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주교는 어떤 자리인가요?” 중앙부처의 국장급 공직자가 물었다. “주교를 돕는 자리죠.” 나는 짧게 답했다. 출입처 기자들과 함께 한 점심 자리, 가톨릭의 ‘보좌주교’ 임명이 화제에 올랐다. “군대로 따지면 별을 단 것 아닌가요?” 어느 기자가 나름 쉬운 비유를 제시했다. “대기업의 임원, 은행의 지점장, 중앙부처 국장…” 그러자 질문이 이어졌다. “보좌주교 위에 주교가 있고, 그 위에는 뭔가요, 추기경인가?” “대주교도 있죠.” 나는 또 한 번 짧게 말하고는 더 자세한 설명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 사이에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주교를 교주라고 하면 큰일 납니다.” 모두가 웃었다.
주교와 교주를 혼동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주교가 승진하면 대주교일까? 이 대목에서는 헷갈려 하는 사람이 꽤 있다. 그럼 대주교가 한 번 더 승진하면 추기경인가? 보좌주교, 주교, 대주교, 추기경은 말하자면 별 하나부터 시작하는 군 장성 계급(준장, 소장, 중장, 대장)처럼 일렬로 세울 수 있을까? 나는 뒤늦게 오해를 방치했다는 자책감에 빠졌다.
‘주교’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이를 교계 서열로 이해하는 것이다.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정확한 이해는 아니다. 이를테면 교황도 주교이다. 이렇게 말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으로 선출된 뒤 겸손하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콘클라베(교황선출회의)의 임무는 로마의 주교를 정하는 것입니다. … 로마 교구 공동체는 이제 그 주교를 갖게 되었습니다. (You know that it was the duty of the Conclave to give Rome a Bishop. … The diocesan community of Rome now has its Bishop.)”
교황은 그날(2013년 3월 13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만 명의 순례객들 앞에서 한 번도 ‘교황(Papa)’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교황이 스스로를 ‘로마의 주교’로 표현한 것은 물론 겸양이기도 하지만 또한 매우 정확한 설명이기도 하다. 교황은 다름 아닌 ‘로마의 주교’이고, ‘로마의 주교’는 자동적으로 교황이기 때문이다. 교황은 특별히 세계 주교단의 단장이 된다.
교황이 주교라는 사실은 주교가 승진하면 대주교가 되고, 대주교가 추기경이 되고, 추기경 중에서 교황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은 모두 본질적으로 주교 신분이다.
그런데 왜 주교가 있고, 대주교가 있는 것일까? 가톨릭교회를 지역적으로 구분하는 기본단위를 교구라고 하는데, 교구의 크기나 교세가 다르기 때문이다. 좀 큰 도시를 중심으로 많은 신자들이 있는 지역을 대교구로 정하고, 그보다 작은 단위를 그냥 교구라고 부른다. 대교구를 책임진 교구장 주교가 바로 대주교이고, 보통 교구의 교구장은 그냥 주교인 것이다.
그러니 대주교와 주교가 상하관계는 아닌 셈이다. 대교구의 교구장인 대주교가 이웃 교구의 교구장 주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교구든 교구든 교회행정의 독립적인 단위로서 자치권을 갖는다. (물론 관구라는 개념이 있지만 생략하자.) 보좌주교 또한 주교이다. 이 말은 보좌주교가 주교보다 낮은 별도의 등급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보좌주교는 그 역할이 교구장 주교를 돕는 보좌일 뿐 신분상 엄연한 주교이다.
한국 천주교는 서울,대구,광주 등 3개의 대교구와 13개(북한지역 제외)의 교구로 구성돼 있으니, 일차적으로 대주교가 3명, 주교가 13명일 것이다. 실제로는 서울대교구장이 추기경에 임명되어 추기경 1명, 대주교 2명이 된다. 여기에 각 교구 보좌주교 10명이 더 있다. 그러니 한국 천주교의 현직 주교는 모두 26명이 된다.
교황이 주교이니 추기경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추기경이란 주교들 가운데 교황의 보좌역으로 임명된 주교이며,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선거권을 갖는다. 추기경이 교황이 될 수도 있지만, 꼭 추기경이어야 교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황은 주교이면 되고, 심지어 주교가 아니어도 주교가 되는데 결격 사유만 없으면 된다.
주교를 한 마디로 설명하면 ‘열 두 사도의 계승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를 세상 곳곳으로 파견하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명한다.(루카 9,1-6) 그 소명을 오늘날까지 수행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주교이다. 다만 숫자가 열둘에서 아마도 수천 명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 반열에 오른 것이니, 대단한 영광일까?
주교직에서 영광과 권위를 본다면 그것은 껍데기만 본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지상 왕국의 통치자로 보낸 것이 아니다. 박해와 처형이 기다리는 죽음의 땅으로 보낸 것이다. 그것은 스승 그리스도를 따르는 형극의 길이다. 현대에 와서 종교적 박해가 대부분 사라졌다고 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고통과 희생과 봉사의 길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이의 종’이 되라고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 10,43-45)
예수 그리스도가 섬기러 왔으니 그 제자들인 주교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방문 때 어떤 문서에 서명을 남기며 ‘Servus servorum, Franciscus’라고 썼다. ‘종들의 종 프란치스코’라는 뜻이다. 주교는 ‘모든 이의 종’이고, 특히 교황은 ‘종들의 종’이다.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주교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다.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탁월한 제자들이 많이 나왔다. 성덕과 학식이 뛰어나고, 신앙과 인품에서 우러를만한 주교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너무나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을까 한다. 언제 읽어도 늘 가슴이 뛸 만큼 감동적이다. 우리에게 이런 훌륭한 주교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여러분을 위하여 내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하여 줍니다. 실제로 여러분에게 나는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전자는 직무의 이름이며, 후자는 은총의 이름입니다. 전자는 위험한 이름이지만 후자는 구원받을 이름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3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