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혁명 제29권 제4장 -원류-(17-22).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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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신이치 일행은 델리대학교에서 도서증정식에 이어 대학 관계자와 교육문제 등을 놓고 의견을 교환한 뒤 재회를 약속하고 캠퍼스를 떠났다.
시각은 오후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일행은 델리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뉴델리 중심부에 있는 로디정원으로 갔다.
이곳은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번영한 로디 왕조의 황제묘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은 시민이 휴식을 즐기는 공원이다.
신이치는 이 공원에서 ‘인도문화연구회’ 멤버와 만나기로 했다.
1972년 6월, 오사카를 방문한 신이치는 간사이의 각 대학회 대표 약 30명과 간담했다.그때 한 멤버가 인도 유학을 간다고 보고했다. 대화가 무르익자 신이치가 각자 인도에 대해 공부하고 7년 뒤에 다같이 인도에 가자고 제안했다. 그 그룹이 바로 ‘인도문화연구회’다.
인도에 유학을 간다고 보고한 사람은 외국어대학에서 인도 파키스탄어를 공부하는 오쓰키 아키하루라는 청년이었다.
오쓰키는 세계 광선유포를 그리며 교학을 연찬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나습삼장이 번역한 법화경을 근간으로 불법(佛法)을 연찬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한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중국적으로 해석했을 것이다.세계광포를 생각할 때 산스크리트어로 거슬러 해석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또 그렇게 했을 때 나습삼장의 번역이 얼마나 훌륭한지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오쓰키는 인도 유학을 결심했다.
신이치는 세계광포를 위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오쓰키의 마음가짐이 기뻤다.
이상이나 꿈을 말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것을 실현하려면 ‘지금, 무엇을 하느냐’ ‘날마다 어떻게 노력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명감, 책임감은 행동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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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키는 간사이 각 대학회 대표들과 함께 신이치와 간담을 나누고 한달 뒤인 1972년 7월에 인도로 건너가 베나레스(나중에 바나라시)의 산푸르나난드산스크리트대학교에 입학했다.
2년 뒤에 귀국해 무역회사에서 2년 정도 일하다가 1976년 3월 다시 인도에 유학을 가 봄베이대학교(나중에 뭄바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오쓰키는 ‘7년 뒤에 다 같이 인도에 가자’고 신이치와 약속한 그날을 인도의 대학원생으로서 맞이하게 되었다.
‘인도문화연구회’ 멤버는 1979년 2월 4일 뉴델리에 도착했다. 가야, 파트나, 켈커타(콜키타) 등 인도 각지를 열흘 동안 방문해 불교 유적을 비롯해 사회 상황이나 사람들의 생활 등을 둘러보는 멤버와 교류하기로 했다. 오쓰키는 ‘인도문화연구회’ 벗을 뉴델리공항에서 반갑게 맞았다.
5일 밤 12시가 지나 뉴델리에 도착한 신이치는 바로 연구회 멤버들에게 전언을 보냈다.
“내일 저는 델리대학교를 방문하니 그 뒤에 만납시다. 만날 생각을 하니 기쁩니다.”
그리고 이 로디정원에서 멤버와 재회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다들 잘 지냈습니까? 마침내 약속을 지켰군요. 목표로 한 인도에 모였으니 다같이 기념촬영을 합시다.”
신이치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오쓰키의 안내로 공원을 산책했다.
신이치는 ‘광선유포의 결의에 불타는 청년들이 지금 인도의 땅에 모인 모습을 도다 선생님이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고 생각했다.
제자가 스승의 결의와 행동을 계승하고 그리고 또 제자가 대대로 계승할 때 세계광포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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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가 ‘인도문화연구회’ 멤버와 함께 로디정원을 산책하는데 몇몇 소년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기하듯 일행을 쳐다보았다.
신이치가 손짓으로 소년들을 불러 ‘같이 사진을 찍자’고 말했다. 오쓰키가 힌디어로 통역했다.부끄러워하는 소년도 있고 환성을 지르는 소년도 있었다. 함께 사진을 찍었다.
신이치가 선물로 가져온 소카(創價)대학교 배지를 아이들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본에서 왔습니다. 이것은 제가 차입한 대학의 배지입니다. 크면 일본에 꼭 오십시오.”
신이치가 소년들의 가족에 대해 물었다. 아버지 직업은 대부분 운전사였다.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웠다. 소년들은 일본으로 치면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모두가 친구인가요?”
한 소년이 이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늘 함께 있어서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입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일이랍니다. 평생의 재산이 됩니다.좋은 친구가 있으면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또 서로 격려할 수 있으니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지지 않고 꿋꿋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면 외롭고 마음이 약해집니다. 또 나쁜 친구와 어울리면 어느덧 자신도 영향을 받아 나쁜 짓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신이치가 이렇게 말하며 오렌지와 볼펜을 소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몸집이 작은 소년이 씩씩하게 물었다. “사진이 나오면 받을 수 있을까요?”
“알았습니다. 꼭 보내겠습니다.” 동행한 간부가 소년들의 주소와 이름을 받아두었다. 소년들을 보면서 신이치는 이렇게 확신했다.
‘이 아이들은 장래 일본이라고 하면 오늘 만난 일을 떠올릴 테지. 대화를 나누면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세계가 우정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세계평화를 이루는 확고한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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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방문한 이틀째인 2월 7일 오전 10시 반 신이치 일행은 모라르지 데사이 총리관저를 방문했다. 뉴델리 삽다르정 거리에 있는 녹음에 둘러싸인 하얀 건물이었다.
총리는 곧 여든세살이 된다고 했다.
인도의 많은 지도자가 그렇듯 총리도 마하트마 간디의 불복종운동에 참여해 인도 국민회의파로서 독립을 위해 싸웠다. 투옥도 되었다. 신념을 관철한 사람의 두 눈은 젊은 투혼으로 빛났다.
신이치는 데사이 총리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인도는 중국과 국경문제로 대립해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묻고 싶었다.
네루 모자에 안경을 쓴 총리는 윤곽이 또렷하고 단정한 얼굴에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변했다.
“대화로 해결하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다시 우호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도와 중국은 역사적은 관계가 깊고 우리는 중국을 신뢰하고 형제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도는 1949년 중국혁명 이후로 중국을 지지해 중국이 유엔에 가맹하는 것도 찬성했습니다. 그런데도 국경문제가 일어나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신이치가 “앞으로 전망은 밝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되풀이해서 묻자 총리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저는 늘 낙관적입니다. 비관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간디도 “나는 어디까지나 낙관주의자다” 하고 말했듯 낙관주의는 지도자의 중요한 요건이라 해도 좋다.
낙관주의는 노력이나 준비를 게을리하고 ‘어떻게 되겠지’ 하는 삶의 자세와 전혀 다르다.낙관주의는 만전을 기할 때 생긴다. 반드시 성공한다. 승리한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자신을 믿는 힘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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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가 “긴 인생을 살면서 가장 기뻤을 때와 가장 슬펐을 때가 언제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데사이 총리의 낙관주의적인 삶의 자세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저는 지금까지 슬프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또 모든 일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데요. 그럼 기쁜 추억들 중에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자 총리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매 순간이 행복한데 그중 한 순간만을 골라 행복하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음식이 있어도 기쁘고 없어도 기쁩니다.“
그렇게 실감할 수 있기에 불복종운동이라는 치열한 투쟁에 몸을 던질 수 있었을 것이다.총리는 지금까지 네 차례나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단행했다.
최근에는 1975년 4월, 치안관계법 적용에 관련해서 중앙정부에 항의하고 요구를 받아들일 때가지 일주일 동안 단식에 들어갔다. 그때 이미 일흔아홉살이었다. 체중은 하루에 약 1킬로나 빠졌다고 한다.
총리는 당시 심경을 이렇게 썼다.
“몸도 마음도 해방되어 행복하고, 자신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평안한 경지였다.”
더욱이 그 직후 다섯 번 투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아홉달 동안 감옥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나 총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유익한 시간이었다.” “구류 중에 나는 내성(內省)하며 살았다. 어떻게 하면 향상할 수 있을까를 늘 자신에게 되물었다. ‘자신의 결점은 무엇인가? 마음은 평온한가? 누군가를 혐오하고 있지 않은가?’등.”
사명을 위해 살고 향상하려는 사람에게는 역경의 때가 결실이 많은 학습의 장이고 자신을 연마하는 최고의 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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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는 데사이 총리에게 일본에 꼭 와달라고 말했다. 만일 일본을 방문한다면 네 번째 방문이 된다.
“일본에 가고 싶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일본 총리가 인도를 방문해주길 바랍니다.”
이어서 일본에 가장 바라는 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지체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우정입니다. 끈끈한 우정만 있으면 나머지 일들을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일본인은 규율을 매우 잘 지키고 근면하고 애국심도 강합니다. 무슨 일이든 서로 친구가 되는 일이 먼저입니다.”
신이치도 우정이 중요하다고 줄곧 주장해온 터라 총리의 말이 기뻤다.
또 총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를 정치에 반영하고 싶습니다. 이것을 정치의 최대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미래를 응시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해서 말했다.
“세계는 군축을 실현한다면 모든 나라 사람들이 친구가 되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정부를 수립해 모든 나라가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힘을 합하는 시대가 오기를 염원합니다.”
약 1시간에 걸친 회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끝으로 신이치가 진심 어린 응대에 깊이 고마워하자 총리가 자신의 저서 한권을 선물했다. ‘바가바드기타’(신의 노래)를 해설한 ‘내 기타관’이었다. ‘바가바드기타’는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일부분인데 인도의 성전으로 간디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책 앞부분에는 “행복은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을 때 찾아온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와 기쁨은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때 생긴다”고 씌어 있다. 깊은 철학성이 넘치는 말이다. 데사이 총리와 나눈 회담은 ‘정신의 대국 인도’를 탐방하는 여정을 시작하는 데 어울리는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