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잘못 이해하고 사용해서 나타나는 혼란에 대해 사도 바울이 책망하고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7절을 보겠습니다.
4 은혜의 선물은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같은 주님을 섬깁니다.
6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선물은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랍니다.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때, 방언이나 예언이나 병을 고치는 등의 신비한 현상을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표준새번역의 이 본문은 개역개정본에서 말하는 은사라는 말 대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표현을 써서 교회에서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고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사는 교회에서 하는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영이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 그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주시는 능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강변합니다. 8~11절을 보겠습니다.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9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10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11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로 든 이 성령의 선물들 가운데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일로 여겨졌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비합리적인 일들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병을 고친다거나 기적을 행한다거나 예언을 한다거나 귀신을 쫓아낸다거나 방언을 하거나 방언을 통역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단으로 취급받는 극단적인 성향의 일부 교회에서 이런 현상을 옹호하고 실제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하지만 막상 깊이 들여다보면 오해나 사기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주장했다고 해서 다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이천 년 세월이 흐르면서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드러난 것들은 제외시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든 예에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언도 현실에 대한 분별력을 바탕으로 앞일을 예견하는 예언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운명을 점치는 예언이라면 배척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병 고치는 은사도 의사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지만, 의학적 전문 과정을 밟지 않은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신적 능력을 받아서 불치병을 고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의 기적이라든가 나눔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영을 분별하는 은사도 교회 내의 비이성적이거나 비과학적, 비성서적인 주장들을 분별하여 바른 신앙으로 이끄는 분별력을 말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멀쩡한 사람에게 귀신이 씌웠다거나, 합리적인 이유를 대지 않고 특정인을 비방하기 위해 꿈이나 환상을 보았다고 이야기하는 등의 비합리적인 영분별을 말하는 것이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방언과 방언 통역이 문제인데,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지만, 본문이 말하는 것은 외국어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진보적인 학자들은 방언도 대부분 부정적으로 보지만, 성령과 소통하는 특별한 언어일 수 있다며 판단을 유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단정 짓고 싶지는 않지만, 저의 대학시절의 경험으로는 저의 신앙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학교 내의 매우 극단적이고 보수적인 신앙동아리에서 한동안 방언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학생들 중에는 방언 통역을 한다는 학생도 있었고, 병을 고친다는 학생도, 귀신을 쫓아낸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들이 긍정적인 효과를 주기보다는 혼란만 가중시켰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들어간 후로는 자연스럽게 방언을 멀리 하게 되었습니다. 12~13절을 보겠습니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합니다.
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하나의 몸으로, 그리스도인을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지만 지체는 여럿입니다. 그런데 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모든 지체가 눈이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냐고 사도 바울은 묻습니다. 또한 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손에게 너는 쓸 데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머리가 발에게 너는 쓸 데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오히려 사람은 약하고 덜 귀해 보이는 지체를 더 소중히 여기고 돌본다고 말합니다. 마치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거나 ‘아픈 손가락에 더 눈이 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26~27절을 보겠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귀하고 높다고 생각되는 직분을 탐내지 말고 각자 맡은 대로 열심히 봉사해달라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권면이 이어집니다. 마지막 31절을 보겠습니다.
31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본문은 오늘날 교회에서 ‘은사장’이라고 말하는 12장과 ‘사랑장’이라고 말하는 13장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가장 좋은 은사는 공동체 내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