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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목자_훌륭한 지도자
요한복음 10:11-17
11.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2.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5.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지난 화요일,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0주년이 된 날이었습니다. 이날 세월호, 이태원, 스텔라데이지호 등 참사 유가족과 시민 3,500여 명은 안산시 화랑유원지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식'을 가졌습니다. 이 기억식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는 염원이 아직도 이뤄지지 못한 데 대한 통한과 안전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또다른 다짐의 시간이었습니다.
기억식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김종기 운영위원장(고 김수진 양 아빠)은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생명안전 기본법을 제정하고 또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서 수십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참사뿐 아니라 이태원 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같은 어처구니없고 비극적인 참사가 반복되지 않는다." "앞으로 10년도 완전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만들기를 위해 더 노력할 것이다." "잊지말고 기억하고 행동해달라." 이렇게 말이죠.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피해를 조사하기 위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는 2022년 9월 활동을 종료하면서 정부에 ▲국가책임 인정과 사과 ▲중대재난조사위(가칭) 설립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포함한 12개 분야의 권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4·16연대에 따르면 단 1개 분야인 해양재난 수색구조 체계 개선 요구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는 무시되었다고 합니다. '추모 사업의 중단 없는 추진'을 권고했지만, 희생자 추모를 위한 '4·16 생명안전공원'은 지난해 착공해야 했음에도 기획재정부와 사업비 협의 과정에 발목이 잡혀 첫 삽도 뜨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가습기 피해, 이태원 참사,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오송 참사, 채상병 사망 등이 계속 반복되어도 국가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니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모양새입니다. 159명의 젊은이가 희생된 이태원 참사 500일이 지났지만 세월호 참사와 마찬가지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또다시 실종되었습니다. 아니 과거보다 더 후퇴했습니다. 책임 주체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윤희근 경찰청장 같은 책임자들은 뻔뻔하게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죠.
이같은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21대 국회에서는 생명안전기본법을 발의했습니다. 2020년 11월 우원식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생명안전기본법은 모든 사람의 권리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명확히 하는 한편,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조사의 보장, 안전 관련 계획 등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안은 여당 반대로 21대 국회 내내 계류됐고, 그러는 사이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참사 이후에도 대통령은 영정과 위패도 없는 분향소를 조문하고, 유가족은 만나지도 않았으며,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마저 거부했습니다. 경찰 특별수사본부 수사는 윗선에 대한 책임 규명 없이 실무진만 처벌하는 꼬리 자르기에 그쳤죠.
야당의 압승으로 끝난 22대 국회에서는 이태원 특별법, 생명안전기본법 제정되리라 믿습니다.
우리나라는 제왕적 대통령 중심제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입니다. 87년 헌법은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허용해 국가권력을 행정부에 집중시켰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인사와 예산편성, 법안발의, 법령의결, 사법기구 임명권(대법원,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등 미국 대통령도 갖지 못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해 왔죠. 특히 보수 진영에서 대통령을 배출했을 때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였습니다. 기득권 카르텔의 절대적 엄호가 있었기 때문이죠. 반대로 진보적 정부에서는 기득권 카르텔의 결사적 저항으로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우리 근 현대사를 살펴 보면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과 국민들의 삶의 질이 크게 죄우 되어 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민주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일수록 그 폐해가 더욱 심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정부수립 50년 만의 정권교체, 총 3번의 민주진영 대통령의 배출로는 잘못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기 역부족이었습니다. 강고한 기득권 카르텔은 0.73% 득표 차로 촛불혁명으로 만든 정부를 또다시 무너뜨리고 검찰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검찰정권은 2년 만에 나라를 송두리째 위기로 몰아넣었죠. 민주주의의 위기, 경제와 민생위기, 안보와 전쟁위기, 반목과 차별위기 등 우리 사회를 총체적 난국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4주입니다. 오늘의 복음서 성서 일과는 요한복음 10:11-17입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죠. ‘착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비유’로 알려진 본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양과 목자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목자와 양의 비유를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양은 단순히 재산의 소유 관계가 아니라 가족과 같이 생명이 걸린 사랑과 신뢰의 관계였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목자와 양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일 것입니다. 우리가 양과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보신 것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축으로 키운 양의 특성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죠.
양은 인간이 기르는 가축을 통틀어 개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동물입니다. 기원전 8,000 ~ 9,000년 전부터 중동 지역에서 최초로 키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당시 양은 캅카스 산맥과 페르시아에서 서식하던 산양을 길들인 가축이었습니다. 양은 가축으로 키우기에 매우 유리한 동물이었습니다. 작은 식량만 섭취해도 오래 버틸 수 있어 대규모로 키우기에 용이했다죠. 양털을 깎아 쓸 수도 있었고 고기와 젖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기와 털(양모)를 얻기 위한 품종 개량도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점차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뿔은 사라지고 복실복실한 털이 길게 자라는 방향으로 진화했죠, 야생양보다 덩치가 훨씬 작아지고 성격도 순해졌습니다. 하지만 양은 염소와 마찬가자로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여서 심지어 사람을 들이받기도 합니다. 과거 양치기의 사망 원인 중 양의 공격도 있었다고 하네요. 또 추울 때는 떨어져 자고, 더울 때는 붙어 자는 습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개별적이고 이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양은 겁이 많습니다. 오랫동안 인간이 보호하고 사육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특성일 수도 있습니다. 양들은 포식자들이 접근해오면 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우왕좌왕하다 동족끼리 깔려 죽는 일들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특히 늑개와 같은 개과 동물에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다고 하죠. 그래서 목자들이 개를 양몰이에 쓸 수 있었고, 효과적으로 양들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양떼 숫자의 3/1정도로 염소를 함께 키운다고 합니다. 염소는 양 무리 중에서 일종의 골목대장 노릇을 합니다. 목자가 초장을 찾아 양떼를 몰고 갈 때 험한 산과 골짜기를 지날 때가 많습니다. 그곳에는 비탈길과 바위와 낭떠러지들이 있습니다. 험한 곳이 나타나면 양들이 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럴 때 겁 없는 염소가 앞장서고, 따라쟁이 습성이 있는 양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됩니다. 또 양은 식물을 먹을 때 잎뿐만 아니라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먹기 때문에 한 곳에 계속 머물거나 목축지가 좁으면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합니다. 그런데 염소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다 큰 풀을 뜯는 습성이 있어 양들도 따라 하며 생태계가 어느정도 보호된다는 것이죠.
양들은 시력이 매우 나쁘지만 청각은 예민합니다. 그래서 소리로 주변 환경을 파악하죠. 양들은 염소의 움직임을 소리로 파악하여 따라 다니며 위험한 환경을 벗어납니다. 또 천적이 나타났을 때도 염소 근처로 모여든다고 합니다. 시튼 동물기에 나오는 늑대 '로보'는 양들을 사냥할 때 가장 먼저 염소들부터 모조리 죽여 양들이 당황하여 흩어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편, 양들은 인간이 주기적으로 털을 깎아주지 않으면 털이 너무 길게 자라 더위를 견디지 못할 뿐만 아니라 털 무게에 스스로 눌려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의 보호가 없다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특성 때문에 양들에게는 목자의 돌봄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와 양을 우리의 삶과 연관 짓는다면 목자는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지도자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목자 중에는 착한 목자가 있지만 삯꾼 목자도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는 이 두 부류의 목자를 2가지 측면에서 구별하고 있습니다.
먼저 보호의 측면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데(11절) 비해 삯꾼은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12절)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만큼 양들을 사랑합니다. 때문에 양을 잡아먹으려고 온 늑대와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 양이 자기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12절). 삯꾼은 양들을 알지 못하고 양들을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품삯을 받고 잠시동안 남의 양들을 맡아서 돌보기 때문에 자기가 받는 보수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삯꾼에게는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관계의 측면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의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압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자기의 목자를 따릅니다. 그에 비해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늑대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면 늑대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버리게 되죠(12절). 이는 생명이 걸린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있느나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착한 목자의 비유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은 양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양들은 착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자를 따르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가 달라질 테니 말이죠.
하지만 착한 목자에게는 내 양이냐 남의 양이냐의 구분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는 양들을 구분하는 목자가 아닙니다. 심지어 누구의 양이든 상관하지 않고 양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그런 ‘착한 목자’입니다(17-18절).
에스겔서 34장 1-10절에 보면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목자들을 꾸짖고 내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목자들이 제 몸의 영달만 위해 양들을 돌보기는커녕 착취하고 못살게 굴었다는 것입니다(4절). 또 야수와 들짐승에게 잡혀먹도록 방치하였고, 흩어진 양떼를 찾아다니지도 않았다는 것(5, 8절)이죠. 이 때문에 야훼는 악한 목자를 내치고 직접 양떼를 찾아서 돌보겠노라고 선언합니다(겔 34:11-16).
예수 시대에도 상황은 같았습니다.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착한 목자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백성들이 그 율법을 잘 지키는지 살피는 목자라는 것이죠. 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양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착취하고, 못살게 구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로마에 충성하며 백성들을 그들의 먹잇감으로 내주었습니다.
이런 일은 에스겔 시대나, 예수 시대,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노자 17장에 보면 “태상(太上)은 하지유지(下知有之)하고, 기차(其次)는 친이예지(親而譽之)하고, 기차(其次)는 외지(畏之)하고, 기차(其次)는 모지(侮之)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최고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는 지도자고, 백성들이 가까이 여겨 받드는 지도자는 그 다음이다.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그 다음이며, 백성들이 경멸하는 지도자는 최하”라는 것입니다. 태상이 다스리는 세상은 태평성대(太平聖代)요, 생활은 넉넉하여 근심이 없으니 구태여 다스리는 자가 누군지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죠.
이 구절은 지도자를 백성(百姓), 지금 시대로 말하면 국민(國民)들의 입장에서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윤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일까요?
내친김에 노자 41장에 있는 한 구절을 더 봅시다. “상사(上士)는 문도(聞道)에 근이행지(勤而行之)하고, 중사(中士)는 문도(聞道)에 약존약망(若存若亡)하고, 하사(下士)는 문도(聞道)에 대소지(大笑之)하나니 부소(不笑)면 부족이위도(不足以爲道)라”는 말입니다. 이 뜻은 자질이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보통사람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웃으니 (그들이) 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공자는 이를 생지(生知), 학지(學知), 곤지(困知), 하우(下愚) 등 4단계로 나눕니다. 공자는 “나면서 저절로 아는 사람은 최상이요.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요, 막힘이 있으면서도 애써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니라. 그러나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하등한 사람이 된다”고 말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로 나누죠. 그런데 하근기 중생들은 외부의 요인에 농락당해서 자기를 찾을수 없는 인간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세상을 살필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이 본능대로 살아갑니다. 지장경에서 말하는 열 사람 가운데 지옥에 갈 아홉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4.10 총선에서 완패를 당한 대통령이 6일 만에 국무회의 모두발언 형식으로 총선 참패에 대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의 발언은 ‘국정 방향은 옳지만 국민이 체감할 변화는 미흡했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언론도 국민도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여당의 기록적 참패 원인은 ‘대통령’이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발언에는 오만과 불통에 대한 반성이 단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남은 3년을 기다릴 수 없는 이유로 충분합니다.
4월 16일부터 18일까지 한국갤럽이 대통령이 직무수행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긍정평가는 23%, 부정평가는 68%로 나왔습니다. 이는 한국갤럽 조사 기준, 윤 대통령 취임 후 긍정률 최저치, 부정률 최고치의 기록입니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부정평가 이유로 ▲경제·민생·물가(18%) ▲소통 미흡(17%) ▲독단적·일방적(10%) ▲의대 정원 확대(5%) ▲경험·자질 부족, 무능함(4%) ▲김건희 여사 문제(3%) ▲통합·협치 부족(3%) 등을 꼽았다고 합니다.
지난 금요일은 4·19혁명 64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윤 대통령은 4.19혁명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대통령실 참모들과 오전 8시에 몰래 따로 참배하였습니다. 총선 참패 후 첫 공식일정이었다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은 불통 대통령의 모습을 보인 것이죠.
이는 민심의 명령을 듣고도 크게 코웃음 치는 지도자의 모습이며,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는 하등한 사람, 자신을 돌아볼 수도 없는 하근기의 사람임을 만천하에 공포하고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삭꾼 목자를 버리고 착한 목자를 선택할 때가 되었습니다. 제22대 국회가 출범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민의를 따르는 길이고 훌륭한 지도자가 이 나라를 이끌어갈 기회를 마련하는 사명이 될 것입니다.
새 시대를 만들어 갈 모든 이들에게 부활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