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John Wesley) - 감리교회 창시자
출생 | 1703. 6. 17, 잉글랜드 링컨셔 엡워스 |
사망 | 1791. 3. 2, 런던 |
국적 | 잉글랜드, 영국 |
요약 영국 국교회에서 감리교를 창설한 인물. 카르투지오 수도원과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공부한 뒤 사제가 되었으며, 동생 찰스와 규칙주의자들의 모임인 신성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피터 뵐러와의 만남과 마틴 루터의 편지를 통해 지적 확신이 개인적인 체험으로 바뀌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 전파를 사명으로 여기고 복음을 전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영국 감리교회의 창설자, 신학자
ⓒ Dcoetzee / wikipedia | Public Domain
어린 시절과 사제 임명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와 함께 영국 국교회에서 감리교 운동을 창시한 인물이다. 비국교도였다가 엡워스에서 교구 목사가 된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잔나 웨슬리(Susanna Wesley)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런던 카르투지오 수도회 수도원에서 6년간 공부한 뒤,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하여 1724년 졸업한 뒤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1725년 옥스퍼드 주교에게 부제 임명을 받았고, 다음해에 링컨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으로 선발되었다. 1728년 9월 22일에는 사제 임명을 받았다.
신성회 조직
1729년 10월 연구원으로서 상주(常駐) 요건을 채우기 위해 옥스퍼드로 돌아가 동생 찰스와 로버트 커크햄(Robert Kirkham), 윌리엄 모건(William Morgan)과 함께 조직한 종교 연구 모임에 가담했는데, 이 모임은 질서정연한 연구와 경건 생활을 강조했기 때문에 조롱조로 '규칙주의자들(Methodists)'이라 불렸다. 존 웨슬리는 찰스로부터 모임의 지도권을 물려받아 회원 수가 늘어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규칙주의자들은 자주 성찬식을 가졌고 1주일에 2일을 금식했기 때문에 '신성회(Holy Club)'라고도 불렸다. 1730년부터 이 모임은 정규활동에 사회사업도 포함시켜서 옥스퍼드 교도소를 방문하고, 죄수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이들의 빚을 갚아주고, 일자리를 마련해주려고 노력했다. 빈민가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손길을 뻗쳐 음식·옷·의약품·책 등을 나누어주고 학교도 운영했다. 1735년 웨슬리 형제가 떠나자 신성회도 해체되었다.
조지아 선교
1735년 4월 아버지가 죽은 뒤, 옥스퍼드 시절의 친구 존 버튼(John Burtun)과 북아메리카 조지아의 식민지 총독 제임스 오글소프(James E. Oglethorpe) 대령으로부터 복음전도협회의 요원이 되어 식민지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관장하고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설득을 받았다. 이 사명을 위해 사제 임명을 받은 찰스와 함께 존 웨슬리는 북아메리카로 건너가 이민 온 모라비아교도들을 소개받았는데, 이들은 그가 추구해오던 영적인 평정을 누리고 있는 듯했다.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는 실패로 끝났고, 자기가 맡게 된 회중들에 대한 사역도 신통하지 못했다. 웨슬리는 이들을 대상으로 신실하게 사역하기는 했으나, 성직자로서 고자세를 유지하는 바람에 반감을 샀다.
존 웨슬리의 선교
신앙생활을 권장하기 위해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게 설교하고 있는 모습
ⓒ FAE / WIKIPEDIA | 4.0 BY CC
순진한 마음으로 서배너의 최고행정관의 조카딸 소피아 홉키(Sophia C. Hopkey)를 사랑하다가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리자 그녀에게 성찬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비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도 저질렀다. 1737년 12월 조지아에서 도망쳐나왔는데, 그것은 소피아 홉키 일화 때문에 오해와 박해를 당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복음주의 운동
이후 런던으로 돌아온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교도 피터 뵐러(Peter Boehler)를 만났는데, 이 사람으로부터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믿음뿐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오직 믿음을 통한 은총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성서 교리를 강조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석>을 발견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게이트가(街)에서 영국 국교회의 후원을 받는 모라비아교도들로 주로 구성된 모임에 참석하여 루터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석> 서론을 읽고 있는 동안 지적인 확신이 개인적인 체험으로 바뀌었다. 당시 35세였던 존 웨슬리는 이 순간부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기고, 설교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 회중들은 웨슬리의 열정이 싫어서 곧 그에게 등을 돌렸다.
존 웨슬리는 종교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신앙 열정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고, 특히 모라비아교도들과 비슷한 '속회'를 도입했다. 이것은 각 종교 단체 안에 구성된 작은 모임들로서, 성(性)이 같은 사람, 혼인한 사람들로서 일신상의 비밀을 함께 나누고 비판을 주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회원 자격을 한정했다. 웨슬리는 이러한 모임을 위해 1738년 12월 '속회 회칙(Rules of the Band Societies)'을 작성했다. 1년 동안 기성 교회 단체들을 대상으로 일했으나, 웨슬리의 방법에 대한 반발이 점차 거세졌다.
감리교회 창시
1739년 훗날 영국과 북아메리카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위대한 설교자가 된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존 웨슬리에게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지역의 민중에게 가라고 설득했다. 웨슬리는 감리교 개종자들을 규합하여 지속적인 교제와 영적 성장을 위한 집단으로 만들었는데, 런던의 한 집단으로부터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곧이어 런던과 브리스톨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도 이와 같은 집단들이 생겨났다.
회원들이 무자격자들이라는 추문을 미리 막기 위해 1743년 감리교 단체들을 대상으로 <규율(Rules)>을 발행했다. 새로운 단체를 세우기 위해 존 웨슬리는 순회 설교자가 되어 여러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웨슬리의 접근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헌신적인 평신도들을 통한 사역을 추구했고, 이들도 순회설교자들이 되어 감리교 단체들을 관할하는 일을 도왔다.
존 웨슬리의 설교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갔으나,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뒤에는 대부분 영국으로 돌아왔다. 런던 주교가 그의 설교자들 가운데 일부를 미국에서 일할 성직자로 임명하지 않자, 웨슬리는 1784년 독자적으로 이들을 성직자들로 임명했으며, 같은 해에 그가 만든 단체들은 영국 국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사역한다고 선언했다. 말년에 웨슬리는 영국 제도(諸島)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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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6, 2024. 송성모 목사님을 아래와 같이 소개드립니다.
<다음 세대와 함께하는 존웨슬리 회심 286주년 기념 성회>의 주강연을 맡으신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정회원이자 존경받고 있는 송성모 목사님을 아래와 같이 소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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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전문가 모임 회장 정승남 배상
<송성모 목사의 약력과 경력>을 아래와 같이 소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