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綠松 오세용 (吳世容)
우리 동기 중에 들어나지도 않고 야단스럽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사람중 한사람이 綠松 오세용이다.
나와 인연은 중 3 때 서로 이웃에 살았고 한반에서 공부했던 것으로 시작 되었다.
그때 인상은 아주 순하고 순박하기 그지없는 그런 소년이었다
그는 부자집에 살았고 그의 어머니는 외모가 예쁘기도 하지만 말씨도 곱고 부드러워 전형적인 옛날 우리들의 어머니상이었고 관세음 보살상의 부드러운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런 분으로 기억된다.
그와는 40대 초반에 같이 합기도를 배웠는데 아마 3단으로 알고 있다.
綠松 오세용은 어머니의 좋은 면을 타고 난 것 같았는 데 오늘날은 세월이 많이 바뀐 탓인지 말이 늘었고 자기 고집이 있는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못 말리는 사람이다.
첫 째로 못 말리는 것은 먼저 살아가는 자세이다
언젠가 대화 속에서 자기는 살아온 과정에서 그렇게 어려움이 모든 것이 무난하게 오늘 날까지 발전해 오고 있다고 하였다. 군생활까지도 훈련후 성적이 제일 좋아 대구에서 근무하여 집보다 편했다고 한다.
그가 현재까지 운영하는 기업(세한산업)은 동업으로 40년 동안 하고 있고 중국에도 공장을 내는 정도로 큰 어려움 없이 잘 되고 있다고 한다.
동업은 형제간에도 하지 말라고 하는 데 40년을 쨍그랑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두 사람이 거짓 말 같이 변함없이 잘 하고 있으니 동업자 되는 이와 함께 인물과 인품을 연구해 볼 만한 못 말리는 사람이다.
만나보면 C.E.O.라는 느낌이 없는 표없는 보통사람
또 동창회에 대한 그의 자세이다.
12~3년전에 동창회장을 맡았다. 동창회사무실을 현재 자리로 옮겨온 것도 그였지만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10 수년을 넘게 오후 3시가 되면 사무실로 나와서 바둑을 뜨고 저녁 때가 되면 사무실에 나오는 동기와 어울려 식사도 같이 하여 분위기를 어우리며 사무실을 지킨다.
지금까지 사무실을 유지하는 것은 이러한 그의 자세가 큰 힘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 결과 동창회 사무실에서 바둑실력이 최고 수준이 되었는데 내가 장난으로 10년 바둑공부를 했다고 놀리기도 한다.
외지에서 동창들이 대구를 방문하면 그들을 편하게 하고 또 동창회 일에도 표나지 않게 힘이 되어 주고 있으니 많은 사람은 모른다.
못 말리는 사람이다.
그의 가족력을 살펴보면 못 말린다.
조부님은 부호였다. 그래서 선친은 왜정 때 동경에 유학하여 대학을 나왔다. 당시 최고의 에리트였다.
조부님은 아들이 고위 관리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아들은 관리 될 생각은 아예 하지않고 마을의 청소년에게 글을 가르치고 계몽 활동을 하니 부모의 기대를 저 버리기만 한 것도 속이 상했는데 어느 날 일본 형사가 들이닥쳐 대구서에 대리고 가서 초 주검으로 돌아오니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결국 20대의 젊은 나이로 꽃다운 부인과 어린 아들 둘을 부고 세상을 떠났으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니겠는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와 활동하던 동지들을 위하여 가족에게 까지도 비밀로 하였을 뿐 아니라 목슴을 잃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왜경이 일본이 항복한 후 모든 독립 운동가에게 해당되 듯이 기록을 없앴으니 독립된 후 대구서에서 기록을 찾았으나 기록은 찾을 수 없고 철저한 동지들 보호로 누가 동지인것도 모르니 그 사실을 입증받을 수도 없어 독립유공자의 기록에도 올리지 못하였다. 그의 선친 참 못 말리는 분이셨다.
그의 어머니는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청상이 되었으나 그와 그의 형을 큰 고난 없이 곱게 곱게 남 부럽지 않게 키웠고 불교에 귀의하여 대구 파계사의 큰 지주가 된 노보살로 90수를 넘겼으니 그 어머니 또한 못 말리는 분이셨다.
그러고 보면 못 말리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받았다면 다행이 좋은 것만 받아 못 말리는 사람이 된 행운아라 할까.
그가 너무나 표를 내지 않는 사람이라 나도 근래에 와서 알았지만 김정의 최희장 이재섭 김극년 조복제와 더불어 경북대학교 의대 발전후원회에 출연하고 있었다. 다른 봉사일에도 관하여 하고 있는 것은 틀림 없는 데 위낙 표없는 사람이라 알 수 없다.
요즘은 노래방 출입이 잦는데 노래 실력이 노래방 아마추어 수준은 훨씬 넘고 음정 박자 좋고 수준급이다. 좋아하는 노래는 오기택의 고향무정 남일해의 이정표
반야심경은 노래는 아니지만 노래와 같이 즐겁게 줄줄 외운다.
내가 쓰러진 것을 본 탓인지 노년 건강 관리에 많이 신경쓰고 있는 것 같다. 일본에서 발간한 건강서적을 나에게 사주었고 상당한 상식을 가지고 있다.
그의 가족은 아들 둘이 삼성에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훌륭한 자부를 보고, 그의 부인은 덕성스런 미인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오세용의 부족함을 메우고 오늘 날을 있게 한 뒷 받힘을 하였다. 다복한 가정과 본인의 사회성취도 모두 이룬 못 말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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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세용, 과연 놓쳤더라면 아까웠을 '못말리는 39'의 한사람이네요. 대구 친구들 역시 남다른 데가 있네요. 綠松과는 한 반에 한 번도 같이 있지 않아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이 글을 통해 그의 감추어진 진면목을 일부나마 알게돼 고맙습니다. 부인도 미인이시고 아들도 둘이나 삼성에 근무한다니 더욱 친근감이 듭니다. 素愚 수고 많았습니다.
綠松과는 중학교 일학년때인가 한반에 있었는데 그 뒤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별다른 교류가 없엇지만 만나면 자주 봤던 사람처럼 반갑다. 더구나
素愚의 자상한 글을 통해 몰랐던 그의 면모를 들어보니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綠松 오세용은 경맥인물의 전형같은 소박하면서도 뜻뜻하고 의리있는 친구로 알아왔다. 대구친구들의 좋은 모습이 드러나면서 우리 39카페가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綠松 오세용형의 못말리는 기질은 선대부터 물려 받은것 같다니 참으로 의미 심장하네요. 최태호형의 글을 읽고 보니 새삼스럽게 오세용형의 온화한 모습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綠松 이라. 대구에 큰 아이 누가 있나 하였더니 역시 綠松 이로다. 그는 만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쓰윽파고 들어봐라 어느 한군데도 만만 한데가 없고. 실없는 농 짓거리 할 수 없는 바른 사람 이지만 남 다른 그의 세련된 유모어는 참 마음 푸 근 하게한다. 잘있소 綠松.! 둘만의 사연이 있지요. 그립소. 素愚 아니면 감당 못할 綠松의 내력 정리는 정말 대단 하고 고맙소이다.
"못말리는 39"당선을 축하합니다,대구친구들을 대표하는 온화하고 자상
한 모습의 주인공,봄날의 따뜻한 온기가 감싸도는것 같구려,10년전에 왜
관에서 덕분에 라운딩하고 그 빚을아직도 갚지못하고,언제 한번 더 늙기
전에 빚갚을 날이오길 바라며 부인도 함께,,항상 건강하시기를, 上求菩提 下化
衆生으로발원하며 三寶에 귀의합니다,慈圓 合掌
독립운동가(아버님)대지황보살(어머님)모시고 살아온 綠松이 부럽슴니다.십년전에 팔공산 파계사를 통과할때 대지황보살님 뵈려 간다고 하면 무조건 통과 시켜줌니다.綠松의 고결한 인품은 애향심을 발휘하여 경북대학병원 발전후원회위원으로 계시고 지역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음니다.39동기회 자랑스러운 친구입니다 매일 만나도 반가운 綠松 항상 건강하시기를......
녹송! 늘 푸른 솔 같은 친구. 그를 대하는 우리들 모두 그에게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것은 그의 과감한 표현과 솔직한 마음이 우러나는 한마디에서 상대방에게 마음을 녹이는 단 내 같은 향기를 느끼기 때문 일 것이다. 제조업을 40년 이상 그의 파트너와 군말없이 동업으로 할 수있는 친구가 우리들 곁에 있어 우리는 더욱 즐겁다. 그의 화목한 가정이 그것을 증명한다.
素愚형 저는 그냥 주위사람들과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좋은쪽으로 과찬을 많이해주셔서 황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남에게 도움은 아니더라도 불편은 주지 않아야한다는 소박한 마음은 항상 갖고 있습니다.
鶴軒, 溪山, 定庵, 東山, 劍農, 瑞軒, 晩翠, 小湖 형님들의 따뜻한 격려의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더욱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삶을 영위하라는 뜻으로 알고 여러동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