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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8월 말이다. 스물두 살의 청년은 늑막염이었다. 청년은 유산을 틀어쥐고 앉은 고향의 형에게 치료비와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그때 청년은 둘째 누나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형은 고향에서 술과 난봉질로 가산을 탕진하고 있으면서도 병석의 동생이 보낸 구조 요청을 외면했다. 겨우 몇 푼 보내주는 시늉을 하고서는 입을 씻은 것이다. 둘째 누나와 동거하고 있던 정 씨(鄭氏)가 청년에게 형님이 재산을 탕진해버리기 전에 재산분할을 정식으로 청구하라고 옆에서 부추겼다. 거기다 잘 안다는 법률사무소까지 소개했다.
“아무 때 분가해도 할 것이구, 이젠 자네도 어린애가 아니니……”
“어 참 잘난 양반을 몰라 뵙고 나 같은 놈이 공연히 그랬습니다.” 고향에 내려온 청년을 보고는 형은 빈정거렸다. 술이 몇 잔 들어간 뒤엔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하고 드잡이를 했다. 그리고는 숯불이 타오르는 화로를 방바닥에 내던져 엎어버렸다. 어떻게든 형의 마음을 바로잡아 보려던 청년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청년은 서울로 다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돈 때문에 형제의 의가 돌이킬 수 없이 깨져버린 것이다.
이 청년이 바로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1908.1.11~1937.3.29)이다. 김유정은 스물아홉 짧은 생애 동안 소설 30편, 수필 12편, 편지·일기 6편, 번역소설 2편을 남긴 작가다. 1996년까지 김유정 문학에 대한 연구 논문이 무려 360편에 이르는데, 이렇게 쏟아지는 연구 논문은 그의 문학사적 위치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단적인 보기다. 1935년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의 신춘문예 공모에 각각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온 김유정은 등단하자마자 ‘금 따는 콩밭’, ‘떡’, ‘만무방’, ‘봄봄’ 같은 걸작 단편을 잇달아 내놓아 다시 한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일본강점기 때의 행정지명으로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실레 마을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심 씨 사이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무렵 나라 곳곳에서는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에 의한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맞서 의병 부대가 들고 일어난다. 김유정이 살던 실레 마을도 국적토벌(國賊討伐), 국모보수(國母報讐), 배양척외(排洋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서울로 진격하는 춘천 의병진의 후방기지가 있던 곳이다. 의병들은 일제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소작농, 유랑민, 노동자, 실업자들이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에 의병들과 맹꽁이, 만무방, 들병이, 금장이, 거지들의 모습은 뒷날 김유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하고 생생한 하층 계급 인물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김유정 일가가 현금과 토지 일부를 정리해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1백여 칸짜리 살림집으로 이사 한 게 1913년이다. 그런데 이사할 무렵부터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갖은 약을 다 써도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숨을 거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김유정은 고아가 되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형 유근은 운니동의 집을 처분하고 관철동으로 이사했다. 어린 유정은 저녁마다 근처의 우미관에서 들려오는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곤 했다. 유근은 선대에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주색잡기로 탕진하는 데 바빠 어린 동생의 허전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유정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의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곤 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휘문고보 시절, 그는 친구인 안회남에게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내 어머님은 미인이다!” 하고 자랑을 하기도 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남다른 그리움은 연희전문 시절까지 이어져 연상의 여인에 대한 짝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휘문고보를 나와 1929년 연희전문학교에 갓 들어간 김유정은 명월관 기생이자 남도창을 하는 박록주(박녹주)에게 막무가내로 연애편지를 보냈다. 비누와 수건을 손에 들고 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록주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그는 검은 휘장으로 들창을 가린 어두운 방에서 날마다 한 통씩 편지를 써서 부쳤다. 유정이 기거하던 방안은 늘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그러나 박록주는 연하의 김유정을 얕잡아본 것인지 그가 보낸 편지를 읽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편지 공세가 그치지 않자 하루는 박록주가 가정부를 시켜 김유정을 불렀다.
“당신이 김유정이오?” “그렇습니다.” “어쩌려고 나에게 그런 편지를 했소.” “어쩌려고 라니 무슨 말이오. 편지를 받아보지 않았소?”
훤칠한 키에 잘생긴 김유정은 스스럼없이 응수했다. 그는 사랑하고 나서 어쩔 생각이냐는 박록주의 물음에 “결혼하는 겁니다.” 하고 대꾸한다. 박록주가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쫓겨나다시피 박록주의 집에서 물러나온 김유정은 좀처럼 포기를 하지 않고, 노골적인 협박과 호소로 범벅된 편지를 다시 쓴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하는 거요. 보료 위에 버티고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혈서로 된 이런 편지를 받고 박록주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외출도 되도록 삼가고 더러 밖에 나갈 때는 휘장을 내린 인력거를 타고 남바위를 얼굴까지 푹 내려써서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연희전문 학생과 기생 박록주 사이의 염문은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나 혈서도, 애원도, 협박도 효과가 없어 유정의 짝사랑은 무참히 밟히고 만다. 노동자를 상대로 싸구려 밥장사를 하는 둘째 누님 집으로 그의 유일한 친구인 안회남이 찾아오면 장기를 두거나 속이 출출하면 누님이 윗목에다 차려놓고 간 밥상에서 둘이 함께 먹기도 했다.
“필승(안회남의 본명)아, 너 물 좀 떠와.” 밥을 먹고 난 뒤 김유정은 안회남에게 물심부름을 시켰다. “요거 어린애가 왜 이래?” 안회남이 거절하면 김유정은 단박에 슬픈 표정이 되었다. “내가 몸이 아파 그래. 가슴이 뜨끔뜨끔해.” 하면서 손으로 가슴 부위를 어루만졌다. “가슴이 괜히 아프냐? 이불도 개키고 창문도 열고 그러렴. 그리고 물도 네가 직접 떠다 먹구.” 유정이나 친구나 다 불우했던 시절이다. 제 불행을 과장하고 싶어 하고 불행이 깊을수록 존경을 받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던 치기어린 시절이었다. 왼쪽부터 김유정, 둘째 누님, 조카(24세이던 1931년에 찍은 사진) <제공: 김유정기념사업회>
그러나 그때 이미 김유정의 병은 속으로 깊어갔다. 그는 때가 조르르 흐르는 남루를 입고 안회남을 찾아와서는 어느 병원에 갔다가 옷이 더러워서 간호사에게 푸대접을 받았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한편 유정은 집에서는 둘째 누님의 학대와 수모를 고스란히 견뎌야만 했다. 광업소에 나간다고 속이고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정 씨는 누님에게 걸핏하면 손을 댔다. 누님은 그 화풀이를 집안에서 빈둥거리는 유정에게 했던 것이다. “너 취직이라도 좀 해라. 네 누나가 고생하는 게 네 눈엔 안 뵈니?” 유정은 누님도 밥장사하느라 심신이 고달팠으리라 생각을 하며 구박을 견뎌냈다. 연애도 실패했다. 사업도 실패했다. 인생살이가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몇 편의 소설을 써냈지만 그것으론 약값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나날이 암담했다. 유정은 폐지 위에 “운명! 나를 꽉 누르고 어떻게 할 수 없게 하는 그 그림자!”라는 글 따위를 끼적이며 탄식을 했다. 그는 혜화동의 누님 집을 나와 도서관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운명이 치질과 폐병을 안은 그의 몸을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그는 더욱 소설에만 매달렸다.
짝사랑에 따른 좌절을 겪은 데 이어, 형 유근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여파로 유정은 1930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유정은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노동을 하며 공부를 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누님이 그를 만류했다.
“내 좀 심하게 했더니 그러니? 내 성미가 번이 망해서 그런 걸 옥생각하면 어떡허니?”하고 유정에게 애소를 하는 것이다.
“난 네가 없으면 허전해서 못 산다. 좀 고생이 되더라도 나와 같이 있자. 그럼 차차 내 살 도리를 해줄 테니!” 유정은 누님의 애소에 지고 만다. 그는 일본행을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혜화동 언저리의 허름한 방에서 지내다가 늑막염에 걸려 고생하던 유정은 1931년 고향인 실레 마을로 내려갔다. 고향에 내려온 유정은 요양에만 매달리지 않고 틈틈이 장만한 나무로 야학당을 지어 글 모르는 이들을 모아 가르친다. 1932년에는 충청도 지방의 금광을 비롯해 곳곳을 떠도는데, 그는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체험했다. 특히 짚으로 꼬아 만든 주머니 속에 술병을 넣어 들고 다니며 농부나 광부에게 술을 파는 ‘들병이’들을 만난 일은 나중에 그의 창작 생활에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1932년 유정은 다시 실레 마을로 가서 본격적인 계몽운동에 나서는데, 이 무렵은 1920년대에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브나로드, 곧 농촌계몽운동이 조직적으로 펼쳤던 시기다. 그도 고향에서 야학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 브나로드 운동 팸플릿을 교재로 썼다. 그는 또 학생들과 마을 청년을 모아 농우회를 조직하고, 이를 발전시켜 정식으로 간이학교 인가를 받아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설립했다. 그러나 형의 음주벽과 가족에 대한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자 1933년부터는 서울로 와서 조카, 형수와 함께 창신동, 신당동, 효제동 등을 전전하며 셋방살이를 했다. 유정은 이 무렵부터 소설 쓰기에 본격적으로 매달리는데, 1933년 1월 13일 ‘산골 나그네’를 끝낸 데 이어 8월 6일에는 ‘총각과 맹꽁이’를 썼다. 유정은 <개벽사>에 다니던 안회남에게 ‘산골 나그네’를 보내고, 이 작품은 <제일선>에 발표된다.
유정은 밤마다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 깨어나 소설을 썼다. 서울시청 위생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니 병명은 폐결핵……. 결핵균의 침식에 의해 이미 쇠약해진 몸으로 그는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려고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1933년 발족한 ‘구인회’에 들어가면서 그의 창작 활동은 더욱 불붙기 시작한다. 그는 구인회의 회지 <시와 소설>에 ‘두꺼비’를, <개벽> 3월호에 ‘금 따는 콩밭’을, <중앙일보>에 ‘떡’을, <조선일보>에 ‘만무방’을, <조광> 12월호에 ‘봄봄’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러다가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동시에 당선된 것이다.
흔히 한국 단편문학의 결정체로 일컬어지는 김유정의 작품들은 카프의 해체 등으로 말미암은 문단 전반의 침체 분위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유정의 단편들은 풍자와 아이러니 수법을 사용해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검열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돌파구를 열었고, 아울러 이전 좌익계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재미도 만만치 않아 우리 소설계에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낙비’는 1930년대 식민지 농촌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주 기본적인 도덕이나 윤리마저 팽개치는 농민들의 체념적 생존 양식을 희화화하고 있다. 춘호는 노름판에서 돈을 따서 도시로 나갈 자금을 마련할 궁리를 하지만 노름 밑천 2원이 없어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 춘호는 어린 아내를 때리며 화풀이를 하고, 이에 견디다 못한 춘호의 아내가 돈을 구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간다. 춘호의 아내는 쇠돌 엄마네 집을 지나치다가 쇠돌 엄마네 집으로 들어가는 이 주사를 본다. 이 주사는 마을의 소문난 부자인데 쇠돌 엄마는 이 주사 덕에 살림이 폈다. 잠시 밖에서 서성이던 춘호의 아내는 용기를 내어 쇠돌 엄마네 집으로 들어간다. 춘호의 아내는 혼자 있던 이 주사와 정을 통한 뒤 이튿날 2원을 받기로 한다. 다음날 춘호는 아내가 이 주사에게 가는 것을 알면서도, 곱게 차리고 집을 나서는 아내를 들뜬 마음으로 지켜본다.
이처럼 가난과 연관된 비정상적인 남녀 관계는 김유정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소낙비’를 비롯한 그의 많은 소설 속에는 남편의 병이나 노름밑천, 빚, 생계 때문에 단돈 몇 푼에 몸을 팔거나 술집 작부 또는 들병이로 나서는 아내, 그리고 아내의 매춘을 뻔히 알면서도 분노나 죄책감 없이 묵인하는 남편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작중 인물들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다만 이들의 행태를 유머, 아이러니, 풍자, 해학적 수법으로 그려낸다.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면에는 늘 짙은 우수가 깔려 있는 게 김유정 소설의 특징이다.
김유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무방’ 역시 농민들이 가난 때문에 겪는 사건을 담아낸 단편소설이다. 부지런한 농사꾼인 응오는 가을걷이를 해봐야 지주와 빚쟁이에게 모조리 빼앗길 것이 뻔하다는 생각에 벼를 베지 않는다. 그의 형 응칠은 밤마다 조금씩 벼를 도둑맞자 자신이 도둑으로 몰리지 않을까 두려워 밤새 논에 나가 벼를 지킨다. 마침내 응칠은 벼를 훔쳐간 장본인이 바로 그 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동생 응오임을 알아낸다. 기가 막힌 응칠은 빈한한 삶을 개탄하며 아우에게 아예 도둑질로 나서자고 제안하지만 응오는 이를 거절한다. 응칠은 동생 응오를 때려누인 뒤 업고 간다.
‘만무방’은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결국 ‘제 살 깎아 먹기’가 되기 일쑤이던 1930년대 우리 농촌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염치없고 막 되어먹은 잡놈의 무리”라는 뜻을 가진 ‘만무방’이란 소재처럼 뻔뻔함과 천연덕스러움은 유정의 다른 소설에서도 도둑질, 도박, 매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비윤리적인 삶의 형태로 줄곧 나타난다.
또 하나의 걸작 단편 ‘봄봄’은 지주의 대리격인 마름이 데릴사위 풍속을 이용해 가난하고 순진한 농촌 청년을 기만하는 과정을 역시 풍자적 수법으로 녹여낸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점순네 데릴사위로 들어가 그 집에서 3년 반 동안이나 뼈 빠지게 일하지만, 마름인 점순 아버지는 심술궂게도 성혼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일만 부려먹는다. 이런 ‘나’를 보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점순이가 은근히 부추긴다. ‘나’는 점순의 말에 용기를 내어 그동안 일해 준 대가를 요구하며 점순네에서 나가겠다고 윽박질러본다. 장인 자리인 점순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곧 점순 아버지와 대판 싸움을 벌이는데, 이를 지켜보던 점순이 오히려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하며 제 아비의 편을 든다. 점순 아버지는 ‘나’에게 가을에 혼례 시켜준다는 약조를 하면서도 얼른 콩밭에나 가보라며 또 일을 시킨다.
김유정의 문학은 자신이 속해 있던, 모더니즘의 한 기류를 보여주던 구인회의 도시적 특성과도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는 특유의 토속적이고 질퍽한 어휘, 유머와 풍자적 수법 등으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를 소설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살아나게 한다. 그가 거둔 이와 같은 문학적 성과는 구인회를 또 다른 각도에서 빛나게 한다.
어찌 보면 유정에게 소설은 일종의 도피처였다. 이미 형 유근이 그 많던 선대의 가산을 거의 다 날린 뒤여서 그에게 돌아올 몫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독립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 암울한 시대상황, 정신적 고립감,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쓰라린 기억, 그리고 폐결핵 선고……. 소설 쓰기는 이 모든 시름과 고뇌, 우울과 절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구인회 시절에 유정은 삶과 죽음에 걸쳐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상과 만났다. 두 사람은 집안 형편이 비슷하고 문학관도 웬만큼 통하는 사이였으나, 특히 폐결핵을 같이 앓고 있어서 더욱 가까이 묶인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유정! 유정만 싫지 않다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버릴 작정입니다. 일개 요물에 부상당해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일기로 불우한 천재가 되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1936년 가을, 이렇게 은밀하게 찬란한 정사(情死)를 모의하던 두 사람은 그 뒤로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버렸다.
김유정이 태어난 실레 마을에 조성된 문학공간, 김유정 문학촌 <제공: 김유정기념사업회>
1936년 김유정은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정릉 언저리의 암자에서 휴양을 했다. 휴양 중에도 글쓰기는 이어져 같은 해 <사해공론>에 ‘산골 나그네’, <여성>에 ‘옥토끼’, ‘슬픈 이야기’, <조광>에 ‘동백꽃’, ‘야앵(夜櫻)’을 발표했다. 그는 이듬해인 1937년 초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아 <조광>에 ‘따라지’, ‘정분’, <여성>에 ‘땡볕’, ‘총각과 맹꽁이’ 등을 내놓지만, 가난 때문에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유정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다. 암자에서 내려온 그는 병든 몸으로 다시 효제동 셋방과 매형의 집 등을 전전하며 창작을 하는 한편으로 돈이 될 만한 일거리에 매달렸다. 유정은 경기도 광주에서 과수원을 하는 다섯째 누이의 집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요양 생활을 할 참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 고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극소량의 아편을 썼다. 광주에 내려와서는 그것마저 끊었다. 그의 형편이 아편을 살 수도 없었고, 거기에 중독되면 헤어날 길이 없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자제를 했던 것이다.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猛熱)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렸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 둬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오십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허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병을 위하야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 삼십 마리를 고와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뭇 먹어 보겠다. 그래냐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둥궁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기다리마.
삼월 십팔일. 김유정으로부터.
유정은 고통스러워도 조카에게 물을 떠오라고 해서 세수를 하곤 했다. 친구 안회남에게 편지를 썼다. 돈이 될 만한 탐정소설을 구해 보내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조카가 방으로 들고 온 세숫대야를 앞에 놓고 생각했다. 내 몸속에 지금 고름이 꽉 차 있을 텐데…… 그리고 계속 생겨나고 있을 텐데…… 이깟 세수는 해서 무엇을 하나. 그래도 유정은 남은 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돈이 생기면 닭 삼십 마리를 고아먹고, 땅꾼을 사서 살모사 구렁이 십여 마리를 먹어볼 작정이었다. 그것만 먹으면 몸이 가뿐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폐병을 떨쳐내고 싶었다.
유정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겐 그만한 돈조차 융통해 볼 방법이 없었다. 유정은 안회남이 보내온 돈이 될 만한 탐정소설을 열심히 번역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제 몸의 생명력이 서서히 꺼져가는 걸 느꼈다. 밤을 새워가며 탐정소설 번역 일을 하는데 유정의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곤 했다. 닭 삼십 마리와 살모사 열 마리를 고아먹기 위해. 그렇게 해서라도 병을 떨쳐내고 살기 위해. 한밤중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소리를 질러 조카를 불렀다. 누님을 오게 해 홍문(항문)을 보아달라고 했다. 누님이 치질이 악화한 홍문을 들여다보지만 통증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는 홍문을 면도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 때문에 한잠도 못 자고 비명을 지르며 밤을 새웠다. 가래도 끓고 기침도 잦아졌다. 1937년 3월 29일, 새벽이 오고 있었다. 유정은 그날 새벽 6시 30분경 길게 숨을 한번 몰아쉬고 눈을 크게 떴다. 세상을 마지막으로 잘 보겠다는 듯이. 그리고 이내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다. 김유정, 스물아홉 나이였다. 시신은 화장을 시켰고, 조카가 한강에 나가 분말로 변한 뼛가루를 뿌렸다. 김유정이 죽고 난 스무날 뒤 멀리 도쿄에 있던 이상(李箱)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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