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가전사
산악인 고미영과 김재수
가끔 산에 간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사실 산을 두려워한다. 힘들면 언제나 하산할 수 있는 산만 가고 좀 험하다 싶으면 지레 돌아서 버리지. 언감생심 지리산 종주니 백두대간 종주니 하는 건 이번 생에는 인연 갖지 않을 거야. 하물며 몸에 줄을 감고 벼랑에 매달린다거나 인적 없는 고산 지대의 눈 덮인 고갯길을 산소통 매고 헉헉대며 걷는 ‘미친 짓’은 다음 생에도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미친 짓’에 ‘미친’ 사람들의 얘기는 나같은 산외한(山外漢)에게도 울림이 크다.
“왜 산에 오르냐고?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라고 얘기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상의 법문을 인류에게 남겼던 조지 멀로리는 1924년 에베레스트 등정 과정에서 실종됐다. 50년쯤 뒤 중국 등반대가 그의 시신을 봤다는 보고를 했고 그로부터 세월이 더 흐른 뒤 멀로리의 시신을 찾기 위한 등반대가 결성됐어. 드디어 1999년, 멀로리가 실종된 지 75년만에 그 시신이 발견된다. 워낙 기온이 낮은 고산지대인지라 대리석처럼 하얗게 됐을 뿐 거짓말처럼 멀쩡했다는군. 그가 마지막 남긴 일기는 “그 일 (정상 정복)을 하기에 완벽한 날이다.”는 것이었다는군.
산은 거기에 가만히 있어 수많은 사람들을 품기도 했고 잔인한 힘을 휘두르기도 했지. 2009년 7월 12일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 (8126미터)는 너무도 산을 좋아했던 한 한국인 여성 등반가의 목숨을 앗아갔어. 고미영이라는 이름이었지. 그녀의 고향은 전라도 부안이야. 산악인의 고향치고는 좀 독특하지. 왜냐고? 그 지역은 대한민국에서 그래도 산과 거리가 먼 대표적인 평야지대잖아. 오히려 바다와 가까운 곳이고. 어려서부터 산에 홀렸던 것도 아니었다네. 농림부 공무원을 하던 어느 날 가평 명지산에 야유회를 갔다가 그만 산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대. “그때가 봄이었는데 나무들이 햇볕에 비춰 파릇파릇 연녹색으로 반짝이는 게 너무 예뻤죠.” 라고 얘기한 적이 있네. (인터뷰 365) 길 가다 꽃을 보면 그 이름을 줄줄 외던 누구랑 비슷한 감성이랄까.
농림부 산하 교육원에서 ‘열정과 도전’을 주제로 산악인 강연을 섭외하던 그녀는 스스로 산을 자주 찾기 시작했고 당일치기 등산에서 몇박 몇일의 종주를 거치더니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등반유학을 떠난다. 가끔 이런 사람 보면 궁금해진다. 그 사람 자체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그렇게 좋아하는 뭔가를 만난 게 행운인 건지. 사람이 살면서 저렇게 한 번쯤은 자신을 던져 봐야 하는데 평생 와인드업만 했다 풀었다 하면서 종생할 것 같은 나는 뭔가 싶기도 하고.
그녀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등반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야심찬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나선다. 히말라야 14좌란 8000미터 이상의 봉우리 14개를 일컫는 거다. 내가 탈진하다시피 오르는 백운대의 열 배 높이만큼 쌓여 있는 거대한 눈과 돌덩이의 산들. 고미영은 오랫 동안 호흡을 맞춰 온 산악인 김재수와 함께 14개 가운데 10개의 봉우리에 발을 딛는데에 성공해. 그리고 열한 번째가 낭가파르바트였지. K2봉에 오를 때 후배를 포함해 대원 11명이 산사태로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고 다울라가리봉 때에는 고미영이 탈진하여 쓰러지기도 했지만 둘은 멈추지 않았어. 김재수 대장은 여성 등반가 오은선과의 경쟁도 무시할 수 없었다고 후일 토로하기도 하지만,
열한 번째로 찾은 낭가파르바트 봉에서 정상을 밟고 돌아오던 고미영은 산사태를 만나 사망한다. 이때 누구보다 슬퍼한 건 김재수 대장이었어. 그녀의 죽음 후 보도에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으로 지칭됐고 고미영의 일기 중 100일만 기다리면 당신에게 가겠다는 식의 내용도 함께 알려졌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고 해. 고미영이 집안의 종용으로 선을 본 적이 있는데 결혼까지 얘기되다가 상대에게 “100일 동안 등반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당신 생각이 나면 결혼하겠다.”고 한 내용이었고 “100일 동안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이메일로 이별 통고를 한 것이 와전된 보도라고 김재수 대장이 인터뷰한 적이 있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피차 산을 너무나도 사랑한 두 남녀에게 애틋한 감정이 없었다고는 말하기 힘들 것 같아.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둘은 서로에게 ‘세컨드’가 아니었을지. 즉 산이 제일 큰 사랑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서로에게 이끌린. 산은 그들에게 매파이자 라이벌이었던 게 아닐까. “너를 정상에 데리고 갈 수는 없지만 네가 고통 속에 죽어간다면 그 옆에서 같이 죽어 줄 수 있어.” 라고 말하는 남자의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비행기에서 “머리 좀 기대도 돼요?” 하는 여자에게 “안돼. 남녀가 같이 등반할 때는 사람들 눈을 조심해야 돼.”라고 거절하는 남자, 그러면서 남녀관계가 개입되면 등반이 안된다고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자면서도 “당신은 여자고 여자다워야 한다.”고 옷을 사 주기도 했던 사이는 또 뭐라고 할까.
사고가 난 뒤 구조 헬기를 탄 김재수 대장은 근방을 네 바퀴째 돌던 중 가까스로 시신을 찾아 수습했다고 해. 현지 병원에서 옷을 갈아입혀야 했는데 함께 갔던 여성 산악인이 도저히 고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다고 주저하자 김재수 대장이 직접 옷을 갈아 입혔다지. 병원에는 남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서. “고미영은 내게 초록빛 꿈을 줬던 사람이다.” 그 후 고미영의 분향소를 상주로서 지켰지. 사람들은 둘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궁금해 했고 입방아도 찧었던 모양이지만 김재수 대장은 “도대체 그게 왜 중요하냐?”고 반문했어. 사실 그의 이후 행동을 보면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을 듯 해.
김재수 대장은 산악인 고미영이 목표로 삼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재개했고 고미영이 밟지 못한 네 개의 봉우리 모두를 기필코 올라 그 정상마다에 활짝 웃고 있는 고미영의 사진을 묻어두고 내려왔으니까. 안나푸르나에서는 눈사태를 만나 죽을 뻔도 했고 기상악화 때문에 발길을 몇 번 돌리면서도 줄기차게 도전한 끝에 이룬 성과였지. 8천미터의 극한 상황을 함께 견딘 사람들 사이에 우정이니 애정이니 하는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히말라야 정상의 눈자락 밑에 파묻혀 있을 고미영의 사진은 영원히 그 웃음을 머금고 있을 것이고 저승에서도 그녀는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애인이든 동료든 자신이 목숨 걸고 좋아했고 하려고 했던 일을 역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완수해준 사람이 있는 건 저승에서도 경사일 테니까
산악인 고미영과 김재수
가끔 산에 간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사실 산을 두려워한다. 힘들면 언제나 하산할 수 있는 산만 가고 좀 험하다 싶으면 지레 돌아서 버리지. 언감생심 지리산 종주니 백두대간 종주니 하는 건 이번 생에는 인연 갖지 않을 거야. 하물며 몸에 줄을 감고 벼랑에 매달린다거나 인적 없는 고산 지대의 눈 덮인 고갯길을 산소통 매고 헉헉대며 걷는 ‘미친 짓’은 다음 생에도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미친 짓’에 ‘미친’ 사람들의 얘기는 나같은 산외한(山外漢)에게도 울림이 크다.
“왜 산에 오르냐고?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라고 얘기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상의 법문을 인류에게 남겼던 조지 멀로리는 1924년 에베레스트 등정 과정에서 실종됐다. 50년쯤 뒤 중국 등반대가 그의 시신을 봤다는 보고를 했고 그로부터 세월이 더 흐른 뒤 멀로리의 시신을 찾기 위한 등반대가 결성됐어. 드디어 1999년, 멀로리가 실종된 지 75년만에 그 시신이 발견된다. 워낙 기온이 낮은 고산지대인지라 대리석처럼 하얗게 됐을 뿐 거짓말처럼 멀쩡했다는군. 그가 마지막 남긴 일기는 “그 일 (정상 정복)을 하기에 완벽한 날이다.”는 것이었다는군.
산은 거기에 가만히 있어 수많은 사람들을 품기도 했고 잔인한 힘을 휘두르기도 했지. 2009년 7월 12일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 (8126미터)는 너무도 산을 좋아했던 한 한국인 여성 등반가의 목숨을 앗아갔어. 고미영이라는 이름이었지. 그녀의 고향은 전라도 부안이야. 산악인의 고향치고는 좀 독특하지. 왜냐고? 그 지역은 대한민국에서 그래도 산과 거리가 먼 대표적인 평야지대잖아. 오히려 바다와 가까운 곳이고. 어려서부터 산에 홀렸던 것도 아니었다네. 농림부 공무원을 하던 어느 날 가평 명지산에 야유회를 갔다가 그만 산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대. “그때가 봄이었는데 나무들이 햇볕에 비춰 파릇파릇 연녹색으로 반짝이는 게 너무 예뻤죠.” 라고 얘기한 적이 있네. (인터뷰 365) 길 가다 꽃을 보면 그 이름을 줄줄 외던 누구랑 비슷한 감성이랄까.
농림부 산하 교육원에서 ‘열정과 도전’을 주제로 산악인 강연을 섭외하던 그녀는 스스로 산을 자주 찾기 시작했고 당일치기 등산에서 몇박 몇일의 종주를 거치더니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등반유학을 떠난다. 가끔 이런 사람 보면 궁금해진다. 그 사람 자체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그렇게 좋아하는 뭔가를 만난 게 행운인 건지. 사람이 살면서 저렇게 한 번쯤은 자신을 던져 봐야 하는데 평생 와인드업만 했다 풀었다 하면서 종생할 것 같은 나는 뭔가 싶기도 하고.
그녀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등반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야심찬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나선다. 히말라야 14좌란 8000미터 이상의 봉우리 14개를 일컫는 거다. 내가 탈진하다시피 오르는 백운대의 열 배 높이만큼 쌓여 있는 거대한 눈과 돌덩이의 산들. 고미영은 오랫 동안 호흡을 맞춰 온 산악인 김재수와 함께 14개 가운데 10개의 봉우리에 발을 딛는데에 성공해. 그리고 열한 번째가 낭가파르바트였지. K2봉에 오를 때 후배를 포함해 대원 11명이 산사태로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고 다울라가리봉 때에는 고미영이 탈진하여 쓰러지기도 했지만 둘은 멈추지 않았어. 김재수 대장은 여성 등반가 오은선과의 경쟁도 무시할 수 없었다고 후일 토로하기도 하지만,
열한 번째로 찾은 낭가파르바트 봉에서 정상을 밟고 돌아오던 고미영은 산사태를 만나 사망한다. 이때 누구보다 슬퍼한 건 김재수 대장이었어. 그녀의 죽음 후 보도에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으로 지칭됐고 고미영의 일기 중 100일만 기다리면 당신에게 가겠다는 식의 내용도 함께 알려졌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고 해. 고미영이 집안의 종용으로 선을 본 적이 있는데 결혼까지 얘기되다가 상대에게 “100일 동안 등반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당신 생각이 나면 결혼하겠다.”고 한 내용이었고 “100일 동안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이메일로 이별 통고를 한 것이 와전된 보도라고 김재수 대장이 인터뷰한 적이 있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피차 산을 너무나도 사랑한 두 남녀에게 애틋한 감정이 없었다고는 말하기 힘들 것 같아.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둘은 서로에게 ‘세컨드’가 아니었을지. 즉 산이 제일 큰 사랑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서로에게 이끌린. 산은 그들에게 매파이자 라이벌이었던 게 아닐까. “너를 정상에 데리고 갈 수는 없지만 네가 고통 속에 죽어간다면 그 옆에서 같이 죽어 줄 수 있어.” 라고 말하는 남자의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비행기에서 “머리 좀 기대도 돼요?” 하는 여자에게 “안돼. 남녀가 같이 등반할 때는 사람들 눈을 조심해야 돼.”라고 거절하는 남자, 그러면서 남녀관계가 개입되면 등반이 안된다고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자면서도 “당신은 여자고 여자다워야 한다.”고 옷을 사 주기도 했던 사이는 또 뭐라고 할까.
사고가 난 뒤 구조 헬기를 탄 김재수 대장은 근방을 네 바퀴째 돌던 중 가까스로 시신을 찾아 수습했다고 해. 현지 병원에서 옷을 갈아입혀야 했는데 함께 갔던 여성 산악인이 도저히 고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다고 주저하자 김재수 대장이 직접 옷을 갈아 입혔다지. 병원에는 남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서. “고미영은 내게 초록빛 꿈을 줬던 사람이다.” 그 후 고미영의 분향소를 상주로서 지켰지. 사람들은 둘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궁금해 했고 입방아도 찧었던 모양이지만 김재수 대장은 “도대체 그게 왜 중요하냐?”고 반문했어. 사실 그의 이후 행동을 보면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을 듯 해.
김재수 대장은 산악인 고미영이 목표로 삼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재개했고 고미영이 밟지 못한 네 개의 봉우리 모두를 기필코 올라 그 정상마다에 활짝 웃고 있는 고미영의 사진을 묻어두고 내려왔으니까. 안나푸르나에서는 눈사태를 만나 죽을 뻔도 했고 기상악화 때문에 발길을 몇 번 돌리면서도 줄기차게 도전한 끝에 이룬 성과였지. 8천미터의 극한 상황을 함께 견딘 사람들 사이에 우정이니 애정이니 하는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히말라야 정상의 눈자락 밑에 파묻혀 있을 고미영의 사진은 영원히 그 웃음을 머금고 있을 것이고 저승에서도 그녀는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애인이든 동료든 자신이 목숨 걸고 좋아했고 하려고 했던 일을 역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완수해준 사람이 있는 건 저승에서도 경사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