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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목면 연혁에 대한 이야기
장목면지에 기록된 <1470년(조선조 성종원년) 거제현에 七鎭(칠진)을 두었는데 장목진, 영등진, 율포보를 두고 鎭(진)에 萬戶(만호) 또는 別將(별장), 堡(보)에 權管(권관)을 두어 軍政(군정)을 하였다>는 내용도 아니고, <임진왜란때 통제사 이 순신이 장목진에서 전략을 숙의하던 鎭營舍(진영사)>라는 내용도 아니다. 참고 자료를 공개 한다.
한국 最古(최고)의
東國地圖(동국지도) 공개 이에 의하여 鄭陟(정척)은 畵工(화공)들을 데리고, 現地(현지)를 踏査(답사)하면서 실지 조사를 끝마치고, 梁誠之(양성지)등의 협력을 얻어 완성하였다. 지난 1991년 10월 11일 금요일 신문에 공개한 우리나라 最古(최고) 東國地圖(동국지도) 발견이라는 기사를 보고 서울대 규장각을 찾아가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어렵게 필자가 입수한 자료이다.
신문 내용을 살펴보면 국내에서 간행된 最古(최고)의 우리나라 地圖(지도)가 발견됐다. 서울대 奎章閣(규장각)은 최근 소장 자료중 現存(현존) 最古(최고)의 우리나라 지도로 추정되는 [東國地圖(동국지도)]를 발견 10일 일반에게 공개했다.
36,3mX24.2cm크기로 木版本(목판본) 32쪽 1책으로 된 이 지도는 郡縣(군현)의
명칭, 鎭堡(진보)의 상황, 邑記(읍기)의 이동 경위 등 내용을 보아 1535년~1543년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1535년 을미년 中宗(중종)30년-1543년 계묘년 中宗(중종)38년 사이에 간행한
지도> 따라서 지금까지 국내의 최고의 지도로 알려져온 國寶(국보) 248호의 [朝鮮方域地圖:조선방역지도:1557년경 간행]보다 10여년 앞서는 것이어서 주목된다고 學界(학계)는 밝히고 있다.
지도상에 나타나는 거제진은 다음과 같다.
1470년(성종원년) 거제현에 七鎭(칠진)을 두어 장목진, 영등진, 율포보를 두고 鎭(진)에 萬戶(만호) 또는 別將(별장), 堡(보)에 權管(권관)을 두어 軍政(군정)을 다스렸다면 1535년 을미년 中宗(중종)30년-1543년 계묘년 中宗(중종)38년 사이에 간행한 지도에도 長木鎭(장목진)이 나타나야 믿을수가 있다. 이것은 명백한 위증이다.(참고문헌) :
巨鎭(거진) : 이조대의 軍營(군영)으로 節制使(절제사)와 僉節制使(첨절제사)가 있는
鎭營(진영)을 말하며, 위로는 節制使(절제사)가 있는 主鎭(주진)이 있었고, 巨鎭(거진)밑에는 同僉節制使(동 첨절제사),萬戶(만호),
都尉(도위), 駐在(주재)하는 여러鎭(진)이 있었다.
壬辰倭亂(임진왜란)으로 巨濟島(거제도)의 古縣城(고현성)은 함락되고 불타버려 1664년
18대 顯宗(현종:5) 甲辰(갑진)년에 官廳(관청)을 復建(복건)하면서 李東耉(이동구) 巨濟(거제) 縣令(현령)이 巨濟面(거제면)으로 縣(현)을
옮겼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 7년간의 戰爭(전쟁)으로 倭賊(왜적)의 소굴로 변한 長木(장목), 軍港浦(군항포) 甑城(증성:시루성=지금의 농바우)을 위시하여 舊永(구영) 등은 사람들이 扶支(부지)할수 없도록 폐허가 되었는데, 1656년 17대 孝宗(효종: 7) 丙申(병신)년에 統制使(통제사) 柳赫然(유혁연)이 王(왕)의 命(명)을 받고, 巨濟島(거제도)의 地形(지형)과 民心(민심)을 살피고, 狀啓(장계)를 올려 지금의 長木(장목)에 長門浦陳(장문포진)을 세워 처음에는 武官(무관) 從九品(종구품)인 別將(별장)으로 하여금 수비케 하고, 戰船(전선) 1척, 兵船(병선) 1척 伺候船(사후선) 1척을 두었다.
그 후에 1712년 肅宗(숙종) 19년 壬辰(임진)년에 陳(진)을 創設(창설) 했으나 地理(지리)가 불길하여 집을 지을수가 없어, 1717년 肅宗(숙종) 24년 丁酉(정유)년 乙卯(을묘)에 다시 터를 잡았으나, 또 다시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지은 집은 무너지고, 1785년 正祖(정조) 9년 乙巳(을사)년 正月(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옮겨 세웠는데,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正三品(정삼품)인 李珍國(이진국)이 主幹者(주간자)라고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 上樑文(상량문)에 기록하고 있다.<참고:1712년 肅宗(숙종) 19년 壬辰(임진)년에 陳(진)을 創設(창설)한것은 武官(무관) 從九品(종구품)인 別將(별장)으로 하여금 수비케 하고, 戰船(전선) 1척, 兵船(병선) 1척 伺候船(사후선) 1척을 두었다>.
뒤에 1785년 正祖(정조) 9년 乙巳(을사)년 正月(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옮겨 세운집은 鎭(진)으로 創設(창설)하여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正三品(정삼품)인 李珍國(이진국)이 長木鎭(장목진)을 수비케 하였다. 고로 엄연히 陳(진)과 鎭(진)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歷史(역사)에 나오는 壬辰(임진)년 해는 다음과 같다.
지난 2011년 11월에 발행한 장목면지를 보고 고향 후손들이 바른 역사관을 볼수 있도록 몇가지 지적하고저 한다. 지나간 거제군지나 장목면지는 붓대를 잡은 사람들이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고집 불통이 되어 제멋대로 역사에도 없는 사실을 만들어 개인의 치적을 쌓는데 급급하여 역사는 점점 왜곡 되어졌다.
집안에 족보가 없어 자손들 보기에 민망하여 잘 알지도 못하고 만들다 보니 홍길동이가 할아버지가 아닌데도 홍길동이가 할아버지라고 버젓이 기록하여 자손들이 혼란스럽게 만든 집안이 있다. 그래서 우리 선대 조상이 만든것이니 맞던 틀리던 그 후손들은 무조건 우리 할아버지가 만든 것이니 틀려도 맞다고 억지를 쓰는 사례는 우리 양씨 가문에도 있고 주위에 흔히 있는 일이다.
잘 알지도 못하고 맞다 틀리다. 다투다 보니 우리 사회는 분열이 생긴다. 한 집안에서도
서로 원수가 되어 잘하고 있는데도 4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내가 하는 일은 옳고 남이 하면 무조건 반대하는 잘못된 생각은 고치지
않고 그릇된 사회를 만드는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번 장목면지가 출판되기전에 故(고) 김 기태 은사님께서 살아 생전에 識字憂患(식자우환)인가? “장목면민들이여 ! 이것만은 고쳐야 한다”라는 제하의 칼럼을 거제타임즈에 올린 내용을 김 기태 은사님께서 보시고 향토 사학가 이 승철씨에게 전하게된 동기가 발단이 되어 장목면지가 장목면 생기고 처음이고 우리 세대에 마지막이라는 절박감에서 다시 정리를 해 본다.
필자가 처음으로 장목면 역사를 접한 것은 평소에 親分(친분)이 두텁던 金鍾碩(김 종석) 長木(장목) 海東醫院 病院長任(해동의원 병원장님)께서 鄕土史(향토사)에 關心(관심)이 많아 長木面 (장목면) 文化財(문화재) 推進委員會(추진의원회) 委員長職(위원장직)을 맡아 長木陣 客舍(장목진 객사)를 1980년 1월 14일 慶尙南道(경상남도) 文化財(문화재) 委員會(위원회)에서 地方(지방) 有形(유형) 文化財(문화재) 제189호로 지정 받아 1981년 12월 8일 午前(오전) 10시에 국고지원으로 上梁式(상량식)을 거행 하셨다면서 복원 당시 客舍 上梁文(객사상량문)을 발견하였다면서 사본을 주셔서 보관된 자료에서 장목면 역사를 소상하게 읽을수가 있어 1990년 9월 30일에 在京 巨濟鄕人會가 發行한 巨濟郡誌에도 필자가 지적 했었다.
객사 상량문에는 서기1656(효종 7)병신년 陣(진)을 세운 후에 1712년 壬辰年(임진년=숙종 19)년에 鎭(진)을 創設(창설)했으나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집을 지을 수가 없어 1717(정유년 숙종 24)년 乙卯(을묘)에 다시 터를 잡았으나 또다시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지은 집은 무너지고 1785(정조 9)을사년 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옮겨 세웠는데 行 別將 禦侮將軍(행 별장 어모장군:정 3품) 李 珍國(이진국)이 主幹者라(주간자)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장목면 객사의 연혁이 왜? 틀리게 되고 엉뚱한 막말을 하게된 것인지 거제향토 사학가이신
이 승철 선생님의 편지를 소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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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