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분리파
서양사에서 항상 중심부를 벗어나지 않았던 오스트리아였지만 미술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었다. 19세기의 빈에서는 전통적인 미술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반기를 든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비엔나’를 모토로 모였다.
1897년 초에 19명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루돌프 폰 알트와 35세의 젊은 클림트의 지도하에 “오스트리아 분리파 협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49명의 오스트리아 작가와 39명의 외국 작가들이 참여하는 분리파 첫 전시회를 열었다. 비난과 동조가 동시에 쏟아졌다. 6만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므로 첫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다.
1903년의 전시회에는 더 많은 진보주의 화가들이 참여하였다.
1905년에는 내부에 화풍을 두고, 자연주의 계통의 화가들은 다시 여기를 떠나갔다. 클림트를 중심으로 남은 18명의 화가들이 새로운 서클을 만들었다. 그러나 클림트를 제외한 다른 화가들은 새로운 미술 운동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다.
이로서 클림트가 자연스레 “빈 분리파”의 대표 화가가 되었다.
클림트(1862-1918)
빈 부근의 바움가르텐에서 귀금속 세공사인 아버지와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의 둘째인 클림트는 14세 때인 1876년에 빈의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수공예적인 심미성과, 장식성을 중요시하는 교육을 받았다. 이에 더하여 철저한 아카데미즘식의 교육도 받았다.
클림트의 특징이랄 수 있는, 그림의 소재로 인체를 선호하는 것과, 완벽한 해부학적 묘사. 고전적 모티브의 활용. 특유의 평면과 금박 장식, 다양한 패턴들은 이 학교에서 교육받은 결과였다.
1883년(21세)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동료 프란츠 미취와(1861-42),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공동 스튜디오를 열었다. 마침 건축 붐에 편성하여 인기를 얻었다. (미술 장식 프로젝트가 주사업이었다.) 또 명성도 남겼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미술가 협회가 미술의 국제 흐름을 외면하고 지역적이고, 폐쇄적인 미술에 몰입해있다고 생각하였다. 클림트는 1897년에 뜻을 같이 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서 ‘빈 분리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빈 분리파는 특수한 미술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모임이기보다는 권위적인 구세대에 도전하는 신세대 미술가들로서 서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외국의 미술 흐름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빈의 예술을 외국에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이들의 단체는 1차 대전 말까지 존속하였다. 이를 지도한 클림트는 자신이 이 운동을 통해서 세계적인 미술가로 성장하였다.
1894년 클림트와 미취는 교육부로부터 빈 대학의 철학, 법학, 의학부의 천정화를 의뢰받았다. 아르 누보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양식의 철학부 천정벽화의 스케치를 본 교수 87명이 격분하여 이 그림을 설치하여서는 안 된다는 청원서를 냈다.
우주의 심연 속에서 의식을 잃고 부유하는 힘과 공포를 그렸다. 사람은 성적 도취와 감정적 혼돈에 휩싸여 있는 듯 하였다. 그는 여성성을 세계를 압도하는 힘과 공포로 표현하였다.
* 에밀리
클림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어머니와 두 누이와 함께 살았다. 그는 바깥 생활에서는 사교적이고, 문란한 성 생활을 하면서 집에 와서는 성자처럼 행동하였다. 그러면서도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이유는 어릴 적 어머니와 고착 관계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와 같았던 생활을 하는 클림트에게 정신적인 여인, 구원의 여인으로 남았던 사람이 에밀리였다. 에밀리는 클림트의 동생인 에른스트 클림트의 부인의 여동생이었다. 클림트와 나이는 12살의 차이가 난다. 1892년에 에른스트가 갑자기 죽자 에른스트의 딸의 후견인이 되면서 에밀리와 가까워졌다.
에밀리는 미망인이 된 언니와 빈에서 패션 하우스를 열었다. 이 모드 매장은 대 성공을 거두면서 이들 자매는 빈의 사교계에 등장하였다. 에미리는 클림트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일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휴가 때는 가족 여행을 같이 떠나곤 하였다. 클림트가 죽을 때 유일하게 찾은 여인이 에밀리였고, 에밀 리가 옆에서 지켜주었다고 한다.
에밀리는 1951년에 죽었다. 죽을 때까지 다른 남자와 사귀지 않았다. 1983년에 에밀리의 가족은 에밀 리가 클림트와 주고 받은 400여 통의 편지를 공개하였다. 편지의 내용에 진한 애정이 담긴 것을 없었고, 거의 평범한 것들이었다고 하였다.
**미치
임신한 여인의 그림의 모델은 미치라고 하였다.
미치 짐머만은 꽤나 예쁜 여인으로서 클림트의 모델이라고 한다. 클림트의 아이를 둘이나 낳은 여인으로서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여인이라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클림트의 성적 대상이었고, 그뿐 아니고 마음으로도 깊은 애정 관계를 나눈 사이라고 하였다. 에밀리와 사이가 어머니와 같은 기대고 싶은 여인이었다면, 미치는 연인 내지 정부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1980년대에 미치의 아들(클림트의 큰 아들)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4통을 공개하였는데 진한 애정의 용어들이 많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였다.
미치는 클림트가 화실을 옮길 적마다 부근으로 이사를 가서 주변에 머물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찾은 여인은 에밀리였다. 좀 더 비극적인 일이라고 한다면 미치는 아예 불러주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주위의 증언에 의하면 아주 헌신적이었다고 하였다.
<희망1)은 미치가 두 번 째 임신하였을 때 그렸다. 그러나 둘째 아이가 돌이 되기 전에 죽자 해골, 어두운 색, ---, 죽음, 죽음, 비탄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바꾸었다고 하였.
***유디트
클림트의 그림에서 요부형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여성의 공포성을 표현한 것이다.
***키스
클림트가 에밀리와 자신을 모델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이미지로 표현한 그림이라는 해석을 한다. 왜냐면 스케치에 에밀리라는 이름이 낙서처럼 써 있다고 하였다.
클림트를 두고, 평면화된 그림과 차거운 리얼리즘을 결합시켰다고 말한다. 더구나 장식성이 아주 강한 채색과, 심지어는 금분을 심하게 바르기도 하였다.(공예학교의 기법이 아닌가.) 직선보다는 구불구불한 곡선을 많이 사용하였고, 그림에도 상징성을 많이 띈다고 한다.
여성은 에로스적인 요소로 표현하였다. 분리파에서는 여성을 에로스로부터 해방시켜 속되지 않는 모습의 에로스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여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평도 듣는다.
클림트 회화를 오늘에 와서는 조금 진부하다는 평도 듣는다. 그의 장식적인 인물화(평면화된)와 1903년 이후에 그린 모자이크 같은 풍경화, 뛰어난 소묘와 판화는 장식 미술사에 길이 남을 가치를 지녔다고 한다.
또 코코슈카, 에곤 쉴레와 같은 젊은 화가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친 것도 그의 공로로 꼽느다.
코코슈카(1886-1980)
오스트리아계 영국 화가로서 빈에서 1904-09년 사이에 미술공예학교를 다녔다. 클림트로부터 아르 누보 양식의 그림에 영향을 받았다.
1906년부터 정물화와 초상화를 그렸다. 내면의 심리적인 것을 표현하였다.
1910년에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의 그림은 환상성과 상징성을 띄고, 힘찬 표현을 하므로 독일 표현주의의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로 1938년까지 이 도시, 저 도시로 떠돌아 다녔다. 이때는 표현주의 방식의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1938년에는 나치가 퇴폐 미술로 비난하자 런던으로 피신하였다.
후기의 대표작으로는 신화를 주제로 하여 그린 ‘프로메테우스 이야기’ 3부작이 있다.
에곤 쉴레(1890-1918)
1890년 6월에 빈에서 40km쯤 떨어진 툴론 마을의 역장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철도 공무원을 하면서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집안이었다. 어릴 때는 유복했다고 한다.
15세 때 아버지가 죽었다.(매독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로 쉴레의 성격에 변화가 오면서 거칠어졌다. 어머니와 아주 많이 다투었다. 죽은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냉대 때문이라고 한다. 어머니도 친척에게 보낸 편지에 쉴레의 성격이 너무 거칠어서 두렵다고 할 정도였다. 쉴레는 누이 동생인 게르티와는 아주 각별하여 주변에서 이상한 시선으로 볼 정도였다고 한다.
1906년에 빈 미술공예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미술 교수의 권유로 미술아카데미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그는 소묘에 뛰어난 솜씨를 가져서 교수가 순수 미술을 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학교의 전통적인 수업 방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907년에 클림트를 만나서 미술의 재능에 대해서 칭찬을 듣고, 클림트를 스승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1909년까지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의 기본기를 3년 동안 배웠다. 이때 젊은 예술가들이 ‘신예술 그룹’을 조직하였다. 보수주의자인 미술 교수 그린펜케론은 쉴레를 두고 ‘ 사탄이 너를 나의 반에 토해 놓았다.’라고 하였다 할 정도였다.
1910년에 자신의 미술을 적극 후원해주는 미술 평론가 아더 뢰쓸러를 만났다.(그가 쉴레의 전기를 남겼다.) 조롱하는 여자, 여자 누드, 폴디 로진스키, 앉아있는 소녀 누드, 팔장 낀 여자, 등을 그렸다.
1911년에는 빈으로 돌아와서 클림트가 소개해준 모델 발리 노이질은 만나서 동거하였다. 노이질은 쉴레의 그림에 선전적인 모델로 자주 나온다. 쉴레는 동거의 댓가를 한 푼도 내지 않고, 마음대로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하는 최고의 모델이었다. 노이질도 쉴레에게 아주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둘은 어머니의 고향인 크루마우로 이사를 갔다. 21세의 화가와 17세의 모델이 살아가는 생활 모습이 보수적인 주민들에게는 음란하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다시 이사하였다.
1912년에는 어린 아이들을 모델로 누드 그림을 그렸다. 마을 주민들은 어린 소녀를 유괴하였다고 고발하여 유치장에서 21일 보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의 화실을 수색한 경찰은 쉴레의 그림을 음란한 프로노로 단정하고 모두 압수하였다. 유괴사건은 무죄로 끝났지만 음란물 제작으로 3일간을 정식으로 구류를 살았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 메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으므로 그는 오히려 더 유명인이 되어버렸다.
1913년에 빈에 새로운 거주지를 정하고, 돈많은 후원자도 만나고,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전시회도 열어서 성공을 거두었다.
1914년에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그는 마지막 연인이 된 에디트 하름스를 만난다. 1915년에는 동것하던 노이질과 헤어진다.(기록에 의하면 떠나 달라는 말 한 마디에 아무 대꾸도 않고 당장 짐을 꾸려서 떠났다고 하였다.)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을 올리자 4일 만에 군에 소집당하였다. 그림의 솜씨를 알아 본 연대장 때문에 그림도 그리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군 생활을 하였다고 하였다.
1917년에 노이질이 적십자사 간호사로 지원하여 병사를 돌보다가 병사하였다.
1918년은 전쟁이 끝나면서 지독한 독감이 유럽 대륙을 휩쓴다. 클림트도 쓰러졌다. 이해에 전시회를 연 쉴레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에디트 하름스가 이해 10월 27일에 역시 독감으로 숨졌다. 3일 후인 10월 31일에는 쉴레도 아내를 따라 독감으로 눈을 감았다.
** 그림 몇 점은 한국 미술사 방에 올리겠습니다.
첫댓글 네 고맙습니다. 공부를 하고 그림을 보면 훨씬 다르게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오스트리아에 여행을 가시면 서점에서나 화랑, 또는 여러 공간에서 수도 없이 만나는 화가가 클림트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거의 국민 화가가 되어 있습니다. 10 수 년 전에 미술 전문지인 월간미술에서 독자를 상대로 가장 선호하는 작가가 누구냐 라는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고호를 제치고 클림트가 1위를 차지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