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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 (燕山君) |
휘 융(提). 성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로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즉위 3년 동안은 별탈 없이 보냈으나, 1498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되었던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당하였던 사건이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甲子士禍].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그렇지만 왜인과 야인의 입구(入寇)를 의식한 끝에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였다든가, 또는 변경지방에로의 사민(徙民)의 독려, 기타 《국조보감 國朝寶鑑》, 《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데, [연산군지묘]라는 석물 이외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
제11대 중종 가계도 성종- 정현왕후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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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정치사 1. 연산군의 폐출과 진성대군의 등극 2. 중종의 개혁정책 실패와 정국 혼란 3. 신진 사림의 재 등장,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치 4. '기묘사화와 사림 세력의 후퇴 5. [중종실록] 편찬 ● 역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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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인종 가계도
중종 - 장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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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정치사
1. 인종의 짧은 치세
2. [세조실록] 편찬
● 역사 개요
▣ 인종 (仁宗) |
자 천윤(天胤). 휘 호(艤). 시호 영정(榮靖). 중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 비(妃)는 첨지중추부사 박용(朴墉)의 딸 인성왕후(仁成王后)이다. 1520년(중종 15) 세자에 책봉되고 1544년 즉위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폐지되었던 현량과(賢良科)를 부활하고 기묘사화 때의 희생자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寃)해 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한편 세자로 있을 때 1522년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동궁으로 있을 당시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여 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어려서 죽자 이를 긍휼히 여겨 그로 인하여 병을 얻었으며, 서형(庶兄)인 복성군 미(福城君嵋)가 그의 어머니인 박빈(朴嬪)의 교만으로 인하여 모자가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에 이를 석방할 것을 간절히 원하는 소를 올려 중종도 그의 우애 깊음에 감복하여 복성군의 작위를 다시 주었다 한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하게 되자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았으며, 손수 잠자리를 살폈고, 부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하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여짐에 따라 1545년(인종 1)에 대신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경원대군(慶源大君-뒤의 明宗)에게 전위하고 경복궁 정침(正寢)에서 31세로 죽었다. 능은 고양(高陽)의 효릉(孝陵)이다. |
제13대 명종 가계도
중종 - 문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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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정치사
1. 눈물의 왕 명종의 등극과 끝없는 혼란
2. 명종시대의 주요사건들 : 을사사화 / 양재역 벽서 사건 / 임꺽정의 난 / 을묘왜변
3. 명종시대를 이끈 사람들 :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 / 조선 성리학의 큰 인물 '이황'
4. [명종실록] 편찬
● 역사 개요
▣ 명종 (明宗) |
자 대양(對陽). 이름 환(緝). 시호 공헌(恭憲). 중종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둘째아들, 인종의 아우. 비(妃)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綱)의 딸 인순왕후(仁順王后). 처음에 경원군(慶源君)으로 봉해졌다가, 1545년(인종 1) 경원대군이 되었다. 인종이 죽자 12세로 왕위에 올랐으며, 처음에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일파가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등의 대윤(大尹) 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즉, 윤원형은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여덟째아들)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하는 한편, 윤임이 인종이 죽을 당시에 계성군(桂成君-성종의 셋째아들)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이를 구실삼아 왕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사건, 1548년 사관(史官) 안명세(安命世)의 《시정기(時政記)》 필화(筆禍)사건, 1549년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 등으로 인하여 을사사화 이후 100여 명의 선비들이 참화를 당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는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고 불교를 중흥시켰다. 즉 문정왕후는 보우(普雨)를 신임하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삼고,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이듬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 보우는 뒤에 도대선사(都大禪師)가 되었 1553년 친정(親政)이 시작되나,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간섭이 여전하였다.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1563년 비(妃)의 외숙 이량(李樑)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이량도 당파를 조성하여 선비들을 숙청하려 하므로, 기대항(奇大恒)에게 밀계(密啓)를 내려 이들을 추방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일당을 숙청하고, 보우를 장살(杖殺)한 뒤 불교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혼란 중에 이러한 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白丁)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일대를 횡행하였고, 1562년 황해도 일대에서 소란을 피운 임꺽정(林巨正)을 포살(捕殺)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 이들은 결국 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하여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또한 여진족의 빈번한 침입으로 북쪽지방도 불안하였다. 그러나 수차(水車)를 제조하여 농사일의 편의를 도모하였고, 전함을 건조하여 외침에 대비하였다. 1554년 비변사(備邊司)를 다시 설치하였고, 수륙병(水陸兵)을 관찰사의 지휘 아래 두어 공동출전하게 하는 등 국방대책을 수립하였다. 또 여러 가지 간행(刊行)사업을 전개하여 1548년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 1555년 경국대전의 원전(原典) ·속전(續典) 등을 간행하였다. 1551년에는 권문세가들이 불법으로 겸병(兼倂)한 토지를 몰수하여, 이를 공정하게 재분배하는 등 치안 ·국방 ·문화창달 ·경제개혁 등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아들이 계승하였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 능은 양주(楊州)의 강릉(康陵)이다. |
제14대 선조 가계도
중종- 창빈안씨 →9남덕흥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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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사
1. 문치주의자 선조의 등극과 붕당정치 시대
2. 사림의 분열과 붕당 정치의 전개
3. 임진왜란과 조선 사회의 변동 : 조.일 전쟁 발발
4. 난세에 핀 꽃 '이순신' / 붉은 옷의 전설 '곽재우'
5. 조선시대의 석학들 : 위대한 인본주의자 율곡 이이 / 불명의 시인 송강 '정철'
6. [선조실록] 편찬
제15대 광해군 가계도
선조- 공빈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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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사
1. 전란이 가져다 준 왕위
2. 실리주의자 광해군의 과감한 현실 정치
3. 광해군 가족들의 비참한 말로와 광해군의 유배 생활
4. 변혁시대에 핀 문화화 꽃 : 비운의 혁명가 '허균' 과 불사의 영웅 '홍길동',
동방의 편작 '허준' 과 [동의보감]
5. [광해군일기] 편찬
역사 개요
▣ 광해군 (光海君) |
휘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 공빈(恭嬪) 김씨의 소생.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기 때문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06년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 의(俎)가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도 적통론(嫡統論)을 내세워 선조를 지지하였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뒤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분조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行在所)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체계를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4년 윤근수(尹根壽)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였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음을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영경의 척신정권(戚臣政權)에 대한 의도는 사류사회(士類社會)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유영경은 주살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이것은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즉위하자 임해군을 교동(喬洞)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賜死)하였다.
유영경의 세자교체기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에 의해 축출되었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李山海) ·이인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大北)이라 하였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다가 오히려 대북파의 책동으로 임해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영창대군 ·능창대군(綾昌大君) 전(佺) 등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는 폐서인(廢庶人)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이 성균관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衿錄- 儒籍)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退館)시켰다.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으며,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慶德宮-慶熙宮), 1621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또한, 1609년에는 일본과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으며, 1617년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외래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에 류큐(琉球)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솜씨를 보였다.
또,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 노력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 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때 나왔다.
1624년 서인 이귀(李貴) ·김류(金帝) ·최명길(崔鳴吉) ·김자점(金自點) 등이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받들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단행하여 이인첨 ·정인홍은 죽이고, 광해군은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1641년(인조 19)에 죽었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내치(內治)로는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성지와 병기를 수리, 호패제(號牌制)를 실시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국경 방비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1619년 후금의 누루하치가 심양지방을 공격하여 명(明)나라의 출병요구가 있을 때 강홍립(姜弘立) ·김경서(金景瑞)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명나라의 모문룡(毛文龍)이 패주하자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여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는 등 명과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외교정책을 실시하였다. |
제 16대 인조仁祖 1695~1649(1623~1649 재위) : 원종과 인헌왕후의 차남
제16대 인조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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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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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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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렬 왕후 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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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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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효종(봉림대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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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 대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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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 왕후 조씨(자식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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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대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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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1635) : 청주 한씨
1. 부친 서평부원군 문익공 한준겸(西平府院君 文翼公 韓浚謙 1557~1627)
- 한효윤(韓孝胤 1536~1580)과 평산 신씨(申氏)의 아들
2. 모친 창원 황씨(黃氏)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 1556~1589)
- 황성(黃珹 1538~1581)의 딸
3. 별칭 :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 숙녕전(肅寧殿)
4. 시호 : 명덕정순인렬왕후(明德貞順仁烈王后)
5. 능호 : 장릉(長陵)
6. 자녀(6남)
* 소현세자 왕(昭顯世子 汪 1612~1645)
* 봉림대군 호(鳳林大君 淏 1619~1659)
* 인평대군 요(麟坪大君 㴭 1622~1658)
* 용성대군 곤(龍城大君 滾 1624~1629)
* 대군(1629~1629)
* 대군(1635~1635)
★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1624~1688) : 양주 조씨
1. 부친 한원부원군 혜목공 조창원(漢原府院君 惠穆公 趙昌遠 1583~1646)
2. 모친 전주 최씨(崔氏)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 최철견(崔鐵堅 1548~1618)의 딸
3. 별칭 : 자의대비(慈懿大妃), 자의대왕대비(慈懿大王大妃)
4. 시호 : 자의공신휘헌강인정숙온혜장렬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貞肅溫惠莊烈王后)
5. 능호 : 휘릉(徽陵)
★ 귀인 조씨(貴人 趙氏 ?~1651) : 순창 조씨
1. 부친 조기(趙琦 1574~?)
2. 모친 청송 심씨(沈氏) 정부인(貞夫人)
3. 별칭 : 숙원(淑媛), 소원(昭媛), 소용(昭容), 소의(昭儀), 귀인(貴人)
4. 자녀(2남 1녀)
* 효명옹주(孝明翁主 1637~1700)
* 숭선군 징(崇善君 澂 1639~1690)
* 낙선군 숙(樂善君 潚 1641~1695)
★ 귀인 장씨(貴人 張氏 ?~1671)
1. 부친 장류(張留)
2. 별칭 : 숙의(淑儀), 소의(昭儀), 귀인(貴人)
★ 숙의 나씨(淑儀 羅氏 ?~?)
★ 숙의 박씨(淑儀 朴氏)
☆ 소현세자 왕(昭顯世子 汪 1612~1645) : 인조의 장남(인렬왕후 生)
1. 별칭 : 원자(元子), 왕세자(王世子)
2. 원호 : 소경원(昭慶園)
3. 세자빈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1611~1646) : 금천 강씨
- 문정공 강석기(文貞公 姜碩期 1580~1643)의 딸
- 원호 : 영회원(永懷園)
4. 자녀(3남 4녀)
* 장녀(1629~1631) : 3세 요절
* 장남 경선군 백(慶善君 栢 1636~1648) : 요절
- 초명 : 석철(石鐵)
* 차녀 경숙군주(慶淑郡主 1637~?)
- 능성 구씨 능산부위 봉장(綾山副尉 具鳳章)에게 하가
* 차남 경완군 석린(慶完君 石麟 1640~1648) : 요절
* 3녀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1682)
- 반남 박씨 금창부위 경헌공 태정(錦昌副尉 敬憲公 朴泰定 1640~1688)에게 하가
* 4녀 경순군주(慶順郡主 1643~1654)
- 이름 : 이정온(李正溫)
- 황창부위 변광보(黃昌副尉 邊光輔)에게 하가
* 3남 경안군 회(慶安君 檜 1644~1665)
- 초명 : 석견(石堅)
☆ 봉림대군 호(鳳林大君 淏 1619~1659) : 인조의 차남(인렬왕후 生)
☆ 인평대군 요(麟坪大君 㴭 1622~1658) : 인조의 3남(인렬왕후 生)
1. 자 : 용함(用涵)
2. 호 : 송계(松鷄)
3. 시호 : 충민(忠敏) → 충경(忠敬)
4. 정부인 : 복천 오씨(吳氏) 복천부부인(福川府夫人)
- 오단(吳端 1592~1640)의 딸
5. 자녀(4남 2녀)
* 장남 복녕군 욱(福寧君 栯 1639~1670)
- 시호 : 효헌(孝獻)
* 차남 복창군 정(福昌君 楨 1641~1680)
* 3남 복선군 남(福善君 柟 1647~1680)
* 4남 복평군 연(福平君 㮒 1648~1700) : 인조의 4남 용성대군(龍城大君)에게 출계
- 시호 : 효익(孝翼)
* 장녀 금온(金溫 1654~?) : 풍양 조씨 기수(趙祺壽)에게 출가
* 차녀(?~1663) : 해주 정씨 중만(鄭重萬)에게 출가
- 인평대군이 죽은 후에 궁에서 길러졌음. 현종이 즉위한 후 출궁했으나 곧 병사
☆ 용성대군 곤(龍城大君 滾 1624~1629) : 인조의 4남(인렬왕후 生), 요절
1. 시호 : 장의(章懿)
2. 자녀(없음)
* 양자 복평군 연(福平君 㮒 1648~1700) : 인조의 3남 인평대군(麟坪大君)의 4남
☆ 대군(1629~1629) : 인조의 5남(인렬왕후 生), 1달 만에 요절
☆ 대군(1635~1635) : 인조의 6남(인렬왕후 生), 이틀 만에 요절
1. 대군이 죽은 지 4일 만에 인렬왕후도 승하하였기 때문에, 대군의 보육을 맡았던 봉보부인 응옥(奉保夫人 應玉 : 인조의 유모)을 유배
☆ 효명옹주(孝明翁主 1637~1700) : 인조의 서장녀(귀인 조씨 生)
1. 부마 : 안동 김씨 낙성위 세룡(落城尉 金世龍 ?~1651)
- 김자점(金自點)의 손자
2. 자녀(없음)
☆ 숭선군 징(崇善君 澂 1639~1690) : 인조의 서장남(귀인 조씨 生)
1. 시호 : 효경(孝敬)
2. 정부인 : 평산 신씨(申氏) 영풍군부인(永豊郡夫人)
- 신익전(申翊全 1605~1660)과 양주 조씨(趙氏 : 장렬왕후의 언니)의 딸
- 장렬왕후의 조카딸
3. 자녀(2남 4녀)
* 장남 동평군 항(東平君 杭 1660~1701)
- 정부인 : 나주 박씨(朴氏) 금성군부인(錦城郡夫人)
* 차남 동성도정 강(東城都正)
* 장녀 : 해평 윤씨 세정(尹世鼎)에게 출가
* 차녀 : 파평 윤씨 정호(尹廷虎)에게 출가
* 3녀 : 순흥 안씨 수정(安壽鼎)에게 출가
* 4녀 : 진주 조씨 명봉(趙鳴鳳)에게 출가
☆ 낙선군 숙(樂善君 潚 1641~1695) : 인조의 서차남(귀인 조씨 生)
1. 시호 : 정헌(靖憲)
2. 정부인 : 강릉 김씨(金氏)
- 김득원(金得元 1600~1670)의 딸
3. 자녀(없음)
[출처] [본문스크랩] 조선 제16대 인조 가계도|작성자 이평재
제17대 효종 가계도
제17대 효종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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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현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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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효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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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공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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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안공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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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 왕후 장씨 |
1남6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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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공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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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공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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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공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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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 이씨 |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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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녕 옹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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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1왕후 3후궁에 1남 7녀를 두었다.
인선왕후 덕수장씨는 인조반정 공신인 우의정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효종보다 한 해 앞선 1618년(광해군 10) 12월 25일에 출생하였다.
1631년(인조 9) 14세로 당시 봉림대군(鳳林大君)이던 효종과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초봉되고 1645년(인조 23)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돌아와 변사하자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됨에 따라 세자빈이 되었다.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심양(瀋陽) · 연경(燕京) 등지에서 볼모살이를 할 때 함께 가서 타국생활을 하였다.
1649년(인조 27)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고 그 10년 뒤인 1659년(효종 10)에 효종이 승하하고 아들 현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서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았다.
1674년(현종 15) 2월 24일에 승하하니 수가 57세였다. 사후에 인선(仁宣)의 시호를 받고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능서면(陵西面) 왕대리(旺岱里)에 있는 영릉(寧陵)에 효종과 같이 안장되었다.
신위는 종묘의 정전 제9실에 봉안되었고 정범 경렬 명헌(貞範敬烈明獻)의 존호를 가상(加上)받았다.
소생은 1남 6녀인데 1남은 현종이다.
딸은 1녀가 숙신공주(淑愼公主)로 2세 때 등에 업혀 볼모지인 만주의 심양으로 가던 길에 병사(病死)했다.
2녀는 숙안공주(淑安公主)로 익평군(翼平君) 홍득기(洪得箕)에게 하가하고 3녀는 숙명공주(淑明公主)로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에게 하가했다.
4녀는 숙휘공주(淑徽公主)로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에게 하가하고 5녀는 숙정공주(淑靜公主)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하가했으며 6녀는 숙경공주(淑敬公主)로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蒙鱗)에게 하가했다.
효종의 제1후궁은 안빈 이씨(安嬪李氏)로 효종의 7녀 숙녕옹주(淑寧翁主)를 낳고 1693년(숙종 19) 10월 23일에 별세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있다.
숙녕옹주는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하가했다.
효종의 제2후궁 숙원 정씨(淑媛鄭氏)와 제3후궁 숙의 김씨(淑儀金氏)는 다 소생이 없고 기록도 미상이다.
효종은 1659년 5월 4일 41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의 존호(尊號)가 올려지고, 묘호(廟號)를 효종(孝宗)이라 하였다.
그 해 10월 29일에 능호를 영릉(寧陵)이라 하고,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장사하였으나 뒤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옮겼다.
시대상
즉위 초에 전 참의 김집(金集),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 · 송시열(宋時烈), 전 자의(諮議) 권시 · 이유태(李惟泰), 전 현감 최온 등이 제일 먼저 소명(召命)을 받고 나아왔는데 그들 의 여식(旅食)의 어려움을 염려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궁인을 시켜 고기와 양식을 계속 보내게 하였다. 시열과 유태의 어미가 늙고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관찰사로 하여금 미찬(米饌)과 약물(藥物)을 보내주게 하였다
**흔히 안빈 이씨 한 사람만이 효종의 후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숙원 정씨와 숙의 김씨도 있었군요. ^^ 안빈 이씨는 효종대왕이 심양의 볼모로 있을 때부터 함께 해왔다고 합니다.
제18대 현종 가계도
효종 - 인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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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사
1. 현종시대의 평화와 남인과 서인의 예론 정쟁
2. 예송 논쟁의 전개
3. [현종실록] 편찬
역사 개요
▣ 현종 (顯宗) |
자 경직(景直). 휘(諱) 연(偵). 효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고 비는 돈령부영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병자호란 후 아버지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이 볼모로 가 있던 선양[瀋陽]에서 출생하였다. 1644년(인조22) 귀국하여 1649년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그해 효종이 즉위하자 왕세자가 되었다. 1659년(효종10) 즉위 뒤 효종의 상례(喪禮)로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이 주장하는 3년설을 물리치고 서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을 채택함으로써 서인이 집권하게 하였다. 즉 당시 일반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 家禮》에의한 사례(四禮)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정된 《오례의 五禮儀》에 준칙되어 있었다.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서 왕위에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었지만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책립되었을 뿐더러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의 예로 3년상의 상복을 이미 입〔服〕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서인측에서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주동이 되어 효종이 둘째 아들인만큼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고, 남인측의 윤휴(尹#휴17)와 허목(許穆) 등은 효종이 아무리 둘째 아들이라고 하여도 승통하였으므로 삼년상이 옳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인인 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유임시킴으로써 남인 재기의 바탕이 마련되던 중, 1674년(현종15)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를 채택하여 대공설(大功說:9개월설)을 주장한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에 서인이 온갖 방법으로 재기를 꾀함으로써, 그의 재위 중에 남인과 서인의 당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퇴해졌으며, 게다가 질병과 기근이 계속되었다. 한편 1666년에는 앞서 1653년에 제주도에 표류해 온 하멜(Hamel, H.) 등 8명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억류생활 14년간의 이야기인《화란선제주도난파기 和蘭船濟州島難破記―하멜표류기(漂流記)》와 그 부록인 [조선국기 朝鮮國記]를 저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함경도 산악지대에 장진별장(長津別將)을 두어 개척을 시도, 1660년(현종1) 두만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북변의 여러 관청을 승격시켰으며, 1662년 호남의 산군(山郡)에도 대동법(大同法)을 실시, 다음해 경기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1668년 김좌명(金佐明)에게 명하여 동철활자(銅鐵活字) 10만여 자를 주조시켰고, 다음해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하고, 병비(兵備)에 유의하여 어영병제(御營兵制)에 의한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曆法)의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또, 지방관의 상피법(相避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