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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사대 국어교육과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희락
[시모음-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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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가 바로 저긴데/이은상 고향집 설날/오정방 그해 설날의 전설/김영언 날마다 새날 새마음 되게 하소서/안희두 다시 새해의 기도/박화목 또 다시 새해는 오는가/이호우 새롭지 않은 새해의 시 1/이동순 새해/피천득 새해/구상
새해/문인수 새해엔 산 같은 마음으로/이해인 새해 두어 마디 말씀/고은 새해를 향하여/임영조 새해맞이/임종호 새해 새날은/오세영 새해 새아침은/신동엽 새해 아침/오일도 새해 아침/송수권 새해 아침/양현근 새해 아침/유자효 새해 아침에/김남조 새해 아침에/이해인 새해 아침의 기도/김남조 새해에/백석 새해에는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정진하 새해의 기도/이해인 새해의 노래/정인보 새해의 노래/김기림 새해의 노래/김규동 새해의 14행시/박희진 새해 인사/김현승 새해 첫 기적/반칠환 설날/윤극영 설날/오세영 설날 아침에/김종길 설날 아침에/김남주 설날 아침에/서지월 설날 아침에/홍해리 설일/김남조 용서하십시오/이해인 65년의 새해/김수영 첫마음/정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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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가 바로 저긴데
이은상(1903-1982)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 <자유문학> 1956년(1954년 송년시로 쓴 것)
고향집 설날
오정방
세상일 접어두고
고향집 찾아가서
설빔으로 차려입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웃음꽃
맛있는 음식
배가 절로 부르리
타관서 멍든 상처
고향가서 치료받고
그립던 일가친척
만난 곳이 낙원이라
덕담에
훈훈한 인정
해 지는 줄 모르리
▷ <현대시조> 2002년 2월호
그해 설날의 전설 - 한리포 전설 9
김영언
세월두 참, 그전 같으면 온 동리가 시끌벅적헐텐디 흰 두루마기 정갈허니 차려입고 집안 맨 웃어른 앞장서고 식솔들 내리 줄지어 해뜨기 전에 제일 먼첨 조상님네들 산소 갔다 오고 노인네들 계신 집마다 정초 문안 여쭙는 세배꾼들이며 집집이 돌며 덕담 나누는 술꾼들 무리 옥빛 남빛 곱살스레 바지저고리 차려입고 신작로마다 발자국들 왁자허니 줄 이을텐디 인젠 설두 설같지두 않구 그나저나 이놈의 동네가 어디 사람 사는 디 같어야지 육지대로 떠나 버린 빈집들만 여기저기 음산허고 그나마 남어있다는 건 죄다 꾸부정헌 늙은이들뿐이니 게다가 해마다 하나둘 세상 뜨다 보니 명절이라구 도회지 나간 자식새끼들 내려오는 집두 두서넛뿐이고 에이구 설두 이젠 다 옛날 얘기지 늙은이가 뒤주 위에 메 한술이라두 떠놓는 게 어디 여간 애성스런 일이어야지 세상두 참 요상허지 철두 제대루 모르는 예닐곱에 시집와서 이렇다 하게 부쳐먹지두 못 헐 오죽잖은 땅뙈기나마 후벼파고 철철이 산으로 갯기슭으로 기대질치며 극매느라 손톱 한번 제대로 자랄 틈 없이 허구헌날 고단허니 엄동설한 같은 시부모 모시고 온갖 시집 다 살면서두 그래두 하나 믿고 의지할 건 올망졸망한 저 자식새끼들뿐이라고 입은 거 벗어 내주고 입안에 든 것이라도 단것이면 뱉어 내 먹이며 길러 너희들만큼은 절대로 이 지긋지긋헌 세상 대물림하지 말고 남대두 좋은 세상 떵떵거리며 살아야 한다고 가슴팍 살점 도려내듯 도회지로 살림 내주었더니 이제 와서는 며느리 시집이라니 참말 거꾸로 흐르는 세월이여 한해를 통털어 고작 서너번 무슨 일 때나 잠깐 다녀가는 요샌 며느리가 며느리가 아니라 손님이라고는 허지만 애들 사는 도회지는 밤낮 무슨 일이 그리도 많은지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애기 아빠가 비상근무래요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머니 서운허긴 서운허긴 뭐 다 괜찮다 세월이 그런 걸 어쩌겠니 자식들마저 안 내려오니께 그 흔허던 술꾼 하나 언뜻도 않네 허긴 예전 같으면 보리 막걸리나마 밑바닥까지 닥닥 긁어내던 열 말은 실히 넘을 저 큰 술독 거미줄 친지 오래건만 아니 할아배는 왜 저기 전화기 옆에 꺼내논 새 한복 두루마기 안 입었어요 설에 입으라고 지난번에 올라갔을 때 큰애가 해준건데 새옷은 입어 뭐해 눈이나 좀 치울까 웬 눈은 이리도 많이 쌔이나 아 올 사람도 없는데눈은 치워 뭐 해요 그래두 혹 누가 오기라도 하면……
아무도 오지 않은 그해 설날
단단히 얼어붙은 신작로를 따라
마당 가득 전설 같은 함박눈이 내렸다
▷ 1992년 작
날마다 새날 새마음 되게 하소서
안희두(1957-)
새해 새날 새아침
학교 운동장에
둥근 해가 떠오른다
날이면 날마다
웃음이 뛰노는 운동장에
둥근 해 품에 앉고 달려오는
보람이와 나래 그리고 …
3월에 입학하는 눈꽃과 새봄이도
삼배하며 그려본다
올해는 마주칠 때마다
한 움큼 사랑을 주자
때마다
한 아름 꿈을 주자
헤어질 때마다
가슴 가득 희망을 심어주자
서해, 서산이 아니어도
아파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밉살스런 영수에게
앙증맞은 지혜에게
다 나누어주지 못한 사랑을, 꿈을, 희망을
첫 다짐을
낙조에 실어 보낸다
날마다 새날 새마음 되게 하소서
◁ <주간교육> 2007년 2월 8일 신년축시
다시 새해의 기도
박화목(1924-)
곤욕(困辱)과 아픔의 지난 한 해
그 나날들은 이제 다 지나가고
다시 새해 새날이 밝았다
동창(東窓)에 맑고 환한 저 햇살 함께
열려오는 이 해의 365일
지난밤에 서설(瑞雪) 수북히 내리어
미운 이 땅을 은혜처럼 깨끗이 덮어주듯
하나님, 이 해엘랑 미움이며
남을 업수히 여기는 못된 생각
교만한 마음 따위를 깡그리,
저 게네사렛의 돼지 사귀처럼
벼랑 밑으로 몰아내 떨어지게 하소서.
오직 사랑과 믿음 소망만을 간직하여
고달프나 우리 다시 걸어야할 길을
꿋꿋하게 천성(天城)을 향해 걸어가게 하소서.
이 해에는 정말 정말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난한 마음만이
이 땅에 가득하게 하소서, 하여
서로 외로운 손과 손을 마주 꼭 잡고
이 한 해를 은혜 속에 더불어 굳건히 살아가게 하소서.
동구 밖 저 둔덕 겨울 미루나무에
언제 날아왔을까, 들까치 한 마리
깟깟깟… 반가운 소식 전해오려나.
하그리 바라던 겨레의 소원,
이 해에는 정녕 이뤄지려나, 이 아침
밝아오는 맑은 햇살 가슴 뿌듯이 가득 안고
새해에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
꼭 이루어 주소서, 하나님
이루어 주소서
또다시 새해는 오는가
이호우(1912-1970)
빼앗겨 쫓기던 그날은 하그리 간절턴 이 땅
꿈에서도 입술이 뜨겁던 조국(祖國)의 이름이었다
얼마나 푸른 목숨들이 지기조차 했던가
강산이 돌아와 이십년 상잔(相殘)의 피만 비리고
그 원수는 차라리 풀어도 너와 난 멀어만 가는
아아 이 배리(背理)의 단층을 퍼덕이는 저 기빨.
날로 높는 주문(朱門)들의 밟고 선 밑바닥을
자유로 싸맨 기한(飢寒) 낙엽마냥 구르는데
상기도 지열(地熱)을 믿으며 씨를 뿌려 보자느뇨
또다시 새해는 온다고 닭들이 울었나 보네
해바라기 해바라기처럼 언제나 버릇된 다림
오히려 절망조차 못하는 눈물겨운 소망이여.
◁ 시조집 <휴화산>(중앙출판사, 1968)
새롭지 않은 새해의 시 1
이동순(1950-)
새해가 왔는가
미처 맞이할 겨를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길손처럼 새해는 와 버렸는가
어제 방구석에 쌓인 먼지도 그대로
내 서가의 해방기념 시집의 찢어진 표지
그 위를 번져 가는 곰팡도 아직 못 쓸고 있는데
새해는 불현듯 와 버렸는가
파헤쳐 놓은 수도공사도 끝내지 못했는데
태어나리라던 아기 예수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여지껏 나무에 대룽대룽 매달려
애잔한 잎들은 팔랑이는데
못다 쓴 원고뭉치는 그대로 밀려 있는데
미처 남쪽으로 떠나지 못한 새들도 있는데
불현듯 불현듯 새해는 왔는가
기다리던 첫눈도 나리지 않고
적적한 마당귀를 덮고 있는 김장독 이엉 사이로
시궁쥐만 분주히 쏘다니는데
새해는 왔는가
헛꿈을 잔뜩 안고 돌아와 저 혼자 설레이는
놈팡이처럼 새해는 왔는가 와서 무얼 하려는가
모듬판에서 돌아오는 밤
이미 자정을 넘겨 볼에 스미는 찬 기운
텅 빈 호주머니와 마음속으로
아무거나 새것이라면 마구 채워야 하는 걸까
해마다 와서 속절없이 가버리는 것이
새해일까 나라는 깨어지고 깨진 틈서리는
서로 붙을 생각조차 품지 않는데
보리싹 파릇파릇 움 틔우는 저 들판이
후루룩 겨울참새를 허공에 뿌리는 그 속마음은 무엇일까
▷ 시집 <물의 노래>(실천문학, 1983)
새 해
피천득(1910-2007)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새 해
구상(1919-2004)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율조(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은
이성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심호흡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충직과 일치하여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는 나의 일과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생애,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새 해
문인수(1945-)
저 해가 새것이다.
하늘에 떠오른 저 해가 완전히 새것이다.
새로 산 옷이나 가구, 새로 꾸민 거실 따위가 아니라 저
낯 뜨거운 해ㅅ덩어리가 바로 새것이다. 싱싱한 느낌으로 사람들은
이른 아침 활짝 창을 열거나 어디
산꼭대기며 바닷가로 몰려가 힘껏 환호하며
가린 것 없는 어린 불의 불멸,
새해를 두 팔 벌려 맞아들이는 것이겠다.
해가 뜨는 것은 일상 자연현상이요, 새해란 인간문명이 정해놓은 한낱 표시일 뿐
그 무엇이 달라질 것이며 새것이겠느냐만, 새해!
단층 옥상에서 봐도 확실히 더 붉은 것 같다. 어둠은 분명 눈앞에서 사라지고,
새해! 늑골 아래 한구석
빗장 따는 깨끗한 소리가 난다. 새해! ‘燒紙效果’가 있다. 용서라는 말, 사랑이라는 말,
희망이라는 말의
일출이여.
새로 떠올리는 밝은 마음, 만면 개벽인
저 해가 새것이다.
▷ 시집 <쉬!>(문학동네, 2006)
새해엔 산 같은 마음으로
이해인(1945-)
언제 보아도 새롭게 살아 오는
고향 산의 얼굴을 대하듯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또 한 번의 새해
새해엔 우리 모두
산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하리
산처럼 깊고 어질게
서로를 품어 주고 용서하며
집집마다 거리마다
사랑과 평화의 나무들을 무성하게 키우는
또 하나의 산이 되어야 하리
분단의 비극으로
정든 산천, 가족과도 헤어져 사는
우리의 상처받은 그리움마저
산처럼 묵묵히 참고 견디어 내며
희망이란 큰 바위를 치솟게 해야 하리
어제의 한과 슬픔을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내며
우리도 산처럼 의연하게
우뚝 서 있어야 하리
우리네 가슴에 쾅쾅 못질을 하는
폭력, 전쟁, 살인, 미움, 원망, 불신이여 물러가라
삶의 흰 빛을 더럽히는
분노, 질투, 탐욕, 교만, 허영, 이기심이여 사라져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디선가 흰 새 한 마리 날아와
새해 인사를 건넬 것만 같은 아침
찬란한 태양빛에 마음을 적시며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하리
남을 나무라기 전에
자신의 잘못부터 살펴보고
이것 저것 불평하기 전에
고마운 것부터 헤아려 보고
사랑에 대해 쉽게 말하기보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날마다 새롭게 깨어 있어야 하리
그리하여 잃었던 신뢰를 되찾은 우리
삼백 예순 다섯 날 매일을
축제의 기쁨으로 꽃피워야 하리
색동의 설빔을 차려 입은 어린이처럼
티없이 순한 눈빛으로
이웃의 복을 빌어 주는 새해 아침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대하듯
언제 보아도 새롭고 정다운
고향 산을 바라보며 맞이하는 또 한 번의 새해
새해엔 우리 모두
산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하리
언제나 서로를 마주 보며
변함없이 사랑하고 인내하는
또 하나의 산이 되어야 하리
▷ 시집 <시간의 얼굴>
새해 두어 마디 말씀
고은(1933-)
새해 왔다고 지난날보다
껑충껑충 뛰어
단오날 열일곱짜리 풋가슴 널뛰기로
하루 아침에
찬란한 세상에 닿기야 하리오?
새해도 여느 여느 새해인지라
궂은 일 못된 일 거푸 있을 터이고
때로 그런 것들을
칼로 베이듯 잘라버리는
해와 같은 웃음소리 있을 터이니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쥔 양반과 다툴 때 조금만 다투고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눈을 부릅떠서
지지리 못난 사내 짓 고쳐 주시압.
에끼 못난 것! 철썩 불기라도 때리시압.
그뿐 아니라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우리 집만 문 잠그고 으리으리 살 게 아니라
더러는 지나가는 이나 이웃이나
잘 안 되는 듯하면
뭐 크게 떠벌릴 건 없고
그냥 수숫대 수수하게 도우며 살 일이야요.
안 그래요? 우리 아낙네들이시여
예로부터 변하는 것 많아도
그 가운데 안 변하는 심지 하나 들어 있어서
그 슬기 심지로 우리 아낙네들 크낙한 사랑이나 훤히 밝아지이다.
마침내 우리 세상 훤히 훤히 밝아지이다.
새해를 향하여
임영조(1945-)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
소학교 운동회날 억지로
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
이번만은 기필코……
인생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몇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재수인가? 삼수인가?
아니면 영원한 미지수인가?
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
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
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
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처럼
근하 신년! 해피 뉴 이어!
새해맞이
임종호
어제도 떠올랐던 그
태양이 오늘 또 떠올랐는데
우리는 새해라 부르네
어제다 오늘이다 언제는 없었던가
그런데도 어제를 작년이라 부르고
오늘은 새해 새날이라 부르네
얼마나 자기 격려가 필요한 인생인가
작은 나 하나만이 아니고
모두 한통속으로 오늘을
새날이라, 새날이라 부르네
아, 혼돈의 세상이여
정의와 평화여 오라
하늘 천사의 날개 타고
가득 소원을 안은 내안에
우리 가정에, 우리 일터에,
우리 마을에, 교회와 나라와
온 세계에
새해 새날은
오세영(1942-)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눈송이를 털고
침묵으로 일어나 햇빛 앞에 선 나무,
나무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긴 동면의 부리를 털고
그 완전한 정지 속에서 날개를 펴는 새
새들은 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해 새날이 오는 길목에서
아득히 들리는 함성
그것은 빛과 빛이 부딪혀 내는 소리
고요가 만들어 내는 가장 큰 소리
가슴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
얼어붙은 계곡에
실낱같은 물이 흐르고
숲은 일제히 빛을 향해
나뭇잎을 곧추 세운다
새해 새 아침은
신동엽(1930-1969)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 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 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와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짓는다.
◁ <주간경향> 1959년
새해 아침
오일도(1901-1946)
한겨울 앓던 이 몸
새해라 산에 오르니
새해라 그러온지 햇살도 따스고나
마른 가지에 곧 꽃도 필 듯하네.
멀리 있는 동무가 그리워요
이 몸에 병이 낫고
이 산이 꽃 피거든
날마다 이 산에 올라
파―란 하늘이나 치어다볼까.
―구(舊) 정월(正月) 초하루 아침 계산(桂山)에 올라서
▷ <동광> 1932년
새해 아침
송수권(1940-)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지난밤 제야의 종소리에 묻어둔 꿈도
아직 소원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외로웠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억울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슬펐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얼마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위에 우레와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그 위에 침묵과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
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
두 줄로 금긋듯
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
새해 아침은
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
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아놓으십시오
새해 아침은
첫날밤 시집온 신부가 아침나절에는
저 혼자서도 말문이 터져 콧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새해 아침
유자효(1947-)
해가 바뀐다는 것은
껍질을 한 꺼풀 벗는 일이다.
사위어드는 아픔 속에서
목숨을 태우는 양초의 심지가
또다시 한 매듭 줄었다는 얘기다.
종교에서
현실로 돌아설 때
경험하는 추락.
그 빈도를 줄이기 위해
몸부림치며
이제는 좀 더 분명히
똑똑히 보고 싶다고
기도를 한다.
나의 얘기가 아닌
우리들의 얘기를 하고 싶다고
기도를 한다.
새해 아침
양현근
눈 부셔라
저 아침
새벽길을 내쳐 달려와
세세년년의 산과 들,
깊은 골짝을 돌고 돌아
넉넉한 강물로 일어서거니
푸른 가슴을 풀고 있거니
이슬, 꽃, 바람, 새
온통 그리운 것들 사이로
이 아침이 넘쳐나거니
남은 날들의 사랑으로
오래 눈부시거니
새해 아침에
김남조(1927-)
이 깨끗한 아침
두렵고 허전한 마음이
눈을 맞는 나무처럼 생각에 잠긴다
바람에 불려
먼 곳으로 가버린 꽃의 씨앗들
꼭 그처럼
내가 흩어버린 것들이여
뉘우침도 불도
말 없는 말도
안녕
더럽혀지지 않은
돌기둥 하나
크고 거룩하게 남으니
이는 내 믿음이요
다시 소망이니라
날이 날마다
내가 잠들 때 가장 마지막까지
내가 깨어날 때 맨 먼저
함께 있어 주는 눈매
쓸쓸하나
아름다운 음악
이는 내 영광이요
다시 곧
사랑이니라
이 간절한
새해 첫새벽
기도를 올리는 나무처럼 내가 있다
소중한 사람이여
그대 큰 기쁨 누리시면
나도 기쁘리라
어여쁜 아기
너에게 큰 기쁨 있으면
나도 기쁘리라
◁ <김남조시전집>(서문당, 1983)
새해 아침에
이해인(1945-)
창문을 열고
밤새 내린 흰 눈을 바라볼 때의
그 순결한 설레임으로
사랑아
새해 아침에도
나는 제일 먼저
네가 보고 싶다
늘 함께 있으면서도
새로이 샘솟는 그리움으로
네가 보고 싶다
새해에도 너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나고
가장 정직한 시를 쓰고
가장 뜨거운 기도를 바치겠다
내가 어둠이어도
빛으로 오는 사랑아
말은 필요 없어
내 손목을 잡고 가는 눈부신 사랑아
겨울에도 돋아나는
내 가슴 속 푸른 잔디 위에
노란 민들레 한 송이로
네가 앉아 웃고 있다
날마다 나의 깊은 잠을
꿈으로 깨우는 아름다운 사랑아
세상에 너 없이는
희망도 없다
새해도 없다
내 영혼 나비처럼
네 안에서 접힐 때
나의 새해는 비로소
색동의 설빔을 차려 입는다
내 묵은 날들의 슬픔도
새 연두 저고리에
자줏빛 끝동을 단다
아름다운 사랑아
새해 아침의 기도
김남조(1927-)
첫 눈뜸에
눈 내리는 청산을 보게 하소서
초록 소나무들의
청솔바람 소리를 듣게 하소서
아득한 날에
예비하여 가꾸신
은총의 누리
다시금 눈부신 상속으로 주시옵고
젊디젊은 심장으로
시대의 주인으로
사명의 주춧돌을 짐지게 하소서
첫 눈뜸에
진정한 친구를 알아보고
서로의 속사랑에
기름 부어 포옹하게 하여 주소서
생명의 생명인
우리네 영혼 안엔
사철 자라나는
과일나무 숲이 무성케 하시고
제일로 단맛나는 열매를
날이 날마다
주님의 음식상에
바치게 하옵소서
새해에
이용악(1914-1971)
이가 시리다
이가 시리다
두 발 모두어
서 있는 이 자리가 이대로
나의 조국이거든
설이사 와도 그만 가도 그만인
헐벗은 이 사람들이 이대로
나의 형제거든
말하라 세월이어
이제
그대의 말을 똑바로 하라
▷ 이용악전집 <낡은 집>(미래사, 1991)
새해에는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정진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살아라.
간절한 소원을 밤마다 외쳐라.
지치면 지칠수록 더 크게 외쳐라.
더 큰 용기와 더 큰 꿈을 가져라.
가야될 인연의 길이 엇갈렸다면
후회 말고 돌아서라.
꼭 그 길이 아니라도
성공으로 가는 길은 많다.
내 인연과 너의 인연이 평행선을 그으며 달려가지만
결국은 우리도 종점에서 텅빈 손으로 다시 만나리.
너무 많은 꿈을 가지고 덤비지 마라.
세상은 전쟁터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터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더 따뜻한 사람이 되라.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더 넓은 가슴으로
이 세상을 품어라.
새해에는 지난날들의 악습을 버려라.
오늘 하지 못한다면 내일도 하지 못하는 법
오늘 조금이나마 전진했다면
일년 후 십년 후에는 꼭 성공하리니
조급함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유로워라.
네 인생의 마지막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애써 설명하지 마라.
세월이 가면 모든 게 환하게 드러나는 법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에 집념하라.
날마다 좋은 날이 되게 애써라.
궂은 날일수록 더 간절한 기도를 올려라.
날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새해에는 심호흡을 크게 하라.
새해의 기도
이해인(1945-)
1월에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그동안 쌓인 추한 마음 모두 덮어 버리고
이제는 하얀 눈처럼 깨끗하게 하소서.
2월에는
내 마음에 꿈이 싹트게 하소서
하얀 백지에 내 아름다운 꿈이
또렷이 그려지게 하소서.
3월에는
내 마음에 믿음이 찾아오게 하소서.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가짐으로
삶에 대한 기쁨과 확신이 있게 하소서.
4월에는
내 마음이 성실의 의미를 알게 하소서.
작은 일 작은 한 시간이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기회임을 알게 하소서.
5월에는
내 마음이 사랑으로 설레게 하소서.
우리 삶의 아름다움은 사랑 안에 있음을 알고
사랑으로 가슴이 물들게 하소서.
6월에는
내 마음이 겸손하게 하소서
남을 귀히 여기고 자랑과 교만에서
내 마음이 멀어지게 하소서.
7월에는
내 마음이 인내의 가치를 알게 하소서.
어려움을 참고 오랜 기다림이 없는 열매는
좋은 열매가 아님을 알게 하소서.
8월에는
내 마음에 쉼을 주시옵소서
건강을 지키고 나와 남을 여유있게 볼 수 있는
쉼을 갖는 시간을 갖게 하소서.
9월에는
내 마음이 평화를 느끼게 하소서.
마음의 평화는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숙할 때 함께 자라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10월에는
내 마음이 은혜를 알게 하소서.
나의 오늘이 있게 한 모든 이들의 은혜가
하나하나 생각나게 하소서.
11월에는
내 마음이 욕심을 버리게 하소서.
아직도 남아 있는 욕심과 미움과 갈등을 버리고
빈 마음을 바라보면서 만족하게 하소서.
12월에는
내 마음에 감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계획한 일을 이루었던 이루지 못했던
지난 한 해의 모든 것을 감사하게 하소서.
새해의 노래
정인보(1893-1950)
온 겨레 정성덩이 해돼 오르니
올 설날 이 아침야 더 찬란하다
뉘라서 겨울더러 춥다더냐
오는 봄만 맞으려 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
깃발에 바람 세니 하늘 뜻이다
따르자 옳은 길로 물에나 불에
뉘라서 겨울더러 흐른다더냐
한이 없는 우리 할 일은 맘껏 펼쳐 보리라.
새해의 노래
김기림(1908-?)
역사의 복수 아직 끝나지 않았음인가
먼 데서 가까운 데서 민족과 민족의 아우성 소리
어둔 밤 파도 앓는 소린가 별 무수히 무너짐인가?
높은 구름 사이에 애써 마음을 붙여 살리라 한들
저자에 사무치는 저 웅어림 닿지 않을까 보냐?
아름다운 꿈 지님은 언제고 무거운 짐이리라.
아름다운 꿈 버리지 못함은 분명 형벌보다 아픈 슬픔이리라.
이스라엘 헤매이던 2천년 꿈 속의 고향
시온은 오늘 돌아드는 발자국 소리로 소연코나.
꿈엔들 잊었으랴? 우리들의 시온도 통일과 자주와 민주 위에 세울 빛나는 조국.
우리들 낙엽지는 한두 살쯤이야 휴지통에 던지는 꾸겨진 조각일 따름
사랑하는 나라의 테두리 새 연륜으로 한 겹 굳어지라.
새해와 희망은 몸부림치는 민족에게 주자.
새해와 자유와 행복은 괴로운 민족끼리 나누어 가지자.
▷ 시집 <새노래>(아문각, 1948)
새해의 노래
김규동(1925-)
새해에는
우리네 가슴에
푸른 강물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백두산 지리산에 내리는 함박눈이
온 천지에 펑펑 쏟아져
집과 길을 파묻기도 하고
새와 짐승과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지친 우리 걸음걸이도
새 힘이 솟게 하세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동강난 강토에 새봄이 오니
우리 마음 어찌 무심하랴
남녘에도 북녘에도
통일의 노래 애타게 울려퍼지니
우리의 바람 하늘에 닿으리
억울한 분단의 세월 너무 길었나니
흩어진 형제들 만나봐야지
끊어진 다리 잇고 막힌 길 새로 헤쳐
그리운 님들 다시 찾아봐야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넘어가 보세
하늘과 땅 사이
슬픔과 미련 사이
노여움과 원한 사이
그 모든 어둠과 설움 위에
화해와 해방의 빛 굽이치나니
이 고개 넘으면
좋은 세상 만나본다네
까치 까치 설날은 우리의 설날
둘 아니고 하나인 해님
산 넘어 물 건너
희망의 새날 맞아 어서 나가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넘어나가세.
▷ 시선집 <길은 멀어도>(미래사, 1991)
새해의 14행시
박희진(1931-)
새해엔 나도 장가를 들꺼나.
새 마음 새 몸으로 새롭게 살기 위해
지난해 그믐밤엔 목욕을 하였거니
새봄엔 나도 장가를 들꺼나.
거멓게 익은 머루의 눈동자와
눈처럼 흰 속살의 각시하고
꾸미는 신방은 나날이 감미로운 꿈으로 차리
부푸는 연꽃 봉오리 속인 양.
너무도 오랫동안 혼자서 살아왔다
삽살개 뒷다리의 궁상을 몰아내자
비참을 불사르자, 시를 쓰더라도
이젠 정말 행복한 시만을 쓸 일이다
눈보다 희고 빛나는 시를. 읊는 이마다
피가 맑아지고 어금니에 향기가 일게 되는.
◁ 시집 <꿈꾸는 빛바다>(고려원, 1986)
새해 인사
김현승(1913-1975)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굴러라.
건너 뛰듯
건너 뛰듯
오늘과 또 내일 사이를 뛰어라.
새옷 입고
아니, 헌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굴러라 발굴러라.
춤추어라 춤추어라.
◁ <김현승 시전집>(관동출판사, 1974)
새해 첫 기적
반칠환(1963-)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설 날
윤극영(1903-1996)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받기 좋아하셔요.
우리 집 뒤뜰에는 널을 놓고서
상 들이고 잣 까고 호두 까면서
언니하고 정답게 널을 뛰고
나는 나는 좋아요 참말 좋아요.
무서웠던 아버지 순해지시고
우지 우지 내 동생 울지 않아요.
이 집 저 집 윷놀이 널뛰는 소리
나는 나는 설날이 참말 좋아요.
◁ <어린이> 1924년 1월호
설날
오세영(1942-)
새해 첫날은
빈 노트의 안 표지 같은 것
쓸 말은 많아도
아까워 소중히 접어 둔
여백이다.
가장 순결한 한 음절의 모국어를 기다리며
홀로 견디는 그의 고독
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
새해 첫날 새벽
창을 열고 밖을 보아라.
눈에 덮혀 하이얀 산과 들
그리고 물상들의 눈부신
고요는
신(神)의 비어 있는 화폭 같지 않은가.
아직 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길에
문득 모국어로 우짖는
까치 한 마리.
▷ 시집 <사랑의 저쪽>(미학사, 1990)
설날 아침에
김종길(1926-)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 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설날 아침에
김남주(1946-1994)
눈이 내린다 싸락눈
소록소록 밤새도록 내린다
뿌리뽑혀 이제는
바싹 마른 댓잎 위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린다
더러는 마른자리 골라 눈은
떡가루처럼 하얗게 쌓이기도 하고
닭이 울고 날이 새고
설날 아침이다
새해 새아침 아침이라 그런지
까치도 한두 마리 잊지 않고 찾아와
대추나무 위에서 운다
까치야 까치야 뭣하러 왔냐
때때옷도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
좋은 소식 가지고 왔거들랑 까치야
돈이며 명예 같은 것은
그런 것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죄다 주고
나이 마흔에 시집올 처녀를 구하지 못하는
우리 아우 덕종이한테는
행여 주눅이 들지 않도록
사랑의 노래나 하나 남겨두고 가렴
▷ 시집 <사상의 거처>(창작과비평사, 1991)
설날 아침에
서지월(1955-)
얼음 꽁꽁 언
시냇가 논둑에서 연날리던 시절
가고 없어도
새배하러 새벽부터 일어나
아버지 어머니께 절 올리던
대청 마루바닥
얼음장 같이 발 시리긴 해도
그때 그날들이 그리운 것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 알겠네
장롱에서 몇 번씩이나 꺼내 입어보던
때때옷과
설 전날밤 자면 눈썹이
흰눈 내린 먼 산처럼 허옇게 센다는
어른들의 말씀 감쪽같이 속았어도
신기하기만 하던 그때 그 시절,
되돌릴 순 없어도
생각하면 명경처럼 늘 맑고 환하게
비쳐오는 어린날의 아버지 어머니
잊을 수가 없네
지금은 먼 산자락
차거운 흙 속에 계시고
아이들이 줄줄이 아빠 엄마 하며 따라도
다가오는 세상은 더 무섭기만 하고
매냥 눈내리는 설날이 와도
자식보다 이승 뜨신 부모님생각에 더욱
눈시울이 뜨거워 옴을 나는 알겠네
▷ 시조집 <가난한 꽃>(전망, 1993)
설날 아침에
홍해리(1942-)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잤더니
눈썹이 하이얗게 세어 버렸네
창 밖엔 흰눈이 세상을 덮고
새소리 바람소리도 얼어붙었네.
▷ 시집 <투명한 슬픔>(작가정신, 1996)
설일(雪日)
김남조(1927-)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용서하십시오
이해인(1945-)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차분히 심호흡을 하는 오늘
해 아래 살아 있는 기쁨을 감사드리며
우리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밤새 뉘우침의 눈물로 빚어낸 하얀 평화가
새해 아침을 더욱 아름답게 해 주십시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부끄러운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함으로 죄를 짓고도
참회하지 않았음을 용서하십시오
나라와 겨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나라와 겨레가 있는 고마움을
소중한 축복으로 헤아리기보다는
비난과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했으며
큰일이 일어나 힘들 때마다 기도하기보다는
“형편없는 나라”, “형편없는 국민”이라고
습관적으로 푸념하며 스스로 비하시켰음을 용서하십시오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사랑으로 다하지 못하고 소홀히 했습니다
바쁜 것을 핑계 삼아 가까운 이들에게도
이기적이고 무관심하게 행동했으며
시간을 내어주는 일엔 늘 인색했습니다
깊은 대화가 필요할 때조차
겉도는 말로 지나친 적이 많았고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말로 상처를 입히고도
용서 청하지 않는 무례함을 거듭했습니다
연로한 이들에 대한 존경이 부족했고
젊은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병약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부족했음을 용서하십시오
자신의 존재와 일에 대해
정성과 애정을 쏟아붓지 못했습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공허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일상생활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고집, 열등감, 우울함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
남에게 부담을 준 적이 많았습니다
맡은 일에 책임과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성급한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곤 했습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깨어 있지 못한 실수로 인해
많은 이에게 피해를 주고도 사과하기보다는
비겁한 변명에만 급급했음을 용서하십시오
잘못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이가 아니 되도록
오늘도 우리를 조용히 흔들어 주십시오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이들에게
첫눈처럼 새하얀 축복을 주십시오
이제 우리도 다시 시작하고
다시 기뻐하고 싶습니다
희망에 물든 새 옷을 겸허히 차려 입고
우리 모두 새해의 문으로 웃으며 들어서는
희망의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65년의 새해
김수영(1921-1968)
그때 너는 한살이었다
그때 너는 한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奇蹟)이었다
그때 너는 여섯살이었다
그때 너는 여섯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奇蹟)이었다
그때 너는 열여섯살이었다
그때 너는 열여섯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너의 의지(意志)는 싹트기 시작했다
너의 의지(意志)는
학교 안에서 배운 모든 것이
학교 밖에서 본 모든 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의사를 발표할 줄 알았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너는 열일곱살이었다
그때 너는 열일곱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
너의 근육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너의 근육은
학교 밖에서 얻어맞은 모든 것이
골목길에서 얻어맞은 모든 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란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행동은
어린 상징을 면하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우리 키만큼 되었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는 이제 열아홉살이었다
너는 이제 열아홉살이었다
너는 여전히 기적이었다
너의 회의(懷疑)는 굳어가기 시작했다
너의 회의(懷疑)는
나라 안에서 당한 모든 것이
나라 밖에서 당한 모든 것이
반드시 정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의 어린 포부는
불가능의 한계를 두드려보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우리 키보다 더 커졌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는 이제 스무살이다
너는 이제 스무살이다
너는 여전히 기적일 것이다
너의 사랑은 익어가기 시작한다
너의 사랑은
삼팔선 안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
삼팔선 밖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
전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너는 너의 힘을 다해서 답쌔버릴 것이다
너의 가난을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가난을
이 엄청난 어려움을 고통을
이 몸을 찢는 부자유를 부자유를 나날을……
너는 이제 우리의 고통보다도 더 커졌다
우리는 너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니 네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다
네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다
육오(六五)년의 새 얼굴을 보고
육오(六五)년의 새해를 보고
◁ <김수영 전집>(민음사, 1981)
첫마음
정채봉(1946-2001)
1월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어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