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교육이 가장 바람직한 교육일까? 그것은 내용의 문제일까, 방법의 문제일까 아니면 제도의 문제일까? 최근 우리 사회의 '학교붕괴' 현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논란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드는 의문이다. 어쩌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확연히 구분되고 이를 제도적으로 관리해 온 기존의 학교체제는 더 이상 최선의 교육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종래의 학교체제와 급격한 사회변화 사이의 부정합 현상에서 비롯된 '학교붕괴'나 탈학교 담론이 그 일차적인 증거이다.
반면, 최근 시민사회가 확장되고 그에 따라 시민의 참여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면서 종래의 학교체제와는 다른 대안적인 교육의 틀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가르침보다는 배움이 중심이 되며, 제도보다는 참여자들의 자발성에 바탕을 둔다. 여기서 전수되는 내용 역시 종래의 학교 지식과 판이하다. 아직은 예시적이고 징후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미래의 학습사회를 열어가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하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변화의 양상을 해석적인 견지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새로운 변화의 일차적인 증상은 학교 밖에 다양한 학습 공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야학이나 공부방과 같은 학교 밖의 학습 공간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학교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새로 생긴 학습 공간은 오히려 학교에 싫증을 느끼고 그곳과는 다른 내용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학교에 대한 염원이 어느덧 혐오로 바뀐 것이다. 당연히 이를 주도하는 사람들도 학교 안의 사람들― 즉, 교사 ―보다는 학교 밖의 사람들― 학부모, 사회운동가 등 ―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동을 건 사람들은 여성운동 동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화' 구성원들이었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생활세계의 변화를 지향하는 '대안문화 운동'을 제창하였다. 그 실천 방법의 하나로 그들은 1986년부터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캠프를 개최하였다. 1993년까지 20회를 거듭한 이 실험적 성격의 캠프는 '삶과 관련된 지식과 지혜를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어린이, 함께 공동체를 꾸려갈 수 있는 어린이'를 이상으로 삼고 어른과 아이, 교사와 학생,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모둠 활동에서 '싫다반'을 둘 정도로 모든 것을 아이들이 자치적으로 꾸려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선구적인 시도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90년대에 들어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와 한국사회 내부의 변혁운동 퇴조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소집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한 새로운 교육적 실험들은 대체적으로 이와 유사한 경향을 띠었다. 일군의 교회 관계자들이 잇따른 중고생들의 자살 현상을 지켜보면서 1990년에 시작한 '다솜학교'나 젊은 교사와 예비교사, 또는 청년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다양한 체험 활동과 풍부한 감성을 길러주고자 시작한 민들레학교(1993), 자유학교 물꼬(1993), 따로 또 같이 하는 학교(1995) 등이 그러하였다.
또 이 무렵에는 구태의연한 학교교육을 보완하기 위하여 학부모들이 직접 나서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광명에서 시작되어(1992) 성남, 부산 등으로 확산된 '창조학교'였다. 여기에서 학부모들은 방과후 또는 주말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맛보지 못한 다양한 창의적 활동과 과학 실험, 그리고 자연 속에서의 체험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아이들의 호의적 반응은 물론 눈에 띄는 지적 정서적 성장은 '비전문가'에 의한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이 무렵 통제 중심의 획일화된 우리 교육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던 일군의 사람들이 새로운 교육운동을 기획하였다. 그것은 맞벌이 부부가 확대되면서 전일제 보육 수요가 급격히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와 질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공동 육아 협동조합'을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교육에 협동조합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도 새로운 발상이며, 더구나 갈수록 핵가족과 개인주의가 보편화하는 추세에서 공동체적 육아 방식을 추구한다는 것도 생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1994년에 시작된 지 불과 몇 년 안에 전국에 20여 개의 조합 어린이집이 설립·운영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이들에게 최대한의 자율성과 자연친화적인 교육을 추구하는 이 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보육의 질을 높이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정부에 의해 공식적인 보육 모델로 인정되고 있다.
이처럼 학교 밖의 '비전문가'에 의한 다양한 교육적 시도들이 확산되면서, 차츰 학교교육의 보완을 넘어 그 자체로 대안적 성격의 교육을 지향하는 움직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민들레'나 '물꼬'처럼 캠프를 위주로 하면서도 장기적으로 대안적 성격의 정규학교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는가 하면,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에서 발전한 성남의 '여럿이 함께 만드는 학교'(1996)는 방과후 프로그램이면서도 그 나름의 완결성을 지향하는 '학교 밖의 학교'를 모색하였다. 또 안산의 장기 가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시작된 '들꽃피는 학교'(1994)는 교육의 사각지대를 메울 새로운 개념의 학교였다. 즉, 가정이 없는 아이들에게 교사와 아이들로 구성되는 안정된 가정을 갖도록 하는 한편, 그들 나름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교육기회와 프로그램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당국의 지원 없이 다수의 자발적 후원자들과 헌신적인 신앙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새로운 교육, 새로운 학교를 모색하는 개별적인 시도들은 1995년이 되면서 횡적인 연대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 해 2월에는 대전 유성에서 전국의 17개 소모임 대표자들이 모여 그간의 경험을 나누고 '새로운 학교를 만드는 모임'을 구성하였다. 또 이 해 7월에는 경기도 수지에서 종래의 학교교육과는 다른 새로운 교육에 관심이 있는 실천가, 교사, 학자들이 모여 밤샘 토론을 가졌다. 이듬해 8월에는 고려대학교에서 대다수의 대안교육 실천가들이 참여하는 '대안교육 한마당' 행사를 갖고 새로운 교육 운동의 확산을 위한 다짐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존 학교 제도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 이른 바 '대안학교'가 최초로 등장하였다. 1997년 3월에 개교한 경남 산청의 '간디청소년학교'가 그것이다. 비인가의 중고등학교 과정인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중에서 고1까지 모두 27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모범생 출신이었으며,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온 것이었다. 학교 졸업장과 대학 입학 준비가 지상 과제인 우리 사회에서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학생과 학부모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 할 만했다. 기존의 학교에 대한 '불만'이 이제는 '거부'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거부' 현상은 90년대 후반에 오면서 가정학교(home-schooling)나 자퇴생의 확산으로 나타나고 있다. 많은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졸업장은 더 이상 열악한 시설과 경직된 수업 분위기, 체벌과 같은 비인간적 통제를 참아내도록 하는 힘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다양한 대안적 학습 공간의 출현과 최근 보편화되고 있는 인터넷 공간 활용은 심리적 마지노선인 학교 울타리를 쉽게 넘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새로운 학습 공간의 출현이라는 변화의 증상들은 또 다른 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까지는 개인 또는 소규모 집단의 연대 차원에서 새로운 교육이 모색되었다면, 이제는 그 범위를 넘어 지역사회 또는 다양한 시민이 함께 참여하여 새로운 학습사회를 실현하려는 노력의 단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구체적인 양상을 짚어내기에는 이르지만, 몇 갈래의 흐름에서 대안교육 운동과 지역주민 운동 또는 시민운동의 결합이라 할 만한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그 하나는 1998년부터 시작된 새교육공동체위원회의 교육공동체 시민운동이다. 기초자치 단체 또는 교육청 단위의 지역을 중심으로 교사, 학부모, 학생, 지역 주민이 협력하여 교육 현안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지역의 교육 여건과 환경을 개선하고자 주창된 이 운동은 지역에 따라서는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민운동의 주체들이 학교나 교육청을 대신하여 학생들의 다양한 교육적 수요를 충족시키는가 하면(다양한 체험학습 기회 제공), 문화경진대회를 통하여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창의적인 문제의식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또 지역사회의 자원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문화교실 역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교육공동체 시민운동이 교육을 학교 밖으로 끌어내어 학부모와 시민의 참여를 열었다면, 최근 부쩍 는 자퇴자 모임이나 가정학교 모임, 그리고 대학생 중심으로 구성된 탈학교실천연대 등은 학교를 벗어난 이들을 '낙오자'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교육 경로의 개척자라는 적극적 위치를 부여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들은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고 학교 밖에도 교육의 길이 있음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스스로 공부한다는 것이 아직은 어렵지만, 상부상조를 통하여 이들은 다양한 세계를 체험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이들이 또 다른 '학교'에 연연하지 않고 지역사회 또는 상호간의 협력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의 길을 찾는 것은 앞서의 대안교육 운동과 다른 흐름이다. 이들이 추진하는 '교육통화운동'은 중요한 특징이다. 이는 화폐도 필요 없고 제도화된 교사도 없이 누구나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학습사회에 이르는 구체적인 수단이다.
최근 이상과 같은 흐름의 합류 지점이라 할 만한 것이 나타나고 있다. '교육문화협동조합'이 그것이다. 공동육아협동조합처럼 교육 문제를 협동조합 방식으로 풀고자 한 선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지 공동 출자와 어린이집의 공동 운영에 그치고 있는 데 비해 이것은 건강한 교육과 문화를 나누기 위한 협동조합이다. 즉, 삶을 풍요롭게 할 문화를 함께 배우고 나누며,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상부상조를 통하여 진행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돈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조합원들 사이에는 돈이 매개되지 않는 교육과 문화의 나눔을 위하여 앞의 '교육통화'와 유사한 '지역통화' 방식을 적용한다.
현재로서 이러한 새로운 흐름들이 어떻게 구체화되고 확산될지 속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새로운 교육적 시도들이 종래의 엄격한 제도적 틀 속으로 재흡수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이미 기존의 학교라는 패러다임을 벗어난, 새로운 사회의 교육을 예고하는 강력한 징후이자 단초이기 때문이다. 그 징후의 의미를 몇 가지 짚어보자.
첫째, 무엇을 배운다는 의미가 예전과 다르다. 여기에서는 누구나 배워야 할 지식이란 없다. 자신의 삶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곧 배워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답이나 점수, 서열화가 필요없다. 중요한 것은 느끼고 향유하는 것이다.
둘째, 그러다 보니 교육이란 곧 학습이며, 따라서 학습자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 교사와 학생이 늘 수직적으로 분리될 필요도 없다. 어느 한 분야에서 학생이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교사일 수 있다.
셋째, 화폐라는 대가 없이 주고받는 것이 일상화된다는 것은 공동체적 삶을 의미한다. 이들이 지향하는 사회는 원자적 개인주의를 극복한 사회이며, 소규모 범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사회이다. 물론 이 때의 범위는 굳이 지역적 공간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징후들이 이윤과 지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현실 사회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가는 예측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이고 실천의 문제이다. 그것은 현실 사회의 추함에 넌더리가 난 사람들의 희망이고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 젖어 사는 우리라고 해서 이러한 문제를 '그들'만의 것으로 제쳐둘 만큼 무뎌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현재의 학교교육이 해체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이에 한 발 앞서 새로운 '교육 문법'을 시도하고 있는 그들을 주목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 그들은 기존의 학교의 틀을 넘어 새로운 학습사회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