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헌황후
1748년 3월 11일. 건륭 일행은 제남에서 덕주로 가던 길이었고, 너벅선으로 갈아타려고 했고,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가마 안에 누워 있던 황후 부찰씨가 병이 갑자기 깊어져서, 곧 숨을 거둘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황후가 황태후와 황제를 따라나선 이번의 행렬은, 공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태산을 오르는 등 매우 빡빡한 일정이었습니다. 그녀는 겨우 36세였고, 그 직전에 둘째 아들을 잃어 심리적으로 타격을 입었습니다. 다름 아닌 천연두에 걸렸던 아들은 음력설을 바로 앞둔 섣달 그믐날 밤에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궁정의 여러 사람들은 건륭에게, 만일 황후가 황궁 안에서 은둔하게 된다면 징조가 나쁘게 될 것이라는 하늘의 움직임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건륭은 자신의 빡빡한 여행에 부인을 데리고 나선 것입니다. 그는 태산등이 보여주는 웅장한 광경이 사랑하는 부인을 소생시켜 주기를 바랬습니다. 사실 효과는 있었습니다. 황후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고, 태산에 직접 올라가 여신을 모신 사당에서 직접 기도도 올렸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여정이 문제였습니다.
이 해는 예상치 않게 봄날의 눈보라가 몰아치던 해였습니다. 황후는 감기 증세에 시달렸고, 잠시 앓아누웠으나 크게 걱정할 만한 상태는 아닌것처럼 보였습니다. 건륭은 예정된 활동을 게속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덕주로 가는 그 길에서 황후의 상태가 엉망이 되었고, 황실의 방문단을 전송하기 위해 강둑에 모인 수백명의 관료들은 이제 그녀의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의미있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녀는 황제의 옆에서 운명했습니다. 젊은 황제는 미친 사자처럼 포효하며, 운명에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황제가 황후와 혼인 하였을때, 황제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고, 그녀는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황제가 되는 사나이와 이에 걸맞는 관계를 찾는 작업에 사랑이라는 요소가 개입될 부분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22년간 지속된 그들의 결혼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 행복한 결합이었습니다. 부찰 씨는 건륭의 동반자였고, 모든 여행에 함께했습니다. 건륭이 병이 나면, 황제가 회복 될 때까지, 그녀는 옆에서 자리를 지켰습니다. 또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극진하게 보살폈고, 황제의 여러 여자들 중에서도 조화를 유지하는 능력은 세상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과시와 사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황후는 진주와 오색찬란한 물건을 진심으로 부담스러워했고, 차라리 밀집과 비단으로 만든 조화(造花)를 더 사랑했습니다. 1747년, 목란의 수렵지로 떠나던 부부의 여행에서, 건륭은 지나가는 말로 조상들이 불을 피우기 위한 부시와, 부싯돌이 담긴 전대를 차고 다니던 관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은 온갖 비단으로 장식한 호사스런 그 시대의 전대와는 달리, 단순한 디자인에 단지 사슴의 꼬리로 만든 가느다란 실로만 장식되어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이에 황후는 직접 평범한 꽃무늬 디자인으로 수를 놓은, 평범한 쪽빛 비단 주머니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단지 6개월이 지났을 뿐입니다. 비단 주머니는 남아 있었지만, 황후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건륭은 그 비단 주머니를 보관하기 위한 특별한 상자를 제작하게 했고, 자신이 지은 시를 동봉했습니다. 건륭은 ─ 그로서는 매우 드물게 ─ 이때 만큼은 '황제' 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입장에서 감정을 표출해내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옛 물건을 볼때마다 슬퍼지나니,
눈앞에 그녀의 모습과 음성이 떠올라 눈물이 흐르기 때문이네."
황후의 사망은 황제의 이성을 흔들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들이 탔던 너벅선 전체와 함께 그녀의 모든 유품을 모두 북경으로 운송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너벅선을 운하에서 북경까지 끌어올리는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뭍으로 나오게 되자 이를 북경으로 옮길 방법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채소의 진잎을 일일히 칠한 나무 레일 위해 배를 올려놓고, 이를 끌어 거리를 지나도록 하는 방법이 제안되었습니다. 이미 납관된 황후의 시신은 임시적으로 장춘궁에 옮겨졌고, 다시 황궁 안의 특별 장소로 옮겨졌습니다.
국장은 전례 없는 규무로 치루어졌습니다. 9일 동안 광대한 제국의 모든 공무는 중지되었습니다. 한달 동안 모든 고위관료는 물론이고, 황실의 모든 사람들이 하얀 상복을 입고 고기를 먹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조정안에서는 모든 결혼이 금지되었고, 지방에서 거행되는 일반 백성의 결혼식에서는 음악을 연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각 성의 관료들은 예복을 벗었고, 아문에서 3일간의 애도기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황족의 자제들은 변발을 잘라야 했고, 부인들은 머리칼을 짦게 깎게 되었습니다. 만주족이든, 한족이든, 모든 남성은 백일동안 면도가 금지되었고, 부인들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는것이 금지되었습니다.
눈치빠른 관료들은 물론 적절하게 처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황후의 사망에 대해 애도의 조의를 표시했습니다. 이는 말할 나위도 없이 형식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세상 모든것에 분노하고 있는 황제는 그런 형식조차 보이지 않은, 특히 일부 만주족에 대해 격노했습니다. 건륭의 표현대로라면,
"그들은 당연히 슬픔으로 울부짖으며 달려오고 있어야"
했습니다. 조의를 표하는 것을 무시한, '배은망덕한' 53인은 신속히 처벌되어 두 계급이 강등되었습니다. 한달 뒤, 애도를 성의 없이 했다는 이유로 아들 중 두명에게 맹렬하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 라고 이들을 비난하며, 황실의 가계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백일도 지나기 전에 머리를 자르거나 면도를 한것이 적발된 수백여명은 직업, 작위, 급료를 잃었고, 일부는 "생명" 까지도 빼앗겼습니다.
이제 단순히 황후의 죽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순식간에 이는 관료조직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과 정비로 직면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의에 벗어났다." 는 이유로 강직, 혹은 면직을 당했으며, 게중 소수는 사약을 받거나 목이 달아났습니다. 정부의 분위기는 갑자기 각박스러워졌습니다. 그전까지는 느긋한 태도를 보이던 건륭은, 완전히 태도가 돌변하여 변덕스럽고 괘팍한 모습을 취했습니다. 황제와 매우 가까운 관료들조차도 그런 변화에 당혹스러워했고, 이는 40여년을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후 건륭의 패기만만함은 끝없는 자만심과 지독한 괴팍함, 변덕스러움으로 변모했습니다.
건륭 39년 10월, 산동성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종교적 봉기였습니다. 바로 백련교 지파, 청수교의 영수 왕륜이라는 인물이 일으킨 난이었던 것입니다.
왕륜은 백련교의 지파인 청수교를 이끌었는데, 왕륜이 난을 일으킨 산동은 본래 반청의 기운이 상당히 잠재되어 있었던 곳입니다. 그리하여 한번 불길이 기세가 붙차 단번에 수천여명이 가담하여 일이 커졌고, 지현은 잡혀 죽었고 당읍이 점거되었습니다. 곡물을 수송하던 배들 역시 반란군에 참여했습니다. 봉기군은 부자들을 죽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고 죄수들을 풀어주었기에,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했습니다.
이 무렵에는 이미 무능해질대로 무능해진 녹영병은 일찌감치 겁을 먹고 전의를 모두 상실했습니다. 총병 유일은 자신이 스스로 용맹하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봉기군에 패해 볼품없이 달아났습니다. 유격대장 간복은 관청 뒷담을 몰래 뛰어넘어 도망쳤습니다. 이제 반란군은 남북 수로 교통의 요충지이자 조운의 중심이었던 임청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이에, 흠차대신 서혁덕이 1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습니다. 봉기군은 5천 600여명의 병력으로 이에 맞섰지만, 청군은 조총, 벽산포, 불량기등 화력이 월등하여 봉기군을 수월하게 격파했습니다. 봉기군에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주모자 왕륜은 분신자살했고, 다른 봉기군들을 모조리 학살되었습니다. 서혁덕은 이러한 참상에 대해 건륭에게 보고를 올렸습니다.
"매일같이 관군을 이끌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담하여 수색, 체포 작업을 진행했다. 모든 집을 순서대로 하나씩 돌아가며 구석구석 뒤지고, 움 속이나 도랑까지도 찾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그 안에 숨어있던 비적들은 잡히는 대로 연일 끌려가 죽음을 당한 것이 그 수를 헤하릴 수가 없었다. 불을 지르거나,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도처에 널려 있었다. 임청 구성의 거리마다 시체가 가득 쌓여 길을 메웠다."
그런데 건륭은 이에 스스로 직접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을 지시했습니다.
"강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넒은 평지를 택하되, 논밭과 가옥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여 큰 구덩이 두 곳을 파, 남녀 시체를 구분하여 버리고 그 위를 재와 자갈로 쌓아 덮으라."
이러한 건륭에게, "단지 겁이 나 반란군에 협력한 사람도 있다. 이들을 석방해야 한다." 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이는 강희제 시대의 기조입니다. 하지만 건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적들이 잡혀 온 뒤에 거짓으로 이르기를, 강제로 협박을 당했다고 속인다하여 어찌 가벼히 용서할 수 있는가? 만일 다시 관용을 베풀어 요행으로 넘어간다면, 장차 구실을 들어 패거리를 모았을 때 그 기세가 더욱 거세질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모두 '주살' 해야 한다."
이리하여 뿔뿔히 흩어진 사람들도 다시 잡아와 처형하는 끔찍한 유혈극이 난무했습니다. 봉기농민들의 가족들은 관료들의 노비가 되었는데, 80살이 된 노파도 예외가 되지 못했습니다. 왕륜의 무덤은 고조부까지 헐어졌고, 5촌 안에 들지 않아 간신히 주륙만은 면한 친척들도 노비가 되어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건륭은 일말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