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자리 잡은 공민왕릉은 고려왕릉 가운데 유일한 부부 쌍릉이다. 재위 14년(1365) 왕비가 죽자 공민왕이 직접 설계하고 감독해 9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한 무덤이다. 공민왕 자신도 죽어서 왕비의 옆에 묻혔다. 두 무덤 사이에는 영혼이 통과할 수 있도록 작은 통로도 만들어져 있다.
공민왕이 생전에 얼마나 아내인 노국공주를 아꼈는지 잘 보여준다.
고려 제31대 공민왕(1330~1374·재위 1351~1374)은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철 등 부원배들을 척결했으며 원나라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를 공격해 잃었던 땅을 회복했다. 원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복구했으며 몽고식의 머리 모양인 변발과 몽고 옷인 호복을 금지했다. 내적으로는 불법적인 인사 행정의 온상이었던 정방을 혁파했으며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부당한 토지와 백성의 탈점을 시정토록 했다.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원나라 위왕의 딸이며 이름은 보타시리, 寶塔實理)의 부부애는 각별했던 것으로 각종 문헌에 기록돼 있다. 공민왕은 그녀의 배경이 없었다면 왕이 될 수 없는 처지였다.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고려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원나라를 고려를 영원한 부마국으로 만들기 위해 몽골여인의 아들에게만 고려 왕의 자리를 물려줬다.
21세 때 노국공주와 혼인하면서 그의 정치적 행로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되고 2년 뒤에는 드디어 고려왕을 물려받는다. 그녀는 원나라 공주였지만 남편의 개혁행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했다.
그러나 1365년(공민왕 14) 왕의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였던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게 된다. 그녀를 잊지 못한 공민왕은 “왕비의 초상화를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울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사서는 기술한다. 이 일을 계기로 공민왕은 딴 사람이 된다. 절제와 금욕적인 삶을 살았지만 노국공주의 죽음과 정치적 고독감을 이기지 못해 동성애와 관음증을 탐닉하게 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난행은 결국 파국을 불러왔다. 후사를 걱정했던 공민왕은 김흥경과 홍륜·한안 등에게 자신의 후궁인 익비를 강간토록 해 임신시켰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연루자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계획을 엿들은 김흥경 등에 의해 왕은 자신의 침실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국립 고궁박물관에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어진으로 알려진 그림이 보관돼 있다. 오른쪽이 공민왕, 왼쪽이 노국공주이다. 태조 이성계가 재위 4년째인 1395년에 종묘를 창건하면서 경내의 신당에 봉안했던 그림이다.
태조는 왜 전 왕조의 왕과 왕비 초상을 이 씨의 조상을 모신 종묘에 안치한 것일까. 태조는 고려의 역사가 공민왕대에서 끊겼으며 그 스스로 공민왕의 계승자임을 대외에 알리기 위해 공민왕 부부의 초상을 봉안했던 것이다. 공민왕이 명나라와 관계가 돈독했던 점도 무시할 수 없었었다. 지금의 초상화는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자 광해군 때 건물을 복원하면서 이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국공주가 순산을 하고 공민왕과 백년해로 했더라면 고려의 운명은 어찌됐을까. 부부가 나란히 앉은 구도의 부부병좌상은 당대 유행하던 부부 초상형식을 보여준다.
여말선초 대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조선 개국 2등 공신에 책록된 조반(1341~1401년)도 부부초상을 남겼다. 조반은 1385년 발생한 ‘무진피화’로 유명하다. 조반은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염흥방의 종 이광이 자기 땅을 빼앗자 이광을 죽여 염흥방에 의해 투옥된다. 이 일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확대돼 최영과 사전 모의를 한 우왕의 명으로 조반은 석방되고 임견미과 염흥방 일당이 처형된다. 부부의 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조반 부인인 계림 이씨의 강한 얼굴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1376~1453)과 부인 성주 이 씨의 영정은 현전하는 부부 초상화 가운데 회화미가 가장 뛰어나다. 합천군 타진당본 등 국내외에 다수 남아있다. 모사본을 제작할 때 원작은 불태워 없애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성주 이씨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의 ‘다정가’로 유명한 고려 말 문인 이조년의 5대 손녀다. 성주 이 씨 초상은 정경부인의 단정함과 여성스러움이 강조돼 있다. 효성이 극진했던 셋째 아들 하우명이 훗날 어머니가 숨지자 3년 모친상을 치른 후 부모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명인 박연(1378~1458) 역시 부부 초상이 있다. 박연은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에 임명되면서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불린다. 그림은 영동군 난계사가 소장하고 있다.
조선 전기 문신으로 의금부제조, 종2품 동지중추원사 등 요직을 지낸 정식(1407~1467)은 재미있는 부부 초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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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