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전투(1950.8.31.~9.15)
■ 개요
미 제2사단과 미 해병 제1여단이 1950년 8월 31부터 9월 15일까지 경상남도 창녕군의 낙동강 돌출부 지역에서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방어한 낙동강방어전투중에 결정적인 전승이다.
■ 작전지형 특성
경상남도 창녕군 일대의 낙동강은 동으로 굽어져 남강과 합류하는 지역에서 북쪽으로 약 10km 거리에 있는 영산 맞은편에서 서쪽으로 굽어 넓은 반원형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미군은 이곳을 '낙동강 돌출부(Naktong Bulge)'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낙동강이 천연장애물 역할을 하였다. 이 지역의 낙동강은 하폭이 300~1,000m에 이르렀고, 강물의 폭도 200~500m나 되었으며 물의 깊이는 평균 2~4m로 적이 도섭하기에는 어려운 지형 조건이었다. 더구나 강기슭은 거의 절벽에 가까운 단애지역을 형성하고 있어 적이 도하하기에는 부적합한 지형 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은 거창 합천지역에서 영산을 거쳐 밀양과 삼랑진에 이르는 중요한 접근로였다.
■ 전투전개과정
미 제2사단은 8월 하순 미 제24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의 부곡리에서 남지까지, 제23연대를 창녕 정면에, 그리고 제38연대를 현풍 정면의 강안고지에 각각 배치 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은 제9사단(-)이 8월 말경부터 미 제9연대가 배치된 영산 정면에, 김천에 서재편성을 완료한 제2사단이 창녕 정면에, 제10사단이 현풍 정면 낙동강 대안에 집결하여 최후 공세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8월 31일에 북한군은 미군의 포격을 받으면서 낙동강을 도하해 미 제2사단을 기습 공격하였다.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미 제2사단은 창녕과 영산으로 양분되어 북쪽의 창녕과 현풍 정면의 부대는 사단 포병사령관인 하인즈(Loyal M. Haynes) 준장이, 남쪽의 영산 정면의 부대는 부사단장인 브래들리(Joseph S. Bradley) 준장이 지휘하여 북한군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북한군은 미 제23연대 제1대대의 우측방을 돌파하여 사단 포병진지를 거쳐 미 제23연대 본부와 근무중대 및 기타 부대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까지 침투하였다. 이날 제1대대는 붕괴되었고, 미 제23연대는 북한군에게 포위되었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사령관은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기 위하여미 해병 제1여단을 미 제2사단에 배속시켜 증앙에서 영산 서쪽으로 공격하였다. 이와 병행해서 미 제9연대(제72전차대 1개 중대와 고사포대대 1개 포대 배속)가 북서쪽으로 진출하여 미 제23연대와 연결하고, 남쪽에서는 미 제9연대 제1대대 잔존 병력, 미 공병대대, 미 제72전차대대(→)가공격하여 미 제25사단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북한군은 도로 북쪽과 구룡산(九龍山, △209)의 미 제38연대 제3대대를 공격하였으며, 현풍 정면에서도 북한군 제10사단이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미 제38연대 제1대대 는 현풍 일대로 후퇴하면서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영산 서쪽에서 미 해병대는 공군과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공격하였다. 도로 남쪽의 미 해병대는 퇴각하는 북한군을 추격하였고, 도로변의 미 해병 제2대대는 북한군 전차 4대를 파괴하면서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미 해병 제3대대는 제2대대를 초월하여 공격기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창녕 정면의 미 제23연대는 주매리와 모산리 및 본 초리 3개소에서 북한군 포위망을 뚫고 곧 반격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하인즈 준장은 제38연대와 제23연대 사이의 전투지경선을 변경하여 미 제38연대로 하여금 창녕으로 가는 남쪽 접근로를 방어하도록 하고, 미 제23연대는 부곡-창녕 도로 축선으로 책임지역을 조정하여 창녕 정면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미 제9연대는 영산 남서쪽으로 공격하여 미 해병 제1여단과 협조체제를 유지하였다. 미 해병 제2대대는 영산 서측 116고지를 점령하였고, 제1대대는 북한군 제9사단 사령부가 설치된 지역과 영산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미군 전폭기 편대가 북한군의 증원을 차단한 가운데 미 공병대대가 영산 서쪽에서 북한군 전차 3대를 격파하면서 밀양으로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영산 정면의 미 해병대는 전진을 계속하여 오봉리 능선을 점령하였고, 미 제9연대는 클로버고지(Clover Leaf Hill, △165)까지 진출하였다.
북한군의 공격은 9월 5일부터 대체로 중단되었으나, 창녕 정면의 북한군 제2사단이 9월 8일에 마지막 공격을 재개하여, 미 제23연대를 돌파하고 본초리까지 진출하여 창녕을 약 5km 남겨두고 있었다. 미 제23연대는 항공기 지원을 받아가며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9월 9일에 북한군의 공격이 중지되었으나 중대 규모의 부대를 창녕까지 침투시켜 교란작전을 전개하였다.
■ 전투결과 및 의미
북한군 제2사단의 T-34전차는 작전 기간 중 대부분 파괴되었고, 탄약과 연료마저 부족하였으며, 보병부대 손실도 극심하여 공세를 취할 수 없었다. 따라서 9월 3일부터 감행된 미 해병대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9월 6일 클로버 고지 와 대봉리 고지를 연결하는 낙동강 동쪽의 조그마한 교두보를 간신히 확보하면서 미군의 역습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 제2사단 제17연대 군의관은 북한군 제2사단이 전사 1,300여 명, 부상 2,500여 명의 손실을 입었다고 진술하였다. 이 전투를 통해 북한군은 심각한 손실을 입고 공격력을 상실하였으며, 미 제2사단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 중 가장 커다란 손실을 입은 미 제23연대는 전투력이 38%로 감소되었다.
작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미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9월 5일 미 제2사단으로부터 배속 해제와 동시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전반적으로 미군은 북한군의 도하공격을 낙동강전선에서 방어전투에 성공함으로써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유리하게 전개하도록 작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박진전투는 그 중에 결정적인 전승이었다.
■ 박진전투 전승기념비 제막식
지난 9월 9일 경남창녕전투기념관에서 박진전투전적비 제막식을 거행하다
지난 9월 9일 (사)한미친선군민협의회(KCMAUSA) 박정기 회장의 주관으로 미 제2사단장 레스퍼런스(LESPERANCE) 장군과 한정우 창녕군수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박진전투기념관에서 거행되었다.
이 행사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돌출부방어전에서 최대의 격전지인 박진전투의 승리를 추모하는 전적비 제막식을 중심으로 전사평가 및 안보결의를 다짐하였다. 당시 미 제2사단 제23연대는 낙동강을 도하하며 공격하는 적 제10사단을 상대로 낙동강을 피로 물들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15일간의 혈투에서 병력과 장비면에서 절대 열세의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적을 격퇴하여 낙동강방어선을 사수(Stand or Die)하며 승리를 쟁취하였다.
특히 창녕지역을 방어했던 제23연대는 중대장 바쏠디(Bartholdi Cyril B.) 대위외 207명이 전사하는 희생을 무릅쓰고 방어전에 성공하여 인민군 제10사단의 대구진출을 저지하였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안정적인 작전시행에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고 전사는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한국군은 초기 방어전에 1개 소대를 참가시켰고, 이어서 700여명의 한국군을 배속하여 박진전투가 한미연합작전이었다는 것을 전사에서 발굴하였다.
이날 제막된 박진전투 전적비는 신동희 작가의 ‘미 육군대위 흉상’과 장순휘 시인의 헌시 ‘박진전투’ 및 박천숙 미술가의 ‘장미와 무궁화’로 제작된 작품으로 미 제2사단 23연대 전사장병들의 박진전투 승리와 고귀한 희생과 한미동맹의 가치를 기리고 한국국민의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창녕전투기념관에서 거행된 제막식에서 박진전투 헌시를 낭송하는 필자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 25전쟁사」 5권, 2008.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전투사 다부동전투」, 1981,
배대균 飜譯, 「창녕방어전투실화」, 도서출판경남. 2021.
Roy E Appleman,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