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장
찬양 받으며 예루살렘 입성, 성전 정결,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 예수님의 권위 주장(찬송 시편24편)
2018-11-23,
금
맥락과 의미
11장부터 예루살렘에서의 일입니다. 11-16장은 주일부터 주일로 끝나는 한 주간의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야기입니다.
11-13장에서 가르치시는 부분과(가르침), 14-16장에서 심문받고 십자가 고난받고 부활하시는 부분(행동, 순종)으로 나누어 집니다.
1. 찬양 받으며 나귀 타고 예루살렘 입성 (1-11절)
예루살렘의 첫째 날(주일)입니다. 예루살렘 동쪽 3km떨어진 베다니에서 시작합니다. 그곳에 매여 있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십니다. 매여 있는 나귀는 창세기 49:11에서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축복의 내용에 나오는 말입니다. “유다의 후손이 포도나무에 나귀를 맬 것이다.”유다 지파에 속한 예수님이 이 예언을 이루십니다. 나귀를 타신 것은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신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스가갸 14:9)
나귀를 타신 것, 사람들이 소리치며 즐거워한 것, “오시는 이여”(9절)라고 외친 것. 이 모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바로 그 메시아임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는 행동에서 자신이 “겸손한 메시아”로 오시는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요 12:16).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것은 시편 118:25-26으로 제자들과 무리들이 노래했습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때 부르던 찬송들(시편 113-118편)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래 전 부터 이 시편에 약속된 “다윗의 나라를 회복할 메시아”를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소망했습니다. 그러면서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찬송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는 예언자라고 이해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 식민지로부터 해방할 정치적 지도자로 이해한 듯합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여행 중에 “내가 예수님이 권력을 잡으면 높을 자리를 차지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서로 싸운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막 9:33-35). 그러나 맹인 바디매오는 제자들 보다는 더 나은 메시야에 대한 생각을 가진 듯합니다.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10:47)하며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는 왕이신 메시야”로 이해한 듯합니다. 그러나 그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어떤 메시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죽으실 메시야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백성을 죄와 마귀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하실 메시야라는 몰랐습니다.
그들이 시편 118편의 중요한 부분을 빼먹은 것을 보면 그들의 메시야에 대한 생각의 부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18:21-22을 빠뜨렸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다음 장 12:10-11에서 이것을 인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사장들이 버린 돌과 같았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예수님은 입성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힘을 상징하는 날을 타시지 않았습니다. 낮아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왕의 행진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무리들은 크게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행진에 대해 로마 군인들이 해산하러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로마 군대가 보기에 나귀타고 행진하는 그 분은 무시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유월절 순례객들의 옷으로 안장을 만든 나귀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메시아는 오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 분은 며칠 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을 불러 모으십니다. 또 다른 놀라운 일은 십자가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그 무리들과 제자들의 찬송을 기쁘게 받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관용과 사랑이 놀랍습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들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들을 위한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들의 믿음을 성장시키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부족함을 계속 절감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교회를 다스리고 있는 그리스도는 지금도 예배에서 말씀과 성례로 계속 가르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며 함께 하십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 믿음을 성숙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 감사합시다.
2.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과 성전의 정결케
하심 (12-25절)
1)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11-14절)
예루살렘에서의 둘째 날(월요일)입니다.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저주하셨습니다 “영원토록 열매맺지 못하리라” (11-14절). 20절 이후에 그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 중간에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15-19절).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이 무화과 나무는 그때의 예루살렘 성전예배를 상징합니다. 그 때의 성전 예배는 겉으로 드러난 종교활동만 무성했습니다. 참 경건의 열매는 없었습니다. 위선적인 제사장,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도, 그 자신들은 경건과 이웃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2) 성전을 정결케 하심(15-18절)
성전의 뜰 안쪽은 유대인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바깥 뜰은 이방인들도 가서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성전 바깥 뜰을 순례자들이 성전에 바치는 제물로 사는 시장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성전 근처에서 제물을 사는것은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성전에 바칠 제물을 멀리서 가져오는 것이 힘들므로 성전 근처에서 사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돈 벌이 수단이 되고 기도할 곳을 없애 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예수님은 장사하는 사람들을 그 뜰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모든 이방민족들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사 56:7)고 했는데,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렘 7:11).” 책망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한 성전 공간을 회복하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후에 교회에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이 이방 나라들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함께 동등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삼아 주십니다.
예레미야 7장에서는 그 백성이 회개하지 않으면 성전을 파괴하겠다는 예언도 함께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레미야 7장을 인용하실 때, 성전을 멸망시킬 것도 뜻하셨을 것입니다. 전에도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고 3일 만에 짓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2:13-23). 예루살렘 성전은 그로부터 40년 후에 실제로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파괴될 것입니다.
참 성전은 예수님 그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서 참되게 친교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몸은 십자가에서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몸은 부활하여 하늘에서 다스립니다. 그래서 참 성전을 회복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참 성전에 들어 가셨습니다. 우리도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참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히 6:30). 땅에서 그리스도는 그 분과 연합된 교회를 세우시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과 백성이 함께 만나 교제하는 땅에 있는 참된 성전(고전 3:16-17)입니다.
3)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와 믿음의 중요성(20-25절)
다음날(셋째 날, 화요일) 입니다. 제자들이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신 기적을 통해서 믿음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기도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24절). “나를 괴롭게 한 옆집 사람 죽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실까요?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과학적으로는 임신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부 사이에 난 아들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해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약속을 믿어 의심지 않고 확신했습니다(롬 4:22). 그런 확신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그 분을 신뢰합시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생육하고 번성하고(행 6:7) 든든히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마 16:18)을 굳게 붙듭시다.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으시고 능력있게 일하실 것을 굳게 믿고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신비를 확신합시다. 하나님의 가문인 교회의 한 지체로서 우리의 가정, 우리 자신의 삶과 직업 활동도 반드시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3.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권위 (27-32절)
셋째 날(화요일)에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계속 가르쳤습니다. 대제사장 등이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누구의 권세로 이 일을 했는가?” 즉 예수님이 성전에서 제물로 장사하지 못하게 하시고, 가르치고 있는 것에 항의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냐 땅으로부터냐?” 제사장들은 대답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높였고, 또 백성들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나도 대답하지 않겠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동기로 대화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화법을 우리도 배웁시다.
제사장들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습니다. 2일 후에, 예수님을 잡아서 재판하고 죽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음 12장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 자신을 배척하고 핍박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실 것입니다(포도원의 비유).
예수님은 성전에서 걸어 다니시면서 가르쳤습니다(27절). “걸어다닌다”는 말은 하나님게서 그 분의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성전으로 삼으시고 거기서 거니셨습니다 (창 3:8). 아담을 만나고 교제하셨습니다. 믿음의 후손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거닐었습니다(창 5:23)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서 함께 거닐도록 불러 주셨습니다(창 7:1). 이제 그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 거니십니다. 백성을 가르치며 교제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다스리시는 지금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계 2:1)입니다. 그렇게 환상으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의 촛대가 있는 성전인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있습니다.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전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땅의 성전인 교회 안에서는 그 분의 성령님을 통해 계속 거닐고 있습니다. 예배와 교회의 모임 안에 거닐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걸어 다니시며 주인이 되십니다.
믿고 복종할 일
무리들과 제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어떤 메시야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주님을 따르며 찬양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 주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를 향해 나가셨습니다. “호산나!”(구원하소서) 그들이 다 이해하지 못하고 찬송하던 그 시편의 원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백성을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교만하게 계속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적한 대제사장들의 성전은 파괴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성전을 파괴하고 그리스도의 참 성전을 세웠습니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찬송합시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서 성장합시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해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믿고 의심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계속하여 그분의 죄용서의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하도록 일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