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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6일 주일
[(녹) 연중 제27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7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시어,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원리로 세우셨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하나로 맺어 주신 것을 인간이 갈라 놓지 못하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신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셨고,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영도자이신 그분을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셨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니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둘이 한 몸이 된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4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9-11
형제 여러분, 9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16
그때에 2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 지난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에 행정 복지 센터, 세무사 사무소, 건강 보험 공단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사무 처리를 하였습니다. 인감 증명서, 가족 관계 증명서, 기본 증명서, 호적 등본, 제적 등본, ……, 입양 관계 증명서를 떼라고 하기에 “없으면 안 떼어도 되지요?”라고 말하였더니 해당 서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때에 따라 아버지의 혼인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혼인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정확하게 미리 서류를 준비하여서 가려고 노력하였지만 처음에는 정말 복잡하였습니다. 그때 저희 가족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별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기에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법과 규칙은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정하여 놓는지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규정이 생기겠지요. 규정을 정할 때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왜 그런 규정이 있는지를 압니다.
규정이 없어도 잘되어야 하는데 신뢰가 없고 사랑이 없어서 안 되기 때문에 규정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규정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불완전함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규정들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이혼장을 써 주라는 규정도 아내를 함부로 버리던 사람들 때문에 허락한 것입니다. 문제는 모세가 아니라 아내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규정을 열심히 외우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규정이 없어도, 사랑으로 그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불과 5~60년 전의 일입니다. 가구마다 자녀를 너무 많이 낳다 보니 인구가 너무 급증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학생 수가 너무 많아 한 반에 70명, 80명이 배정되어 담임 선생님이 학년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 이름도 다 못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한 명 한 명, 인격적 대우가 아니라 도매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가 있는 시골은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온 마을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줍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마을 입구에 큰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너무 귀한 아이들이다 보니,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같지 않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감사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개념있는 행동이나 예의바른 처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직 이성적 사고나 판단 능력보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큽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요란스레 예수님 앞에 등장한 어린이들이 무척이나 성가셨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계속되는 복음선포 활동으로 격무와 상습 피로에 시달리고 계시는 스승님이신데, 보다 중요한 일을 수행하셔야 할 스승님이신데, 개념도 예의도 없는 아이들이 몰려오니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가까이에서 군중들의 질서 유지 담당 역할도 수행했었던 제자들이기에, 자연스레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지금 스승님께 몹시 바쁘시니, 빨리 아이들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크게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4~15)
가톨릭교회는 예로부터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어린이의 예를 들어왔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의심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그런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의탁을 하느님 나라 입국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십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든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 입국은 불가능하다거나 요원한 것일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 세상과 자연을 향한 강한 믿음과 신뢰심, 깨끗한 마음과 단순성, 솔직함과 겸손함을 지닌다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가는 부부의 비밀: 의무가 감정을 이기게 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라는 주제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듭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냐고 물으시니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창세기’로 끌어올리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왜 예수님은 부부 문제를 창조할 때로 끌어올리실까요? 부부도 창조자의 의도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사람의 욕구로 살면 실패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 1위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굳이 쓰기는 뭐하지만, 남편이 자신이 벌어온 돈을 낭비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아내에게 듣기 싫어하는 말 1위는 능력 없다고 무시하는 말입니다.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생각으로 서로 감정이 상하게 만듭니다. 핵심은 이러한 감정을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갖는 것입니다.
‘EBS 부모 – 아이 양육법, 달라도 너무 달라요’에 아이들 양육 태도가 너무나 다른 부부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아이들이 잘못할 때 ‘타이르자’라는 주의이고 아빠는 ‘단호하게 훈육하자’라는 주의입니다. 부부는 서로 너무 안 맞아 남자가 먼저 답답해서 TV 출연을 제안했습니다.
첫째 아이는 남자이고, 둘째 아이는 여자아이입니다. 여자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평생 장애로 살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힘겹게 병원 생활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첫째 아이가 소외되어 부모로부터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묻는 말에 ‘아무것도 아닌 아들’이라 대답했습니다.
둘째 딸도 몸이 아프기에 나름 부모의 사랑을 더 확인하려 합니다. 그 방법이 물고 할퀴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생이 자신을 물고 할퀴었다고 아빠에게 이릅니다. 아빠는 “내가 맞지?”라는 듯 아내를 봅니다. 그리고 둘째를 꽉 잡고 훈육합니다. 그 옆에서 엄마는 “당신이 하는 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자 아빠는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함에 화가 더 납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훈육법을 무시한다고 느낄 때 감정 카드를 뽑았는데, ‘외로움, 고통’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무시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감정은 외로움과 고통이었습니다. 그 감정은 어떤 욕구로 생겼을까요? 남편은 ‘존재감(중요하게 여겨짐), 이해’를 뽑았습니다. 남편은 무언가 근저에 인정받고 이해받으려는 욕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아빠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장애인 형이 있어서 소외당한다고 느꼈고 부모는 매일 이혼하겠다고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이 원인으로 뱃속 깊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했고 거기에서 외로움과 고통의 감정이 생겼으며 그 원인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뱀의 욕구에 지배당함으로써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감정이 생겼고 결국 그 원인을 상대에게 했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존재였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의무는 감정을 이깁니다. 하느님이 주신 의무는 뱀의 욕구를 이기는 새로운 욕구입니다. 이 때문에 부부가 함께 십일조를 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인정하면 부부생활은 의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2022년 당시 하버트 말리코트(99)와 준 네이피어(100)는 결혼생활 79년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감정이 상하는 일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결혼을 의무로 여겼습니다. 매일 자기 전 뽀뽀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이 의무 때문에 안 좋은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 앞에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어떤 의사도 선풍기 틀고 자면 큰일 난다고 어머니가 선풍기를 끈다고 합니다. 시원하게 자는 게 소원이랍니다. 선악과를 바치면 주님 현존 안에서 돈 때문에 서로의 탓을 하는 일은 사라집니다. 다만 상대에 대한 ‘의무’만 남습니다. 사랑의 의무란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맺어주셨음을 믿읍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저는 부모님이 모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아버님은 2011년에, 어머님은 2020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신앙 안에서 저는 부모님과 함께 하니 기쁨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군자삼락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똑똑한 제자를 만나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높은 문화와 문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부모와 자식, 세대와 세대가 경험과 지식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가르치셨습니다. 사제의 직분 중에는 ‘가르치는 직무’가 있습니다. 저는 예비자 교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였고, 강론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였고,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주일학교 교사의 노래 중에 ‘가르치면서 배우게 하소서’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모두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화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멀리서 신부님들이 제가 있는 신문사를 찾아왔습니다. 저를 보고 싶어서도 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한국에서 안식년 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자녀들이 뉴욕에서 공부하는 교우들도 왔습니다. 신문사는 마치 손님들이 머무는 사랑방 같았습니다. 손님들이 오면 맨해튼 구경도 가고, 뮤지컬도 보고, 가을이면 단풍 구경도 갔습니다. 지난 2월에 달라스로 왔습니다. 제가 온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오겠다는 손님도 없었습니다. 달라스의 여름이 워낙 덥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10월에는 손님이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있던 신문사의 후임 신부님이 신문 홍보를 위해 왔습니다. 모처럼 뉴욕의 이야기를 들으니 반가웠습니다.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이 2주일 정도 온다고 합니다. 5년 동안 달라스에서 사목했던 전임 신부님도 1달 정도 온다고 합니다. 12월에도 손님들이 오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명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그러니 나에게 와서 쉬어라.” 벗들이 와서 쉬어갈 수 있다면 제게도 기쁨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전에 명동거리를 걸을 때입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가는 연인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신발에 껌이 묻었던지, 남자에게 이야기 합니다. 신발에 껌이 묻었네. 남자는 기꺼이 무릎을 꿇고서 사랑하는 여인의 신을 벗겨서 신발에 묻은 껌을 떼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발에 신을 신겨주고, 다시 다정한 모습으로 길을 걸어갔습니다.’ 가을바람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기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고, 신발에 묻은 껌을 기꺼이 떼어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들께서도 아마 그러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여동생과 함께 시골 외할머니 댁엘 갔었습니다. 외할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고, 저는 시골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고추, 마늘, 깨를 보자기에 담아 주셨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 짐들은 모두 어머니가 양손에 들고, 오셨습니다. 아버님은 담배를 하나 들고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그런 것을 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짐을 들지는 않으셨지만 아버님께서도 어머니를 사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님을 대하셨습니다. 아버님도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부부는 무엇, 무엇 때문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살아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신발에 묻은 껌을 떼어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짐을 대신 들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꼭 부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주려고 할 때, 가정은 생명이 넘쳐나는 갈릴래아 호수처럼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가 서로에게 받으려고 한다면 가정은 생명이 살 수 없는 사해(死海)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 될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브루노(Bruno)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032?-1101년
성 브루노는 독일 쾰른(Kol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좋은 교육을 받은 것 외에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지만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쾰른의 성 쿠니베르투스(Cunibertus) 학교를 거쳐 프랑스의 랭스(Reims)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1055년경에 쾰른으로 되돌아 와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다시 1056년에 랭스로 가서 신학교수가 되었다. 다음 해에 그는 그 학교의 학장이 되어 1074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때 그는 성직매매로 랭스의 주교좌를 획득했던 자신의 대주교 마나세(Manasses)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섰다. 성 브루노는 그를 고발하고 그의 직책에서 사임을 요청하여 이를 성취하였으며, 이를 눈여겨 본 랭스의 교구민들이 그를 대주교로 원하였으나 그는 은수생활을 결심하였다.
그는 1082년 마침내 2명의 동료와 함께 랭스를 떠나 몰렘(Molesme)의 성 로베르투스(Robertus, 4월 29일)의 지도하에 은수자가 되었지만, 1084년에 그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르노블(Grenoble)로 이주하여 적막한 알프스 산 속에 은수처를 마련하였다. 그르노블의 주교인 샤토뇌프의 성 후고(Hugo)는 샤르트뢰즈(Chartreuse)라는 장소를 브루노에게 제공해주었다.
이곳에 브루노와 동료들은 경당과 개인 방을 만들고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며 생활하였다. 이것이 곧 카르투지오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극도의 가난생활을 하기 위하여 노동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베끼는 작업을 하였으나, 그들의 규칙을 글로 쓰지는 않았다.
1090년 브루노는 옛 제자였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7월 29일)의 부름을 받고 로마(Roma)로 갔다. 교황의 명에 순명하여 은수처를 떠난 브루노는 이후 교황의 고문으로서 성직자들의 개혁 등 교회의 여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협력하였다. 얼마 후 브루노는 교황을 설득하여 다시 은수생활로 돌아가게 되었다.
로마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에 정착한 브루노는 샤르트뢰즈에서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들의 생활에 감명을 받은 시칠리아(Sicilia) 섬의 영주 로제(Roger) 백작으로부터 라 토레(La Torre)의 땅을 기증받아 이곳에 '라 토레의 성 마리아'라는 은수처를 설립하고 운명할 때까지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시편과 성 바오로(Paulus)의 편지들에 대한 주석을 썼다.
공적인 명예를 거부하는 카르투지오회의 규칙에 따라 공식적으로 시성식을 거행하지 않았고, 다만 레오 10세 교황이 1514년 그를 구두로 시성하여 카르투지오회 내에서 브루노에 대한 공경 예절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162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축일이 10월 6일로 정해졌으며, 1674년에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는 모든 교회가 브루노의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Mary Francisca)
신분 : 동정녀, 3회원
활동지역 : 나폴리(Napoli)
활동연도 : 1715-1791년
같은이름 : 메리, 미리암, 방지가, 프란체스카, 프란치스카, 프랜시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Maria Francisca)는 안나 마리아 로사 니콜레타 갈로(Anna Maria Rosa Nicoletta Gallo)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6세 때에 부친이 어느 집안의 자제와 혼인하도록 강요하였으나 자신은 이미 하느님만 사랑하기로 결심한 후라며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방안에 가두고 빵과 물만 주는 등 갖은 학대를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한 단계로 받아들이며 인내하였고, 어머니가 그녀를 설득하려 하자 자신은 작은 형제회 3회 회원이 되겠다는 뜻만 밝혔다. 결국 그녀는 1731년 9월 8일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되었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의 주요 신심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그 후 38년 동안이나 교구사제인 요한 페시리의 사제관에서 일하였다. 이때 그녀는 신비스런 현상들이 몸에서 일어남을 감지하기 시작했는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거나 사순절의 금요일이 되면 예수님의 수난에 버금가는 고통을 앓기 시작하였다. 즉 게세마니(Gethsemane) 동산의 번뇌, 매 맞음, 가시관을 쓰심, 모욕, 침 뱉음, 죽음에 이르는 고통 등이었다. 사실 그녀는 오상 성흔을 이미 받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그녀에게는 더 많은 신체적인 고통이 따랐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자발적인 고행까지 행하였다. 한 번은 연옥 영혼들의 고통을 체험하였다고 한다. 성녀 마리아 프란치스카는 프랑스 혁명 초기까지 살았다.
그녀는 이 혁명의 무서움을 미리 예언하였다. 성녀의 유해는 나폴리의 산타 루치아 델 몬테(Santa Lucia del Monte) 성당에 모셔졌다. 그녀는 184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마뇨 (Magnus)
활동년도 : +660년경
신분 : 주교
지역 : 헤라클레아(Heraclea)
같은 이름 : 마그누스, 마누스, 망누스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에서 태어난 성 마그누스(또는 마뇨)는 트레비소(Treviso) 지방 오데르초(Oderzo)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638년 롬바르드족(Lombards)이 쳐들어왔을 때 그는 자신의 주교좌를 헤라클레아(오늘날의 치타 누오바, Citta Nuova)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