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라고요? 아니죠!”
“못났다! 못났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일갈이 누군가를 향하자, 급히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 두어 시간 TV 앞에 앉아 있는 것도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습관처럼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기에 드라마 시청이 하루의 루틴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날은 즐겨보던 드라마가 결방되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갈 곳 잃은 두 눈동자의 아쉬움을 붙든 한마디가 “못났다.”였다. 나름 못난 것에 대한 소견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 말은 채널을 고정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못난 사람은?”이란 질문을 내게 한다면 주저 없이 “라이벌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춘기를 겪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두 아들의 엄마가 되고 학부모의 입장에서, 그리고 여러 만남의 관계와 상황에서 대체로 라이벌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고 굳어진 탓도 있지만 내가 느낀 못난 사람은 단연코 라이벌을 마음에 둔 비교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라이벌을 향한 방향이 부정적이면 질투와 시기심을 촉발하고 더 나아가 그릇된 생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유발할 수 있어서 라이벌은 양면의 칼날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기록 경신을 위한 운동선수나 학교 성적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학생들 역시 라이벌은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깊은 고뇌와 고통을 수반한 나와의 싸움을 통해 객관적인 관점에서 냉철하게 나 자신을 파악하고 인정하면 타인에게 적대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한 분쟁 또한 생기지도 않게 된다. 어찌 되었든 말 한마디에 시선이 붙들린 드라마를 보기로 했다.
일정한 러닝타임이 있어서 상영 내내 집중해서 봐야 하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촘촘한 플롯과 연출로 극을 제작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TV 연속극은 여러 에피소드가 섞여 있어도 어느 한편만 시청하면 무슨 이야기로 어떻게 흘러왔는지 정황과 상황을 대충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드라마가 지닌 마력(魔力)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들이 건네는 세상으로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는 것이 그 방증이 아닐까. 어찌 되었든 방향을 잃고 헤매는 손에 감금당한 리모컨이 자유를 찾아 탁자에 놓이는 순간 분노를 표출하는 남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해로 인한 갈등이 파국으로 치달으며 종국을 맞는가 싶던 차에 오작교를 자청한 누군가 남자 주인공 앞에 나타난 뻔한 설정이었는데도 드라마의 마력에 기꺼이 나를 내주었다.
분노에 휩싸여 절규하는 남자 주인공에게 차근차근 자초지종 설명하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여자 주인공과 얽힌 듯한 선배라는 남자. 그의 이야기 속에 과거 회상 장면이 나와서 나는 운 좋게도 그들의 사연과 그동안의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카메라 앵글은 자신이 크게 오해한 것을 자책하며 오열하는 남자 주인공의 젖은 뺨에 오랜 시간 머물며 비통한 그의 심정을 내게 전해 준다. 그리고 이내 바뀐 화면에선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여주인공을 향해 지난 이야기를 다 들었다며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원망하는 남자 주인공의 넋두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좀 더 일찍 알려 주었으면 그렇게 모질게 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며 자기의 변명만 늘어놓던 남자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여주인공에게 용서를 구했다.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단호한 여자의 굳은 얼굴이 잔잔하게 깔리는 배경음악에 그녀의 미묘한 감정선이 실리면서 아무 상관 없는 내게도 흐르는 노랫말에 맞춰 감정 변화를 유도했다. 굳이 다음 회는 보지 않아도 어떤 결말로 갈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추 한 시간여 생면부지 남녀의 사랑놀이에 끼어 있다가 문득 든 생각이 줄거리를 유추해 보면 어릴 때부터 이웃으로 오랜 시간 연인 관계인데, 저 둘 사이에 남 때문에 생긴 문제를 설명해야만 이해가 되고 오해가 풀리나? 난데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이라는 의문 하나가 생겼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속 진심은 말하지 않아도 귀가 아닌 마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텐데 하는….
드라마의 내용대로라면 오랫동안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만을 바라보며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성향과 품성을 이미 알고 있는데 왜, 오해가 생겼을까? 신분 격차는 처음부터 알았을 테고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이간질과 방해가 있었다고 한들 믿어 주었다면 의심의 싹은 애당초 씨앗조차 심기지도 않아 오해는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오해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믿음에 확신을 가졌다면, 설명하지 않아도 시간 차이만 있을 뿐 언젠가 자연스럽게 풀렸으리라. 당장 변명이나 해명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옳고 그름이 드러나는 경우를 누구나 한 두어 번은 경험하지 않았을까? 비록 가상의 이야기지만, 드라마와 같은 일은 현실에서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 세상 속에 얽힌 무수히 많은 관계가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해서 TV 드라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대변하기도 하고 때론 길잡이와 같은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시대적 변화를 쉽고 빠르게 접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 내겐 텔레비전 연속극이다. 어찌 되었든 사랑하는 여자의 말 못 할 비밀을 선배 입을 통해 듣고 그동안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했던 자신을 비난하며 흐느껴대니 제삼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던 나는 “사랑했다면서 왜 그랬어?” 불쑥 남자를 향해 질타가 입 밖으로 나왔다. 그 남자의 처신에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곧 나를 향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뜬금없이 내게 의문을 던지고 마침표를 요구하니 단어의 고갈에 한심할 뿐이었다. 결국 드라마를 본 영향인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오해는 하지 말아야지.” 자연스럽게 입에 붙어 온다. 그런데 문제는 여주인공이 해야 할 말을 가로챈 듯한 기분이 들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문장 도입을 반복해 읽어 보았다. 그러자 ‘적어도’라는 부사가 따라붙는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또다시 몇 번을 되뇌며 문장을 이어가려 했지만 어떠한 단어조차 따라 나서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쩌란 말인가! 피수식어가 떠오르지 않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며 한국어의 취약함에 스스로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무조건 믿고 포용해야지.” 홧김에 내뱉은 말이 유레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가 아닌 ‘무조건’이라는 것을. 무조건이라는 단어의 파급력이 굉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명사로서는 ‘아무 조건도 없는 것’이고, 부사로는 ‘이모저모 살피지 않고 덮어놓고’ 말하자면 이것저것 따지지도 재지도 않고라는 것이니 사랑이란 말과 이처럼 궁합이 딱 들어맞는 말이 또 있으려나.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신뢰하고 믿는 것은 당연한 기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라야지!” 드디어 뜬구름 없던 의문에 마침표보다 더 강한 느낌표가 찍혔다. 그런데 이 단순한 문장이 연속으로 읊조리니 생각지 않게 뜨거운 무언가 솟구치며 내 마음을 울리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무 조건 없이 무조건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 사랑으로 자신의 귀한 목숨마저 내주셨다는 것을 즐겨 보던 드라마의 결방으로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도록 이끌어 준다. 드라마 속의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을 무조건 믿었다면 라이벌을 품고 미움과 분노로 세월을 채우며 살지 않았을 텐데…. 잠시 어긋났던 청춘남녀의 사랑 덕분에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되새기면서 기쁜 마음으로 내 사랑의 고백을 당당하게 외쳐 본다. “주님!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2024년 12월 20일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행복한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