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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정조실록]
[1. 정조의 문화 정치와 실학의 융성]
(1752-1800, 재위 기간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며 왕위에 오른 정조는 문예 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려 한다. 그의 이 같은 문화 정치를 가능케 했던 것은 규장각과
실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론 권신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게 전개된다.
정조는 1752년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으로 1759년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 수업에 들어갔다. 이후
1775년 82세의 연로한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켰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22대 왕에 즉위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역시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나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그래서 '개유와'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 건륭 문화에 열중하면서
전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의 태도는 달라졌다. 11세 이후 줄곧 가슴앓이로만 간직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한편,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해 친위 세력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하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었다. 또한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이른바 '세도'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홍국영의 세도 정치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되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 정치 기간 동안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모았다. 즉,
모든 신하들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펼칠 문화 정치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고의로 홍국영의 세도 정치를 부추기거나 방치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가 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단순한 왕실 도서관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혁신 정치를 펼치려 했다. 말하자면
규장각은 정조의 근위 세력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1776년 설치된 이래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인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개국 이래로 능력과 학식에 상관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조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운영하면서 당하관의 소장 관원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실시하여 상벌을 내리는 방법을 택했다. 또한 각 신하들은 초계문신의
시험관이 되게 했으므로 규장각은 실질적인 경연관으로 왕과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하는 일에서부터 편서와 간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했다.
1780년 홍국영이 제거될 무렵, 규장각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고 있었고 규장각에 모여든
인재도 적지 않았다. 그 무렵 정조는 친정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홍국영을 방출시킨다.
홍국영을 방출시키면서 친정 분위기를 정착시킨 정조는 그 동안 시험 가동한 결과를 바탕으로
1781년부터 본격적으로 규장각 확대 작업에 돌입했다. 그가 후에 규장각 설립 취지에서 밝힌
바대로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그 선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에 젖어 있으므로 왕이
의도하는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의 규장각'이 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 청사로 옮겨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학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화(만들어 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분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의 이 같은 규장각 중심의 정치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당쟁은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영조 때 형성되었던
외척 중심의 노론은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벽파로 남고, 정조의 정치 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시파는 '시류에 영합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고, 벽파는 '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쳐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조는 학문적으로 육경 중심의 남인 학파와 친숙하였고, 예론에서도 왕권의 우위를 주장하던
남인 학파 내지 남인 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었다. 그리고 신권을 주장하였던 노론
중에서도 젊은 자제들이 북학 사상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학자적 소양에도 호응하고
있었다.
정조가 중용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은 남인 계열의 채제공을 비롯하여 실학자 정약용, 이가환
등과 북학파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었다.
이처럼 정조가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정국을 이끌어가자 조정은 당연히 정조의 통치 이념에 찬성하던 시파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벽파는 자신들의 위기 상황을 실감하고 종전보다 훨씬 더 똘똘 뭉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벽파는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를 기점으로 서서히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신해박해는 천주교 수용 여부에 대한 논란 끝에 결국 수용불가 결정이 나면서 일어났다.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인물이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
의식에 따라 상을 치렀다. 이 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이 그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조정은 서구 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벽파)와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던 신서파로
갈라져 정면 충돌하였다.
이에 정조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국문케 하여 사형시켰다. 이 때문에
조정의 대세는 벽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4년 뒤인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으로 벽파는 또 한 번 기세를 떨치게 된다.
이때 남인의 실학자로서 차기 정권의 주자로 인식되고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 등의 중신들도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죽자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이듬해 정조가 죽음으로써 남인은 거의 축출당한다.
그나마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24년 만에 정조의 문화 정치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남겨 놓은 크나큰
업적들이 있었다.
우선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졌고, 영조 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문물 제도 정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물들이 이때 편찬된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 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 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인 이하의 위항인들이 귀족 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 정챌의 추진과 선진 문화인 건륭 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 후기는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문예 부흥의 선봉에 서 있었던 정조는 1800년 6월, 49세가 되던 해에 지병으로 앓고
있던 종기가 도져 세상을 떴다. 그는 효의왕후를 비롯한 3명의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으며,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화성에 있다. 대한 제국 성립 후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가
되었다.
[2. 정조의 가족들]
정조는 효의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3명의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효의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선빈 성씨가 문효세자, 수빈 박씨가 세자 공(순조)과 숙선옹주를 낳았다.
이들 중 문효세자는 어린 나이에 죽은 탓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생략하고, 효의왕후의
삶을 간추려 적는다.
제22대 정조 가계도
영조와 영빈 이씨의 차남인 장조(장헌<사도>세자)는 3명의 부인(혜빈 홍씨, 숙빈 임씨, 경빈
박씨)이 있으며, 혜빈 홍씨 사이에서 차남인 제22대 정조가 태어났다. 3명의 부인은 효의왕후
김씨(자식 없음)와 문효세자(일찍 죽음)를 낳은 의빈 성씨 그리고 제23대 순조와 숙선옹주를 낳은
수빈 박씨가 있었다.
효의왕후 김씨(1753-1821)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다. 1762년 10세 때 세손비로 책봉되어 정조와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빈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기에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혔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왕가의 자녀들을
돌보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 사가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 수진궁과 어의궁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중의 물품은 공물이라 하여
일체 사가에 보내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채 1821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능은 경기도 화성의 건릉이다.
[3. 실학의 융성과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사람들]
실학은 조선 후기에 대두된 일련의 현실 개혁적 사상 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정주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회 체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현실 속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구현하려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수광, 유형원 등을 선구로 시작된 이 같은 실학은 이익, 안정복, 박세당, 홍대용을 거쳐
박지원, 정약용, 이덕무, 박제가에 이르러 집대성되고 19세기말의 개화 사상가들에 의해
재발견된다.
이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조선 사회의 정주성리학적 질서와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사회 건설을 통한 새로운 시대를 염원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인 박지원, 정약용 그리고 박제가의 삶을 간단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실학의 범위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양에 달하기 때문에 실학 자체에 대한 분석과 소개는
생략한다. 또한 이들 세 사람에 대한 서술 역시 간단한 이력 소개의 차원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들의 이력을 덧붙이는 것은 정조 시대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1737-1805)
박지원은 1737년 한성 서쪽 반송방의 야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와 고관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5대조 박미는 문예 서도의 대가로서 선조의 부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의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 박사유는 그가 어릴 때 미처
관직에도 임용되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며, 어머니 역시 일찍 세상을 떴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읜 탓으로 조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조부 박필균은 노론측 인사였지만
당쟁을 싫어했던 탓에 당론 시비에 휘말리는 일이 없었고, 또한 청렴하여 축재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가난하게 살았다. 이런 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는 건강하고 영민한 청년으
성장해 1752년 16세 때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이보천은 비록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사람
보는 눈이 좋고 성품이 뛰어난 선비였다. 그는 박지원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교리로 있던 아우
이양천에게 부탁하여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는 이양천에게 주로 [사기]를 비롯한
역사 서적을 배웠고,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여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그리고 처남 이재성과
학문을 교제하며 서로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하였다.
1760년 조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그리고 1765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에는 집을 팔고 백탑 근처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에서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자주 토론하였고 또한 유득공, 이덕무 등과 어울려 서부 지방을 여행하기도 한다.
이 당시 정국은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있었고, 그 때문에 노론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위협을 피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은거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는 연암협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1780년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삼종형 박명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 사절 정사로 북경을 갈 때
수행하여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 보고 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
[열하일기]이다.
그가 자원하여 청을 다녀온 것은 홍대용의 영향 때문이었다. 홍대용은 그에게 중국 여행담을
들려주면서 그곳의 산업과 과학, 그리고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그가 쓴 [열하일기]는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는 정면에서 시작된다. 요동의
성경(봉천)과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청황제의 피서지인 열하에 도착하였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오는 8월 20일까지 약 두 달 동안의 여행 체험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으며,
특별한 부분은 별도 항목을 마련하여 덧붙여 놓았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선비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 후 1786년(정조 10년) 50세에 음서로 선공관 감역에 재수되면서 녹봉을 받는 관리가 된다.
1789년에는 평시서주부, 1791년에는 한성부 판관, 이듬해에는 안의현감, 1797년에는 면천군수
그리고 1800년에는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805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안의현감 시절에 북경여행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재직시에는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안설' 등을 저술한다. [열하일기]와 더불어 이 책들 속에는 그의
현실 개혁에 대한 포부가 잘 나타나 있다.
북학 사상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긴 하지만 청의 문명이 우리의
현실을 풍요롭게 한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청이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그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역대
중국인들의 우리 민족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방법을 서술하기도 했다.
이 같은 그의 현실주의적인 사상은 노론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정조 대의 젊은
선비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되어 북학파를 형성하는 중심 사상이 되었다. 그의 현실 개혁적
사상은 '연암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허생전', '민옹전', '광문자전', '양반전', '김신선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등의 소설 속에 잘 용해되어 당대와 후대 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소설들은 대개 시대상을 풍자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양반전'에서는 조선 봉건 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며 군림하는 사대부
계층이 처한 현실과 한계점을 잘 지적하고 있고, '허생전'에서는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중상주의적 사상을 통해 이상향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소설들은 그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이자 배타적으로 인식한 조선
사회의 현실과 이상향으로 추구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염원을 표출한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지배층의 사고 방식과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그의 저술들이 오랫동안 불온한
서적으로 취급된 이유가 되었다.
그의 문집이 처음 공간된 것은 그가 죽은 지 1백 년이 지난 1900년이었다.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을 지낸 인물이었지만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연암문집'은 그때까지 간행되지
못하다가, 20세기 벽두에 김만식을 비롯한 23인의 학자들에 의해 겨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실학의 최고봉 정약용(1762-1836)
정약용은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를 지내다가
그가 태어날 무렵에 대다수의 남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묻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정권에서 쫓겨난 남인들이 다시 등용되자, 정재원도
호조좌랑에 임명되어 한성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정약용은 아홉 살이 되던 1770년에 어머니 윤씨를 여의었다. 그리고 1776년 정조가 등극하던
해에 승지 홍화보의 딸과 결혼했다.
한양에 올라온 그는 외가를 자주 찾았다. 그의 외조부 윤두서는 문인으로 명망이 높았고, 잘
알려진 문인 화가이기도 했으며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정약용이 외가를 드나들었던 이유는 바로
윤두서가 소장했던 책들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는 열정적인 독서를 통하여 고전을 섭렵하는 한편 친형 정약전과 그 친구들과의 교유를 통해
많은 지식을 쌓았다. 정약전의 친구 가운데 이승훈이 있었고, 또 이승훈의 소개로 이익의 종손
이가환을 알게 되었다. 이가환은 이익의 실학을 계승한 유능한 학자로 당시 젊은 유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교제는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호조좌랑이 된 아버지는 곧 다시 전라도
화순의 지방관으로 발령이 났고, 그도 역시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1781년 스무살 때 과거를 치렀지만 떨어졌고,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초시와 회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생원으로서 벼슬길에 오른 지 3년 뒤인 1784년 정조의 부름을 받아 경연석에서
'중용'을 강의하면서부터 파란많은 삶이 시작된다.
이후의 그의 삶은 대체로 3기로 나눠질 수 있다. 제1기는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벼슬살이를 하던 득의의 시절이고, 제2기는 정권에서 밀려나 귀양살이를 하던 시절이며, 제3기는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던 시절이다.
정약용은 생원이 된 이후 1789년 3월에 정조 앞에서 치른 전시에서 합격하여 초계문신의
칭호를 얻었으며, 그 해에 종7품의 부사정을 거쳐 정7품의 가주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큰
배를 강에 나란히 띄워 가교를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그리고 배다리를 준공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1791년 정6품의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고, 이듬해에는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수원성 수축에 동원되어 설계를 도맡았으며, 기중기를 제작해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도 했다.
1793년 수원성 수축 도중에 아버지 정재원이 임지 진주에서 세상을 뜨자 그는 이듬해 7월까지
상을 마치고 다시 정5품의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왕의 특명을 받아
경기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 지방의 서용보 일당의 범죄 사실을 보고하여 그를 해직케 했다.
하지만 이때 해직당한 서용보는 앙심을 품고 혈안이 되어 여러 차례 그를 죽이기 위해
모략을꾸미게 된다.
암행어사 일을 마친 그는 1795년 정3품의 병조참의에 오른다. 하지만 이때 청나라 신부
주문모잠입 사건이 발생해 충청도 금정의 찰방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규장각 교서로 돌아와
편찬과 교정 업무에 종사했고, 천주교 문제가 다시 정쟁의 핵심으로 떠올라 1797년 6월 재차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되어 떠나야 했다. 이 곡산부사 생활을 하며 그는 뛰어난 목민관의
자질을 드러내어 곡산군민들의 추앙을 받게 된다. 또한 이때 전국적으로 천연두가 유행하자
서학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적절한 치료책을 세우고 '마과회통'이라는 의학서에 담아 편찬,
보급하였다. 그때까지 천연두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였던 민간에서는 그의 치료 대책에 힘입어
많은 환자를 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조정에 알려져 전국적으로 이 책을 보급하게 되었다.
1799년 그는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병조참지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요직을 제수받는 것을
반대한 정적들은 그를 천주교인으로 몰아갔다. 이 때문에 그는 해명서인 '자명소'를 제출한다.
그는 자명소에서 자신은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 특히 천문, 농정,
지리, 건축, 수리, 측량, 치료법 등의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서학에 접근했다면서 이를 위해
서학에 능통한 천주교 신부와 신자를 만났다고 밝힌다. 그리고 사퇴 건의서를 함께 제출했다.
정조는 애써 그를 달래어 조정에 머무르게 했지만 그의 사의는 완고하여 1800년 봄 처자를
거느리고 낙향했다. 그 후 정조의 재촉으로 일시 상경하였지만 정조가 그 해 8월에 죽는 바람에
그는 다시 향리로 돌아왔다.
정조가 죽은 후 그의 제2기 인생이 시작되었다. 조정은 노론 벽파가 완전히 장악하였고,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정약전, 정약종을 비롯한 이가환, 이승훈 등이 투옥되어 이가환,정약종, 이승훈
등이 죽고 서용보의 간언으로 정약용도 유배된다.
1801년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오로지 독서와 창작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져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야 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서학 관련자들이
사형당했지만,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의 공적을 존중한 조정 내부의 사람들에 의해 유배형으로
끝났다. 그래서 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떠났으며,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유배지 강진에 도착한 그는 1801년 11월부터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유배지의 주막에서
거처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만덕사의 혜장선사와 인연을 맺는다. 1803년 봄 소풍길에
만덕사의 혜장선사를 알게 되어 유교와 불교를 서로 교환할 기회를 갖는다. 이후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1805년 겨울 거처를 고성사로 옮기고, 다시 9개월 후에 목래 이학래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길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게 된다.
1808년 봄 정약용은 다산에 있는 한 정자를 얻게 되었는데, 그곳은 윤박이라는 선비의
별장이었다. 거기에는 천여 권의 장서가 있어 그가 책을 집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초당에 기거하면서 그는 자신의 아호를 '다산'이라고 붙였다. 그리고 자신이 머물던 곳을
'다산초당'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11년 동안 다산초당은 정약용 학문의 산실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비롯한 '시경강의보',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대학공의', '중용자잠' 등 수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818년 유배가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오면서 정약용은 다시 제3기 인생을 맞이한다. 유배 생활 중에 쌓은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흠흠신서', '상서고훈' 등을 비롯한 많은 책을 집필했다. 그의 저서는 '여유당집'
250권, '다산총서' 246권과 나머지 책들을 포함하여 약 508권에 달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고, 1934년에서 1938년에 걸쳐 신조선사에 의해 '여유당전서'가 출간되었다. 감히 한 마디로
업적을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저작물을 남겨 놓은 정약용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1 신세계를 염원한 석학 박제가(1750-1805)
1750년에 태어난 박제가는 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이다. 소년 시절부터 시, 서, 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쳤으며, 박지원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그는 양반 가문에 태어났지만 첩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11세 때 그나마 바람막이가 되어 주던 아버지마저 사망하였기에 어린 그와
어머니는 버림받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는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가까스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고전에 밝았고, 남달리 시와 글씨에 두각을
드러내어 소년 시절에 쓴 글들이 명사의 서재에 장식될 정도였다.
하지만 서얼 차대로 인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다만 당대의 석학들인 이덕무, 유득공 등과
친분을 맺으면서 북학에 열을 올렸다. 그가 아홉 살 연상인 이덕무와 평생을 나누는 벗이 된
것은 그들의 출신이 모두 서얼인데다가 시와 북학에 대한 열정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연을 맺은 뒤로 줄곧 함께 활동했다. 그리고 둘의 뜻이 북학에 있음을 깨닫고
박지원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또한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던 홍대용의 가르침도 구했다.
당시 북학을 추구하던 무리들은 한결같이 북경을 방문하여 그곳의 선진 문명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는 것을 소원하였다. 홍대용과 박지원 주위에 많은 청년들이 모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박제가는 그 청년 무리들 속에서 서얼 출신인 유득공과 양반 출신인 이서구를
만난다.
1776년 그의 나이 27세 때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왕위에
오른 정조가 즉시 규장각을 설치하여 많은 실력 있는 젊은 학자들을 그곳에 유치한 것이다. 이때
그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이라는 사가시집을 출간하여 청나라에까지 그
명성을 얻는다. 이듬해 정조는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서얼 차대를 없애기 위해
'서얼허통절목'을 공포했고, 이 덕택으로 박제가는 꿈에도 바라던 북경을 갈 수 있게 되었다.
1778년 그와 이덕무는 정조 등극 이후 영의정이 된 남인의 채제공을 수행해 청나라 사은사
행렬에 합류했다. 북학에 조예가 깊고, 학문이 뛰어나다는 정평이 나자 방문단의 수행원으로
간택되었던 것이다.
3개월에 걸친 여행을 하면서 박제가는 대단한 열정을 보이며 청나라의 문명을 살피기
시작했다. 홍대용의 소개로 이조원, 반정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문명의 이기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고, 그는 엄청난
충격과 감동으로 그것들을 접하며 체험한 모든 것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의 기록들은 귀국 후 '북학의'라는 대논문으로 묶여졌다. 내외 두 편으로 된 이 책의
내편에는 수레, 배, 성, 벽, 궁실, 도로, 교량, 소, 말 등 생활에 필요한 기구와 시설 등이
서술되었고, 외편에는 전제, 농잠총론, 과거론, 관론, 녹제, 재정론, 장론 등의 정책과 제도가
서술되었다.
그는 이 논문 속에서 중국의 생활 도구와 조선의 것을 비교하기도 했지만 국가 정책과 제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특히 과거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며 능력에 따른 등용제를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경제 문제에 관해서도 생산보다는 소비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국제 무역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북학의'를 통해 북학의 개념을 정리한 그는 정조의 서얼 차대 폐지책에 의해 1779년 이득무,
유득공, 서이수 등의 서얼 출신들과 함께 규장각의 검서관이 되었다. 그는 이로부터 13년간
규장각에 머물면서 그곳에 비장된 서적들을 탐독하는 한편,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사귀면서 수많은 책들을 교정하고 간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줄곧 정조에게 신분적
차별을 없애고, 국민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이를
위해 청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790년 건륭제의 팔순절에 정사 황인점을 따라 두 번째 중국길에 올랐으며, 돌아오는
길에 왕명에 의해 연경에 파견되었다. 원자(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검서관이던 그를 정3품 군기시정에 임시로 임명하여 별자 사절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이 같은 배려에 정권을 쥐고 있던 양반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북학파가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여지없이 명나라의 은혜를 망각하고 침략한
만주족을 존중하는 것은 명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묵살해버렸다. 이에 그는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과거의 제도와 관습에 사로잡혀 안일한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곤 했다.
권력층과의 이러한 대립은 결국 그의 말로를 불행으로 몰고갔다. 1800년 실학의 탄탄한
후원자였던 정조가 죽자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천주교 금지를 명분으로 남인 일파를 완전히
숙청하고,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천주교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실학파 학자들을
대거 제거하였다. 박제가 역시 제거 대상의 주요 인물이었다.
노론 집권층은 윤행임 반역 사건(신유사옥)을 조작해 그를 가담 인물로 지목했다. 그는 반역
혐의를 끝까지 부정하며 묵묵히 고문을 받았으며, 결국 두만강변의 종성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1804년 유배에서 풀려나 향리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의 학자들은 박제가를 두고 지나친 개혁론자라고 비판하였다. 그것은 그가 봉건 사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문물을 통해 조선 사회의 질서를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의
개혁론은 권신들에 의해 번번이 묵살되었지만 정조는 언제나 그의 의견에 동조해 주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의 개혁론을 전적으로 수용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 때문에 박제가의 개혁론은 한낱
이상주의로 취급되고 말았다. 즉, 지나치게 앞서갔던 탓으로 동조 세력을 많이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선각자들은 박제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신분 차별 타파는
시대적 사명이고,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은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다.
[4. '정조실록' 편찬 경위]
'정조실록'은 총 56권 5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76년 3월에서 1800년 6월까지 정조 재위
24년 3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800년 12월에 시작되어 1805년 8월에 완료되었다. 편찬 인원은 총재관 이병모,
이시수, 서용보를 비롯하여 도청당상 2명, 각방당상 21명, 교정당상 9명, 교수당상 2명, 도청낭청
20명, 각방낭청 64명, 분판낭청 10명 등 총 131명이었다.
정조 시대의 세계 약사
이 시기 중국의 청에서는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혼란이 일어났고, 일본은 서양
문물을 새롭게 수용하면서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후
나폴레옹에 의해 혁명 전쟁이 이어졌고,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고 워싱턴, 제퍼슨 등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이 시기는 무엇보다도 프랑스와 미국의 시대였다.
독일에서는 '슈투름 운트 드랑'적인 사상이 과격한 양상으로 치닫자 괴테와 쉴러 등에 의해
조화와 정제미를 추구하는 고전주의 문학이 모색되고 있었고, 베토벤이 등장하여 고전파 음악의
완성과 함께 낭만주의 음악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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