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언제나 특정한 혈통의 창조물이며, 형식에 매인 예술의 본질은 같은 혈통을 지닌 존재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1930년
19. 금융 위기
1927년 7월 14일, 미국 뉴욕 증시의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가 단 하루 만에 20%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훗날 “검은 목요일”로 불리게 되는 이날의 대폭락은 미국 경제의 외형적 번영 아래에 잠재되어 있던 구조적 모순을 송두리째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전 세계 금융시장에 연쇄 충격을 일으킵니다. 이른바 ‘광란의 20년대’로 불렸던 미국의 대호황은 실물경제보다는 금융사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특히 RCA를 필두로 한 전기전자 산업의 주식은 상장만 하면 상한가를 기록하는 등 투기 열풍이 극심하였으며, 일부 인사들은 테슬라의 제자를 자처하며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해 부를 챙기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품을 우려한 농무부와 내무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멜런 재무장관은 감세와 금리인하를 통해 일시적인 연명을 꾀하는 데 그쳤습니다.
1927년 2월부터 선물시장을 중심으로 패닉 셀이 확산되었고, 3월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조차 개입을 시도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부실한 전기전자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졌고, 이들에 연계된 투자은행, 보험사, 대기업들까지 줄도산의 길을 걷게 됩니다. 투자자 12명이 집단투신한 사건은 공황의 상징이 되었고, 뱅크런과 주식 매도 열풍은 미국 전역을 뒤흔듭니다.
독일 정부는 이러한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뉴욕 증시에 물려 있던 자산을 긴급히 인출함으로써 최악의 경우를 피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독일 내 주요 대기업들의 주주는 대부분 미국계 투자자였으며, 이들의 자금 회수는 국내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드 행정부는 관세법 특별조항 제66조 발동을 예고하고 있었고, 독일 내에서는 대통령 비상대권을 통해 미국 자산을 동결 및 수용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까지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발 공황은 곧 영국으로 전이되었고, 런던 증시가 흔들리자 대형 은행들이 지급불능 사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연계된 프랑스, 이탈리아, 기타 중유럽 국가들도 연쇄 충격을 피하지 못하게 됩니다. 독일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대기업의 초과이윤과 세수로 운영되던 ‘국민경제기금’은 기업 도산과 구조조정으로 실직자가 급증하면서 사실상 지급 불능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1927년 11월 기준 실업률은 8.9%에 달하며, 이는 이전의 세 배를 넘는 수치였습니다.
언론은 이 사태를 ‘실업보험 위기(Arbeitslosenversicherungskrise)’로 명명하고 대대적인 보도를 이어갑니다. 정국은 혼돈에 빠지며, KPD, FDP, FKP, DStP 등 주요 야당들이 뮐러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나섭니다. 국민경제기금은 지급중단 또는 파산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정당 간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독일 내에서는 긴축정책이 논의되었고,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장감독위원회’의 설치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자유주의 야당의 주장으로 인식되어 큰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죠. 이러한 와중에 빌헬름 쿠노는 여권을 향해 장기적 관점의 고통 감내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단기 현금살포나 임기응변에 불과한 정책은 실업자들을 거리에 내몰 뿐이라 비판합니다. 이는 정치적 논쟁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고, 경제정책의 중심축에 대한 노선 차이가 격화됩니다.
DRG는 특집방송을 편성하여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조명하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일부 편집하여 여권을 공격합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뮐러 총리는 DRG 사장 도리나 리하르츠슐러를 해임하는 초강수를 두지만, 이는 직권남용이라는 비판을 불러오며 역풍을 맞게 됩니다. 도리나는 베를린 방송공장을 통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섭니다. 그녀의 음성은 독일 전역에 퍼졌고, 일간지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쓰며 여론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ADGB마저 뮐러 내각 지지를 철회하게 되며, 정국은 심각한 혼란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사민당은 내부적으로 분열합니다. 힐퍼딩, 카우츠키, 하세 등으로 구성된 노장파는 내각 결사옹위를 외치며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고수하려 하고, 반면 아우프호이저, 유하츠, 에렌코펜 등 소장파는 “인민 정당”으로의 변화를 요구하며 베른슈타인식 사회민주주의로의 노선을 제안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사회민주주의연합(SPU)’이라는 명칭으로 선거 준비를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유주의 및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자민당과 보수당, 농민당, 인민국가당 등의 인사들이 연합하여 ‘독일 자유-인본연합(Freiheit und Menschlichkeit – Deutschland)’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체를 조직합니다. 이들은 거리로 나서 시민 불복종운동을 전개하며, “뮐러 내각 사퇴하라!”, “자유민주주의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칩니다.
이와 동시에, 빌헬름은 경제당과 기민련의 뒷배경에서 움직이는 프란츠 폰 파펜의 정치공작 네트워크에 대한 비밀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파펜은 다양한 정당을 오가며 은밀히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정치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SPD 당권파는 내부 숙청에 나섰고, 소장파 의원들은 탈당을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SPU는 ‘긴축 반대’를 전면에 내세운 선거 캠페인을 시작하며 기존 사민당과의 결별을 분명히 합니다. 도리나의 방송공장은 ‘파펜 서클’ 관련 폭로를 이어가며 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의 사퇴를 이끌어내고, CDU-CSU는 위기의식 속에 당내 결속을 다지는 분위기로 전환합니다.
자유민주당은 극우와의 절연을 선언하며 FKP와의 제휴마저 재검토하게 되었고, DStP는 “애국은 죄가 아니다”라는 구호와 함께 중도우파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갑니다. 한편, KPD는 내부의 부하린파를 출당시키며 정당 정비에 성공하고, 하인리히 브란들러를 중심으로 한 KPO가 창당되었죠.
19-1. 정계 개편
1928년 초 총선은 독일 정계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총 495석 가운데 자유민주당(FDP)은 무려 190석을 확보하며 단독 과반에 육박하는 최대 정당으로 부상하였습니다. 반면, 기존의 중도좌파 중심축이었던 사민당(SPD)은 43석에 그치며 치명적인 패배를 겪었고, 탈당파들이 조직한 사회민주주의연합(SPU)은 36석으로 새롭게 원내 진입에 성공하였습니다.
공산당(KPD)은 40석을 유지하며 일정한 기반을 지켰고, 출당된 브란들러 계열은 독일공산당 반대파(KPO)를 결성하여 11석을 얻었습니다. 보수진영에서는 기독교민주연합(CDU/CSU)이 76석을 확보하였으며, 국민보수당(DStP) 또한 49석으로 상당한 약진을 보였습니다. 농민계 정당인 바이에른농민당(BB)은 16석, 민족주의계 정당(DAP)은 5석을 얻었습니다.
총선 결과를 바탕으로 구성된 치머만 내각은 자유주의 중도 연정의 색채가 강하였습니다. FDP 소속의 게오르크 치머만이 총리에 선출되었고,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국민자유당(FKP) 출신의 얄마르 샤흐트가 맡게 되었습니다. 외무장관에는 발터 라테나우, 내무장관에는 도리나 리하르츠슐러, 국군장관에는 한스 루터가 각각 임명되었으며, 이들 모두 자유민주당 소속이었습니다.
이번 내각은 정치적 균형보다는 정책 안정성과 통치력 확보에 중점을 둔 구성으로 평가받았습니다. 특히 재무장관 구스타프 슈톨퍼, 노동장관 테오도어 호이스, 교육장관 게르투르트 보이머 등 주요 부처 수장들이 모두 FDP 출신이라는 점에서, 자유주의 중심의 기술관료 체제라는 인상이 강하게 드러났습니다.
헌법 개정도 이어졌습니다. 자유민주당은 유권자 10분의 1의 서명을 통해 “건설적 불신임제 도입을 위한 공화국 헌법 개정안”을 국민발안 형식으로 상정하였고, 의회는 해당 개정안을 유효 투표수 495 중 찬성 388, 반대 107로 가결시켰습니다. 이로써 공화국 헌법은 과반수 찬성으로 새 총리 후보를 선출하지 않으면 불신임이 불가능하도록 수정되었으며, 정국의 안정성과 책임정부 원칙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사민당의 분열은 지속되었습니다. 소장파는 ‘사회민주주의자 연합(SPU)’의 정식 창당을 추진하며 “빌레펠트 강령”을 채택하였습니다. 해당 강령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명확한 이탈, 실질적 노동자 권익 보호, 소수자 인권의 보장 등을 내세우며 포괄적 사회개혁 정당을 표방하였습니다. 독일노조총연맹(ADGB)은 이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기존 SPD와의 거리를 벌렸습니다.
한편, 도리나는 내무부 장관으로 공식 임명되었으며, 구스타프는 국방위원장으로, 막시밀리안은 정보본부장으로 각각 발탁되었습니다. 빌헬름은 의회 외교위원장, 카를은 사회복지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이들 모두 새 정국의 핵심 조정자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공화국은 한 차례 폭풍을 지나 새로운 정치 균형 속에 진입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부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잠재되어 있었으며, 경제위기의 여진과 국제정세의 불확실성은 향후 또 다른 국면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20. 경제위기대책위원회
1928년 4월, 국가신용은행(크레디트방크)은 독일 내 중소 은행 다수가 지급불능 직전에 이르렀으며, 이 여파가 대형은행들의 부실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중대한 경고를 내놓았습니다. 이는 곧 예금 시스템의 붕괴, 기업 도산, 실업률 폭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고, 정부는 즉각 대응에 착수했습니다.
치머만 내각은 경제위기대책위원회를 발족하고, 오이켄, 미제스, 슘페터 등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을 모아 해법을 모색했습니다. 위원회는 “망할 곳은 망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부실 금융기관과 기업을 과감히 구조조정하는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세기업의 도태는 불가피했으며, 그로 인한 실업 증가와 복지 부담 역시 예상되었습니다.
프렌츨라우 정보본부장은 시장의 독과점을 방지하고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 ‘시장감독위원회’를 신설하자고 제안했고, 이는 내각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위원회는 감독뿐 아니라 부당거래, 정경유착, 분식회계까지 감시하는 강력한 권한을 갖도록 설계되었으며, 초대 위원장에는 CSU의 에두아르트 하이만이 임명되었습니다.
정부는 다음과 같은 6대 정책을 긴급 도입했습니다.
1. 부실 은행에는 고이율·고담보 조건의 단기 구제금융을 제공하고, 자산이 회수되지 않을 경우 압류 및 공시가 매각 조치
2. 도산절차의 간소화를 위한 도산법 개정
3. 소액 예금자 보호를 위한 예금자 보호법 신설
4. 연구개발 및 설비투자에 대한 세액감면, 대신 소비세 인상
5. 대통령 직속 시장감독위원회 설치
6. 회계감사원의 합목적성 감사권 도입
이 조치들은 대통령 슈테거발트의 승인을 받아 한시적 비상조치로 시행되었으며, 이후 정식 입법을 거치는 조건으로 발효되었습니다. 기업들은 자산을 대거 청산하기 시작했고, 금융자산이 싼값에 시장에 풀리면서 대기업들에게 유리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장감독위의 개입으로 초거대기업 통합 시도는 여러 차례 차단되었습니다.
5월 1일, KPD는 대규모 가두행진을 감행했으나, SPD는 이에 동참하지 않았고 CDU/CSU는 이를 질서 유지의 명분으로 활용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지만, 대중은 급진세력에 동조하지 않았고, 정부는 언론 네트워크를 활용해 ‘공화국의 수호자’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 덕분에 독일 경제는 최악의 붕괴를 피할 수 있었고, 대형 금융기관과 핵심 산업체들은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실업률은 여전히 높았고 사회안전망도 미비했지만, 뱅크런을 잠재우고 시장 질서를 회복한 것만으로도 내각은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국 자본의 이탈은 여전히 독일 경제의 목을 조이고 있었고, 세계무역 역시 본격적인 회복 국면에 접어들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수는, 이제 정치가 아닌 전략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21. 공화국의 무력
1929년 초, 미국발 금융위기가 일단락된 가운데, 사회민주당(SPD)은 익명의 투서 형태로 국군 방첩국(Abwehr)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극비문서를 전달받았습니다. 이 문건에는 경제위기가 심화되어 극좌·극우 세력이 준동하고 공화국이 붕괴 직전에 이르는 시나리오를 가정하며, 대통령의 인가 하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좌파 인사들을 체포한 뒤, 군이 주도하여 비상내각을 수립하고 공화국을 수호한다는 계획이 상세히 담겨 있었습니다.
문건의 충격적인 부분은 프랑스와의 전면전을 명시한 부분이었습니다. 독자적인 기갑전술과 공수낙하 작전을 통해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 섬멸하고, 소련이 개입하기 전에 악시옹 정부를 붕괴시키며, 런던에 있는 프랑스 공화주의 망명정부와의 협조, 이탈리아와의 임시 동맹을 통해 승리를 도모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계획은 마치 실행을 목전에 둔 수준의 세부성과 정교함을 지니고 있었고, 이에 SPD는 즉각 당 내에 비밀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SPD의 좌파 인사 쿠르트 로젠펠트가 위원장을 맡고, 전 정부 구성 당이었던 SDAB, CDU, CSU 등에서 한두 명씩 참여한 비밀 진상조사작업반은 국군과 접촉하여 상황을 파악하려 하였습니다. 국군 정무국장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소장과 의회 연락관 알프레트 요들 소령은 접견에 나서 유출자를 색출 중이며 의회와의 정보 공유를 희망한다고 밝혔으나, 로젠펠트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대화 자체에 회의를 표했습니다. 그는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내세우며 군이 임의로 쿠데타와 전쟁을 계획한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고, 같은 위원회 소속인 보수 성향의 카를 뢰벤슈테른은 군 소장파의 숙청이 오히려 융커 노장파의 득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였습니다.
소장파 장교들, 이른바 ‘현대전 연구회’ 출신들은 중국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군사 교리 개혁파로, 공화국에 비교적 충성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공화국의 승인 없이 프랑스를 상대로 침공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나자, 그들의 공화국에 대한 충성조차 의심받게 되었습니다. 룬트슈테트는 해당 문건이 총참모장의 서명이 찍힌 정식 내부 검토자료라고 인정했으며, 당시 총참모장 오토 하세 장군의 책임론도 불거졌습니다.
슈테거발트 대통령은 상황 보고를 받은 뒤 격노하였으며, “정부의 무능을 근거로 한 비상대권 발동은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는 정부가 주도권을 가진 상태에서 사태를 수습할 것이며, 국군의 무단행동을 결코 묵과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 아래 내무부, 보안본부, 정보본부가 연동하여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작전을 개시하였고, 1월 6일 군 헌병부는 반란음모자 157명을 구속했다고 공식 발표하였습니다. 룬트슈테트와 함께 계획을 작성한 오스발트 루츠 소장, 만슈타인, 구데리안 등 소장파 실무자들이 무더기로 체포되었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이번 숙청으로 국군 내 소장파, 즉 ‘친공화국파’는 사실상 몰락하였습니다. 주도권을 넘겨받은 노장파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으며, 어떤 이는 이를 문민정부의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공화국에 협조하는 제스처를 취하였고, 일부는 인민국가당에 입당해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은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독일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며 인민국가당 입당을 공식화하였습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군(Reichswehr)은 국방군(Wehrmacht)으로 개칭되었고, 국방부(Ministerium der Verteidigung)가 신설되면서 문민 정부의 일상감사 및 회계감독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습니다. 베를린 근위연대는 사단급으로 증편되어 국방부 직속부대로 재편되었으며, 국군의 작전계획, 교리, 교육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감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쟁대학 교장 칼 하우스호퍼가 ‘독일인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동방진출’을 공개적으로 교육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더했습니다.
CDU/CSU 당 소속이었던 카를 폰 뢰벤슈테른은 당 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출당 조치되었으며, 비례대표제로 인해 의원직도 자동 상실되었습니다. 그는 직접적 내란 가담 혐의는 받지 않았으나, 군 내 쿠데타 계획에 대한 반응이 부적절했고 비상대권 통치를 간접적으로 건의한 정황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내무장관 도리나 리하르츠슐러는 여야 정당들과 공동으로 정치적 규탄문을 발표하며 국군 내 음모세력을 비판하였으나, 이후 ‘리하르츠 스캔들’이 불거지며 정국은 다시 한 번 요동쳤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CNT 창립멤버인 보구밀 리하르츠였고, 그의 누이가 소련 공산당 당평의회 대의원 율리아나 우스트랼로바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도리나가 국제공산주의와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내각은 이 사안에 대한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도리나를 ‘부분개각’ 형식으로 경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독일공화국은 군부의 정치개입이라는 고질적 문제를 제도적으로 통제하는 데 일보 전진했으나, 동시에 공화국에 우호적이었던 군 소장파를 숙청함으로써 미래의 군부 재편에 또 다른 불안요소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정치권은 혼란의 수습 과정에서 대통령 슈테거발트의 원칙적 입장에 기대어 안정을 도모하였지만, 이번 사태가 국제적으로 남긴 파장과, 내부에 남은 균열은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22. 서부전선 이상없다
1928년 초,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가 출간되어 세계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전쟁의 참혹함을 전면적으로 고발한 이 작품은 곧 유니버설 픽처스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유럽 배급권은 독일의 국책기업 TAMPA가 확보했습니다. 무려 ‘심판의 날’보다 7배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초대형 무성영화로, 북미 개봉 이후 기록적인 흥행을 올렸으며, 1929년 3월 독일 개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대사로 대표되는 반전 메시지와 노골적인 반애국주의적 연출로 인해, 독일 내 민족주의 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DStP의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인을 자학적으로 만드는 역사관”이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FKP 내에서도 TAMPA라는 국책기업이 이를 배급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내부적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군에서도 영화가 전우의 희생을 모욕한다고 격분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이에 대해 SPD의 한 의원이 “다음 전쟁엔 그런 자칭 애국자들이 참호로 알아서 기어들어가라”고 말해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FM-도이치 프란츠 젤테가 주도한 청년조직은 영화 시사회장에서 “의견을 표출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사태는 전사회적 분쟁 양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FDP를 지지하던 “청년독일인 기사단”까지 반대운동에 합류하면서, 영화에 대한 반감은 단지 극우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내무장관 루트비히 크비데는 이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불관용에 대한 관용은 있을 수 없다”며 전국 상영관에 주경찰과 치안경 배치를 검토했고, SPD와 SDAB 역시 이를 지지했습니다. 반면 CDU/CSU와 FKP는 사태의 과도한 정치화를 우려하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 와중에 SDAB의 신임 전국위원장 에렌코펜은 “영화 하나로 나라 전체가 이 지경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며 씁쓸하게 말했습니다.
우익 진영의 반대는 단일하지 않았으며, 다양한 성향의 민족주의 단체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직접적인 무력 사용은 자제하되, 시사회를 방해하거나, 영사기에 타르를 붓는 방식 등 간접적인 방해 활동이 예고되었습니다. 대중들 대다수는 오히려 영화 자체에 관심이 높았으며, ‘심판의 날’의 후속작이라 할만한 이 작품을 놓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 사태가 “공화국파 대 반공화국파”의 이념 구도로 확산될 가능성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슈타틀러는 이를 정면 돌파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극우가 영화를 반대해 주류로 부상하는 걸 그대로 놔두자”며, 오히려 대중매체를 통해 대전쟁의 참상을 상기시키는 방향으로 프레임을 재구성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도리나 리하르츠슐러는 경찰력 투입보다는 영화관들이 자율적으로 경호를 담당하도록 유도하고, 필요시 사설 경호 인력을 고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비공식적으로 재정지원을 하자는 타협안을 제안했습니다.
정보본부장 프렌츨라우는 한 발 더 나아가, “영화를 그대로 상영하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극우 세력이 실제로 물리력을 행사할 경우, 그 순간을 포착해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습니다. 이 구상이 높은 지지를 받으면서, 정부는 ‘공안의 사전억제’가 아닌 ‘후속기획’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민족주의 세력 중 하나인 청년독일인 기사단은 전쟁문학 『강철 폭풍 속에서』를 숭배하는 집단이었고, 우연히도 해당 소설의 저자 에른스트 윙어와 레마르크는 개인적으로 우호적 관계였습니다. 이를 본 정보당국은 아예 ‘영화 대 영화’의 구도를 만들자는 방안을 밀어붙였고, TAMPA는 즉각 『강철 폭풍 속에서』의 영화화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크비데의 영화관 경비계획은 공식적으로 폐기되었고, 대신 각 상영관은 민간의 자발적 경비와 경호로 치안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좌파 진영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경호원’으로 활동하였고, 이들은 프랑스 왕당파, 이탈리아 파시스트, 소련 공산주의 모두에 반대한다는 의미의 ‘세 개의 화살표’를 로고로 사용하며 강철 전선(Eiserner Front)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습니다.
한편, 우익 진영의 결집은 윙어의 영화화로 인해 오히려 분산되었고, 일부 극우 인사들만이 남아 영화 상영을 방해하려 했습니다. 이들은 영화관 주변에서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으나, 강철 전선의 청년들에 의해 격퇴되었습니다. 새로 개봉된 우익 영화는 꽤 진지하고 완성도 높은 연출로 호평을 받았으며, 이 영화의 인기에 자극받은 DStP의 괴벨스는 ‘제2의 문화투쟁’을 예고하며 새로운 영화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이 시기, 독일 내 좌우 문화전쟁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알 카포네와 해리 데이비슨 등은 밀주 및 유제품 판매를 통해 공작금을 조달해 미국 퇴역군인단체를 후원했고, 이들 수만 명이 워싱턴 DC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미첼 법무부 장관과 존 에드거 후버가 이를 ‘공산주의 동조자들의 시위’로 규정하자, 앨 스미스 대통령은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수도경비를 책임지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기병대와 장갑차, 전차까지 투입해 시위대를 초토화시켰고, 이 진압으로 898명이 사망하고 1,438명이 중상을 입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다룬 예술작품 하나로 시작된 논쟁은 독일 내 문화, 정치, 사법, 정보 체계 전반에 걸쳐 균열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나아가 대서양 양안의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표현의 자유와 국가주의’의 충돌이 어떻게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차들어 홍차야 일제가 만선사관같은 독을 잔뜩 퍼뜨리는 바람에 대동아주의자의 탈을 쓴 조선 국수주의자들이 만주국으로 넘어가서 중국인 거주지에다가 조선인 정착촌을 짓는다던지, 국내성 유적이랍시고 아무데나 문화보호구역을 지맘대로 지정해서 거기 사는 중국인들을 강제퇴거시킨다던지 하면서 깽판을 놓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제 업보 정산의 시간이..
@E.E.샤츠슈나이더 조선족 자치구는 못 생기고 로힝야족 취급 받겠네요...
근데 이거 현대 이스라엘 아닌가요...?
@E.E.샤츠슈나이더 중공과 조선인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봐도 무방한가요? 정율성 정도나 있나..?
@E.E.샤츠슈나이더 만협추 등장인물 중에서 한명은 여기선 학습회에 못 꼈겠군요.
@렌지파일 최현, 오기섭, 김무정, 김책, 최용건 등 초창기부터 가입했던 인사들 정도만 남았습니다. 물론 88여단으로 일찍 통합되면서 거의 소련파에게 반쯤 흡수되긴 했습니다.
김두봉, 최창익, 허정숙 등 원역사에서 연안파였던 인물들은 ‘임정 좌익(…)‘입니다. 임정 폐지운동을 한다는 게 문제긴 한데..
+ 갑산파는 만주에서 열심히 대동아공영을 빙자한 국수주의 활동을 하다가 일제 패망으로 곤경을 겪고 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연안파는 없단거군요 ㄷㄷ..
@E.E.샤츠슈나이더 박금철이 빨갱이가 아니라 검댕이가 되었다고요? ㅋㅋㅋㅋ
번외: “예맥사(濊貊史)“
일제 당국이 전략적으로 퍼뜨린 일선동조론과 만선사관은 만주에서 예기치 못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동경삼재의 일원으로서 1920년대 중반 전향하여 1928년부터 조선사편수회 이사직을 역임한 최남선은 그의 매제이자 협화회 간부 박석윤을 통해 만몽한일체론을 주장하는 극우민족주의 역사서들을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 대역죄로 거열형에 처해진 가비(可備) 이원호가 편찬했다던 “구분잡서”를 발굴해내 조선과 만주의 역사가 실은 같은 민족인 예맥족의 역사이며, 예맥인의 반만년 역사는 화이론을 무기로 주변부 민족을 억압해온 지나인에 대한 항구적 투쟁의 기록이라는 사관이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여진족 만호였으며 애신각라씨는 이성계의 아들 먼터무의 씨족이므로 만주국 황제 푸이 역시 조선인이라는 기적의 논리에는 총독부와 만주국 총무처마저 당황했죠.
“지금은 일본을 상국으로 섬기고 있지만 그들 역시 위대한 고구려-부여-예맥-조선민족의 영광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자 대전 말기에는 일본군 역시 만주 내 조선인들의 권세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통째로 불태우는 판국에 만주국의
@E.E.샤츠슈나이더 아니 이거 어디서 아주 많이 본....
@E.E.샤츠슈나이더 저때 뿌린 독이 300년을 가다니;
통치체제를 갈아엎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누구보다 일본 제국에 열심히 부역했으나 실상 내면적으로 일본에 충성하지는 않았던 박승환, 최창륜, 박창암, 박임항 등 만주군 청년장교들이 일제의 망조를 일찍 감지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우, 김필중 등 몽양 여운형의 밀정들은 일제가 최종적으로 패망하기 몇 달 전부터 만주의 크리오요이자 파나리오테스인 재만조선인 첨병들의 충성의 대상을 바꿔놓는 공작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렌지파일 조선RPG 최종우승자(?)인 아이신기오로 호오거.. 아니 부여국왕 김호격의 직계후손이 만주의 마타하리 가와시마 요시코이기도 하니 역시 만선은 일체인 게 분명합니다(???)
@E.E.샤츠슈나이더 근데 박승환이라면 군대해산에 항거해 자결하신 분 아니에요?
@차들어 홍차야 동명이인입니다.
https://namu.wiki/w/박승환(군인)
@렌지파일 아, 저 사이비 유사역사학 논리에 따르면 “성군 광해를 몰아내고 감히 지나인을 섬기며 같은 민족인 여진족을 배신한 인조”는 천하의 암군이고, 그런 인조를 폐위하고 예맥일체의 도를 따르는 소현세자를 옹립하려다 단체로 처형당한 심기원, 정찬석, 이원호 등은 만선 반만년 역사에 길이 남을 호걸들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왠지 낮설지가 않은데?
@E.E.샤츠슈나이더 이 세계관에서는 2020년대까지 환단고기가 교양서로 대우받나요?
@차들어 홍차야 그건 사실 여기서도읍읍..
@E.E.샤츠슈나이더 그래도 다수의 한국인은 환뽕에 안 취한다고요!
@E.E.샤츠슈나이더 여기서도 중국 대륙이 내전으로 혼란스러울때 만주를 장악해 한국령으로 만들고 훗날 국부군 or 중공군이랑 한번 떠야 한다는(?)
@E.E.샤츠슈나이더 어우 이덕일사관인줄..
오늘중으로 차기작 예고편을 한번 올려보겠습니다. 신변정리도 어느 정도 끝났고..
라이히라이히 차차차
신변 정리라고 하니까 무거운 느낌이긴 하네요 ㄷㄷ 어딘가 멀리 떠나실것 같고...
@dear0904 굉장히 심각한 것처럼 썼지만 부서를 다시 옮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ㅋㅋ
@E.E.샤츠슈나이더 역시 고충 신고의 힘은 대단하군요 ㅋㅋㅋ 아니 근데 옮긴 부서에서 그런 사고가 나는건 진짜 ㄷㄷ...
@dear0904 저를 포함한 직원 과반수가 정신과 상담을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도 병원에 가는 건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E.E.샤츠슈나이더 그건 ㅇㅈ.
저같은 경우에도 잠기운이 도는한이 있더라도 약먹는게 나을 지경이니.
@E.E.샤츠슈나이더 아... 정말 심하긴 했네요 ㄷㄷ... 여기서 터진거랑 비교가 안될 정도... (여기는 간단히 말하면 근무 지원팀쪽 사이에서 문제 터져서 직장내 괴롭힘으로 신고 터졌습니다. 지금은 신고 하신분이 퇴사. 이 과정중 고충 담당자분은 마음건강 지원 신청할까 하시고) 무튼 병원은 확실히 도움이 됩니다 진짜.
이제 생각난건데 빌헬름이 야당 고로시하려다 파펜 서클 건을 캐치한게 없었더라면 후일 이벤트에서 파펜이 사바리마냥 중간보스 중 하나로 나올 예정이었나요....?
이 동네 선거제도는 뭐 고칠 방법이 안보이네요 (...)
보통 제일 쉬운게 봉쇄조항 높이는건데 그거로 안 먹히면... 아예 룰을 바꿔야죠 뭐 ㅋㅋ 근데 바꾼다고 막힐게 아닌거 같은걸 공감하고 있고(...)
@dear0904 높일수록 더 막장이 되는데요(?
@렌지파일 ㅋㅋㅋㅋ 무턱대고 높이면 튀르키예가 되는거죠 ㅋㅋ 예전에 10퍼라서 양당만 살았다던가 뭐라나...?
역시 답은 흑적금 삼당훈정 뿐이군요! 장총통 각하 그립습니다…(?)
일찍 일어난 전쟁 - 1
1928년 8월 4일, 독일-폴란드 국경 및 무역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외교적 교섭이 결렬되면서, 슈타틀러 외무장관과 폰 프렌츨라우 국군장관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폴란드 공화국에 “48시간 내에 단치히 회랑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고 독일 공화국의 무역조건을 수용하라”는 최후통첩을 송부했습니다. 같은 날 지노비예프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주석 역시 폴란드에 유사한 최후통첩을 날렸죠.
10년만에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자, 영국과 프랑스는 즉각 총동원령을 선포해 볼셰비키와 결탁한 독일 유사민주주의 정권에 맞서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독일 국군(Reichswehr)과 붉은 군대가 협공을 통해 폴란드 국경을 유린하던 8월말, 민의의 팽창과 대중주의를 적극 이용하는 군부를 제어하지 못한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 역시 “귀축영미에 맞선 대아시아 성전”을 선언하며 영불연합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 역시 유럽의 신질서를 지지하며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죠.
’현상변경 동맹‘이 이렇게 동시다발적이고 유기적으로 제2차 대전쟁을 준비할 줄은 몰랐던 영불연합, 또는 ’협상국‘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일본 연합함대는 홍콩과 싱가포르, 사이공을 타격하는 것으로 선전포고를 대신했고, 협상국의 동양함대들은 나가토와 무츠가 발사하는 16인치탄에 즉시 찢어발겨졌습니다. 로열 네이비 주력 역시 북해와 대서양, 지중해를 지켜야 했기에 당장 일본 해군에 대응해 대원정을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약 10톤 정도의 “전차”,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기의 하마기병대(dragoon)을 현대화한 형태라고 불리던 “차량화 보병”을 이용한 소위 “기동전”은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파리 코앞에서 차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쉴새없는 전선 침투와 공격을 마치 신념처럼 여기던 붉은 군대는 일본의 남방작전과 연계해 영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차, 장갑차, 트럭, 기병전력 등으로 무장한, 스뱌토폴크 크라피엘 원수가 이끄는 100만 “아시아집단군”이 인도를 목표로 페르시아로 남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일제랑 이탈리아랑 동맹 ;;
다만 오히려 그래서 1차대전 느낌이 나네요..?
황혼의 제국.
1997년 8월 31일 파리, 파파라치들에게 쫓기던 메르세데스 벤츠 S280는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한 지하차도에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이집트의 부호 도디 알파예드와 운전사가 사망했으나, 동승자이자 전세계의 연인이라 불리던 다이애나 스펜서만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죠. 당연히 이 사고는 전세계 언론에 즉시 대서특필되었습니다.
당대 그 어떤 연예인보다도 인기있고 아름다우며 심지어 대인지뢰 금지, 제3세계 아동 보호, 내전 종식 등 국제구호활동에도 적극적이던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당한 사고에는 여러 뒷말이 따라붙었습니다. 영국 왕실이 자신들과 계속 대립각을 세우는 다이애나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제기되었고, 왕실공보관실이 내놓은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의 빠른 쾌유를 빈다”는 원론적 답변은 대중을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다이애나의 회복 과정을 거의 생중계하다시피 하며 찰스 왕세자와 영국 왕실의 부도덕을 비난하고, 다이애나를 한층 더 성역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재를 아는 사람 한동안 몇 없었죠 읍읍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왕실에게 결정타를 날린 것은 1999년 호주 공화국 전환 국민투표였습니다. 노동당, 자유당 등 주요 정당들은 1975년 고프 휘틀럼 총리가 ‘외국 군주가 임명한 총독’에게 비민주적으로 해임당한 사건을 다시 거론하며 총공세에 나섰고, 농촌의 보수적 유권자들이 결집하지 않으며 결과는 찬성측의 낙승으로 이어졌습니다.
호주 국기에서 유니언잭이 떨어져 나가자, 다음 타자는 캐나다였습니다. 1995년 간발의 차로 패배의 쓴맛을 본 퀘벡 독립운동 진영이 3차 국민투표를 주장하고, 딱히 군주제 그 자체를 열렬히 지지하는 건 아닌 장 크레티앵 총리와 자유당 정권은 캐나다가 쪼개지는 걸 보느니 차라리 호주의 선례를 따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명시적으로 “공화국“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2002년 국민투표에서는 총독의 직함을 대통령으로 개칭하는 사실상의 공화국 전환이 가결되었죠.
“뉴 브리튼”을 외치며 뭔가 대단한 개혁을 할 것처럼 나서놓고는 대처리즘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던 블레어의 소위 ‘신노동당’ 정권이 이라크 전쟁 가담으로 큰 비난을 받는 와중에, 영국 왕실의 지지도는 1930년대 이래 최저 수준까지 낮아졌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개인에
대한 지지도는 여전히 높았지만, 그녀가 윈저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은 더 이상 변두리에 머무는 의견이 아니었죠. 찰스 왕세자를 옹호할 수도, 그렇다고 다이애나의 아들인 윌리엄 왕세손에게 격세계승을 천명할 수도 없던 왕실은 느릿느릿했고, 외교적 난국을 타개하는 작업은 오롯이 내각에게 돌아갔습니다.
더 이상 영연방의 사분오열을 막고 영국의 국내정치적 불안을 방지하기 위해 내각은 EU를 탈퇴해야 한다는 일부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한편, 파이브 아이즈 간의 결속 역시 강화해 나갔습니다. 보수당과 노동당 중도파의 대내외정책은 사실상 차이가 없어져 버렸죠.
2010년대, 영국이 더 이상 국제정치의 독자적 변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선에서, 인기없는 중도내각은 제국의 황혼기를 연착륙으로 끝내는 듯 했습니다.
…여왕의 차남 앤드류 왕자가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SNS에 올라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렌지파일 더 크라운이 큰 일을 했죠(?)
90년대 영국이라... 누가 등장하려나? 내중문없? 소확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