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에 이륙이 지은 야담 잡록집. 아들 영이 1512년(중종 7)에 처음 편찬, 그의 후손 노선이 1853년(철종 4)에 보완하여 중간하였다.
유형 - 문헌 시대 - 조선/조선 전기 성격 - 야담집, 잡록집 편저자 - 이육 제작시기 - 조선 초기, 1512년 간행·발행·발급자(처) - 이노선(1853)
정의 조선 초기에 이륙(李陸)이 지은 야담·잡록집.
내용 작자의 문집인 『청파이선생문집(靑坡李先生文集)』 제2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륙의 아들 영(岭)이 1512년(중종 7)에 처음 편찬하여 그의 후손 노선(魯善)이 1853년(철종 4)에 보완하여 중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제2권 내용의 일부는 ‘청파극담’이라는 책명으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나, 문집에 있는 것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문집에는 제2권의 내용이 극담으로 예감(睿鑒)·기실(記實)·척이(摭異)·도량(度量)·정렬(貞烈)·총명(聰明)·명험(明驗)·점험(占驗)·조복(朝服)·의상(衣裳)·음식(飮食)·의방(醫方)·기용(技用)·기술(技術)·골계(滑稽) 등 15종으로 분류되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대동야승』에는 기이(記異)·기관(奇觀)·도량·골계·이학(俚謔)·고려품대(高麗品帶) 등으로 분류되어 있을 따름이다.
「기실」에서는 이암(李嵒)·공부(孔俯)·하륜(河崙)·효령대군(孝寧大君)·양녕대군(讓寧大君)·허조(許稠)·최윤덕(崔潤德)·세조, 그 밖의 여러 유명 인물에 얽힌 일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척이」도 대체로 이와 비슷하여 안유(安裕)·김덕생(金德生)·최운해(崔雲海)·유효통(兪孝通)·정창손(鄭昌孫) 등의 이야기와 이들과 관계된 야사를 다루고 있다.
「도량」에서는 유관(柳寬)·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정갑손(鄭甲孫) 등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정렬」에서는 당시 유명했던 열녀들에 관한 행적을 수록하고 있다.
「조복」에서는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의 관복을 설명하며, 「의상」에서는 목면·베·마의 유래와 사용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한편, 「골계」에서는 김효성(金孝誠)·영순군(永順君), 그 밖의 다른 인물들과 관련된 소화(笑話)를 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주로 유명 인물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는 점에서 야사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또한 「조복」·「의상」 등의 내용은 민속학이나 복식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청파극담(靑坡劇談).2 ○ 계묘년 겨울에 종실(宗室) 회의도정(懷義都正)1이 기전에서 이상한 새를 얻었는데, 그 모양이 암꿩 같으면서도 더 작고, 발은 살쾡이나 고양이와 같아 나뭇가지를 붙잡지 못하므로 날면서도 나무에 깃들지 못하였다. 박식하다는 사람들에게 이를 물어 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갑진년에 내가 영남 안찰사(嶺南按察使)로 있을 때에 어떤 이가 이 새를 보고 말하기를,
“연전에는 무려 수천만 마리가 떼를 지어 하늘을 덮듯이 세차게 날았는데, 기세가 마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항상 평전(平田)에 내려와서 보리 뿌리를 쪼아 먹었는데, 어떤 늙은 왜인(倭人)은 이 새를 해중조(海中鳥)라 말하더라.”하였다. ○ 의성(義城)은 옛날 문소현(聞韶縣)이다. 고려(高麗)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가 일찍이 이 현의 누각에 시를 지어 붙이기를, 문소 공관 후원은 깊기도 한데 / 聞韶公館後園深 그 가운데 백여 척 높은 다락 우뚝 솟았네 / 中有危樓百餘尺 향기로운 바람은 10리나 깔렸는데, 주렴은 걷혀 있고 / 香風十里捲珠簾 밝은 달빛 아래 옥적(玉笛)의 외로운 소리 들려오네 / 明月一聲飛玉笛 가벼운 연기 버들 그림자 가느다랗게 연해 있고 / 煙輕柳影細相連 비 갠 산빛은 짙어 뚝뚝 떨어질 듯 / 雨霽山光濃欲滴 용황의 팔 부러진 갑지랑2이 / 龍荒折臂甲枝郞 난간에 기댄 채 더욱 애석하기도 해라 / 仍按憑闌尤可惜 고 하여 당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뒷날 현이 병화에 타서 재가 되고 시 또한 없어졌는데, 어떤 암행어사가 이 고을에 이르러 김지대의 시를 급히 찾으니, 고을 사람들은 어찌할 줄 몰랐다. 마침 고을 원의 딸이 장(張) 재상의 아들과 혼담이 있었는데, 재상의 아들이 멀리 다른 곳으로 장가드니, 그녀는 듣고 결국 심질(心疾)이 생겨 정신이상이 되어 미친 소리만 쉴 새 없이 하다가 문득 김공이 지었던 시를 읊었다. 고을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암행어사에게 써서 바쳤는데, 지금도 이 현의 누각 벽에 걸려 있다. 갑진년 겨울에 내가 왕명을 받아 본도 안찰사로 왔다가 공의 시를 읽고 나도 모르게 흠모하는 생각이 들어 그 끝에 차운하기를, 영헌 공의 아름다운 시편 지금도 전하니 / 流傳英憲瓊琚篇 수백 척 높은 다락에 빛나도다 / 輝映高樓數百尺 바람은 시가[紫陌]에 부는데, 몇 집에서는 다듬이소리 들려오네 / 風吹紫陌幾家砧 사람은 주란에 비겼는데 어느 곳에서 들리는 젓대 소리인고 / 人倚朱闌何處笛 한 조각 시내 구름 난간 앞으로 날고 / 溪雲一片檻前飛 달도 밝은 밤중이라 이슬이 옷을 적시네 / 月露五更衣上滴 호화로운 행장 영화롭기보다는 / 高車駟馬不須榮 무거운 책임 몸은 미약하니 진정 애석하도다 / 任重身微良可惜 하였는데, 구미속초(狗尾續貂)의 기롱을 면할 수 없다 하겠다. ○ 별이 떨어져 돌이 되고, 천둥소리가 울려 돌을 얻으면 칼이나 도끼 같은데 그 조탁한 공은 참으로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공장이와 노련한 솜씨를 거치지 아니하면 이루지 못하나니, 어찌 천지조화의 재능이 자연 신묘하여 사람의 솜씨보다 뛰어난 것이리오. 뉘가 천상에 물(物)이 있어 자연히 이와 같다고 말하겠는가. 무릇 천지 자생(自生)의 물건 가운데 초목의 꽃 같은 것은 교묘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음양의 정기를 빌려서 일시에 번영하고 호화로운 것이지만, 금(金)ㆍ옥(玉)ㆍ토(土)ㆍ석(石)에 있어서는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교묘함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나는 뇌부(雷斧)ㆍ뇌검(雷劍)에 있어서도 그 소이연(所以然)을 모르는지라 기다려 알고자 한다.
○ 박연폭포(朴淵瀑布)는 천하의 장관(壯觀)으로 천마산(天磨山)ㆍ성거산(聖居山) 사이에 있다. 돌 사이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5,60척이며, 깊이는 한정이 없다. 가운데 돌섬은 10여 명이 앉을 만한데, 세상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왕이 여기에 와서 놀 제 어떤 용이 이 돌섬을 움직이니 왕이 노하여 용을 매질하였다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물에 붉은 핏빛이 띠어 있다. 못 아래 다시 노구담(老嫗潭)이 있는데, 또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노구담에서 폭포를 쳐다보면, 하얀 필배가 하늘 구멍[天穴]을 따라서 뛰어 나오는 것 같고, 석병(石屛)을 따라 곧게 내려오면, 비가 쏟아지는 듯 암담(暗淡)하다. 골짜기 높이 또한 백여 척이나 되는데, 비록 큰 비가 땅을 씻고, 낙엽이 산을 말아 놓은 듯하여도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맑고 깨끗하여 장관을 이루니, 또한 너무도 신령스럽고 괴이한 못이다. 내가 이 못이 좋다는 말은 들은 지 오래였으나 일이 없는 틈을 타서 가보지 못하는 것을 한(恨)하였더니, 마침 기해년에 제릉헌관(齊陵獻官)의 천망을 받아 숙원(宿願)을 마침내 이루었는데, 이 해를 전후해서 팔도를 두루 돌아 지리산에 올라 둘러 있는 여러 곳을 내려다보았으나 폭포의 경치로서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세종조(世宗朝) 때 수상이 되어 거의 30년이 되도록 기쁨과 노여움을 말이나 얼굴에 한번도 나타내지 아니하고, 종들을 대할 때도 사랑을 하여 일찍이 매질을 하지 아니하였다. 사랑하는 시비(侍婢)가 어린 종놈과 장난하는 것이 너무 심하여도 공은 보고 문득 웃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노복(奴僕) 또한 하늘이 내리신 백성인데 어찌 포악하게 부리겠느냐.” 하고, 글을 지어 자손에게 남겨주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홀로 정원을 거닐고 있었는데, 이웃집에 철없는 아이들이 한창 무르익은 배에 돌을 던져 땅에 그득히 떨어졌다. 공이 큰 소리로 시동(侍童)을 부르니, 아이들은 시동을 부르는 것은 반드시 우리들을 잡아 가려는 것이리라 하고는 놀라 모두 달아나서 몰래 숨어 엿듣고 있었다. 그런데 시동이 오니 버들고리[柳器]를 가져오라 하여, 떨어진 배를 담아다가 이웃집 아이들에게 주라 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이 장원 급제하여 정언(正言)이 되어 공을 뵈니, 공은 《강목(綱目)》과 《통감(通鑑)》한 질씩을 내놓고 문강에게 제목을 쓰도록 명하였는데, 잠시 후에 못된 계집종이 간소한 음식을 차려 가지고 공을 기대고 앉아서 문강을 내려다보다가 공에게 말하기를, “술을 드리겠습니다.”하니, 공이 나지막하게,“아직 두어라.” 하였다. 계집종이 다시 공의 곁에 한참 서 있다가 성낸 소리로, “어찌 그리 더디시오.”하니, 공은 웃으면서,“가져오너라.”하였다. 술을 드리고 나니 두어 명의 어린아이들이 모두 남루한 옷에 맨발로, 어떤 아이는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어떤 아이는 공의 옷을 밟으면서 차려 놓은 음식을 모두 퍼먹고, 또한 공을 두들기니 공은, “아프구나. 아프구나.”고만 하였다. 이 어린 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자식들이었다. ○ 정승(政丞) 유관(柳寬)은 청빈하여 흥인문(興仁門) 밖에 집을 지었는데, 두어 칸에 불과하며 밖에는 막아놓은 담이 없어 큰 비가 오면 다 새니, 우산을 받고 밤을 새우면서 말하기를,“우산이 없는 집은 어쩔까.”하였다. 손님을 대접하여 술상을 차릴 때는 반드시 탁주 한 병을 선반 위에 두고, 늙은 여종 한 사람이 사기잔으로 술을 드리고 각각 두어 잔씩만 들면 마쳤으며, 비록 귀한 정승이 되어서도 교육을 시키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제생(諸生)으로 강의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의 자제이든 반드시 순순히 가르쳤으므로 문하에 학도들이 매우 많았다. 항상 시제[時亨] 전일에는 제생을 보내고 시제를 행하고 나서는 제생을 불러 음복하였는데, 염두(鹽豆) 한 소반(小盤)을 서로 나누어 안주하며, 질그릇 동이의 탁주를 가지고 와서 먼저 한 잔을 마시고 이것으로 여러 생도들에게 한두 순배씩 돌렸다. 태종이 공의 청빈함이 이 같음을 알고 선공감(繕工監)을 명하여 밤중에 파자(把子, 울타리)를 공의 집에 베풀어 공이 알지 못하게 하였고, 또 끊이지 않고 어선(御膳)을 하사하였다. ○ 김량일(金亮一)공은 애꾸눈이요 성질도 조급하다. 남이 애꾸눈이라는 말만 해도 버럭 화를 내니, 당시 함께 노는 사람들이 장난으로 우스개 소리를 하다가도 사팔뜨기나 애꾸눈이라는 말은 모두 움칠하고 함부로 말을 못하였으므로 홍문(弘文) 정휘(鄭徽)3가 김에게 말하기를, “사람은 도량이 있어야 하는데, 공은 어찌 남이 장난삼아 하는 말만 들어도 화를 내는가. 아마 남들은 공이 부귀하여도 도량이 모자란다 할 것이다.”하니, 김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무슨 말인가. 내가 어찌 그처럼 성을 내던가.”하므로, 정이 말하기를 “이제 내가 공에게 욕을 할 터이니, 공은 성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니, 김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성을 내겠는가.”하므로, 정이 말하기를, “정말 성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니, 김이 말하기를,“틀림없다.” 고 맹세[有如天日]한 후에 정이 큰 소리로 욕을 하기를, “애꾸눈 이 병신 놈아, 너는 반 조각 사람이요, 온전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 너도 사람이냐. 왜 죽지도 않느냐.” 하니, 김은 부끄럽고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성낸 빛이 발발(勃勃)하나 이미 성을 내지 않기로 하였는지라 한마디도 소리를 내어 힐난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이야기하는 중에 채기지(蔡耆之)4가 천천히 김에게 말하기를, “공의 눈은 고칠 수 있는데 다만 그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하니, 김은 속으로는 무척 불쾌하지만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혹시나 도움을 얻을까 하여, 문득 말하기를, “그럼 말해 보라.”하니, 채가 말하기를, “좋다, 좋다.”하였다. 김이 또 말하기를,“얘기해 보라.” 하는지라 채가 말하기를, “술을 마셔 무척 취하면, 예리한 칼로 애꾸눈 속의 병든 눈동자를 자르고 1년생 개의 눈알을 급히 끼워 두면 피가 식지 않고 근육이 합하여서 능히 볼 수 있다.” 하니, 김도 과연 그렇겠다고 재차 수긍하는지라 채가 이에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렇다면 썩 좋다. 그러나 사람의 버린 똥을 보면 모두 고량(膏粱) 진미가 되어 보이리니 이것을 잘 알아 두어야 한다.” 하니,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청파극담(靑坡劇談).3
○ 화공(畫工) 최경(崔涇)은 나이 70여 세가 되었어도 눈이 밝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일찍이 덕종대왕(德宗大王)의 초상을 그리니, 임금께서 그린 것을 보고 사모하다가 경을 맞나 특별한 은총을 내려 당상(堂上)의 직책에까지 제수하려 하였다가 언관(言官)의 논박으로 결국 정지되었다. 경은 사람됨이 부랑(浮浪)하여 그 당시의 문벌 재상은 모두 절친한 친척이라 하였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공이 두 번째 임금의 장인이 되어 권세가 세상을 뒤엎을 만하니, 경은 반드시 상당형(上黨兄)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조정 선비로서 화공을 구하는 자는 경을 칭할 때에 족장(族長)이라 하니 경은 크게 기뻐하며 좇았다. 옛 제도에, 도화관(圖畫官) 두 사람은 모두 사인(士人)이 하도록 되었으므로 임금께서 특별히 경을 별제(別提)로 명하였다. 하루는 화원(畫員) 송계은(宋繼殷)이 경이 이미 서(署)에 앉아 있다는 말을 듣고, 출근이 늦었다고 질책을 받을까 두려워 질책을 면할 방법을 생각하였으나 되지 않자 이고(移告, 휴가)까지 하려고 방황하던 중에 마침 예조 정랑 최진(崔璡)을 노상에서 만나 인사를 하니, 최가 말하기를, “최 별제(崔別提)는 잘 있는가.” 하므로 계은이 내심 무척 기뻐하고, 이 일을 빙자하여 말을 하면 질책을 면하리라 하고는, 드디어 출근하였다. 경이 과연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왜 이렇게 출근이 늦었느냐.”하였다. 계은이 말하기를, “길에서 정랑 최진을 만났는데, 최 별제 아저씨[尊叔]는 잘 있는가 합디다.” 하니, 경은 기뻐함을 얼굴에 나타내면서 말하기를, “그 놈은 나의 종질(從侄)이다. 그러므로 안부를 물은 것이구나.” 하고 마침내 질책을 하지 않았다.
○ 광주(廣州)에 80여 세의 한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의 말이, 내 평생의 이상한 일 두 가지를 일찍이 보았다. 그 중에 아주 기괴한 일은 이웃집에 어떤 사람이 가면(假面)을 좋아하더니, 하루는 그 집에 병이 전염하였는데, 무당이 말하기를,“나무 가면이 빌미가 되었다.” 하자, 즉시 들판에 버렸더니, 병이 과연 그쳤다. 수개월이 지나 가족 하나가 밭 가운데를 지나가다가 전에 버렸던 가면이 있었는데, 반절이 이미 썩어서 버섯이 온통 생겨 따다가 삶아 한 다리[一足]를 먼저 먹으니, 갑자기 웃다가 일어나 춤을 추는데 마치 미치광이 같았지만 모두 우연으로 여기고 그다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다음에 먹은 사람도 모두 웃다가 일어나 춤추기를 앞사람과 똑같이 하더니, 조금 후에 그치는지라 물어보니, “처음 먹고 나니 자연 흥이 나서 그만두려고 하여도 되지 않아 그렇게 하였다.” 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병으로 남해 가에서 죽었는데, 날이 따뜻하자 살이 썩어서 온 몸이 개구리가 되더니 바다에 들어가서는 또 변하여 조그마한 물고기가 되어 헤엄쳐 가는 것을 보았다 한다. 노인이 눈으로 본 것인즉 무척 기괴한 일이었다.
○ 갑진년에 영해(寧海)에서는 땅속에서 불이 일어나 연기는 위로 수백 길이나 오르고 열은 온돌과 같이 뜨거우므로 깨뜨려 보니, 화염은 극히 심하여 사석(沙石)도 모두 타고 타버린 돌의 빛깔이 숯과 같은데, 아마도 들불[野火]이 온돌 가운데를 뚫고 들어와 연이어 사석을 태우면서 자연히 불이 탔을 것인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돌을 주어 불에 던지면 불이 타고 연기가 났으니 대개 석탄(石炭)이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한재(旱災)의 징조인가. 을사년의 한재에도 내[川]가 마르고 나무가 말랐는데 영남은 더욱 심하였다. ○ 어떤 촌백성이 성질이 포악하여 성이 나면 그 어미를 때리곤 하였는데, 하루는 그의 어미가 맞고 큰 소리로 호소하기를,“하느님이여, 왜 어미 때리는 놈을 죽이지 아니합니까.” 하였다. 그 촌백성이 낫을 허리에 차고 천천히 밭에 나아가 이웃집 사람과 같이 보리를 줍는데, 그 날은 하늘이 아주 맑았는데 갑자기 한 점의 검은 구름이 하늘에 일더니 잠깐 사이에 캄캄해지면서 우레가 치고 큰비가 오는지라. 동네 사람들이 밭에 있는 사람을 보니, 벼락이 여기저기 치는데 누구인지 낫으로 막는 것 같았다. 이윽고 비가 개고 보니, 그 사람이 죽어버렸다. 하늘의 총명함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 부마(駙馬) 회천군(懷川君)이 부경(赴京)하는데, 동지(同知) 조지경(曺智敬)이 대호군(大護軍)으로서 따라갔었다. 군이 서경(西京)의 기녀를 태우고 가는데, 압록강에 이르러 눈물을 줄줄 흘리고, 따라가던 서리[抄] 한 사람도 덩달아 또한 우니, 조동지가 발로 서리를 미끄러뜨려 강물에 떨어뜨리며 말하기를, “군이야 기녀를 사랑하고, 기녀도 군을 생각하니 서로 눈물을 흘릴 만하지만, 너는 왜 우느냐.” 하니, 군이 그 말을 듣고 조동지를 질책하기를, “호군은 어찌 생각을 못함이 그리 심하냐. 나는 위로는 전하가 계시고, 아래로는 옹주가 있으니 낯선 지방에 건너가게 되었으니 어찌 그립지 않겠느냐. 그래서 우는 것이다. 어찌 기녀를 생각할 이치가 있겠는가.” 하므로, 조가 말하기를“그렇다면 이 울음이 조금 늦었습니다. 왜 도성문에서 울지 않고 여기서 울어야만 합니까.” 하니, 군은 눈물을 거두며 사죄하였다.
○ 집현전(集賢殿)이 성할 때에, 은전(恩典)이 매우 융숭하여 국가에 큰일만 있으면 고문(顧問)을 내려 어선(御膳)이 잇따르고 상도 헤아릴 수 없이 내려 하루에도 삼접(三接)의 은총이 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신선과 같이 흠망하였다. 그때 문경공(文敬公) 김예몽(金禮蒙)이 여러 사람들 가운데에 제일 연장자였는데, 산물(酸物)이 마침 이르렀는데 김이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완력으로 차지하였다. 제학(提學) 이개(李塏)가 읊기를, “어린애 마음을 면치 못하고 무의(無意)하도다.” 하니, 김이 곧 답하기를,“여력(膂力)이 바야흐로 강한 자가 산물을 좋아한다.” 하니, 당시 그 민첩함을 탄복하였다. 속담에,“늙으면 뜻이 없고 음탕한 자는 신 것을 좋아한다.” 하였는데, 두 공의 말이 이 속담을 사용한 것이다. 문강공(文康公) 이(李)가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빈부ㆍ귀천ㆍ생사ㆍ영욕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어서 진실로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되고, 이름과 시호에 있어서도 역시 하늘이 정한 것이요, 분명히 우연이 아니다. 내 꿈에 중추(中樞) 김예몽(金禮蒙)이 원정(遠征)하는데 훌륭한 말이 시가(市街)를 메우고, 어떤 사람이 손에 한 물건을 먼저 가지고 왔는데, 문경공이라고 쓰여 있었다. 꿈을 깨어 매우 이상히 여겼지만, 김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1년 뒤에 김이 죽어 내가 도성문 밖에서 집불(執紼)하고 그의 시호를 보니, 바로 문경공인데, 꿈과 서로 맞았으니 이로 보면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도 하늘이 정해 주지 않은 것이 없다.”하였다.
○ 재상 권홍(權弘)은 벼슬이 최고에 다다르고 나이도 많아 매일 구릉(丘陵)을 찾아 노니는 것을 일로 삼았다. 일찍이 어느 날 저녁 꿈에 한 늙은이가 엎드려 울며 호소하기를, “홍 재상이 우리 종족을 처참하려 하니 상공(相公)이 구원하여 주옵소서.”하니, 권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구하겠는가.”하니, 늙은이가 말하기를, “홍 재상이 반드시 상공과 같이 가자고 할 터이니, 공이 사양하면 홍공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다시 살려 주시는 은혜이옵니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놀라 깨어 물어보니, 홍공이 오늘 전곶(箭串)에 자라를 구워 먹으려고 공과 같이 가자고 하므로 왔습니다 하는지라, 권공은 생각하기를 꿈속의 늙은이는 반드시 자라[鼈]일 것이다 하고는 병을 핑계하여 사양하였는데, 뒤에 들으니 홍공도 가는 일을 그만두었다 하였다.
○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익평(翼平) 권(權)공은 한상당 부원군(韓上黨府院君)과 벼슬하기 전부터 친구가 되어 형적을 잊고 지내는 친분이 있었다. 권에게는 조그마한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은 종(鍾)이고 나이는 16세가 되어 용모가 아름답고 성질 또한 총명하고 간활하였다. 공은 마음속으로 생각이 있었지만 부인이 무서워 감히 가까이 못하고 상당(上黨)에게 의논하니, 상당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거짓 상심병(傷心病)을 앓아 두렵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권이 그 말대로 아프다고 남의 집에 거처하였다. 밤중에 한이 몰래 홰나무 꽃을 달여서 보내며 권의 온몸에 바르도록 하고 황달병을 앓는 것처럼 하였다. 며칠이 지나서 한이 권의 문병을 갔는데, 마침 종(鍾)의 어미도 왔으니 바로 부인의 유모였다. 한이 들어가 권을 보고 나와서 종의 어미에게 울며 말하기를, “내 친구는 죽겠구나.”하니, 종의 어미 또한 우는지라, 한이 말하기를, “내가 병을 낫게 하는 약을 알고는 있지만 감히 말할 수는 없다.”하니, 종의 어미가 말하기를, “나의 주인께서 살아만 난다면 무슨 약이든 쓰지 않겠습니까.”하므로 한이 말하기를, “이 병은 다른 병이 아니라, 종을 생각만 하고 가까이할 수 없으므로 그 노증(勞證)이 되어 맥이 가늘고 힘이 약하여졌으니 얼마 안 가서 죽을 것이다. 어미는 어찌 딸자식만 생각하고 부인에게 이야기하여 주인의 생명을 살리지 않는가.”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다가 이어 말하기를, “모름지기 같이 자지 않고 보기만 하여도 족히 심중의 맺힌 원한을 풀 수 있으리라.” 하니, 어미가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하기를,“형편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할꼬.” 하고는 드디어 부인에게 고하고 서로 의논하고 좋은 날을 가리어 권에게 종을 보내게 되었다. 그 날 한이 또 권면하기를,“큰 일을 이루려면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실수하면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하니, 권도“그렇다.” 하였다. 다음날 한이 다시 가니 권이 말하기를,“큰일이 이미 이루어졌다.” 하고는, 킬킬 웃었다. 그 뒤 두 분이 서로 꾀하여 정난좌익(靖難左翼)의 공을 이루어 중흥의 제일 원훈(元勳)이 되었다. 내가 이 일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어느 날 숙도(叔度)와 더불어 상당댁에 가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공이 일의 자초지종을 이렇게 말하였다.
○ 사예(司藝) 조수(趙須)가 관동(關東)에 유락(流落)하여 30여 년을 학문에 힘써 읽지 않은 책이 없고, 시를 아주 잘한다는 소문이 있으므로 세종(世宗)이 심히 중하게 여기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이태백 문집을 보내니, 조가 손으로 배를 문지르며 거절하기를,“이 가운데 이태백의 전집(全集)이 있다.” 하였다. 하루는 승정원 내관(內官)을 시켜 족자 한 쌍을 보내면서 조의 시를 구하니, 조는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관이 임금의 명령을 전해도 조는 예도 취하지 않고 이어 안궤에 기댄 채 내관을 불러 앞에 세워놓고 말하기를,“무엇 때문에 왔는가.”하니, 내관이, “상감께옵서 선생의 시를 구하기로 왔습니다.” 하면서, 족자를 올리려 하니, 조는 머리를 끄덕일 뿐이요, 가르치기를 계속하거늘 내관이 떠날 인사를 하면서 말하기를,“시를 지어 놓으면 다음날 와서 가지고 가겠습니다.”하니, 조는, “즉시 지어 올릴 것이다. 무슨 다음날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일필휘지로 글을 썼는데 말과 뜻이 겸하여 아름다워 스스로 읽고 지으면서 말하기를,“노자(老子)의 서법이 꼭 새끼 딸린 호랑이가 긁어놓은 것 같다.” 하고, 크게 웃으면서 내관에게 돌려주었으니 그의 탄솔(坦率)함이 이와 같았다.
청파극담(靑坡劇談).4
○ 성주(星州)에서 몇 사람이 밤에 강 위에서 낚시질을 하는데, 달빛도 없는 가운데 강가에서 무엇이 몰래 엿보는 것 같은지라, 놀라 엎드려서 감히 소리를 못 내고 있는데, 얼마 있다가 어떤 물건이 물에 떨어지자 물이 출렁이는지라, 너무 놀라 더 있지 못하고 모두 낚시 도구를 그대로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다시 가보니, 언덕에 호랑이 발자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또 큰 고기 한 마리가 물 위에 떠 있거늘 그 배를 갈라서 보니, 조그마한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아마 그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려다가 잘못하여 물속에 빠져 드디어 고기밥이 되고 고기는 삼킨 채 또한 죽은 것이었다. 그 사람은 사나운 짐승의 화를 피하여 큰 고기를 얻었고 또 조그마한 호랑이까지 얻었으니, 가히 어인(漁人)의 공(功)을 얻었다 할 수 있고 또 배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홍인산 부원군(洪仁山府院君)은 성질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부귀한 수상(首相)이 되었으나 채소를 심고 재물을 늘리는 것에 정신을 쓰지 않은 적이 없으니 베틀을 거두고 아욱을 뽑는[去織拔葵] 것으로 본다면 부끄러운 일이나 일은 아니하고 빈들빈들 노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낫다고 하였다. 일찍이 길에서 두 백성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공은 말에서 내려 묻기를, “이것이 무엇 하는 것이냐. 여기서 옷이 나오며 밥이 나오느냐. 너희 같은 사람들은 마땅히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런 쓸데없는 짓은 하는가. 너희들은 이것으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하고는 그 바둑을 다 먹게 하였다.
○ 완산(完山)의 이석정(李石丁)이 활을 잘 쏘아 종일토록 과녁을 쏘아도 못 맞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세종(世宗)이 듣고 후원에 과녁을 베풀어 놓고 쏘도록 하니, 역시 종일토록 땅에 떨어지는 살이 하나도 없었다. 능성(綾城) 구문로(具文老)는 신장이 8,9척이요, 얼굴에 검은 점이 있는데 크기가 손바닥만하며, 사람됨이 강건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호랑이 잡기를 좋아하였다.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동교(東郊)에 나가실 적에, 마침 문로가 범에게 쫓겨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임금께서사람을 시켜 큰 소리로 이르시기를,“수목 사이로 향하라.” 하니, 문로가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가므로 호랑이는 말을 쫓았지만 미치지 못하고 바위틈에 쭈그리고 앉았다. 임금께서 문로를 불러 위로하기를, “네 비록 재주는 좋으나 꾀는 나만 못하다. 나무 사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살 수 있었겠는가.” 하니, 문로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였다. 임금이 행차를 명하여 궁으로 돌아오려 하니, 문로가 나와서 아뢰기를,“신은 호랑이를 잡고 따라가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화살과 말을 주니, 문로는 말을 채찍질하여 범을 향해 한 개의 화살로 곧 죽이니 임금께서 매우 기뻐하시고 왕을 모신 여러 사람들도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경진년 북정(北征)할 때 수많은 되놈을 손으로 잡아 죽이니, 되놈이 서로 경계하여 흑면장군(黑面將軍)을 피하라 하였다.
○ 사람 중에는 탁월하게 총명한 자가 있다. 학사(學士) 예겸(倪謙)이 일찍이 본국에 사신으로 왔는데 문충공(文忠公) 신(申)이 송별시(送別詩) 1백 운(韻)을 써서 주니, 애공이 한 번 보고 말아서 책상 위에 놓고는 곧 그 운으로 화답하였는데, 한 운자도 착오가 없었고, 판서(判書) 정초(鄭招)는 일찍이 어떤 수영(水營)에 이르러 군대 백여 명을 점호하였는데, 그 뒤에는 군목(軍目)도 사용하지 않고 다시 점호를 하였으나 한 사람도 순서가 틀리지 않았고, 양천(楊川) 조생(趙生)은 나이 15, 6세에 처음으로 남의 집에서 제책(制策 과거보는 글)을 베껴 쓰기를 부탁하였으나 되지 않자 집에 돌아와 외워 썼는데 역시 한 자도 빠짐이 없었다.
○ 정승(政丞) 하연(河演)이 영남(嶺南)을 안찰하는데 정승 남지(南智)가 막료가 되어 서로 뜻이 맞았다. 하가 거짓으로 남 정승이 좋아하는 진주 기생이 되어 남 정승에게 글을 보내기를, “첩이 요즈음 태기가 있어 신것을 먹고 싶다.” 하였다. 그날 마침 산물(酸物)을 봉하여 임금께 올리게 되었으므로 하 정승이 남 정승에게 말하기를, “산물을 봉한 나머지가 많으니, 그대가 족친 중에 보낼 곳이 없는가.”하니, 남 정승이, “아무 곳에 종고모가 계신다.”하거늘, 하 정승이 예리(禮吏)에게 명하기를,“남 정승의 소용이다.” 하고는, 다시 남 정승이 되어 기생에게 답서를 하고는 산물과 함께 진주 기생에게 보내었으나 남 정승은 전혀 몰랐다. 진주에 가니 기생이 동침하면서 남 정승에게 산물을 보내준 후의에 사례하고, 남 정승은 기생에게 태기가 있어 신 것 구한 뜻을 위로하여 각각 부친 편지를 뜯어보니 모두 거짓인지라, 그런 후에야 하 정승의 소행임을 알았다. 하루는 하 정승이 촉석루(矗石樓)에 앉아 남 정승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 산천이 경치 좋기로는 동방에서 으뜸이 된다.”하니, 남 정승이, “경치가 좋기는 하나 다만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품관(品官)이 있소.” 하였다. 뒷날 하 정승은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오르고, 남 정승은 판원사(判院事)로서 우의정이 되어 숙배(肅拜)한 후에 먼저 하 정승 댁에 가니, 하 정승이 맞아들이는데 문에 다다르자 남 정승을 돌아보면서, “수령관(首領官) 노감사(老監司)가 만일 한 자국만 실수했으면 말할 수 없게 될 뻔하였구나.”하였다.
○ 호정(浩亭) 하륜(河崙)은 사람됨이 경세제민의 큰 꾀가 있어 사소한 일에는 구애되지 않았다. 일찍이 영천군(榮川郡)에 봉첩(鳳捷)하였는데 장막을 청사(廳事) 위에 치고 여러 기생들은 안에서는 주악을 하게 하고, 장막 밖에는 여러 아전들을 늘어서게 하여 좌우로 응답하면서 송사 처결을 물 흐르듯 하였으나, 청루(靑樓)의 기롱을 면하지 못하였다. 마침 우열 상하[殿最]를 의론할 적에 관리들이 반드시 공을 아래에 두고자 하거늘, 안찰사 김 공은, “그렇지 않다. 하모는 비범한 인물이라, 다른 날 우리들의 운명이 다 그의 손에 달려 있으리니 경솔히 대우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으나, 관리들은 굳이 청하거늘 공은 말하기를, “어찌 모(某)를 하등(下等)으로 욕보여 다시 펴지 못하게 하겠는가.” 하고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하가 정사원훈(定社元勳)으로 지위가 최고에 올라 말만 하면 듣고 계교[計]를 하면 써서 당국(當國)한 권세가 있었다. 마침 김공이 중대한 혐의로 금부에 잡혀 죽기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라, 김공이 사람을 시켜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하공을 가서 뵙고 다만 김모의 아내라고 하면 살 수가 있을 것이다.” 하니, 처는 그 말대로 하였다. 하공이 과연 그지없이 불쌍히 여겨 옥사는 마침내 무사하게 되었다. 하륜의 시가 지금도 영주의 벽에 있는데, 화산(花山) 권반(權攀)과 제현(諸賢)들이 이 제목으로 그 다음에 읊어 놓았다. ○ 어떤 재상의 성이 이(李)씨인데, 사위가 며느리 집에서 헌수(獻壽)를 하게 되었다. 밤중에 어린 종이 외치기를, “도적이 있다. 도적이 있다.”하거늘, 모두 놀라 따라갔으나 도적을 잡지 못했다. 종은 말하기를, “달빛이 비치는데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 같습니다.”하니, 부인이 영감을 크게 의심하고는 나무라기를, “도적은 간 종적이 없으나 종의 말이 이와 같고, 늙은 영감도 항상 초록 옷을 입었으니 필연코 몰래 가려고 한 것이다.”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사위도 초록 옷을 입었다.”하니, 딸이 또한 그의 남편에게 나무라기를, “밤중에 왜 가만히 나가서 종을 도둑하려 하였느냐.”하자, 그 사위는 말하기를, “내가 아니라 장인이다.”하였다. 공이 듣고 꾸짖기를, “네놈이 스스로 행하였으면서 어찌 죄를 늙은이에게 씌우느냐.” 하여, 장인과 사위가 서로 미루어 끝까지 분별하지 못하였다.
○ 겸사복(兼司僕) 박효공(朴孝恭)은 공주(公州)에 사는 백성인데 말 타는 기술이 능하여[騙馬] 벼슬이 어모(禦侮)에까지 이르렀다. 사족(士族) 과부집에서 딸을 시집보낼 적에 서달성(徐達城)이 족빈(族賓)으로 참여하였다. 혼인날 서랑(婿郞)이 혼례가 끝나 예대로 인도되어 들어갔고, 손님들도 각각 흩어졌는데, 노상에서 달성을 따라온 사람들이 서로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오늘 서랑은 박효공이라.”하였다. 방금 서로 예할 때 달성이 속으로 박효공인가 의심하였으나 반드시 그 모양이 비슷한 자이리라 하여 묻지도 않았는데, 그 말을 크게 놀라,“무슨 말이냐.” 하니, 모두들“오늘 서랑은 박효공입니다.” 하기에, 달성이 말을 급히 몰아 그 집에 돌아오니, 박이 벌써 옷을 벗고 베개를 의지한 채였고 촛불은 켜지지 않았다. “오늘 서랑이 누구냐.”물으니,“충의위(忠義衛) 민(閔)모라.”하였다. 달성이 “그러면 지금 안에 있는 사람은 곧 겸사복 박효공이로다.” 하고, 서로 크게 놀라 그 이유를 물으니, 두 집이 같은 날 장가를 들이는데 여자 집에서 잘못 맞아들인 것이었다. 밤은 깊고 타고 갈 말도 없어서 두 신랑이 다 도보로 각각 처가로 돌아갔었다.
○ 내가 충청도를 안찰할 적에 종제인 숙도(叔度)는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호남에 말을 점고하러 왔다가 공주에서 서로 만났다. 기생 연연(燕燕)은 이 고을의 이름난 꽃이었다. 공주에서 연연으로 하여금 숙도와 동침하게 하므로 밤에 장막 안에 들어가니 숙도가 먼저 누워 연연에게 옷벗기를 재촉하자, 연연도 옷을 벗고 누워 바야흐로 즐기려 할 때 연연은 갑자기 말을 듣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일 비웃음을 당할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숙도가 말하기를 “왜 그런가.”하니, 연연이 말하기를, “본래 젊은 것으로 손님을 가려 모시도록 하거늘 사또께서 손님을 웃게 하려 나 같은 늙은 기생으로 바꿨으니, 오늘 동침하면서 첩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오나 내일 만당(滿堂)의 조롱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듣지 않는 것입니다.”하였다. 숙도는 드디어 기생을 내보내고 급히 관대(冠帶)를 찾아 입고 일어나 닭이 울 무렵에 내 처소에 와서 나를 일어나도록 재촉하여 서로 등불을 돋우고 술을 마시는데, 숙도가 불빛에서 연연에게 눈길을 주며 말하기를,“이 기생은 이름이 무엇이냐.”하니, 우두머리 기생이, “어젯밤에 모시고 잤던 연연이옵니다.”하자, 숙도는 말하기를,“아니다. 같지 않다.”하고는 또 연에게, “네가 참으로 내 기생이었더냐.”하니, 연연이 말하기를,“그렇습니다.”하자, 또,“같지 않다. 같지 않다.” 하였다. 내가 심히 이상히 여겨 힐문하였는데 그런 연후에 숙도가 연에게 속은 것이 이 같은 것을 알았다. 숙도는 항상 권모와 지략(知略)으로 자부하여 남을 속일지언정 남에게 속임을 당하지는 않았거늘 도리어 한낱 아녀자에게 속임을 당하여 운우(雲雨)의 즐거움을 잃었으니 또한 웃을 일이로다. ○ 속칭 동채(同菜)라는 것은 줄기와 잎사귀가 당귀(當歸)와 같아 향기가 먹음직하니 파군채(破軍菜)와 비슷하다. 성시좌(成時佐)의 종 여섯 명이 일이 있어 영흥(永興)에 갔더니, 마침 사상전의군(使相全義君) 판서(判書) 이덕량(李德良)이 사냥하러 나왔다가 그들을 만나니 다 꿇어 인사하고 여기 온 이유를 말하니, 이(李)가 “해가 저물었으니 부청(府廳)에 와 만나자.”당부하고, 이가 부에 돌아왔는데 어떤 사람이 뜰 아래에서 인사하면서, “저는 성준(成俊) 영감댁의 종이옵니다. 아침 나절에 노상에서 같이 뵙고 물러가 밥을 먹을 적에 어떤 나물이 향기롭고 먹음직하여 일행이 다 먹었으나 종만은 끝자리에 있어서 먹지 못했는데, 먹고 나서 한꺼번에 다 기절하였으니 사상께서 구하여 주소서.” 하거늘, 이가 크게 놀라 의원과 약을 보내어 치료하였지만 끝내 효험이 없었다. 먹은 것은 파군채(破軍菜)였다. 그러므로 운명을 아는 자는 비록 동채(同菜)라도 먹지 않으니 서로 비슷한 것을 싫어함이다. ○ 남루(藍縷)한 차림으로 수행하던 중이 있었는데,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이라도 헐벗은 자를 만나면 반드시 벗어 주었다. 성품이 순후하고 분별[曲折]이 없어서 사람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너라고 하는데, 호는 자비수좌(慈悲首座)이다. 항상 관부(官府)나 사사(寺社)에서 매를 맞아야 할 자가 있으면 반드시 대신 맞기를 원하였다. 일찍이 원각사(圓覺寺)에 우거할 때, 마침 큰 불사(佛事)가 있어 종재(宗宰)가 일시에 다 모였는데, 자비(慈悲)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인산부원군(人山府院君) 홍윤성(洪允成)에게 말하기를,“너는 지금 귀하게 되었구나.” 하니, 홍이 무례하다 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치니, 자비는 웃으면서 말하기를,“홍윤성은 나를 때리지 말라. 아프다. 아프다.”하였다. 뒤에 내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李)와 여러 정승들과 종유하다가 틈을 타서 절의 못가에서 잠깐 쉬는데, 자비가 이를 눈여겨보면서 말하기를, “낯익은 얼굴인데 이름은 잊었다.”하더니, 한참 후에야, “이석형(李石亨)씨로다.”하였다. 절 중들이 다 말하기를, “자비의 천성이 이러하니,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하였다. ○ 이조 판서 허성(許誠)은 사람됨이 강직하여 남이 감히 사사로이 요청하지 못하였다. 모든 인물 전형에서도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도록 하니 대개 사람들의 다투는 것을 싫어함이다. 어떤 중이 젊어서 공과 더불어 방외(方外)의 교분이 있었는데 석왕사(釋王寺)의 주지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공이 들어주지 않을까 두려워 속여 말하기를,“만일 나를 석왕사에 처하게 하는 것은 나의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니, 그만두지 않는다면 영명사(永明寺)가 좋겠습니다. 다른 날 조화에 석왕궐[造化有釋王闕]이 있겠습니다.”하니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노승이 석왕사에 있고 싶지 않으면 어느 절을 원하는가.” 하고, 곧 가게 하였다. 내가 성균관 시험을 맡았을 적에 참시관(參試官) 한 사람이 거자권(擧子券)을 읽으며 칭찬을 계속하므로, 나는 그 사사가 있는 것이 미워서 굳이 낙제시키려 하였더니, 참시관은 천천히 말하기를, “아깝다. 이 사람이여, 크게 철성(鐵城) 이씨의 기골(氣骨)이 있으면서도 낙방하였구나.” 하였다. 뒤에 들으니 내 조카 완(琬)이었다. 책에 쓰인 복봉국시(伏奉國試) 넉 자는 내가 손수 쓴 것인데 나의 친구 이절(李節)이 이전에 나에게 청하여 쓴 것이었다. 내가 피혐하여 잠자코 가부를 말 못하였더니, 참시관이 다 읽고 나서 차등하기를 청하므로 내가 참시관의 말을 좇아 결국 낙제시켰다. 완은 나의 철성과 같고, 절은 내가 쓴 글씨로 피혐함으로써 합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일이 석왕의 일과 같을 것이니 역시 웃을 만하도다.
청파극담(靑坡劇談).5
○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공은 성질이 고항(高亢)하여 한 번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니 물러나 탄식하기를,“남아가 세상에 나서 마땅히 뜻이 높아야 하는데, 어찌 과거 공부로 백일(白日)의 아래에 재주를 다투어 평생 진취의 매개로 하겠느냐.”하고는 마침내 과거에 응시하지 아니하였다. 능원군(綾原君) 구문신(具文信)공은 재예(才藝)가 남달리 뛰어나 무과 시험을 부끄럽게 여기고 말하기를, “하필 과거를 하여야만 입신할 수 있겠는가.”하고, 그 날로 그만두고 가버렸다. 세조가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노래로 기념하였는데, 그 법은 구리를 주조하여 그릇을 만들어 24위(位)에 나열하고, 그 가운데를 비워 구리쇠 기둥을 세우며, 옆으로 구멍을 뚫어 그 위에 구리쇠 저울을 놓고 낮추고 올리면서 보게 하였으니, 규형(窺衡)이라 불렀다. 땅을 측량할 적에는 영구(靈龜 지남철)로 사방을 바로잡으니, 오시(午時) 초일각(初 一刻)이 어느 표에 멀고 가까운가를 알려면 먼저 묘시(卯時) 초일각이나 혹은 유시(酉時) 초일각에 표를 해서 엿보게 하고, 다시 묘시와 유시에 표한 곳을 이전에 방법으로 사방(四方)을 바로잡아 정오 초일각에 표한 곳을 어느 방위 몇 각(刻)으로 정한다. 이렇게 한 후에 명당(明堂)으로부터 끈으로 앞의 묘시 초일각까지 재어서 1천 1백 척에 표하면 세 곳의 오정(午正) 1각의 표가 3천 3백이 될 것이니, 이것으로 24위를 바로잡고, 가로 세로와 구부러지고 바른 것을 모두 이것으로써 바로잡았는데 옳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일찍이 신과 김유(金紐)ㆍ강희맹(姜希孟) 등을 불러서 이 법을 강의하시고 후원에서 시험하게 하였는데,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곧 영릉(英陵)ㆍ사산(四山)을 측량하였으며, 그 뒤에 또 경성(京城)의 지형을 측량하도록 명하였는데 모두 이 법을 쓰게 하였다. 그러나 경성은 민가가 즐비하여 측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신등의 어리석은 의견을 참작하여 쓰셨으니, 한 성안에 무릇 표를 세운 곳은 모두 이 법을 써서 원근(遠近)ㆍ고저(高低)ㆍ대소(大小)ㆍ평험(平險)에 이르기까지 역시 종이에 베끼고 그 속에 24위를 정하고, 이에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하나를 측량하여 줄여서 작은 자로 하면, 다시 땅을 재지 않더라도 이 자로 땅 위에 그은 곳을 재어보면 번거롭게 걸으면서 재지 않아도 산하(山河)ㆍ천지(天地)ㆍ성곽(城郭)ㆍ실려(室廬)가 모두 제 곳을 떠나지 않고, 원근과 고저가 자연히 추호의 차이가 없게 되므로, 인자(印字)의 분명함이 그림으로 완성되어 임금님께 올리니, 대궐 안에만 두고 내놓지 않았다. 규형은 지금 관상감(觀象監)에 있다. ○ 호조 정랑 김순명(金順命)과 예조 정랑 박안성(朴安性)이 서로 친근하게 지냈는데, 예조는 청빈하고 호조는 부유하다. 박안성이 항상 호조 공궤(供饋)의 자본으로 김순명에게 요구하였는데, 하루는 박안성의 사자가 또 오니 김순명이 꾸짖기를,“줄 것이 없는데 어찌 내 불알[腎囊]은 가져다 먹지 않느냐.” 하거늘, 사자가 돌아가 박에게 고했다. 이때 월천군(越川君) 김길통(金吉通)이 예조 아판(禮曹亞判)이 되었는데, 바로 김순명의 아버지였다. 이에 박안성이 사자를 시켜 김순명에게 전하기를, “보내주신 불알을 그대의 아버지께 드리려고 하는데, 빨리 보내주면 좋겠네.” 하니, 김순명은 감히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 사람들의 말에, 집 남쪽에 까치가 와서 집을 지으면 주인이 벼슬을 한다고 한다. 전하는 속담에, 태종이 한 친구가 있었는데, 곤(困)하여 뜻을 얻지 못하고 임금님이 행차함을 엿보고, 종을 시켜 남쪽에 까치집을 만들게 하였다. 그런데 임금이 과연 사람을 시켜 묻기를,“왜 이렇게 하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집의 남쪽에 까치집이 있으면 꼭 벼슬을 얻는다 하는데 우리 주인이 오랫동안 벼슬을 얻지 못하므로 이렇게 합니다.”하니, 임금이 가련히 여기시어 벼슬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 까치집이 집에 있었는데, 내가 여러 아이들과 그 나뭇가지를 꺾으니 까치집 전체가 땅에 떨어졌다. 주둥이가 노란 새끼가 있었는데 그 죽는 것이 불쌍하여 남쪽이 복지(福地)라 하므로, 둥우리를 집 남쪽 회나무 위에 올려놓았더니 새끼들이 모두 자라 날아갔었다. 그 해 겨울에 선군이 군기녹사(軍器錄事)로서 정난(靖難)의 공에 참여하여 3급을 뛰어 봉례랑(奉禮郞)으로 제수되었고, 후에 청파(靑坡)에 별제(別第)를 지었는데, 집은 정남향이고 까치가 대추나무 위에 집을 지었는데 바로 남쪽이었다. 계집종이 나무를 하기 위해 헐어버리니 다음 해에 다시 그 나무 위에 집을 지었는데, 이때가 바로 예종(睿宗)이 즉위한 다음 해 기축년이었다. 내가 사회(司誨)로 뛰어 장령(掌令)을 배수하였는데, 신묘(辛卯)년 봄에 까치가 와서 부(府)의 남쪽 뜰 나무 위에 집을 지으므로,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까치집이 영험이 있다는 것은 예부터 있었던 말이요, 내가 일찍 증험이 있었으니, 부중(府中)이 모두 복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하니, 한 대장(臺長)이 말하기를, “이 까치집은 동쪽으로 조금 치우쳤으니 아마 집의(執義)를 위한 것이리라.” 하더니, 과연 집의 유경(柳輕)이 승지(承旨)를 배수하였다. 오래되어서는 까치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 집을 헐어버리고는 다시 바로 남쪽에 짓더니, 그 해 여름에 임금께서 누구누구가 직무에 능력이 있다 하여 포미(褒美)를 하교하고, 모두 한 자급씩 가자(加資)하였는데 나와 집의 손순효(孫舜孝)는 당상(堂上)에 올랐다. 갑진년 봄에, 까치가 다시 집 남쪽 대추나무에 집을 지었는데. 집을 짓지 않은 지 무릇 14년 만에 다시 지으니, 이상(二相) 정괄경(鄭佸景)이 농(弄)으로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그런데 여름에 과연 금띠를 두르고 영남을 안찰하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사람들의 말이 또한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 중원(中原) 박온(朴溫)이 일찍이 관서(關西) 대동강(大東江)에서 놀 적에, 소를 타고 가는 어떤 여자를 만났는데, 나이가 40 가량 되었으나 오히려 자태가 아름다우므로, 박온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그대는 보통 인물이 아닌데 왜 소를 탔는가.”하니, 그 여자는, “첩은 본래 서경 기생으로 젊어서 발을 다쳐 소를 타고 다닙니다.” 하니, 박온은 아주 기뻐하여 그 여자와 강 언덕에서 술을 마시면서, 그의 발 다친 연유를 묻고 또 보니, 양쪽 발의 발가락이 모두 없어져서 마치 형을 받은 사람 같았다. 박온이 이상히 여겨 묻기를, “왜 이런가.”하니, 그 여자는, “첩이 젊어서는 약간 재주와 용모가 있어 빈객들을 침실에 모신 적이 전후해서 여러 번이었으나, 대동찰방(大同察訪)만은 한 번도 모시지 못하였는데,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새 찰방이 오게 되었는데, 우선 성씨가 강씨(姜氏)라는 것만을 들었습니다. 첩은 이로부터 늘 강씨가 오면 절대 빼앗기지 않으리라 생각하였어요, 그런데 마침 부관(府官)이 배에서 손님을 전별할 적에, 기생 백여 명이 곱게 단장하고 풍악을 울리고 술도 얼근하게 되었는데, 멀리 강 동쪽 언덕에 말 달리는 먼지가 일거늘, 마침 물어보니 새로 오는 대동찰방이었습니다. 첩이 이에 안으로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고, 밖으로는 안색이 변하여 구부렸다 일어나 바라보니, 작달막한 체격에 자색 수염이었어요. 비록 남을 움직일 만한 풍채는 아니었지만, 첩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탓으로 눈은 잠시라도 찰방에게서 떠날 수가 없었고, 이미 앉아서 술을 두어 순배 하고는 대동(大同)이 차례대로 술을 따랐는데 소윤(小尹) 윤처공(尹處恭)이 첩을 보면서 말하기를, ‘손님께서 술을 따르신다니 잔을 올려라.’ 하는데, 첩은 자신도 모르게 쓰러졌다가 몸을 일으키니 소윤이, ‘이상하다. 그 기생이여.’ 하였어요. 술이 끝나고 주객(主客)이 모두 성으로 들어가는데, 첩도 대동의 뒤를 따라 질주하니, 몸은 나는 듯 가벼웠어요. 유숙하는 집에 이르러서는 밤새도록 잠만 자고 아무 말도 물어보지 않았고, 다음날도 그러하였고 또 다음날에도 그랬어요. 첩은 혼자 나의 용모가 저분의 맘에 들지 않을까 두려워 부끄러움과 탄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지 3일이나 되었는데, 그 다음날에 첩을 불러 즐겼는데, 이때부터는 먹어도 맛을 모른 채 한두 달이 지났어요. 마침 첩의 어머님 병환으로 서울에 가게 되었는데, 양계 도체찰사(兩界都體察使) 황보인(皇甫仁) 공이 또 부에 이르니, 부관(府官)이 첩으로써 침실에서 모시게 하였습니다. 황보인 공은 첩을 좋아하기를 강씨보다 더하였으나, 첩이 강을 위하는 마음은 하늘에 해가 있는 것 같아서, 비록 공을 힘써 접대하기를 하였으나 사실은 복종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관의 위력으로 공을 따라서 관서(關西)를 돌고 후에 동북계(東北界)로 들어가니, 하루는 공이 경흥(慶興) 언덕에 올라 야인(野人)의 땅을 바라보면서 처량하게 첩에게 말하기를, ‘눈에 보이는 곳은 모두 되놈 땅, 집은 어디 있는고. 만약 이 늙은이가 불행하여 너와 영결(永訣)한다면 너는 어떤 마음을 갖겠는가.’ 하기에, 첩은 강씨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저도 발끈 성을 내며, ‘비록 이렇게 하고 있으나 첩의 잘못이 아니요.’ 하였더니, 공은 실없이 웃을 뿐 말이 없더니, 그 뒤로는 다시 첩과 더불어 말하지 않았어요. 본계(本界)로 돌아오니, 부관이 벌써 이 사실을 듣고는 다른 기생을 뽑아 빨리 보냈으나, 공이 그 기생과는 더불어 교제하지 않으니, 온 관내가 놀라 모두들 첩더러 복이 없다고 하였어요. 공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어 감사와 부관이 배를 띄우고 성대히 전별 잔치를 하는데, 공이 끝까지 앉아서 희색이 없더니, 헤어질 때에 임하여 첩을 가리키며 소윤에게 말하기를, ‘이제 그대의 기생은 돌려보내고 다른 기생을 태우고 가겠다.’ 하니, 소윤이 무척 화가 나서 첩을 수도 없이 매질하니, 발가락이 다 달아나 1년을 자리에 누웠다가 결국 병신이 되었어요. 첩의 이 병은 강을 사랑한 때문이었지요. 그 후에 소윤과 판관이 이어 폄출(貶黜)되었고 대동찰방도 혁파되었는데, 그 당시 한 첩이 지아비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그 화가 결국 이와 같은데 이르게 되었어요.”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고 박온이 말했다. ○ 정승 허조(許稠)는 강정(剛正)하게 법을 지키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정(私情)으로 간청하지 못하였다. 매양 부모의 기일을 당하면, 반드시 그의 모부인(母夫人)이 손수 지은 어릴 때 입던 푸르고 작은 단령(團領)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치재(致齋)하였고, 자제들의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때렸다. 아들 둘이 있는데, 큰아들은 후(詡)인데 참찬(參贊)이요, 작은아들은 눌(訥)인데 역시 높은 관직이다. 마침 큰 가뭄이 들었는데 눌이 항의하기를,“성 안에 변소가 많아서 더러운 기운이 위로 올라 한해(旱害)를 이루니, 청하옵건대, 다섯 집에 변소 하나씩만 두게 합시다.”하고, 또 우물에 이르러 물을 긷다가 우연히 파란 이끼가 꿈틀거리면서 물결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것을 가지고 정원(政院)에 바치면서 말하기를,“용이다.” 하였다. 공이 후를 불러 말하기를, “후야, 사당에 고하고 눌을 때려 주어라. 만일 다섯 집에 변소 하나씩을 둔다면, 저의 처도 아침저녁으로 다른 집 변소에 다니도록 하려 하였더란 말이냐. 또 이끼를 용이라 하고 바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였다. 공의 형 주(周)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써 치사(致仕)하였는데, 공이 매양 정부에서 합좌(合坐)할 때에 닭이 울면 반드시 형에게 가고, 갈 적에는 반드시 동구(洞口)에서 하인을 떼어 두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주도 역시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밤마다 의관을 바루고 등불을 가리켜며, 자리를 베풀어 몸을 안석에 기댄 채 기다렸다가 공이 오면 반드시 작은 술상을 차렸다. 공이 천천히 묻기를, “오늘 정부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하면, 주는, “내 의견에는 마땅히 이러하면 좋겠네.”하였다. 공은 기뻐서 물러나와 말하기를, “옛날에 ‘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하였다.’ 하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로다.”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6
○ 참찬(參贊) 정갑손(鄭甲孫)은 용모가 괴걸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성품이 재산 모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망석(網石)에 앉고 누워서도 편안하게 여겼다. 그러나 손님이 오면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술상을 차렸으며, 친척을 대우함이 내외가 없었다. 일찍이 승지가 되었을 때, 모부인(母夫人)이 구하는 것이 있어 글을 청하였는데 공이 굳이 거절하니, 부인이 노하여 판서 바로 그의 아버지 흠(欽)이다. 에게 고하였다. 그런데 판서는 웃으며 말하기를, “부인은 화내지 마오. 비록 부인은 거절하였지만 나야 어찌 안 된다 하겠소.” 하였다. 그가 대사헌이 되어서는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여, 세상을 현혹시키는 올바르지 못한 승니(僧尼)의 부류를 마음대로 서울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여러 번 직언(直言)으로 임금의 뜻을 범(犯)하니, 조정이 숙연(肅然)하였다. 그때 정승 하연(河演)이 이조 판서를 겸하고, 재상(宰相) 최부(崔府)가 정판(正判)이 되어, 어느 날 아침에 계(啓)를 올리고, 계가 끝나서 대간(臺諫) 이상이 차례로 나가는데,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하연과 최부는 물러가지 말라.” 하고, 이어 정사의 실책을 극히 간하니, 연과 부가 엎드려 땀을 흘리며 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였다. 물러나서는 하와 최를 보고 담소가 자연스러워 조금의 사색(辭色)도 없으니, 당시의 언론이 위대하다고 하였다.
○ 창령(昌寧) 성간(成侃) 화중(和仲)은 젊어서 문장을 잘 지어 진일집(眞逸集)이 세상에 전하였다. 겉모습은 추하여도 집현전에 연회가 있으면 반드시 화중을 맞이하여 객으로 앉게 하니, 이로부터 사림(士林)에서 생김새가 추한 자는 좌객이라 하였다. 그의 아우 현(俔형) 경숙(磬叔)도 형과 비슷하였으나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이상(二相) 한산(漢山) 이평중(李平仲) 파(坡)는 스스로 풍채로서는 당세에 제일이라 하였으나, 얼굴 위에 수염이 있으므로 공을 희롱하는 자가,“윤길생(尹吉生)과 비슷하다.” 하니, 이 중추(李中樞)가 매우 싫어하였으니, 대개 윤(尹)은 얼굴이 험상궂고 수염이 많기 때문이었다. 우리집에 잔치가 있어 정승 홍익성(洪益成)ㆍ이공(李公 )ㆍ성공(成公)과 여러 재상이 잔뜩 모였을 때, 성이 사옹원 정(司饔院正)이 되었으므로, 이가 성에게 눈짓하며 낭랑히 읊기를, “손님이 있구나, 손님이 있구나. 성옹정이여[有客有客成饔正],” 하니, 여러 공은 무슨 뜻인 줄 몰랐지만 평중(平仲)이 스스로 풀이하기를, “손님이 있구나의 손님은 좌객(坐客)이란 손님이구나.” 하니, 성이 일어나 시로서 대하기를, “수염 많다. 수염 많은 윤길이여[于偲于偲尹吉生],” 하니, 만좌하였던 사람들이 우스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절도하였다. 이때 사재(四宰) 현석규(玄碩圭)가 모양이 추하였다. 일찍이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한 재상 댁에 갔는데, 부인이 창틈으로 내다보고 웃더니, 성이 한림(翰林)으로 역시 그 댁에 가니, 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실성(失聲)하여 말하기를, “전일 사인은 비록 추하기는 하여도 사람 같더니, 이번 한림은 사람 형상과 비슷하지도 않으니, 어찌 아니 웃으리오.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선비를 뽑을 적에 성을 보고는 웃으며 말하기를, “네 비록 재주는 있으나 모양이 너무 추하니, 관직은 괜찮지만 승지 같은 가까운 자리는 불가하다.” 하니, 지금까지 성(成)을 일러 어람좌객(御覽坐客)이라 한다. ○ 내가 젊어서 뜻을 얻지 못하여 남주(南州)에 묻혀 있었는데, 진주(晉州) 기생 승모란(勝牡丹)이 서로 헤어질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손님께서 이제 서울에 가시게 되면 어느 때 다시 오시며, 무슨 벼슬을 해 가지고 오시겠소. 하동 현감(河東縣監)이 좋다고는 하나 가족이 있으니, 만호(萬戶)가 되는 것만 못하겠어요.”하므로, 내가 말하기를,“이번에 가서 감사가 되어 오려는데, 어찌 녹록하게 만호나 수령이 되겠는가.” 하니, 승모란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졸도하기에, 나는 주머니에서 약을 내어 먹이려고 하니, 승모란이 웃으며 말하기를,“바보 같은 양반아, 첩은 손님이 감사가 된다는 말이 비위에 거슬렸으므로 배가 아프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모르고 함부로 약을 꺼내어 주니, 바보 같은 양반이오.” 하고는 곧 크게 웃었다. 그 해 봄에, 세조가 온양(溫陽)에 거둥하여 선비를 뽑는데, 내가 제1위로 발탁되어 성균 직강(成均直講)을 배수받고, 7년 만에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다시 진주에서 놀았고, 또 11년이 지나 본도의 감사가 되었는데도 승모란이 아직 아무 탈 없었다. 유림이 많이 이 제목으로 읊어 그 행적을 사치스럽게 했으나 시가 많아 적지 못한다.
○ 사람들이 말하건대, 개(蓋)씨 성을 가진 대상(大相)이 있었는데, 밤마다 매일 그의 부인이 잠든 틈을 타서, 살짝 몰래 종이 있는 곳에 갔다 오므로, 하루는 부인이 거짓 자는 척하고 코를 고니, 송이 곧 몸을 빠져 나가는지라, 부인이 몰래 일어나 그 뒤를 따른즉 공이 한 종의 방에 들어가니, 종이 욕하기를, “절병(節餠) 같은 부인은 어디 두고 이런 누추한 종의 방에 왔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너를 산 겨자[山芥沈菜]로 만드는 것이 좋겠느냐.” 하더니, 이윽고 나가 돌계단 위에 앉아서 볼기를 식힌 후에 부인이 있는 방에 들어와서는 말하기를, “아이고 배야, 변소에 오래 있었더니 볼기가 차가워졌네.”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이렇게 배가 아픈데, 어째서 산 겨자는 먹지 않소.”하니, 공이 깜짝 놀라, “그만두오. 부인은 참 영( 靈)하오.” 하였다. 또 어느 날 밤에, 비가 몹시 오고 번개가 치는데, 공이 다시 부인이 잠든 틈을 타서 부엌에 들어가 큰 표주박을 찾아 머리에 쓰고, 종의 방에 들어가거늘 부인이 알고 몰래 방망이를 들고, 문틈에서 기다렸다가 공이 문 안으로 들어오자, 부인이 방망이로 갑자기 그의 머리 위의 표주박을 치니, 공은 벼락이 또 치는 줄 알고 놀라 땅에 엎드려 오래 있다가, 들어와 부인에게 말하기를,“우리집은 부자가 될 징조가 있으니 즐거운 일이다.” 하였다. 부인이,“무슨 말씀이십니까.”하니, 공은 “사람들 얘기에, ‘조그마한 벼락을 만나면 집안이 반드시 부자가 된다.’ 하였는데, 내가 마침 변소에 갔다가 조그마한 벼락을 맞았으니, 어찌 부자가 될 징조가 아니겠는가.” 하여, 부인이 웃자 공도 또한 웃었다.
○ 양천군(陽川君) 허모(許某)는 용모가 웅장하고 풍채가 준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대인군자(大人君子)로 일컬었다. 젊을 때부터 학식이 넓고 글을 잘하여, 천문(天文)ㆍ율(律)ㆍ역법(曆法)ㆍ의(醫)ㆍ복(卜)의 기예(技藝)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또 활쏘기ㆍ말타기도 능하여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반드시 공(公)을 원수(元師)로 삼았다. 그러나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거처하는 집은 겨우 바람과 햇빛을 가릴 정도였으나 마음만은 담담하였다. 소년시절에 벗과 한 곳에서 독서하는데, 어떤 도둑이 옷과 신을 훔쳐가서 다음날 각각 자기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 식사 때 공은 벗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가거라. 나의 장인은 나를 못났다고 여겨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도 무척 나무랐는데, 오늘 옷과 신을 잃어버렸으니 어떻게 가겠는가.” 했다. 친구가 방을 나서니 공은 누워서 낭랑히 읊기를, 내 옷을 이미 도둑질해 갔는데 / 旣吾衣之偸去兮 또 어찌 신도 도둑질해 갔는가 / 又胡爲乎盜鞋 신도 옷도 도둑질해 갔으니 / 旣偸衣又盜鞋兮 도선생은 도둑질하려해야 가져갈 것이 없구나 / 竊爲盜先生不取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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