학문에 전념하다.
충숙왕 9년(1321)에「첨의평리」에 기용되어「판삼사사」가 되었으며 그 후 요직을 두루 거쳐 충숙왕 15년「삼중대광문하시중 수문관 대제학 겸 전리사사」로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정공이다.
공의 성품은 세인이 공평하다고 칭송하였으며 위용과 표상이 수려정엄하고 언어와 행동이 예법에 어긋남이 없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응구 접대에 음성과 기색이 온유하고 유화하였다고 한다.
어머니를 효도로 받들고 교자(敎子)에 법으로 지수하고 친척 간에 돈목으로 화합하였으며 사람들과 함부로 교류하지 않았지만 원망하는 소리는 없었다고 한다.
공은 공무를 집행함에 지공무사하여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 진주하는 바가 모두 원대한 계책이었으며 모든 송사를 상호화해로 귀결하고, 이해득실과 기호욕념을 배제하였으며 언제나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충렬‧충선‧충숙 세 왕조를 섬김에 진퇴를 예의로서 처신해 매사에 조그마한 실책도 없었으며 국가 중요정책에 있어서 공에게 자문하여 시정하였다.
공의 저술인 훈(訓)과 교(敎)의 체제가 잘 짜여지고 시(時)는 청신(淸新) 염려하여 명시문(名詩文)으로 우리나라의 문장을 수집 편찬하여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제목을 붙이니 상응 필적한 명칭이라, 자호(自號)를 쾌헌(快軒)이라 하고 만년에는 설암(雪菴) 이라 하였다.
성균시를 관장하여 이청등 70인을 얻고「지공거(시험관)」가 되어 박리 등 30여인을 얻어 당대에 명망 있는 선비를 발굴하였다.
공은 좌우위낭장 김의의 딸을 배필로 맞았으나 일찍 별세하고, 신호위 중낭장 왕정단의 딸을 취처하니 이분이 개선군 대부인으로 봉작되니 현숙하여 가정이 화목하고 삼형제를 대과에 급제시켜 국록을 받았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니 광식, 광철, 광재, 광로와 장녀는「예문관직제학」안목에게 출가하고 차녀는「예문관 공봉」박윤문에게 출가하였다. 김씨 부인이 1남을 낳고 여는 왕씨 부인 소생이다.
공이 충혜왕 원년에 70세를 일기로 서거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제사를 올리고 문정이라 증시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상수(喪需)의 조달을 명하였다.
이해 11월 18일에 덕수현 해운산에 안장하면서 문인(門人) 계림군 최해가 묘지명을 찬술하여 이르되
아! 문정공이시여 당신은 국가 원로의 귀감이신데 어찌 홀연히 가시니 누구에게 의심된 바를 물으오리까.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졌다 하오리까. 현철하신 스승님 저를 내버려두고 가시나이까..
아! 그 슬픔 그 감동이 공자를 잃은 자공의 심정이외다.
종보 94. 11. 1.
15세 충숙공 휘 심
공(公)의 휘는 심(深)이요, 자는 연수이니 고려 원종 4년(1262)에 문숙공과 상질현 대부인 장씨 맏아드님으로 태어나니 고려 후기의 명신이다.
공은 15세 때 문음(門蔭)으로 관직으로 보임되어 충렬왕 때에 볼모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낭장(郎將)이 되었고, 이어 밀직부사 만호(萬戶)를 역임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계실 때 오기, 석천보 등이 왕의 총애를 믿고 왕의 부자를 이간함으로 홍자번과 조력해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왕궁을 포위하여 오사를 잡아 원 나라에 압송하고 뒤에 충렬왕을 따라 충선왕을 모시고 와서 찬성사가 되었다.
공의 딸이 원나라 황후가 되어 원으로부터 고려 도원수의 벼슬을 받았고 충숙왕 때 벼슬이 수첨의 정승 판 총부사에 이르고 여절 보안공신에서「수성수의 충량공신 화평부원군」으로 개봉되고 협보공신의 호를 더했다.
섭행 동정사인 장백상의 탐관농권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장백상을 잡아 가둔 후에 만호 홍수와 함께 성서(省書)를 대행하게 하였다.
충숙왕의 약사를 살펴보면 용모와 거동이 기위(奇徫)하고 매사에 진퇴와 주선함이 법도에 맞으니 왕이 크게 쓸 인재라 하고 기뻐하여 별장과 금위(禁衛)의 수령(守領)과 사순위 등을 임명하니 각산에 출정해 군령이 엄숙하니 주위에서 아버지 문숙공의 기풍이 있다했다.
왕의 총애를 받아 우군 만호「홍위위 대장군 우부승지. 우승지 지신사 등」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임금에게 주대함이 자상하여 칭찬을 받았고, 이어 우상시 상장군을 거쳐 도순사로 나아가 관리를 잘 살피고 백성을 잘 다스리니 그 지방이 평안하였다.
한때 행궁을 받들고 원에 머문 지 오래되고 신기가 미편하여 일행 신료와 함께 글을 올려 귀국을 빌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임조부에 하옥되었는데 아들 석견이 그의 누이 영정옹주와 더불어 대궐에서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정성을 다해 슬피 호소하니 왕이 이에 사면하였다.
공이 문무접전의 재량으로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70세에 글을 올리고 물러나려 하니 임금이 거듭 그의 뜻을 어기고「벽상삼한중대광 화평부원군」에 제수하되 중요한 직무만 해직하니 공이 사은하고 집에 거처하였다.
한적으로 낙을 삼고 요양한지 4년 무인 10월 23일에 졸하시니 향년 77세였다.
왕이 부음을 듣고 탄식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제기와 부물을 후히 보내 조상하였고 봉국산 동록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충숙이라 내리시었다.
공은 아드님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영걸하여 세상에 위명을 떨쳤다.
종보 95. 1. 1.
충숙공 휘 심 묘갈명
공의 사람됨이 위엄 엄중하니 바라보는 사람마다 경외하며 굴복하였다.
그러나 손님을 대접함에 차별을 두지 않았고 화락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잔일에도 개의치 않았고 산업에도 간섭하지 않아 집에 남은 재산이 없고, 벼슬에 있을 때에는 경제로 나의 임무로 삼아 조석으로 게으르지 않아 어려움을 한결같이 절조 있게 하니 이 또한 황신이 바른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들 석견은 지금 광정대부 삼우사사 상호군이다.
배(配)는 변한국부인 왕 씨이니 4남 1녀를 두었다.
장녀는 순정대부 판통예문사 오첨에 출가하고 차녀는 원나라에 들어가 황후가 되었다.
3녀는 종실 단양부원군 비 복안옹주가 되고, 사녀는 안동으로 출가하여 아들 승사가 대호군 간판내시원사이다.
뒤에 진강군 부인 노씨를 취하여 2남을 낳으니 맏 승한은 도재고 판관이요, 둘째는 승진이니 상호군 광산부원군이다.
영가군부인 김씨를 취하여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 승노는 예조판서이며 딸은 출하가지 않았다.
아!
공의 아버지(문숙공 주정)는 장원급제로써 명상(名相)으로 만호에 제수되어 두 조정에서 중망이 있었고 공 또한 만호가 되고 또 도원수가 되었으며 세 번 정승이 되어 훈계, 공신, 부원군에 장상까지 겸하여 벼슬은 신하로서 극에 이르고 가문이 성대하고 자손이 경상(卿相)에 오르고 딸은 황후‧옹주‧택주를 두었으며 수는 길어 8순에 가까웠으니 그 사람이 사는 세상에 어찌 만족스럽지 않겠는가.
장사지내기 전날에 우사가(석견) 공의 살아온 전말을 자세히 갖추어 명을 청하는데 사양타 못하여 드디어 명(銘)하노니
태악이 신을 내려 우리 명공(明公:충숙공)을 낳았도다.
사직을 책임지고 바른말로 몸을 돌보지 않았네.
지위 높아 정승이요, 위엄이 중해 대장이다.
정성 다해 나라를 받드니 태산 같은 공이로다.
77세에 늙은 덕 더 높으니 동국에 분양이요, 인망이 우레 같구나.
다들 정승에 오르고 딸은 황후가 되었네.
문벌이 번창하여 해동에 빛나도다.
공중에 선유하니 아득하여 하늘 기러기 같네.
조정과 백성이 흠탄하고 삼한의 벼슬을 다 했네.
백관이 모여 장사지내니 마지막 보내는 의식도 풍성하도다.
평원이 아름답고 봉우리 총총하네.
무덤이 편안하니 자손이 무궁하리.
글을 새겨 후생들에게 보이고 무덤에 들이니 천년 뒤에도 그 아름다움 더 넓으리라.
대제학, 상호군 윤선좌술, 통직랑 기거주지제교 이선 서
15세 정경공 휘 사원
공의 휘는 사원(士元)이요, 초명은 구(埧) 또는 원구(元具)이다.
양간공(연)과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 조씨(裬城曺氏)의 맏아들로 고려 고종 5년(1257)에 통랑(通郞)으로 재임 시에 언(諺)을 국문하여 그 옥사를 공평하게 잘 다루어 대언(大諺)과 영(領)을 배웠다.
충렬왕 35년에 이훈, 채균 및 승지 권준과 함께 번양왕이 제정한 관제와 비판서를 가지고 원(元)에 갔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니 권세를 부리던 세신(世臣)과 구관들이 물러났다.
공은 왕을 독대할 수 있는 총애를 받았으며 충선왕 3년 원나라에서 팔찰(八札)을 보내어 황후(皇后)를 책봉한 일을 반포했다.
환관 이대순이 원에 들어가 총애를 받아 용사하더니 구평궁으로 더불어 노비의 분쟁이 있자 황제(皇帝)가 제령을 내려 형부(刑部)에서 결정하라 함으로서 전서(典書) 김사원 등이 안건을 주청하여 구평궁 위씨(韋氏)에게 조비를 돌려주니 대순이 노하여 팔찰들과 같이 황제의 명이라 사칭하며 공을 귀양 보냈다.
충숙왕 4년 상의회의(商議會議) 도감사를 거쳐 동왕 6년(1318)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었는데 왕명으로 온천에 잡은 새를 태묘(太廟)에 올렸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이를 바로 잡으니 왕이 이르되 “내가 깊은 궁중에 있어 경이 아니면 이런 일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냐”고 찬양하였다.
충선왕 4년(1319)에 평양 윤이 되고 이어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경(貞景)이니 충숙왕 기미년 정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였고 배(配)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순흥 안씨로 안문성공(安文成公:유, 호는:매헌)의 따님이요, 외아들을 두었는데 휘(諱)는 진(稹)이니 광정대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상호군(知春秋館事上護軍)을 지내시니 시호는 장영공(章榮公)이다.
충숙왕후 2년 계유(癸酉)에 호적이 전하니 슬하에 다섯 아드님과 두 따님을 두어 모두 영달하였고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광김을 명문화벌로 승화시키니 이는 양간공(良簡公), 정경공(貞景公), 장영공(章榮公) 삼대에 터전이 잡혀 음덕이 자손에 드리워져오고 있다.
종보 95. 3. 1.
16세 장영공 휘 진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척재. 아버지는 정경공 사원, 어머니는 순흥 안씨로 문성공 유(裕)의 따님이시다.
충렬왕34(1307) 문과 추장제술과에 급제하여 충혜왕3(1332)에 중현대부 성균제주로 통례문 부사를 겸하고 충숙왕2(1333)「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과 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었다.
충혜왕 4년에 과거의 총책임자로 인재를 가장 많이 뽑았다.
1333년의 호적이 전해오며 시호는 장영공이다. 묘는 개풍군 홍교면 조문리에 있었으나 실전되었다가 순조29(1828)에 후손 성은과 수등이 다시 찾아 수호하였다.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지 춘추관사 상호군시 장영공 휘 진 묘갈문
공의 휘는 진이요, 묘는 충덕부 동부 망포리 제일동 응봉 아래 양마교위 자좌원에 있다고 구보에 기재되었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정조(正祖) 신해년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그의 선대 분묘를 찾다가 망포리에서 구 묘비 갈명(碣銘)을 찾았는데 이끼는 끼었으나 그 갈문(碣文)은 식별할 수가 있었다.
갈문에 이르되 고려「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 지 춘추관사 상호군 시 장영 김공 휘 진지묘」라 기록되어 있었다.
그 사람이 우리 선대의 묘인 줄 알고 우리 종중에 와 알려줌으로 종중에서 그 비의 도형과 글자를 탑본하여 왔다. 그러나 비가 상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요, 족보가 증거 될 수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전한지 오래 되었는지라 일이 또한 큰지라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미루어 온지 40년이나 되었다.
순조 무자(1829)에 종인이 깨우쳐 감동시키는 이가 있으므로 종중의 의견 또한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다. 다시 가서 살펴보니 그 비는 그 사이 암장한 사람들이 쪼는 바가 되었으나 묘는 여전하니 무엇을 다시 의심하리요.
이에 모든 종중이 다시 수축할 의논을 세우고 말하되 “추만보의 처가 아니었던들 공자로 오부가의 장사 지낸 일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요. 선령을 봉치한 묘인 줄 알고 주자도 관에 고하고 다시 곡을 하였거늘 이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이 저 같이 미덥고 산 이름과 땅이름이 합치되어 비문은 비록 쪼았다 할지라도 탑본이 있는데 이대로 그만두면 자손의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1829년에 힘을 모아 봉영을 수축하고 비를 세우고 제사를 짓고 묘전(墓田)을 장만하니 묘역의 모양이 새로워졌다.
“우리가 성을 가진 후로 묘소의 실전이 많았으나 오직 공의 묘소가 여러 백년 만에 다시 석물을 설함하게 되니 어찌 무연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우리 김씨의 근본은 광산이니 신라 왕자 휘 흥광이 공에게 시조가 되고, 판예부사 휘 광존과, 증 평장사 휘 대린과 판 판도사사 시호가 양간인 휘 연과 찬성사 시호 정경인 휘 사원과 순정군 부인 순흥안씨 문성공 휘 유의 따님은 곧 공의 고조, 증조, 조, 고, 비가 된다.
이로부터 가지처럼 나눠지고 잎처럼 퍼져서 계속하여 번성하니 자손의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석덕 대현과 영공 거경이 앞뒤로 배출되었으므로 국조에서 시례고가를 헤아릴 때 반드시 우리 광김을 일컬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삼가 고려사기를 살펴보면 공이 충렬왕19(1292)에 나시어 임신년(1332)에 벼슬이 중현대부 성균제주와 통례문 부사를 겸하였다.
1333년에 벼슬은 묘전에 새긴바와 같았고 충혜왕 4년(1342)에 공거(과거 책임자)를 맡아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그 뒤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공의 덕행과 사적이 반드시 많으련만 돌아가실 때까지 아울러 전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십칠 세손 중추부사 상모 찬
*장영공 유문시(章榮公 遺文詩)
바람은 엷은 구름조차 쓴 듯 맑은데 밝은 달이 푸른 하늘에 둥실 떠있네.
수정같이 찬 기운은 눈(雪)빛을 시새우고 맑은 빛은 비단의로 싼 등불을 비추어주네.
보름밤은 오직 밝기만 한데
술동이에 달이 비취니 동이 채 비울 것 같네.
이 정경(情景)을 베개에 옮겨 접어 두었다가 임과 같이 즐기고 싶네.
(월하(月下)의 회포를 추상서에 올리는 글)
16세 광식‧광로‧광재‧광철
같은 형제들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아버지는 문정공 태현이고,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이다.
광식은 1294년(충렬21) 문과에 급제하여 총부의랑(정6품)을 지냈다.
광로는 1317년(충숙5) 문과에 급제하여 가안부녹사(정8품)를 지냈다.
광재는 시호는 문간이며 1313년(충선왕5)에 식년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관이 되었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한 공으로 사복시승이 되어 이어 도관정랑이 되었다.
판도판서 밀직부사(정2품) 등 여러 요직을 거쳐 충정왕 2년에는 사부가 되었다.
이때 정방(政房)에서 문서를 총괄하는 폐단을 없애고 전리판서 및 대제학을 겸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은퇴하였다.
어머니가 별세하자 여묘 3년을 마쳤고 효행으로 정려를 명받으며, 그가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라 명명하였고 시호는 문간이다.
광철
문민공 휘 광철(光轍)(문정공파‧문민공파)
고려조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둔헌(鈍軒)이요, 시호는 문민(文敏)이니 문정공(태현)의 둘째 아드님으로 충렬왕 32년(1305)에 문과에 급제, 입조이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충목왕 2년(1345) 6월에 서연(書筵)을 설치하였을 때에 우정승 채하중, 좌정승 한종유, 지신사 김광철 등 40여인이 연일 시독(侍讀)을 하였다.
충정왕 2년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해「판밀직사사」김광철로 판사를 삼아 여러 「도(道)」의 경전(耕田)을 상고하고 살피게 하고 안겸사(按傔使)를 경임하게 하였다.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족제인 기삼만이 황후의 세력에 의지해 불법으로 사람을 해치고 재산을 탈취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함으로 안겸사로서 기삼만을 장형(杖形)으로 다스린 끝에 옥사하게 하니 원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정치도감 등을 국문 하였으나, 전 밀직사사, 공과 대호군 이원구는 병으로 사면이 되었다.
삼중대광 밀직사사에 화평군에 봉작되었으니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 배위(配位)는 원주 원씨이니 찬성사 관의 따님으로 두 아드님과 세 따님을 두시니 장자 희근은 판도판서 해양군이요, 차자 도락을 천우위 해령별당으로 추성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의 증직을 받았다.
◦ 공(公)의 손자 계지(繼志)는 태종묘(太宗묘)에 공훈으로 왕으로부터 사명(賜名)을 받았으며 호는 송곡(松谷)이니 풍해도 병마절도사겸 수군절제사를 거쳐 「지초토영전사」를 지냈고 해주목사를 역임하였다.
‧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체에 승진되니 태조 태종의 양대에 당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양궁을 내왕하면서 태조의 뜻을 돌이켜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회천(回天)대업의 공이 있어서 전토(田土)와 많은 노비를 하사 받고 선왕의 뜻을 이었다 하여 계지(繼志)라는 사명을 받고 순충 보조 명량 개국 공신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지고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으니 가문의 영화가 문민 공의 손자와 증손 대에 더욱더 창대 하였다.
종보 95. 5. 1.
16세 석견‧승로‧승사‧승진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같은 형제들로 아버지는 충숙공 심이다.
석견은 고려 충숙왕 때 여러 번 밀직부사(정2품)를 지냈고 상호군 우정승(종1품)을 지냈으며 화평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충혜 왕조에 조적의 난을 평정하여 일등공신에 책훈되고 벽에다 초상화를 걸 수 있게 하였으며 부모와 처에게는 3등급 초과하여 봉작하고, 아들에게는 7품직을 제수하고, 밭 100결과 노비 십구(十口)를 하사받았다.
수(17세)는 그의 아들로 해양군에 봉해졌으며 평의 우정승에 추증되었다.
승로는 예조판서(정2품)였다.
승사는 충목 왕조에 벼슬이 병마도원수(종1품)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도적 이혼성을 토벌하였다.
승진은 상호군(정3품)으로 광성부원군에 책봉되었고 공검충직으로 칭송되었다.
덕선(17세)은 승진의 아들로 문하시중 종선(17세)은 벼슬이 병사였고
적선(17세)은 중추원사로 일찍이 왜적을 격멸하는데 공이 컸다.
17세 사온직장공파조 영(英)
고려 후기 문신, 여조 말기에 사온서 직장을 지내셨다. 조선조 공조 참의에 추증 되었다. 묘는 실전되고 중원군 금가면 점병리에 설단 하였다.
17세 광리‧성리‧안리‧영리‧천리
같은 형제들로서 고려 후기의 문신들이며, 아버지는 장영공 진, 어머니는 영가부인 복주 권씨이다.
광리는 1532년(공민2) 좌언대부로 밀직부사 전리판서(종2품)를 지냈다.
광리의 아들 갑우‧남우‧삼우‧시우‧인우(18세)가 모두 뛰어났다.
갑우(18세)는 공민왕 19년 대장군으로 명나라 황태자 생일에 천추사가 되어 다녀왔다.
공민왕 22년(1372) 11월 대호군으로 제주도에서 조정에 바칠 말 50필을 몰고 명나라에 가는 도중 2필을 잃어버렸다.
다른 말로 채워 바쳤으나 황제가 대노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공민왕을 책망하자 돌아와 통역관 오극충과 함께 주살되었다.(고려사)
이 사건으로 형제들이 연좌되어 여러 지방(전남‧경남)으로 좌천되어 살았다.
남우(18세)는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갑우의 일로 연좌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다.(합천 영창리 설단)
유(19세)는 남우의 아들로서 공민왕 때 중령낭장으로 남북정벌 때 큰 공이 있었다.
신돈이 정사를 문란케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령에 살다가 합천 영창리로 이거하였다.
당시에 사람들은 공을 목은‧도은‧포은과 함께 절개 있는 사람이라 칭하였다.
삼우(18세)는 벼슬이 상서였고 묘는 실전하여 산청군 신동면 가슬리에 설단하고 원일재를 지었다.
시우(18세)는 판사벼슬이다.
인우(18세)는 공민왕 11년 홍건적의 난 때 임금을 모시고 호종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동왕 13년에 우정승 홍언박과 같이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일등공신에게는 초상화를 걸게 하고, 부모와 자식에게 3등급 작위를 올려주고, 아들 한 사람에게 1품 벼슬을 주었다. 또 마부 5명, 파수병 7명을 거느리게 하고, 자손을 음직에 채용하였으며 밭 100결, 노비 10명을 주었다.
밀직부사(정2품)에 승진되고 이어 봉익대부 전리판서에 이르렀으나 공민왕 24년 갑우의 화로 연좌되어 현 고창군 감무로 좌천되었다.
승길(19세)은 함종 현령을 지냈으며 고려 말의 절신이다.(인물 열전 참조)
성리는 사온승(정6품)을 지냈다.
학문이 절륜하고 효우가 독실하여 사림(士林)이 추증한 바 있다.
안리는 판도판서(종2품)를 지냈다.
영리는 문정공 신현의 문인으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성리학을 배웠다. 충목왕 4년 정치도감을 지냈고 충정왕 4년 전라도 안렴존무사로 민전(民田)을 다스렸다.
공민왕 4년(1354) 판군기 감사(종3품)에 이르렀다.
문정공 신현 선생의 사실을 모아「화해사전」6권을 저술하였다.
영리의 아들 당(18세)은 낭장이었고, 정(18세)은 광성군에 봉해졌다.
천리는 밀직부사 상호군(정3품)을 지냈고, 조선 태종조에 명원 종훈(공신)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출처 : 광산김씨사
20세 퇴촌공 휘 열(양간‧퇴촌공파)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행 형조도관 좌랑 퇴촌 김공 묘갈명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관음리 후산(가골) 향유원(向酉原)에 구묘(舊墓)가 있으니 이는 광산김씨 분파조 퇴촌공 묘소로서 자손들이 실전 했다가 다시 찾아 개봉축(改封築)한 묘소이다. 김씨는 신라종성 계통으로 왕자공 휘 흥광을 시조로 하여 고려와 이조에 대대로 높은 벼슬이 나시었다.
양간공의 휘 연, 정경공 휘 사원, 장영공 휘 진은 공의 고조이상 3세요 좌사의 휘 명리. 광성군 휘 정. 출척사 휘 약채는 부이상(父以上) 3세이며 비는 원주 원씨 문정공 휘 송수의 따님이시다.
공은 사형제분 중에 끝으로 총명효우하고 일찍 문학이 성취되셨고 풍채와 위엄이 남을 감동 할 만하여 세인의 추증을 받으셨다.
백씨께서 불행 이도 일찍이 돌아가시니 맏형수 허씨 부인께서 아들(철산)을 기르시며 수절하실 때 공이 어린 조카와 형수(허씨 부인)를 보호하사 능히 그 종통과 가업을 이어 받도록 하셨다.
태종조에 문음(조상의 음덕)으로 출사하여 형조도좌랑에 계시다가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하시니 사람들이 공을 일컬어 퇴촌 선생이라 하였다.
증손 휘 여석이 이조판서에 오르니 「통정대부 추조참의」에 증직 되셨고 공의 저서로 빙옥고(氷玉稿))라는 책이 있었고 홍 허백당 휘 귀달(이조판서 역임)께서 서문을 지으셨는데 이르기를 선생의 시를 음미함에 그 맛이 담백하고 그 소리가 숭고하여 마치 대경(맛있는 국) 현주(쌀술)와 같고 성정(性情)의 정도(正道)를 이루었다 고 하셨다.
공의 문학이 성(盛)하였음은 여기에서 징험(徵驗)할 만하나 아깝게도 그 책이 전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공의 생졸(生卒) 및 의적을 상고할 수 없음은 사화(士禍)와 병란(丙亂)으로 인함이 아니겠는가.
배(配) 숙부인 삼척 진씨는 집현전 제학 의귀의 따님이시다.
아들 달손은 도호부사(강화도) 수(洙)요, 생원 사(泗)이며 달덕은 무육하고 달검은 아들이 간이며 달전의 아들은 엄‧형‧격은 사복시정이요, 지(漬)는 검열이며 주(澍)는 판관이다. 달도의 아들은 관찰사 호요, 유‧빈은 진사요, 인과 준이니 이하는 번거로워 적지 않는다.
아! 공의 묘소를 실전한지 수백 년에 누대에 걸쳐 찾았으나 적지(適地)를 찾지 못하던 중 지난 1982년에 후손 귀현등 제손(諸孫)이 춘천 보호산에 설단((設壇))하여 시향(時享)을 모셨다.
계해(1983) 시월에 후손 대중이 수소문으로 묘소를 찾아 후손의 뜻을 모아 비를 세워 빛나도록 하였으니 옛말에 이르기를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을 감동시킨다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묘갈문을 청한 이는 우현(禹鉉)이다.
명은 아래와 같다.
외로운 조카(철산)를 도와 성가(成家)하게 함은 종통(宗統)을 돈독하게 함이요, 벼슬에 물러나 전원(田園)으로 돌아옴은 어지러운 세상을 멀리 함이로다.
빙옥고에 담은 그 말씀은 바른 풍속이 완연한데 노론에 볼 수 없음이 후세 사람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순천 후인 김철희 근찬
빙옥난고(氷玉亂藁)의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손자 충목공(여석)과 교우하던 허백당 홍귀달(이조판서 역임)께서 서문을 지으시어 그 서문은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행 형조도관 좌랑 퇴촌공 열 빙옥난고서
시(詩)의 본뜻은 성(性)과 정(情)에 있으며 언사(言辭)와 지조(志操)를 귀하게 여긴다. 만약에 말을 헤프게 하고 글이 속되거나 외양을 분칠하듯 하고 그림을 새기 듯 하여 남이 보기에 좋은 듯이 된 시는 아직 제대로 되지 못한 걸로 그 성과 정을 바르게 다룬 시와는 스스로 거리가 있다 할 것이다.
내 보기에 세상에 시를 말하는 자와 가벼이 그 화려한 것을 보고 그 충실한 것을 버리며 그 육(肉)을 쪼으면서 산적으로 갖추지 못하여 처음 보기에는 즐거우나 씹을수록 맛 나는 진미는 적으나
오호라! 시에 대한 이치가 언제나 옛날처럼 바로 서겠는가. 나는 율재와 퇴촌 두 선생의 시를 대개 비슷하게 보고 있다.
집현전 제학 율제 진선생 휘는 의귀이며 중추부사 김공 은경(휘 여석 충목공)은 그의 후예이다. 두보 선생이 평소에 여러 가지를 지어 읊었던 시를 모아서 책이름을 빙옥난고라 하였다
율재선생은 퇴촌선생의 빙장으로서 은경은 율재의 외현손(外玄孫)이며 퇴촌의 증손이다. 진나라의 선비 악광과 위개의 풍신(風神)이 훌륭하여 그 때 별명으로 옥윤(玉潤)과 빙청(氷凊)이라 하였더니 이재 율재를 빙(氷)에 비유(比喩)하였으니 이는 조상을 높이 받드는 갸륵한 뜻에서인 것 같다.
은경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삼척지방에서 빙옥고를 간행토록 하였다.
그 곳은 율재의 고향으로서 판각(板刻)과 인쇄(印刷)의 일이 쉽게 이루어 졌다. 하루는 인쇄한 책 한부를 편지와 아울러 나에게 보내와 서문을 청하였다.
아! 내가 어찌 이 시를 아는 사람이겠는가. 그러나 평소에 나고 들 때 예와 이제의 시를 제목으로 한 적도 있었기에 가만히 위에서 말한 대로 두 선생의 시를 읽어보았다. 과연 시에 뼈가 섰으며 군살이 적고 뜻이 충실하고 번거롭지 아니하며 대경현주(大藑玄酒)와 토고궤부(土鼓簣桴)처럼 고색(古色)이 짙어서 비록 세속 사람의 입이나 귀에는 맞지 않을지 몰라도 그 담백한 맛과 고박(古朴)한 음조(音調)는 진실이 있다.
비록 옛것을 탐(貪)하여 즐겨 하는 것이나 이것이 후파(候芭)의 태현(太玄)인 것이다. 하물며 나와 은경 만난 지가 작금(昨今)이 아니며 그 사람의 포부도 나는 잘 알고 있다. 평소에 만나면 풍채도 좋았는데 시에 있어 그가 이러한 시를 숭상하였으니 그 호불호(好不好)가 나와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에 나도 평일에 본받은 시를 지었으니 그 개요를 여기에 써서 돌려보내니 그대는 알아주기 바라오.
홍치 5년 6월
허백당 홍귀달 서
23세 충목공 휘 여석 유사(양간‧퇴촌공파)
충목공 파조(담암공 백형)
신도 비문에 「정충 출기포의 적개공신 자헌대부 행 이조판서 광산부원군 충목공 휘 여석」공의 휘는 여석이요, 자는 은경이며 조선조 문신으로서 시호는 충목공이다.
김종직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소년시에 국학에 오르시었다. 키는 오 척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나 학문을 시험하면 동학중(同學中)에 늘 우두머리를 차지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다.
아버지 강화 부상공 휘 수는 사예 권황의 따님을 취하시어 여석(충목공, 이조판서), 이석(공조좌랑), 용석(담암공․진사), 인석 4형제분을 두셨다.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시고 그 해 세조께서 궐내에서 선비의 자제를 친히 책문(策問)하시고 3인을 택하니 공이 둘째로 뽑혔다.
세조께서 책문을(구술시험) 하시고 과히 영재라 일컬으시고 내전에 불러 친절하시며 『큰 그릇은 다르구나(深器異).』 하시었다.
세조께서 이르시길 『네 아비는 이제부터 네 아비가 아니고 내가 네 아비가 될 것이다』(汝父非汝父我實汝父) 하시고 『네가 추우면 내가 옷을 입혀 주고 네
가 굶주리면 내가 먹여 줄 것이니 그러므로 네가 곧 네 아비이니라.』(汝寒我衣之汝飢我食之我實汝父) 하시고 다시 물으시길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으며 활도 쏠 줄 아느냐』하시니 『책은 읽고 있지만 활 쏘는 법은 모르옵니다』하고 아뢰오니 세조께서 웃으시며 『나는 이미 15세에 큰 활을 당길 수 있었다.』고 하시었다. 동궁을 불러 들게 하시고 중전께서 술잔을 올리게 하시면서 이르시길 이는 후일에 좋은 보좌역이 될 재목이라 하셨다.
방(榜)을 발표하는 날에 임금이 시제일장(時題一章)을 써서 삼인에게 화답해 올리게 하니 공의 시의 한 구(句)에 『배상심전 충의자(背上深鐫 忠義字)』라 하니 임금께 칭찬하시길 마지않았다.
일방(一榜)에 유가4일(遊街四日)을 특허하시고 예문관에서 잔치를 베푸니 이것은 공을 끔찍이도 귀중히 여기신 까닭이다.
세조께서 나이가 어리고 재주 있는 문사를 뽑아서 예문관의 직책을 맡기시니 공이 그 중에서 먼저 선발되어 입궁하여 시강(時講)하였다.
세조가 공을 보고 이르시길 『술은 사람을 보고 미치게 하니 너는 그것을 행여 즐기지 말고, 교만은 사람을 거만하게 하니 너는 매사에 교만하지 말 것이며, 욕심을 부려서도 아니 되니 너는 모름지기 참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몸을 보전하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지나지 않으니 너는 나의 말을 명심해야 하느니라.』하시며 영성군 최항에게 명하여 무기욕(毋嗜欲), 무기음(毋嗜飮), 무교금(毋驕衿) 아홉 글자를 쓰게 하여 어새를 눌러 하사하니 그 총애하고 우대함이 매양 이와 같았다.
성균관 학유에서 군자감 주부로 전직되고 이조와 병조 좌랑으로 옮기었다. 병조에 계실 때에 공이 맡으신 일은 유독 공무가 번잡해서 남들은 공이 이 일을 능히 해낼까 근심하였으나 공은 잘 처리 결재하여 막히고 지체함이 없으므로 군사들이 우러러 펴는 자가 천백인이었다.
공이 사람을 한번 보시고 이름을 묻고는 다음에 그 사람이 지나가면 이름을 기억해 부르시고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다하니 사람들은 그의 총명하심을 탄복함으로 공의 이름이 널리 퍼졌다.
병조정랑 자리가 비어있어 판서가 특천으로 승진시키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병조에 참된 정랑을 얻었다. 하였다. 그 뒤 의금부 검상에 옮기고 사인에 오르시고 성균관 사예로 전보되었다.
명나라 헌종이 건주의 난에 우리나라에 청병 해 옴에 우의정 윤필상을 원수로 삼고 공을 종사군으로 삼아 군대의 중요한 업무를 맡기니 공이 기무에 능하고 공급을 민첩하게 하니 일이 극진하고 합당하게 처리되어 쉽게 오랑캐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하여 공을 아뢰오니 황제가 칭찬하고 상을 후히 주었다.
곧 사간이 되어 직언을 많이 하시고 다시 사복시정에 오르시니 세상에서 사복시정에 바른 사람을 얻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 무렵 남쪽 지방에 도적이 창궐하여 잡아서 치죄를 하는데 관원이 잘못을 가리지 못함에 성종께서 공을 파견하시어 일을 보게 했다. 도적들은 익히 공의 이름을 들은지라 감히 그 실정을 숨기지 못하고 이미 죄로 갇힌 사람 또한 원망치 못하였다.
세조 30년(1467)에 이시애가 난을 일으켜 길주로 부터 군사를 풀어 여러 고을 함학하자 조정이 크게 놀라 당황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토벌을 명하시니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기 위해 영상 조문석과 함께 토벌하여 죽이고 잡은 도적은 일만 명이 넘었다. 난을 토벌하자 『정충출기포의 적개공신 일등』8명 중에 드셨다.
동부승지가 되고 우승지를 거쳐 뛰어 도승지에 제수되었고, 시종 형방을 맡게 된 것은 공이 어디를 보아도 형정에 밝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강화공(수)께서 임지에서 병환이 위독하시매 이금께서 약과 전의를 보내어 병세를 살피게 하였다. 전의가 이르기도 전에 돌아가시니 임금께서는 특명으로 부의를 보내시며 이르시길 『승지로서 상을 당하는 자는 많지만 유독 충성되고 또한 어진 것이 남보다 특이한 고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하셨다.
공이 상을 마치고 이조 참의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얼마 후에 한 직급을 올리시며 글을 내려 이르되 『경이 일찍 후설(喉舌)의 직책을 맡아 출납을 오직 진실하게 하고 이제 지방의 안찰사로 나가 정사를 함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가자(加資)하는 것이다.』하셨다.
공께서 중임을 맡으신 후 피로와 수고로움을 잊고 밤과 낮으로 직책을 다하매 피로가 얼굴에 나타나 사람들이 『좀 쉬어야 합니다. 병환이 나실까 두렵습니다.』하였으나 듣지 않으셨다.
과로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 슬퍼하시며 『무슨 병을 얻었기에 갑자기 죽었느냐』하시고 공을 위해 조회와 저자를 3일간 거두시고 『충목공』이라는 시호를 내리셨다.
공의 총명함이 다름 사람보다 뛰어나고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삼족에게 인자하고 집을 잘 다스리며 나라의 근심을 내 집같이 하고 남이 청하는 바를 곧 바로 허락하고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으며 언제나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데 표리가 없는 고로 사람들이 모두 부형과 같이 믿었다.
사람이 죽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지성으로 구휼하고 오히려 미치지 못하신가 저어하시니 대개 공의 천성이 그러하였다.
세종 27년(1445)에 태어나시고 성종 25년(1494)에 돌아가시니 향년 49세다. 성천부사 김익령의 따님을 취하시어 3남 2년을 두셨다.
장남 상은 전생서 참봉이고, 차남 장은 부사직이고, 삼남 장이다. 맏딸은 판서 유계경의 아드님 진사임에게 출가하시고 둘째는 대사헌 허침의 아들 진사 관용에게 출가했다.
이조 판서 부계 홍귀달께서는 공을 이렇게 비문에 읊어 새겼다.
하늘이 사람에게 성품을 주시니 공의 성품은 순수하였다. 총명하고 영특 호협하니 무리 중에 빼어났다.
일찍이 조정에서 벼슬을 할 때 기특한 기국을 발휘하고 백일 같은 붉은 마음 충(忠)과 의(義) 두자뿐이네 임금께서 친히 보시고 찬찬하여 마지 않으셨다.
호랑이는 바람을 타고 용은 구름을 타니 이로움은 주역의 괘효 52에 보고 바쁜 나날의 항적에도 오히려 넉넉함을 얻었다. 삼대에 임금을 받들 제 그 뜻을 더욱 돈독히 하여 지위는 날로 높아 마침내 형조의 장이 되고 구요(咎요)와 짝이 되었다.
삼정승을 눈앞에 두고 이루지 못했으니 주역에 대들보와 서까래가 부러짐을 슬퍼하고 시경에 시들어 병듦을 노래하였다. 사람들은 비록 돌아갔다고 하나 명성은 길이 남을 것이다. 돌보다 더 굳음이 없고 지석(誌石)보다 수명이 오래일 수 없다.
홍치(성종) 7년 계축 12월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 오위도총관 부계 홍귀달 근찬
- 신도 비문에서 -
23세 담암공 휘 용석 유사
낙동강 연안 안동 구담방면 대촌 입구에 유허 비각이 있으니 성균진사 담암 김선생의 유허비로 약 오백 년 전 연산 폭정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가솔을 이끌고 낙향 은거한 사실을 말해준다.
담암공은 양간공의 십대손이며 문장이 명세 하신 퇴촌공의 증손이요. 강화부사(수)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1453-1523) 대대로 사환으로 이어진 명문의 후예로서 서울 동문 외에 사셨다.
선생은 일찍이 당대 거유 점필재(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성취되어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
주문공의 고사에 의해 향약을 설립해 태학관에서 소학을 강의하시며 실사구시의 학문을 강구하시니 그때 선임된 분이 모두 당대의 명사였다.
장안 준사 가운데서 공이 가장 우수하다고 추강 남효온은 사우록에 적어 공의 높은 학덕과 인품의 고매함을 실증하였다.
공은 세상변화의 기미를 알고 낙향 은거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아니 되어 무오․갑자 양대 사화로 사문(師門)의 화가 극에 달해 동문수학한 일두 정여창, 한훤 김굉필, 탁연 김일손 등 이름난 분들이 참혹한 화를 입어 혈육마저 보전치 못하였는데 홀수 초수야로(물고기와 산짐승)와 함께 산수간에 자취를 감추니 세상과 인연을 끊는 초연한 군자였다.
공은 슬하에 팔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학재명으로 추증을 받았으나 관로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임하(林下)에서 학문연구에만 점심하였다.
셋째 아들 시는 무과로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공의 계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혹편(酷鞭)을 가하니 연유인즉 자손들에게 “성균 진사만은 안 할 수 없으나 대과에 참여하지 말라” 는 공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토록 공은 세상공명에 초연하였고 임종 시 서안에 있는 문적을 불사르고 타계하시니 이는 후손들의 신명을 보전케 함이다.
장손 득렴(도봉공)은 유일제 문인으로 구중생진(구중생진) 하여 추증 되었고 임진란에 창의 하여 근시재 김해와 함께 군공(軍功)을 세웠으며 그 후 대대로 구담에 사시며 문학 재사가 끊이질 않았다.
둘째 아들 균(습독관)은 봉화 거촌에 터를 잡아 언구가(쌍벽당) 집의 문호를 열었다.
넷째 아들 주는 퇴계 선생과 동방진사로서 은거 구지하여 안동 와룡 이계에서 터를 잡았다.
셋째 아들은 중절하시고 일곱째 아들 지(참봉)는 문행이 있고 그의 아들 언박과 손자 익 부자는 생원 진사로서 학행이 높고 효행으로 대대로 이어가니 이는 담암공이 끼친 음덕이다. 오백년의 긴 역사 속에 공의 유적을 더듬는 바는 유허비뿐인데 세파에 붙들려 유허 비각이 장터 한가운데 파묻혀 있으니 멸몰 될까 두려운 마음뿐이다.
봉화 거촌의 쌍벽당 지방 문화재로 지정
봉화군 거촌 마을은 담암공의 둘째 균이(습독관) 터를 잡아 그의 아들 언구(상벽당)가 중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학술과 덕행으로 성망이 높았으나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득려(잠계)는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생원이 되었고 친상 삼 년을 시묘(侍墓)사리를 했다.
잠계의 아들 백웅은 임진란에 의병장으로 군공을 세웠으며 이곳 거촌에 정착한 후 자손 대대로 문장과 학행으로 추중된 분이 많아 봉화 거촌의 문호를 빛내었다. 쌍벽당의 건물은 건축연대가 오래 되고 구조에 특이성이 있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정화하여 수호하고 있다.
셋째 시는 무과 급제로 성주 목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언진과 언수 형제가 모두 생원과 진사였고 언수의 손자 여종은 귀산검사를 지냈는데 후손들이 대대로 성주에 살고 있다.
사림 숭모지지(士林崇慕之地) 용산 보덕단의 유래
유일재(언기)는 담암공의 휘 주의 둘째 아들로 중종 16년(1520) 구담에서 출생하여 부모를 따라 와룡면 이계로 이사하였는데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전념하였다.
일찍 백담 구봉령과 함께 청양산에 들어가 십 년을 공부하고 성균 생원시에 합격한 후 다시 진취할 뜻을 버리고 육영사업을 낙으로 삼았다.
만년 가야에 학당을 세워 유일재라는 편액을 걸고 후학을 교도하니 한때는(1561-1588)생도가 칠십 명이나 되었다고 신오봉(지제집)에 기록 되었고 문도의 수가 수백 명이었는데 재주에 다라 교양하여 학문이 성취되어 현달 한 분도 있고 문학과 조행으로 후진을 가르쳐 한 시대의 사표가 된 분도 있으니 복주(안동)의 문학을 풍성하게 한 것은 오직 선생의 창도(倡道)에서 이루어 졌다는 칭송을 받았다.
퇴계선생이 타계하신 지 4년 후에 사림(士林)이 선생을 위해 여강서원을 짓고 유일재 선생을 초대 원장으로 추대하였는데 동문들과 더불어 원규를 제정하여 초윤 권문해가 안동부사 재임 시에 청원하여 서원을 국학으로 승격 시켰으며 그 글의 내용이 천하의 명문으로 전한다. 문도 중에 정랑 권위, 판서 박곡장, 승지 신지제, 참판 권태일은 현달한 분이요 지헌 정사성, 방담 권홍, 책지 남치리, 매헌 권반은 후진 교육에 전념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588년 3월 15일 선생이 영면하신 후 문인 권태일(참판)이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동문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돈이나 곡식을 수습해 용산 선생의 묘 아래에 보덕단을 쌓아 사림에서 보덕단을 받들어 온지 삼백 수십 년에 이른다.
정조조 때에는 용계서원을 창건하여 70년을 원향(院享)으로 받들기도 했는데 서원이 훼철되자 보덕단을 복설하여 수호해 왔는데 지난 정묘에 단소 경내를 정리하고 단비와 용산보덕단 정비를 세워 사림숭묘 지지로 성역화 하여 매년 음력 초정에 향사를 봉행한다.
선생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 득연(갈봉)은 구중생진으로 선조 임진란에 창의하여 의창을 설치해 후방 관장에게 소홀함이 없이 충효양전(忠孝兩全)의 도리를 다 했다.
명나라 장수 장무덕, 양호, 진천룡, 주공유 등이 공의 인품에 감화되어 증시 및 서문에 이르되 갈봉은 진실한 군자로 가구유운(佳句流韻)의 시상을 이두지가 재세함과 같고 교우의 신의는 안편중과 같고 중신은 자로와 같다고 하며 존경했다.
인조(1623) 개국 후에 심징불기 했다. 친상에 시묘 3년 하시고 선영하에 지수전을 지어 많은 후학을 교도하고 학구에 전심하였다.
지수정가와 시조 60여 수를 남기니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 사미인공 등과 년대가 거의 같이하는 작품으로 학자들의 연구 재료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의 아들 광주(생원공)는 문명이 떨쳐 5대 진사 집으로 명가의 지칭을 받았다.
둘째 득숙(만취헌)은 구백담 문인으로 문장과 학행이 한때를 진동하여 영남 좌우 도에서 많은 선비들이 재주를 겨룰 때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와 장원을 다투어 좌김우정(左金右鄭)의 설로 문명을 떨쳤는데 선공상중(先攻喪中)에 슬프다. 29세로 일생을 마치니 애석 하도다.
그의 아들 광부(오매당)와 증손 세환(긍구당)은 박통경사하고 조리가 간결하여 집안의 명성을 높였고 대대로 도학과 무학재사가 끊이질 않아 가야파의 명성을 그 지방에 떨쳤다.
셋째 득의(청취헌)는 숙부 언령에 출계(양자)하였는데 재학이 겸전해서 임진란 때 백형 갈봉공과 창의하였다.
그의 아들 광원(석당)은 문장과 학행으로 사류에 추증되어 여러 번 천맹에 올랐으나 임하에서 늙어 죽기를 바라니 세칭 남주고사라 하였다.
그의 아들 진구와 손자 태운(운정)이 또한 문학이 높아 양대 진사를 하니 담암공으로부터 운정까지 7대 진사집으로 선생의 후손에 면면히 학문의 운이 크게 융성하였다.
광산 김씨 종보에서
23세 성균진사 담암공 휘(諱) 용석 유허비명
복주(福州 안동)의 구담은 용궁 예천 양군의 접경이라 앞으로 낙동강을 굽어보니 삼읍(三邑)의 백성들이 연안을 따라 살매 집이 서로 연하여 대촌을 이루었다.
북으로는 용궁산이 있고 그 상(上)에 고진사(故進士) 담암 김선생의 무덤이 계시다.
선생의 휘(諱)는 용석(用石)이요, 자는 연숙이니 성화년간(成化年間)에 나셨다. 대대로 경성 동문밖에 살아 계셨다.
이십 세 되시는 성묘3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셨고 점필재 김선생 문하에 유학하셨다. 연산 초에 가권을 이끌고 구담에 와 은거하시니 부인의 고향이다.
공이 몰(沒)하시매 자손들이 그 집을 8, 9세를 전하여 지켰다.
공의 묘전석에 다만 성(姓) 휘(諱)만 있고 현각(顯刻)이 없었다.
공의 아들 팔인(八人) 자손들이 문아(文雅)로 전업하였는데 공을 위한 신후(身後)의 사적(事蹟)이 이다지 몰몰(沒沒)함은 어찌된 연고인고....
세상에 전하기를 공이 임종 시에 안상(案上)에 쌓인 문적을 가져 오라 하여 불살랐다. 이는 이름을 세상에 남기지 않게 함으로 자손들이 유지를 받들어 석면(石面)에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공의 시대가 근 삼백 년이 되었으며 당시 사적은 상고할 수 없으나 홀로 남추강 효온 사우록에 공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다.
강중화, 응정사가 말하기를 공이 소시(小時)에 성균관에서 주문공의 고사를 의방(依倣)하여 향약(鄕約)을 설립하고 월 초하루, 보름에 소학을 태학관에서 회강(會講)하였다.
그 선임된 분이 모두 장안의 일시명사(一時名士)라 이렇듯 김용석, 연숙과 신종호 차소와 박연 문숙과 손효조 무첨과 정경조 효곤과 권주 지경과 정석형 가회와 가백신 자온과 김윤제 자주는 그 가장 우수한 분들이라 하였고 끝으로 말하기를 세상에서 시기(猜忌)하는 자 다투어 말하기를 저희들은 소학효자의 계원들이 아닌가. 공부자(孔夫子)의 사성십철(四聖十哲)이 있는 것 같도다 하였다.
추광공은 일시에 뛰어난 분으로서 소허(少許 : 제이) 가인(可人)이라 허락(許諾)하였다. 장안 준사를 열거함에 공이 가장 우수하다 하였으니 공을 가히 알 수 있다.
그 당시 성묘(成廟) 인재를 양성하여 일시재사(一時材士) 가(可)히 성(盛)하다 하였다.
그 향약을 태학관에서 설립하고 소학을 강론함은 고도(古都)를 창명(倡明)하여 이 세상에 펴고자 함이어늘 조물이 시기하여 막는 자 있어 공이 사도(학문의 길)를 가히 행치 못할 것을 알고 다시 과거(대과)에 응시치 않으셨다.
동문우(同門友)로 한훤 일두의 현(賢)으로 이 학(學)을 몸소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화를 면치 못하셨고 정암 선생은 한훤 선생에게 수학하여 이 학(學)으로 일세(一世)에 사험코자 하다가 기묘사화를 입으셨다.
우리 동방(東方)이 편소(偏小)하나 어찌 이다지 고도(古道)로 상배(相背) 되는고 간절히 생각건대 선생은 학술이 순정하고 지혜와 생각이 깊고 커서, 천문과 세시(歲時 : 세상의 일이 돌아가는 정황)를 미리 아시고, 종일(終日 : 때, 시기)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초연히 은둔하시었다.
무오, 갑자 양대 사화에 동문들은 가루가 되었으나 광채를 보존하고 여생을 마치시되 신분과 명예의 매몰됨을 한탄치 아니하시니 주역에 이르기를 기미를 알고 있는 것은(知幾지기) 신과 같다 하였으니 선생을 이룸이 아니겠는가?
말하기를 외인(外人)이 선생 묘산(墓山)에 투장한 자 있어 고을 원이 선생 묘전 비석인줄 알아보고 놀라고 또 울어 가로되 이 노선생(老先生)의 유해가 이곳에 방치된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도다 하고 제문을 지어 제를 지내고 갔다고 한다.
그러한 즉 그 당시에 선생의 처소를 모르는 자가 많았다 할 것이다. 금년 봄에 구 세손 광현이 유적의 매몰됨을 괘념하여 동종(同宗)에 창의(倡義)하여 선생사적 약간을 기록하여 유허비를 세우는 것이 어떠할꼬 하니 다 배례하고 승낙함으로 이에 광현이 그 일로 찾아와 비문명(碑文銘)을 청하였다.
광정이 또한 외손이 됨에 노혁(老洫)으로 사양치 못하시고 삼가 받아 서(敘)하고 명(銘)해 가로되!
계림(경주)의 운이 다 되어가고 낙엽이 떨어질 것 같으니 왕자공께서 거친 땅에 오셨다.
왕자의 관복을 벗으시고 백성들과 혼거하셨다.
유풍(遺風)이 아득하니 넓은 세상에 뉘가 짝할꼬... 손(孫)에 길(佶)이 계시니 고려를 도우사 자손이 창성하여 이어서 8평장이 계셨다.
수십 세를 지나며 벼슬자리가 규조(圭組)처럼 많았네. 공에 이르러 상서(尙書: 이조 판서를 지낸 형 충목공을 두고 한 말)의 아우이시다.
젊어서부터 명망이 높으사 곧 제세(濟世) 할 뜻을 갖으셨다.
저 성균관에서 준사(俊士)와 소매를 같이 하셨네. 향약을 베풀어 가학하시매 그 경과 그 윤이로다.
유관(儒冠)이 밝고 빛나며 키 큰 말이 거북 타고 용 같은 명을 멸시하였네. 활을 당기고 독을 품은 무리가 있으니 시국(時局)을 점(占)하고 기상을 보아 패도를 아니 할 수 없다.
기미(機微)를 알고 멀리 떠나시니 낙동강 가이(岸) 안동 구담이로다.
문을 닫고 외출치 않으시니 뉘가 그 기미를 알리요, 신실하고 명철한 그 덕을 오래도록 그 빛을 남겼는데 그 아름다운 행적을 숨기고 가려져 빛나지 아니하였다.
저 유구한 백세에 뉘가 그 상세함을 알리요 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그 규범을 지켰도다.
끼치신 그윽한 향기 꺼지지 아니하니 지나가는 길손도 공의 덕을 추모하였으니 저 숨은 군자를 향사(享祀) 할 것을 생각했네.
공의 자손들이 효사(孝思)로 추모하니 세사(歲祀)를 결(缺)함이 없도다. 개연히 하회함은 뜻이 유열(遺烈)에 있도다.
향사 모시는 법을 글로 남기어 이로써 후세 자손들에게 경계케 함이로다.
담암공은 안동 용계서원과 돈정사에 배향되셨다.
익위사 세마 평원 이광전 근찬
광산김씨 담암공파 묘사절요(光山金氏 潭庵公派墓祀節要)
세시풍속은 제도적으로 의식화한 체제가 아니고 하나의 민족적인 풍습이기 때문에 외국인들에게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기 쉽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자라온 까닭에 고향을 떠나면 곧 향수(鄕愁)에 젖게된다.
이러한 풍속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은 연중 행사로 음력 10월은 일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다.
계절상으로 소설(小雪)이 들어 있어 겨울로 접어드는 달이다. 하지만 햇빛이 따뜻하여 소춘 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시월은 상달이라 하여 사람들은 최고의 달로 여겨오고 있다.
10월 시제는 기제사(忌祭祀)를 지내는 것과는 달리 묘소를 찾아 일년에 한번씩 제사를 올리는 것은 추수가 끝나고 한가한 10월 상달에 지내는 것으로 예로부터 전해오는 추수감사(秋收感謝)에 제천(祭天)의 전통을 이어 조상님에게 감사한다는 뜻이 있다고 본다.
제례(祭禮)는 정성을 다하여 함으로써 치제(治祭)에 있어는 금기(禁忌)와 목욕제계(沐浴齊戒)를 하여야 한다.
제물을 장만할 때 걱정도 안하고 하인도 꾸짖지 말고 “하하”하고 웃지도 말며 행동거지도 삼가며 어린아이가 보채도 주지말고 정성으로 치제하면 祖上은 기꺼이 흠향하고 자손들은 복을 받으며 그렇지 못할 때는 제화(災禍)가 있다고 여겨오고 어느 가문도 제사만은 정숙하게 모신다.
시사는 일년에 한번 뿐으로 자손들은 한복에 도포를 입고 관탕을 하는데 갓 대신 유건을 쓰기도 한다. 그래서 시사는 여러 파로 갈린 친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전을 올리는데 본소 회전에는 많은 자손들이 참사하고 있다.
이날은 입향조를 비롯하여 삼 형제분의 제사를 올리게 되어 있다.
묘제는 각파별로 추천하여 선임된 유사(有司)로서 제수(祭需)를 구입하는데 흥정을 하지말고 보기 좋고 흠집 없는 정결한 제물을 구입하고 실과를 깨끗이 씻고 장만한다.
떡은 인절미와 절편으로 웃기는 전, 조약, 부편, 경단, 깨꾸리로 괴이고 고기는 쇠고기, 돼지고기, 방어, 조기, 닭으로 계성조(鷄腥組)로 만져야 한다.
제물 진설은 일반 기제(忌祭)나 길사(吉祀) 또는 상사(喪祀)와는 달리 시사 때는 제물의 진찬 의식은 별로 없고 한꺼번에 묘전 상석(床石)위에 먼저 진설하고 진설은 조동율서(棗東栗西: 밤, 대추) 이동시서(梨東柿西: 배, 감)로 과실을 진설한다.
다음 줄이 청동백서(靑東白西)로 삼채를 놓으며 우포(右脯), 좌회(左회)로 하고 다음에는 적대 받침을 올리고 다음 줄에 삼탕(三湯)을 올리고 그 다음 줄에 우편(右䭏: 떡), 좌면(左麵: 국수)을 올리고 좌반(左飯: 밥), 우갱(右羹: 국)으로 진설 하게 된다. (잔(盞)은 飯과 羹사이에 앞줄 놓아야 함)
제관은 당일 본소 강당에서 의관 정제하고 접수처에 시도(時到)를 마치고 어른분께 인사하고 친척간으로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 개좌(開座)하여 分定을 마치면 제관은 분정판을 읽어보고 자기의 임무를 확인한 다음 각기 분담 역활 자와 참사자가 묘전에 도열하는데 나이가 많고 행열(行列)이 높은 사람이 왼쪽 줄에 서고 그 다음에는 나이 순서대로 서게 된다.
제의(祭儀)는 집례(執禮)의 창홀(唱笏)에 맞추어 참신(參神) 강신(降神), 초헌, 아헌, 종헌례, 부복, 사신(辭神), 퇴작(退酌), 분축(焚祝), 철상(撤床)순으로 진행된다.
∘참신(參神) :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먼저 祖上에 인사를 하는 것으로 일제히 두번 절한다.
∘강신(降神) : 신을 모셔 오는 의식으로 초헌관이 분향하고 꿇어 앉으면 술을 잔에 따루어 초헌관에게 주는데 祭主는 이를 받아 잔대를 돌리고 오른손으로 잔을 들어 묘전 향로석을 중심하여 세번 부어 빈잔을 집사자에게 준다. 집사자는 잔을 받아 상석위에 놓는다. 다음에 초헌관은 홀기에 따라 두번 절을 한 다음 제자리로 돌아 간다.
∘초헌례(初獻禮) : 원래 宗孫(종손)이 초헌관을 한다. 만약 종손이 유고할 때는 직계주존(直系主孫)순으로 대행한다. 첫번째 술잔을 올리고 집사자는 상석위에 차려진 밥그릇의 뚜껑을 열고 참사자 모두가 묘 앞에 부북(俯伏)하고 축관은 祭主의 왼쪽에서 축문을 읽는다. 축이 끝나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고 초헌관만 소퇴재배(小退再拜) 한 뒤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헌례(亞獻禮) : 두번째 올리는 잔으로 나이많은 어르신에로 분정하여 아헌관을 한다. 아헌관은 술잔을 올린후 소퇴재배(小退再拜) 한 후 제자리로 돌아 간다.
∘종헌례(終獻禮) : 종헌도 세번째 올리는 잔으로 사위나 아니면 참사관 타성(他姓)의 사람으로 종헌을 택한다.
종헌도 아헌과 같이 술잔을 올린뒤 소퇴재배(小退再拜)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때에 집사자는 삽시정저(揷匙正箸)를 하는데 ?가락은 동량하여 밥그릇에 꽂고 젓가락은 잘 갖추어 시접에 놓으면 홀기에 의하여 헌관 이하 참사자 모두가 다시 묘전에 부복을 한다.
신이 밥을 아홉번 뜰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축관(祝官)이 북쪽을 향하여 서서 기침을 세 번 하는데 이것을 계문(啓門) 이라고 한다. 이 때 祭官은 모두 일어서며 집사자는 갱(羹)을 물리고 냉수로 바꾸는데 이것을 철갱진다(撤羹進茶) 라고 한다. 이어 집사자는 밥을 세술 떠서 물그릇에 놓고 전체 제관이 국궁하여 홀기에 따라 평신(平身) 구령에 몸을 바르게 하고 밥 뚜껑을 덥고 숫가락은 시접 위에 놓는다. 이를 철시이반(撤匙罹飯) 이라하는 양식(儴式)이다.
∘辭神(사신) : 제사의 마지막 순서로 헌관 이하 참사자 모두가 두 번 절한다. 祝官은 祝을 불사르고 술잔부터 내려 撤床을 하게 되면 묘사의 전 의식이 끝난다.
∘飮福禮(음복례) : 묘제가 끝나면 참사자 모두는 제사(薺舍)로 와서 개좌(開座)하여 먼저 복주를 따룬다.
복주는 헌관부터 시작하고 다음은 나이 순서대로 각각 술잔을 돌린다. 이는 혼령이 “내가 음식마다 복을 골고루 넣어 두었으니 다정하게 나누어 먹어라, 목 매이지 않게 술을 먹어라” 하는 복내림을 받기위함이다.
복주가 끝이 나면 다음이 과실과 떡 그리고 고기를 나누어 분배하는데 제사에 쓴 음식을 모두 한곳으로 모았던 것을 골고루 나누어 祭官에게 준다.
음복시에 마시는 술은 곡주로 탁주를 음복한다. 음복이 끝나면 비로소 의관(衣冠)을 벗을 수 있다. 음복도 의식(儀式)이다.
이어서 참사자 모두가 중식을 하는데 밥은 비빔밥이고 고추가루, 양념이 않든 깨소금장물로 간을 맞춘다.
묘사는 남자만이 참석하고 여자는 제관이 될 수 없다. 다만 여자는 제물을 장만하는 일과 식사 과정을 도와 줄 뿐이고 음복은 같이한다. 이와 같이 사람은 죽어도 제사를 통해 후손과 함께 살면서 자손에게 복을 주고 있다. 이러한 개념으로 祖上을 숭배하고 집안의 代를 이어가는 것을 孝의 으뜸으로 삼았던 우리나라 유교정신으로 삶의 가치관을 숭상했던 미풍양속(美風良俗)이 오늘날까지 뿌리깊게 남아 있다.
이처럼 우리들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祖上들의 슬기와 얼을 이어받아 오천 년을 면면이 살아 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할때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는 근본(根本)이 곧 孝道이고 보면 이러한 정신을 선인(先人)들이 전해준 그 숭고한 전통문화는 오래 오래 살아 숨쉴 것이다.
∘묘사정일(墓祀定日) : 매년 음 10월 10일 雨天不拘(비가 오더라도 행사함)
∘參祀者(참사자) 준비 사항 : 1. 전일날 목욕하고 견건한 마음으로 참사한다.
2. 의식(儀式)은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는데 관(冠은 갓 대신 유건(儒巾)으로 하고 의복은 한복 위에 두루막을 입고 도포(道袍)를 입는 것이 정장(定裝)이나 도포가 없을 때는 두루막으로만 입어도 된다. 양복(洋服)을 입었을 때도 정장(定裝)을 하는 것이 禮儀이다.
양간 퇴촌 담암공파 39세손 案東 金炳奎 (容) 提供
<참고>
삼채 :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 삼탕 : 육탕, 어탕, 소탕(두부)
삼적 : 육저, 어적(조기), 소적, 메 : 밥, 추석 → 송편 연시제 → 떡국
침채 : 동치미 식혜 : 젓갈 유과류 : 약과 산자(흰색) 강정(검은깨)
담암공 묘사 진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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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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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위(靈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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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 |
밥(좌반),국(우갱) 밥, 국 |
조 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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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잔 |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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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탕 소탕(두부) 어탕 |
꺼 꾸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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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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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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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절 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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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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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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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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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고 기↑ 동두서미(東頭西尾) | |
서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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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
동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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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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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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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
명 태 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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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 |
백채(도라지) 흑채(고사리) 청체(시금치) 청동백서(靑東百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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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시서(배동, 감서) 조동율서(대추 동, 밤 서) | ||
밤(백), 감(홍), 땅콩(백), 은행(홍), 잣(백), 수박(홍), 유과(백) 사과)홍, 배(백), 대추(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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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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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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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도봉공 휘 득렴(양간‧퇴촌공파)
1545년(인조2)-1601년(선조35) 조선 중기 학자, 자는 치정, 호는 도봉.
아버지는 장사랑 언련, 어머니는 풍천 임씨.
유일재 김언기의 문인이며 선조 15년(1582) 생원시 2등 21인으로 합격하였다.
선조 26년 임진왜란 때에는 근시제 김해와 같이 창의하며 화왕산에 들어가 크게 군공을 세웠다.
시례의 가문에서 성장하여 문장과 학행이 세상에 저명하였다.
유고가 있으나 전란 중에 불타 없어졌다.
성균진사 도봉공 휘 득렴 유사
공의 휘는 득렴이요, 자는 치정이며, 호는 도봉이니 담암 선생의 주손이시다.
가정실례로 견문과 식견이 뛰어났고 때인즉 유일제 선생이 창도하여 퇴계선생의 학문을 강명할 때에 공이 당내종질로서 일찍부터 배워 위기(爲己)의 학문을 터득하였다.
동문재현 신오봉, 권노천, 권태일과 도의로 사귀었다.
만력 임오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선조 임진년에 창의하여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하왕산성(창녕)에 들어감에 제명록이 있다.
공이 사가의 보수로 도학이 있는 문하에 들 때 학업을 받았고 확실한 역사에 단서가 있는데 병화로 인해 문적이 탕진되어 증빙이 없고 다만 이 적묘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자료출저 : 광산김씨사
김수환 추기경 스테파노
◎세상이 성자라 부르는 분
2009년 2월 16일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 한 분이 선종하시자 모든 국민들이 안타까워하며 애도의 물결로 슬픔에 젖은 적이 있었습니다.
공중파 방송은 물론 모든 언론들은 추기경의 5일장 장례날까지 매시간 생중계 방송을 하면서 그분이 일생동안 행하신 사랑과 겸손의 삶을 조명하면서 성자의 삶이었노라며 연일 대서특필한 적이 있습니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성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 몰려든 추모의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져 십여리에 네 다섯시간 기다려야 조문할 수 있는 인파를 보고 사람들은 명동의 기적이라 외쳤습니다.
조문객의 소감은 다양하지만 "평화를 느꼈다, 빚진 것을 갚는 느낌이다, 추기경님과 한 시대를 같이 살아온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로 요약될 수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사십만이라는 자발적 추모객은 사상도 이념도 남녀노소도 외국인도 종파도 초월한 우리 현대사의 초유의 추모인파였고, 교회와 모든 사람들이 상상치 못한 추모열기였습니다. 국가가 선포하지 않는 국장과 다름없었고 또 한국 가톨릭 역사상 처음 치루는 명예로운 교황장이었습니다.
◎순교자의 후손
추기경님 조부(보현 37대)께서는 병인박해 때 순교하셨고, 아버지(영석)께서는 유복자로 태어난 순교자 가문입니다.
목숨까지 바쳐 삼대가 믿어온 추기경님과 관련된 가톨릭교회 기초교리 몇 가지는 알아두어야 그분을 알리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말로 천주교회입니다. 창조주 하느님 즉 신이 인간이 되어 오신 신비의 종교입니다. 창조주(성부) 하느님께서 동정 마리아를 택하시어 하느님의 영(성령)으로 잉태되셨다가 태어나시니 이름을 예수(성자)라 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을 악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 회개, 용서를 말씀(복음)으로 선포하시자, 그 당시 사회에서는 파격적인 급진 사상으로 두려움을 느낀 지배층은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립니다.
그분은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시어(부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천주교회서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세상의 시작으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ㆍ추기경 : 성직제도는 교황, 주교, 사제, 부제, 수도자로 되어 있으며 예수로부터 교회를 다스리는 교도권과 죄를 사해 주는 사죄권을 위임 받은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 현 베네딕도 16세 교황까지 265대로 이어집니다. 추기경은 교황을 보좌하며 교황을 선출할 수 있는 선거권과 교황으로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을 가진 고위 성직자입니다. 교황의 왕자로서 전하의 존칭으로 호칭되며 어디에 거주하든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ㆍ스테파노 : 세례를 받을때 세례자(영세자)는 교회의 성인성녀의 이름을 선택하여 신앙생활의 거울로 삼는데 이를 본명 또는 세례명이라 합니다. 스테파노는 예수의 열두제자 중의 한 분으로 첫 순교자입니다.
◎ 양반 중에 양반으로의 긍지를 지녀셨던 분
국민들 스스로 성자라 부르며 사랑받아온 추기경님은 21세기에서 광산김씨를 명문가문으로 도약시키는데 공헌하신 당사자로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광산인입니다.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주교님의 착좌식 때에 축사를 하셨습니다.
"주교단에 김씨성을 가진 분이 십 여명 있는데 또 김씨가 주교가 되는데 다행히 나와 같은 양반 중에 양반인 광산김씨가 주교가 되어 매우 든든합니다." 라는 말씀에 폭소가 터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신께서는 광김의 후손으로 긍지를 잊지 않고 사셨던 분입니다.
◎ 민족의 영원한 성자로 승화하기위한 종친사회의 노력
신라 국교인 불교는 이차돈이라는 순교자를 내고 도입된지 200년 만에 원효, 의상 대사와 같은 고승을 배출했고, 조선의 국교 유교 또한 순교자는 없었지만 200년이 지나서 퇴계, 율곡 같은 성현을 배출하였습니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세계 가톨릭교회 역사상 선교사 없이 서학을 연구하는 실학자들에 의해 스스로 교회를 수용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온 후 백년간의 모진 박해 속에서 수만 명의 순교자를 낸 후 역시 200년이 지나서야 우리사회에 다양한 종교 중에서 천주교회가 국민들이 사랑과 존경심의 발로로서 성자라 호칭하는 추기경을 배출하였습니다.
원효나 의상대사, 퇴계나 율곡 같은 성현의 공통점은 시대와 종교를 초월한 민족의 스승으로 사랑을 받고있듯 추기경 또한 같은 반열에서 성자 김수환을 민족의 영원한 스승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교회에만 의존할 일이 아니라 종친 사회도 '성자 추기경'의 명성과 명예를 영구히 지키기 위해 교회와 협력해야 할 부분을 찾아 함께 노력해야 할 것 입니다.
◎출생
1790년대에 광김 중흥지 연산 지방에도 천주교가 전파되었습니다.
ㆍ조부 보현(37대, 조모 강말순)은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신앙을 전파하다가 병인박해(1886년)때 순교. (대원군 집권 5년, 8000명 순교)
ㆍ아버지 영석(38대 요셉)은 유복자로 태어나시어 박해를 피해 경북 칠곡 장자골 옹기마을 교우촌으로 정착.
ㆍ김보록 신부(대구 본당 첫 사제)와 뮈델 신부(후 조선교구장)의 중매로 교우 서영서의 따님 서중화(마르티나)와 혼인, 5남 4녀 출생.
ㆍ추기경은 1922년 대구 출생, 호는 옹기, 51년 사제 수품, 43살 주교, 47세 최연소 추기경.(중형 동환도 사제, 일찍 선종)
대구․경북 종친회 전부회장 선국
09. 4月
안동 구담의 담암공 후 도봉공파의 후예들 ...
양간공파/ 군기감사공파/ 퇴촌공파/ 담암공파/
안동은 경북 북부 중앙에 있는 시로 동쪽은 영양군, 청송군, 서쪽은 예천군, 남쪽은 의성군, 북쪽은 영주시, 봉화군과 각각 접해 있는 고장으로 옛날 변진(弁辰) 24개국 가운데 기저국, 불사국(不斯國)이 이곳에 있었으며 <연려실기술(燃黎室기記述>등에는 창녕국(昌寧國), 구령국(驅令國), 소라국(召羅國) 등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가 이곳에 고타야군(古陀耶郡)을 두었다가 삼국 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 고창군(古昌郡)으로 개칭하고, 직령현(直寧縣), 일계현(日谿縣), 고구현(高邱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이곳의 호족들인 삼태사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등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의 승리에 기여한 공으로 930년(태조 13) 안동부로 승격하였다. 그 뒤 영가군(永嘉郡)으로 강등되었다가 1030년(현종 21) 다시 안동부로 개칭되어 3개 속군과 11개의 속현을 관할하였다.
1197년(명종 27) 안동도호부, 1204년(신종 7) 안동대도호부, 1308년 복주목(福州牧)으로 승격을 거듭하다가 1310년(충선왕 2) 복주로 강등되었다. 1356년(공민왕 5) 다시 복주목이 되었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이곳으로 피난해 옴에 따라 1362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일시적으로 현으로 강등된 적이 있었으나 계속 <부>를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에 따라 안동부, 안동군, 1896년 경상북도 안동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예안군(禮安郡)이 폐지되고 몇 개의 면이 안동군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확대되었다. 31년 읍면제 실시에 따라 안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63년 안동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안동시와 안동군이 분리되었다가 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군이 안동시에 통합되었으며, 98년 행정동이 통합되었다. 관할은 현재 1읍 13면 10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담암공이 정착한 풍천면 구담리는 서쪽에 위치하며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에 접해있다.
안동은 동쪽의 태백산맥, 북서쪽의 노령산맥이 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은 저산성 구릉지로 낙동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다. 시 경계를 따라 보문산(643m) 학가산(870m), 불로봉(482m), 연점산(871m), 산지봉(890m), 황악산(782m), 등이 솟아 있다.
낙동강이 시 중앙부를 남류하여 안동호를 이룬 뒤 지류와 합쳐져서 서부로 흐르며, 강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풍산평야는 이 지역 최대의 농경지이다. 호수로는 안동호를 비롯하여 풍천면 도양리에 수리시설이 1970년도에 설치되어 안동시 풍천면, 풍산읍은 물론 예천군, 지보면, 호평면에 까지 관개(灌漑)되고 있고, 여기에 만운지(晩雲池), 여자지(女子池), 등이 있어 관개용수 및 생활용수를 공급해 주고 있으며, 안동댐과 임하댐이 있어 수자원이 풍부한 편이다. 산림대는 활엽수림계에 속하나 소나무와 각종 활엽수 및 참나무 등의 혼효림을 이룬다.
농경지는 풍산, 풍천 논이 80%, 밭이 20%로 수리안전지 논이 더 많다. 풍산평야 일대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며 조, 수수, 메밀 등의 잡곡과 파, 감자, 토마토, 무, 배추 등의 채소 재배가 활발하다. 안동포의 원료인 대마도 많이 재배되며, 한우, 돼지, 닭 등의 가축사육과 양잠, 양봉도 성하다.
광업은 2001년 현재 12개 광구에서 석회석, 장석, 사문석 등이 채굴되고 있다. 공업은 전체적으로 생산시설 기반이 취약하여 거의 발달되지 못하였으나 2001년 현재 3개의 농공단지에 33개 업체가 입주하여 있으며, 음식료, 섬유, 제지 등의 업종이 주를 이룬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시의 중앙을 통과하며 의성~영주를 잇는 국도가 중앙선을 따라서 중앙을 지난다.
안동시를 중심으로 영천, 예천, 영주, 청송, 봉화 방면의 국도가 연결되어 경북 중북부지역의 교통중심지를 이룬다. 안동호에서는 호운(湖運)도 다소 이루어진다.
안동은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을 비롯한 명현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안동향교, 예안향교, 도산서원, 병산서원, 역동서원, 호계서원, 고산서원 등 향교와 서원이 발달하였다. 매년 안동국제탈춤 페스티발과 안동민속제 등의 종합축제가 열린다. 전승되는 민속놀이로는 별신굿놀이, 풋굿, 화전놀이, 놋다리밟기 등이 있고 한국정신문화의 수부의 역활로 각광을 받는다.
이곳은 예로부터 유림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으로 퇴계 이황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도산서원, 서애 류성룡을 배향하는 병산서원, 우탁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역동 우탁(易東 禹倬) 서원 등 많은 서원, 향교가 있어 이러한 전통을 말해준다.
풍천면의 하회(河回)는 민속의 보고로 일컫어지며, 양진당(養眞堂), 충효당(忠孝堂), 북촌댁(北村宅) 등 보물로 지정된 건물을 제외하고도 300~500년 된 고택들과 마을구조 등이 조선시대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유물.유적도 매우 많이 보존되어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가 70점, 도지정문화재 121점, 문화재자료가 42점(2001년)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와룡면 가구리의 선돌, 남후면 하아리의 민무늬토기 등이 있으며, 삼국시대 고분으로 신안동고분군, 옥동고분군이 있다.
중요유물로는 하회탈 9개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기록을 담은 <징비록/국보 132>과 <운천호종일기/보물 484>, 오천 군자리 문화단지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길안면 송사리의 소태나무(174), 길안면 용계리의 은행나무(175), 남후면 광음리의 측백나무자생지(252) 등이 있다. 이 밖에 하회마을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승지로는 풍천면 광덕리의 부용대, 백운정, 임하면의 경포대(景浦臺) 등이 유명하며, 1976년 안동다목적댐이 준공됨에 따라 안동호와 함께 관광자원이 개발, 정비되어 관광도시로서 활기를 띠고 있다.
구담에 정착한 입향조 담암 용석(潭庵 用石)은 퇴촌공의 증손으로 강화도호부사를 지낸 아버지 수(洙)와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의 4남 중 넷째 아들로 단종 계유(1453년)에 한성 동문 밖 세제(世第)에서 태어나 점필재 김종직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종 임진(1472년)에 진사과에 합격한 후 당시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장안십철(長安十哲)의 수좌(首座)로서 명성을 떨쳤으나 성종 연간의 어지러운 혼정이 장차 심화될 것을 예감하고 안동 구담으로 낙남하였다.
구담의 유래
구담은 안동 서남방 32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마을 앞에는 낙동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광산김씨(담암공파)와 순천김씨(국담공파)를 주축으로 하여 평산신씨(영벽공파), 진주류씨 일파 등 400여 호가 거주하는 큰 마을이다. 구담에는 담암 김선생 유허비(숭정기원후 3 경진 7월 1760년 7월 세움)와 국담 김선생 신도비(1968년도 세움) 영벽 신선생 남하유허비(1982년도 세움)가 그 옛날을 일러주고 있으며,
동으로는 안동시 풍산읍 풍천면 가곡, 하회리, 서쪽으로는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암천리, 신풍리, 남으로는 강 건너 평야에는 풍천면 기산, 신성, 구호리, 의성군 신평면 청운, 창농, 쌍로리, 북으로는 예천군호명면 금릉, 산합, 송곡리로 한 달 여섯번 장날(4.9)로 400여년의 전통 장날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구담은 이곳 교통의 중심지로 1978년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340미터의 새마을 대교가 가설되어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날로 경제권의 요충지로 발전하고 있다. 조선조 때는 낙동강 하구인 부산에서 이곳까지 소금배가 오르내려 물물교환이 원활하였다.
영가지에 이르기를 ...
풍산현에서 30리 거리이고, 큰 들판이 그 남쪽에 펼쳐져 낙동강물이 마을 앞을 지나고 화산고개 왼편 백산이 빼어난 그 오른쪽에 자리하다. 마을 앞 위 아래로 물이 흐르는 이 곳을 구담이라 일컬었다.
상주목사 권집경이 산천의 아룸다움을 사랑하여 터 잡아 살았으며 사람이 많고 큰 집들이 첩첩하여 강물에 비치었고, 명절 길일마다 사방에서 노래 부르는 소리로 이곳을 적은 서울이라 애칭했다.
절부 안처인의 처 김씨가 살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패배하는 왜적들이 이 동리에 몰려들었으나 동리 젊은 장사들이 서로 단결하여 밤마다 그들을 엿보면서 많이 죽였던 곳으로 왜적들은 분풀이로 사납게 분탕질을 거듭한 끝에 결국 죽거나 패퇴하였다.
구담은 오곡과 목화, 사과가 많이 나는 곳이다. 또한, 숭정원년 후 재임인 1772년 광산김씨 서악종회록에 황강(黃岡)선생 현손 김진옥이 안동부사 재임 시 끽첩(喫帖)에 구담 거주 종인들은 거주지명을 모두 구담(龜潭)으로 표기한 것을 미루어 볼 때 한 때는 한 때는 구담(龜潭)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선생이 구복음룡수 기생만년상(龜伏飮龍水 其生萬年像)이라고 구담을 예찬한 시가 전해오고 있다.
구담은 부인 순천김씨의 고향이며 구담에서 멀지 않은 가일(佳日)은 외가 곳이다. 안동권씨 복야공 후 화산군 권주(花山君 權柱)는 내외종간으로 외가와 처가로 연유해 정착하였으며 후손들이 공을 파조로 삼고 아호를 파명으로 하여 담암공파라 칭하며 세계를 잇게 되었다.
분파 세계는 퇴촌공파(閱:20世) - 직장공파(達孫:21世) - 담암공파(用石:23世)로 이어지고 있다.
담암공의 맏형 여석(礪石)은 충목공파조요, 둘째형 이석(以石)은 정랑공파조로 4형제 중 막내 3형제가 파를 형성하였다.
도봉공파조 득렴(得렴)은 담암공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참봉 황(篁)이다. 공은 장사랑을 지낸 아버지 언련(彦璉)과 어머니 풍천임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나 종숙(從叔) 유일재(惟一齋)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선조 임오(1582년)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진란에는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웠고 학행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안동 풍천면 구담에서 세를 이어 후손들이 공의 아호 도봉(道峰)을 파명으로 하여 도봉공파를 형성하고 공을 파조(派祖)로 삼았다.
분파 세계는 퇴촌공파(閱:20世) - 직장공파(達孫:21世) - 담암공파(用石:23世) - 도봉공파(得렴)로 이어지고 있다.
유적으로는 구담 낙동강 연안에 담암공 유허비각과 재사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담암공 종택 중락당(中洛堂)은 헌종 병신(1836년)에 중락당 도종(道宗)이 종가 터 전면에 건립한 청사로 그 규모는 내외 청사 33간의 우람한 건물이었다.
담암공이 터전을 마련한 때로부터 수백 년 뒤에 춘양목(春陽木)으로 개축할 당시 모든 공사는 재종질 행원(行源)이 맡아 하였다는 기록이 도종의 중락당 기문(記文)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는데 이 건물은 화려하고 장엄하리만큼 웅대하여 문화재로 높이 평가되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타인의 소유가 되어 보전하지 못한 한을 남겼다.
담암공이 낙남한 사적을 담은 유허비각은 삼사와 광현(三思窩 光鉉)의 수창(首唱)으로 건립하였으며 담암공 종택 중락당, 둔정사(遯靖祠)와 섬계 영윤(剡溪 永胤), 동주 영국(東洲 永國) 형제의 소구(所構) 체락당(체洛堂)과 제각, 기타 선대 유적이 지켜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나 담암공 이하 누대 묘역은 정화하여 잘 보존하고 있다.
도봉공의 후손 중 송담 연(松潭 演), 침강 탁(枕江 鐸), 성암 영진(省巖 永晋), 삼락당 영하(三樂堂 永廈)는 학행으로, 낙암 수락(洛庵 壽洛), 삼우재 윤(三友齋 鈗)은 성리학에 뛰어난 유현으로, 중락당 도종(中洛堂 道宗)은 후덕한 성품으로 중망되엇다.
취헌 도협(翠軒 道協)은 경전에 해박하였고, 후재 도항(後齋 道恒), 창암 도준(蒼巖 道峻)은 행의로 중망되었으며, 무월당 도장(撫月堂 道章), 청전 창수(聽田 昌洙), 낙애 황수(洛厓 璜洙), 동림정 수영(東林亭 洙瑩), 도계 철수(道溪 哲洙)는 문장과 학행으로, 산수정 기영(山水亭 箕榮)은 문학으로 명세하였다.
모석 대현(慕石 大鉉)은 행의가 준엄하였고, 헌주(憲周)는 재예가 뛰어나고 예설에 해박하였으며, 훈모 영직(薰慕 永直)은 문학과 행의로, 동주 영국(東洲 永國)은 청수한 인품으로, 섬계 영윤(剡溪 永胤)은 경전과 예학에 뛰어났고, 기음 조수(箕陰 祖洙)는 엄의 강직하였다.
아주 진수(亞洲 晋洙)는 효행으로, 성균진사 경수(敬洙), 죽원 기수(竹園 琦洙)는 유현으로 명성을 떨치고 문호를 빛낸 인물이다.
세를 이어 담암공의 맏아들 참봉 황(篁)의 현손 옥음(玉音)은 아버지 인(인)과 어머니 연일정씨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선조 정유(1597년)에 태어나 누대를 이어 살아온 구담을 떠나 동해안의 영덕군 남정면 도천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여 그 곳 입향조가 되었고 후손들이 남정면 등지에 살고있다.
참봉공의 현손 옥구(玉九)는 아버지 함(함)과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선조 기유(1609년)에 태어나 구담에서 충청도 청원군 강내면으로 옮겨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으며, 풍광이 수려한 이 곳의 지명을 연고로 하여 스스로 당곡이라 자호 하였는데 후손들이 아호를 파명으로 하여 공을 파조로 받들고 당곡공파(唐谷公派)라 칭하며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분파 세계는 퇴촌공파(閱:20世) - 직장공파(達孫:21世) - 담암공파(用石:23世) - 당곡공파(玉九)로 이어지고 있다.
공의 덕화가 후대에 크게 미쳐 문호가 번창하고 자손 가운데 많은 인재가 배출 되었으며, 후손 옥현(玉鉉), 성당 우현(誠堂 禹鉉), 창포 영학(蒼浦 永學), 영진(永振), 영년(永年), 영건(永建) 등이 정관계(政官界)와 경제계에서 가문을 빛낸 명사로 꼽힌다.
2005년 현재 후손 약 400여 세대 근, 1,200여 인이 구담, 의성, 예천, 상주, 경남 진주, 영덕, 청원, 충북 괴산 등지에 산재하였고, 세속의 변천에 따라 서울, 부산, 대구, 울산, 포항 등 경남북 일원으로 분포되어 살아가고 있다.
23세 용석(用石 1453~1521) 담암공파조
공의 휘는 용석(用石) 자는 연숙(鍊叔) 호는 담암(潭庵)이며,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행강화도호부사 수(贈吏曹判書 行江華都護府使)요,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권씨 집의 항(貞夫人 安東權氏 執義 恒)의 따님이다. 공은 4남 중 셋째 아들로 단종 계유(1453년)에 한성(漢城) 동문 밖 세제에서 태어났다.
성종 임진(1472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점필재 김종직(점畢齋 金宗直)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종조(成宗朝)에 가솔을 이끌고 부인의 고향인 안동 구담으로 은거하였다.
공의 성품이 청명간직(淸明簡直)하고 올바른 일에는 흔들림이 없으니 모두가 추증하였다. 성균관에 있을 때 월삭(月朔 = 1일, 15일)에 소학(小學)을 회강하여 주문공(朱文公)의 고사향약(故事鄕約)을 모방하였는데 이 때 선임된 이가 당시의 명사로 담암 용석(用石)과 차소 신종호(次韶 申從濩) 문숙 박연(文叔 朴演), 무첨 손효조(無첨 孫孝祖), 효곤 정경조(孝昆 鄭敬祖), 지경 권주(支卿 權株), 가회 정석형(嘉會 丁碩亨), 자온 강백진(子온 康伯珍), 자주 김윤제(子舟 金允濟), 공직 강응정(公直 姜應貞)은 모두 가장 우수한 분이라고 하였고, 세상에서 시기하는 이 들이 말하되,
이분들을 소학효자(小學孝子)의 계원들이 아닌가, 공부자(孔夫子)의 사성십철(四聖十哲)이 있는 것 같다고 야유하고 모함하였다. 이 사실이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의 사우록(師友錄)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학술이 순정하고 지려가 깊고 천문과 세시를 예지하여 은둔하니 연산 무오 갑자 양대 사화에 동문제현들은 화를 입었으나 홀로 신명과 자손들을 보존하였으니 지기함이 신과 같다 하였다.
공에 관한 일화 하나가 전해지고 있는데 공이 내종제 참판 권주(權柱)에게 가산의 분재를 요구하여 이르되 내가 이 곳에 객거하여 외가전업을 입어 고과(孤寡)가 의탁할 곳이 없자 공이 전일에 분재한 문권을 되돌려 외가 재산을 보존케 하니 지감(知感)의 명철함이 이와 같았다.
공이 서안에 교류한 문적과 서간을 모두 모아 불사르고 임종하니 문헌이 전해진 바 없고 아들과 조카에게 교시하되, 시례고가의 후예로 소과(小科) 진사시에는 응시하되 대과(大科)에는 응시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니 이는 당로한 위정자의 도덕성을 문제 삼아 벼슬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공의 고귀하고 청간한 인품을 많은 후인들이 흠모하였고 구세손 삼사와 광현(三思窩 光鉉)이 유적이 멸몰함을 두렵게 여겨 제종(諸宗)과 협모하여 구담 낙안에 유허비각을 건립하고 유허비명을 세마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이 찬하여 비를 세워 오늘에 보존되고 통정대부 병조참의 한산 이상정(韓山 李象靖)이 비각기(碑閣記)를 지었고 묘갈명은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眞城 李家源)이 지었다
부인은 의인 순천김씨 익찬 형석(翊贊 亨石)의 따님이며 8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황(篁), 균(筠), 시(시), 주(籌), 관(管), 범(範), 지(지), 공(공)이요,
딸들은 김숙종(金淑宗) 무과에 급제한 진주 류원창(晋州 柳元昌)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중종 계미(1521년) 4월 16일 졸하니 묘는 구담 관동 축좌 쌍분이며 묘비가 있다.
실기(實記)가 있고 둔정사(遯靖祠)와 용계서원(龍溪書院)에 향사(享祀)하였는데 서원 훼철로 폐하였다.
[편집자 주]
공이 안동 구담으로 내려간 시기는 연산조(燕山朝)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이전인 성종조(成宗朝)에 이미 낙남한 것으로 보인다. 구와 김굉(龜窩 金굉)이 쓴 담암공 실기 서문과 첨추 이광정(僉樞 李光庭)이 쓴 유허비명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이 쓴 비각기 용산세고 등 여러 문헌에 교동초(喬桐初=燕山朝)에 견기남하(見幾南下) "교동초설가 내은우구담 부인김씨지향"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성종 3년(1472년)에 편찬한 사마방목(司馬傍目)에 공의 거주지가 안동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공이 안동에 거주하면서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며 이후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처가와 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낙남한 것으로 보인다.
구담에 대대로 전해져오는 구전설화(공의 백씨 충목공 여석(忠穆公 礪石)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중 구담으로 아우를 찾아가 형제가 상봉하였다는 설화)를 사실로 미루어 보면 공의 낙남 시기는 연산조가 아니라 성종조였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충목공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한 때는 성종 20년(1490년)이기 때문이다.
공이 타계한 해를 문헌(해동명신록, 추강사우록)에는 중종 계미(1523년), 담암공 종가 소장 30世 만우(萬宇)까지 수록된 가첩에는 신사(1521년) 졸, 향년 69세로 기록되어 졸년에 2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첩을 근거로 졸년을 1521년으로 기록함.
자료제공 : 부산종친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