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서상돈선생과 천주교 대구교구청 히말라야시다
대구가 널리 알려져 이른 바 브랜드가치가 높아진 것은 신라 제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이 대구로 천도(遷都)하려 했던 일과 임란 후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고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 국민에게 크게 알려진 계기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녀의 차별이 극심했고, 반상(班常)의 차이가 엄격했던 시절, 성별과 연령, 신분의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민족 전체가 참가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의 자랑거리이자 다른 도시의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대구사람 그 중에서도 서상돈이 주도한 민족자존, 자강운동이다.
공은 조선의 국반(國班) 대구서씨의 후손으로 아버지 서철순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 1850년(철종 1) 김천시 지좌동에서 출생했다.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가문이 되었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강원도와 충청도로,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 경상북도 문경, 상주 등지로 피신하였다가, 10세 때인 1859년(철종 10) 아우 상정과 함께 서구 새방골에 정착했다.
당시 대구천주교 원로회장 서용서(김수환 추기경 외조부)와 보부상 두령 외사촌 형 최철학 등의 도움으로 보부상으로 출발하여 22세 때 당시 생활 필수품인 소금과 지물, 포목 등을 취급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1811년 29살 때 수안 김씨와 결혼하고 그 후 8남매를 두었다. 사업은 더욱 번창하여 39살 때에는 대구 제일의 거상(巨商)으로 성장했다. 이 때 천주교 대구교구 창설에도 크게 기여했다.
1894년 45세 때부터 탁지부 세무시찰관에 임명되고 1903년까지 9년간 경상도 세정을 총괄했다. 임명권자는 경상도관찰사 조명호였다. 정6품으로 시작하여 정3품으로 승진했다. 1898년 48세 때 만민공동회 재무부장으로 대구에서 서울로 활동범위를 넓혀 민권운동, 외세배격, 참정권획득운동을 벌였다. 이때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한 서재필은 공의 족손이다.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1901년 극심한 가뭄이 들자 수천석의 곡식을 풀어 굶주린 사람을 구제했다.
1904년 일제가 강제로 한 · 일 의정서를 체결하고 고문(顧問)정치가 시행되면서 조정의 재정을 노골적으로 간섭했다. 이듬해에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했다.
1906년 동래경무관(현, 경찰서장)을 지내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사표를 낸 배일사상이 투철한 충남 보령 출신의 김광제(1866~1920)를 만나게 되어 그와 함께 대구광문사를 설립하면서 그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회의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원을 보상할 것을 제의하고 먼저 800원을 기부했다. 주사 월급이 15원, 쌀 한 말이 1원 80전 시절이다. 이 때 참석한 회원들이 2,000여원을 갹출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국채 1,300만원은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으로,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그 대금 20전씩을 거둔다면 1,300만원을 모을 수 있으며, 나머지는 특별 모금한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을 비롯한 민족 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어 2월 23일 중구 남일동에서는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결성되어 반지, 팔찌, 목걸이 등의 패물을 내놓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국채보상부인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여성들이 남성들의 활동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큰 이의가 있다. 1913년 63세로 돌아가셨다. 그 후 물산장려운동과 1997년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운동의 씨를 뿌린 분이다.
대구시에서는 공을 기리기 위하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고 100주년을 맞는 2007에는 서상돈 · 김광제 두 분을 ‘이달의 문화인물’선정하도록 하였으며 ‘기념우표발간’, ‘국제학술대회의 개최’, ‘흉상건립’, ‘기념음악회개최’, ‘금연운동전개’, ‘관련유적답사’ 등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
천주교 대구교구청에는 공이 심은 히말라야시다가 푸름을 잃지 않고 서 있다. 교구청은 대구가톨릭의 심장부이다. 그 입구 계단 한 쪽에 서상돈 수식(手植)이라고 쓴 표석이 선명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언제, 무엇 때문에 심었는지 알 수 없었다. 교구청이 자리 잡은 일대는 공이 희사한 땅인 만큼 대구교구가 설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013년,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에 필자에 의해 칠곡향교 경내에서, 2015년 심충성에 의해 군위 소보면에서 공의 송덕비가 발견되었다.
첫댓글 선생님
환영합니다
자주 들리시어 많은 가르침 부탁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