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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입문
- 천야 2023 06 24.
* 의미의 논리(1969)에서 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으로
두 작품 사이에 관계와 연관은 어떤 측면에서 이어지고 확장되었을까? 그리고 정신 분석 소설과 닮은 소설을 쓰고 대하드라마를 준비하였던가?
나로서는,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1969)에서 마지막으로(34계열) 하고 싶은 이야기가 풍자, 아이러니, 유머에 대한 분류와 더불어 그래도 유머가 퍼져야 한다고 읽었다. 물론 초중고에서 교과서를 읽고 답하는 것과 같은 공안(公案)은 아니다. 그렇다고 뭘 모르면 물어가면 해답을 찾는 학습의 과정으로서 선문답과 같은 대화법 또는 변증법(아이러니 포함)이 지식에는 필수적일 수 있지만 삶을 난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삶에서 생성하고 부딪히고 엉키면서 일어나는 난문제를 화두라고 부른다면, 그 화두의 해결방법으로 말도 논리도 아니고 움직이는 사건들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 사건의 징후가 어떤 치료 어떤 처방이 필요하기보다 그 속에서 다른 분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건 속에 내재하는 의식이 현실의 표면으로 솟아나야 할 것이다. 화두에 대한 해소는 묵언의 실천일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에 대한 실천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오랜 노력 과정에서 능력을 쌓았겠지만, 그 사람이 어떤 경우 또는 운에 맞는 순간에 일어날 수 있고 해소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퀴니코스학자들은 헤라클레스를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그런데 풍자와 아이러니와 달리, 유머는 활력소가 아닐까? 유머를 통한 새로운 창조적(recreatif) 활동에서 찾는 것이리라.
내가 읽었던 의미의 논리(1969)의 논리는 표면으로 솟아나는 방식과 과정, 그리고 연결(연대, 다리건너기, 가로지르기)의 선을 펼치는 것이 들뢰즈의 의도라고 생각했다. 연결은 그물망도 아니도 조직화의 다단계도 아니며, 홈 파인 공간을 다니는 현실의 그물도 아니다. 그 연결은 매끈한 공간 위에서, 마치 하늘에 번개가 똑같은 번개를 친 적이 없듯이, 실핏줄의 연결(리좀)처럼 얽혔다가 잠시의 해소와 더불어 사라지는 돈오(頓悟)와 같은 것인데, 다음 번개가 동일하지 않듯이 다음 돈오도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이질 반복이라는 것이다. 한번을 느낀 자만이, 이질 반복의 다른 리좀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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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반복의 습관적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울 것 같지만, 현실적 먹이사슬 속에서 매우 어렵다. 어느 개인적 행동과 사회적 행위에서 습관과 관례에 벗어나서 행동하는 것이 있는 지를, 각 개인이 성찰까지는 아니더라도 반성(반사)해보면, 알 수 있다. 학생, 병영, 직장, 병원, 감옥 인들 습관과 관습을 만드는 기계이다. 그 기계는 배치와 배열을, - 마치 인수분해 하듯이 자리바꿈도, 지수(승)도, 변수도, 부정수도 자리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여기듯이, - 제도에 맞게 그리고 체제에 맞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바꿀 수 있다는 가정하게 습관과 관습을 고착화시키는 패거리(카르텔)가 있다. 들뢰즈가 푸꼬를 높이 평가한 것은 이런 고착화를 만드는 사고가 “미친 짓”(광기, 내가 보기에 사익을 추구하는 간악한 짓거리)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가 벩송의 웃음(1901)을 원용했더라면, 고착화, 뻣뻣함, 그리고 기계주의와 자동주의에 대해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리고 심층의 발생과 생성, 저항과 용출의 방식을 표현하려고 했을 것이다: <심층의 연결성이 없는 삶은 허풍, 허황된 것, 가식, 치장의 삶이다. 이것을 웃기게 만들면서 사회를 교정하고 삶의 진솔한 방향을 찾게 하는 것이다. (51RKE)>
들뢰즈가 산업사회를 지나서 정보와 통제사회에서 인간이 또는 인민이 스스로 자발성과 자유를 발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려고 의미의 논리(1969)를 장편 소설식으로 또는 일화집과 같이(옴니버스로) 쓰면서, 대하드라마를 준비하였을 것 같다. 푸꼬는 앙티-외디푸스(1972)의 서문을 쓰면서 이런 흐름을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푸꼬는 풍자도 아이러니도 유머도 아닌 새로운 분출을 내보인 것으로 이 작품을 평가하였고, 그는 오랜 만에 만나는 윤리서(도덕론)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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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비꼬고 세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고 해서 사회의 변화와 자아의 생성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풍자는 풍자로서 자리가 있지만, 그 사회 속에서 현 배치와 달리 배치하는 데 대한 관심처럼 보이지만 한계 안에서 자리바꿈일 뿐이다. 마치 요즘 변호사들이 비슷한 소송에서 원고측과 피고측의 변호인석 자리바꿈을 하면서 법률적으로 다룬다고 하듯이 말이다.
이에 비해 아이러니는 사회와 자연,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에 표면에서 드러나는 부조화든 부조리든 다른 방향을 잡거나 또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들뢰즈도 이런 노력의 종류가 세 종류이라고 한다. 셋 중의 하나로서 소크라테스는 자아 자체의 문제까지 끌어들여서 풀어보려고 노력하였다고 본다. 그러데 들뢰즈는 니체와 말라르메를 끌어들여 분출하는 내재의식(무의식)의 작동들이 표면에서 어설프고 또는 비의적이고 또는 이국적이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인민 속에서 솟아나는 것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솟아남이 기존의 습관과 관례로 고착된 기계주의가 파라독스로 용출에 매질을 하고, 나아가 악으로 몰면서 배제한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반성하는 척하면서, 포섭의 방식으로 배려니 환대니 라는 말을 하면서 부조리를 해결하려 한다고들 한다.
들뢰즈가 현실의 표면에서 찍힌 점들 각각은, 스토아의 말대로 영원성이라 하는 이유가 있다. 점들처럼 표시되는 그 단면은 사실로서 변화하지 않고, 과거로 밀려가도 거기에 있었다라고 고정되어 있는 꺼풀(막)이라 한다. 그것은 오래되면 자체적으로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꺼풀은 여전하다. 따라서 언제든지 그것이 현실에 불려 와서 배치와 배열이 가능하리라고 착각한다. 이런 착각은 재현(표상)을 다루는 인식론자들의 것이다.
각각의 삶은 일회성이고 불가역적인데도, 용출선이 마치 점들처럼 영겁회귀를 하는 것처럼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들뢰즈의 영겁회귀는 심층이 끊임없이 영원불변한 현재 점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영겁회귀이다. 이 현실 평면의 점들로서 기계적인 인간은 동일 반복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의 흐름에서 평면은 계속 변하고 있기에 거기에 찍힌 점으로서 기계는, 그 기계 자체가 변화과정 속에 있기에, 생산하고 욕망하는 것이며, 이질 반복의 점들은 만들고 있다.
현재하거나 지나갔거나 평면의 불변성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 점들은 영원의 평면에서 서로 잇거나 관계를 맺거나 연관을 통한 계열을 형성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거의 미로 잇기와 같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이런 영원한 평면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평면 자체도 이질 반복하고 있기에 연결과 계열의 형성이 어렵다고 이야기 한다. 이런 어려운 연결의 이야기를, 그러면 의미의 논리(1969)의 장편 소설과 달리 대하소설을, 무엇으로 쓸 것인가를 생각했을 때, 가타리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참고로 들뢰즈의 장편 소설에 이어 대하소설은 플라톤의 대화편의 방식도 아니고, 에피쿠로스학파 교훈서도 아니고 초기 스토아의 신천 우위를 지나 중기의 스토아의 디아트리베(민중설법)도 아니며, 어쩌면 스토아와 신플라톤주의가 합친 페다고지(길 안내서)일 지도 모른다. 이런 안내서가 벩송이 보기에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Ἐννεάδες, 254-270)로 나타날 것인데, 들뢰즈는 역사적 과정에서 여러 일화 같은 이야기를, 또는 사건으로서 단편소설처럼, 불쑥 내지를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푸꼬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의 1977년에 영문판 서문을 썼다. 그는 이 책과 연결성이 있는 출판된 두 권의 저술에 대해, 즉 비평(Critique)지(誌)에 푸꼬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에 대해 서평을 실었다. 여기에서 “아마도 언젠가는 들뢰즈의 세기가 올 것이다” 했다. 서로 봐주기의 주례사같은 글이라고들 비판하지만, 푸꼬가 본 들뢰즈는, 푸꼬 자신으로서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심층의 철학사는 아무나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도 소개서로는 벩송의의 영향으로 심층철학을 드러내려 쓴 것이 에밀 브레이어 철학사(8권)이었다. 직접 선생과 제자 관계는 아니지만 원전을 읽는 방식과 인용에서 벩송, 브레이어, 들뢰즈에 공통점이 있다. 심층이다. 푸꼬는 현상과 재현에 마물렀기 때문에 성의 역사로부터 고대철학에 관심으로 들어갔지만 퀴니코스와 스토아에 대한 견해가 없다. 들뢰즈는 스토아의 사상이 플라톤주의 전복이라 것을 논문을 보다 일찍이 발표했었다(1966년).
푸꼬는 영어판 「서문: 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1977)」에서 “비-파시스트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안내서”, “프랑스에서 저술되어온 책들 중에 아주 오랜만에 나온 윤리학 서적”, “정치를 슬픈 정서(정념), 부정과 원한의 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책”이라 했다. 사실상, 현상학적 또는 재현의 관심에서 도덕론이 나오기 어렵다. 그의 글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유머에 관한 것인데, 푸꼬가 보기에 들뢰즈가 유머를 넘어서는 방식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본질적인 뭔가가, 극단으로 심각한 뭔가가 일어나고 있을 때, 재미와 놀이만 있다고 믿게 만든다.”고 했다. 나로서는 유머를 넘어서는 것이 생의 긍정으로서 「아리아드네의 불가사의(Mystere d'Ariane)」(1963)에서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없이도 긍정적으로 즐겁게 산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1969)의 마지막 장, 거의 마지막 긴 문단에서 풍자도, 아이러니도, 유머도 사유의 생성적 방안 또는 절차에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저술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소신을 드러내는데, 그것도 아니라고 그리고 아직 이야기는 지속하고 있다고 읽은 푸꼬가 흥미롭다. 푸꼬는 앙티-외디푸스(1972)가 니체의 영향이 크다는 점을 비추면서, 사유에서 ‘생성과 창안’을 재미와 놀이로 설명했다는 점이다. 표면의 영구적이고 고착적인 수면에, 새로이 돌을 던지면 물수제비가 될 것인지, 동심원의 파동을 그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심층에서 계열과 계열 사이에도 파라독스들의 경우 수만큼이나 계열들이 많다. 표면에서 그 수많은 파라독스의 점들이 연결(연접이든 이접이든) 또는 리좀망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삶의 도약과 분출은 그러한 것이다.
그러면 표면에 올라온 사건들을 보라고 할 것이다. 표면에 떠 있는 그런 사건들이 아니고, 인류 역사 속에서 또는 서양 사유의 역사 속에서 균열을 내고 솟아 오른 사건들을 보라고 할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외디푸스(1972)에 이어서 연속 대하드라마로서 천개의 고원(1980)을 발표하였다. 푸꼬와 들뢰즈가 1978년 결별하지 않았더라면아마도 이에 대한 서평이나 또는 평가 대담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푸꼬는 성의 역사 1(1976)를 출간하였고, 「비열한 인간들의 삶(La vie des hommes infâmes, 1977)」의 논문을 내는 시기에 들뢰즈와 다른 관점에서 표면의 미시적 사건들을 지배와 통제하는 제국의 권력에 대한 분석으로 기울었을 것이다. 통제와 권력은 전통적으로 정치학의 주제가 아닌가? 인간의 문제가 심층으로부터 제기되는 것과 달리 통치의 문제는 제도 속에서 기계들의 배치에 있다는 것을 푸꼬도 들뢰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인가? 파레시아(진솔하게 말하기)는 규범(노모스, νόμος)에서 일까, 인민(노모스, νομός)에서 일까? 둘 다 일까? 박홍규라면, 둘 다라고 할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모스에, 벩송은 노모스에 치중했다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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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이 드러내고자 한 것은 삶의 영역에서 오는 부조화(désharmonie)가 주제이며, 부조리(인식적 태도)는 보충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미제국주의 영향으로 “정의”와 평등을 주장하면서, 사람들은 인민과 검사들 사이에 부조화를, 인민들이 어리석고 검사들이 조리있고 논리적이라는 부조리라고 내세우고 있다. 벩송은 1919년 <“내가 시도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희극(la comédie), 소극(la farce), 광대예술(l’art du clown) 등에서 웃음거리의 제작 절차 방식들(les procédés de fabrication du comique)을 찾았다. 나는 이러한 방식들이 보다 일반적인 주제(un thème)에 관해 그 만큼 많은 변양들(variations, 변수들)이었다는 것을 찾았다고 믿는다. 나는 단순화하기 위하여 주제를 주목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변양들이다. (156)> 인간의 노력과 터전에서는 다른 생성, 생산, 창조가 있다.
부조리에 의해 이항 대립으로 선을 나누어 진위를 구별하는 쪽과 달리, 벩송은 여러 변수들이 솟아나는 점을 보라고 한다. 이 여러 분출들은 현재의 습관과 관례에서는 부조화이지 부조리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조화는 새로운 생성과 창조, 발명과 창안은 기존의 기준과 표준에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창조와 창안이 젊은이의 상상에서 솟아나 자신의 몸에 맞게 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 분출을 악으로 개돼지로 취급하는 자들(패거리, 카르텔)은, - 잔다크와 브루노를 산채로 장작에 태워주긴 자들처럼 - 사악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56QMD) (4:25, 56Q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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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1.
미셸 푸코, 「서문: 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1977) 발췌 – 김재인 역
『안티 오이디푸스』는 무엇보다도 얼마나 많은 땅이 가려 있었던가를 보여 준다. 하지만 실은 훨씬 그 이상을 행하고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옛 우상들을 깎아내리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다. 비록 실제로 프로이트를 상당히 많이 놀려 먹고 있긴 해도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책이 우리를 더 멀리 가도록 자극한다는 점이다.
감히 말하건대 『안티 오이디푸스』(저자들은 나를 용서해 주길 바란다)는 윤리 책이며, 꽤나 오랜만에 프랑스에서 저술된 최초의 윤리 책이다(이 책의 성공이 특정한 <독자>에게 국한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이로써 설명되리라.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것은 삶의 양식, 생각과 삶의 양태가 되어 버렸다). 자신을 혁명적 투사라고 믿는 바로 그때(특히 그때), 어떻게 해야 파시스트가 아닐 수 있게 막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말과 행동에서, 심장과 쾌락에서 파시즘을 떨쳐 낼까? 우리의 행동 속에 배어 있는 파시즘을 어떻게 해야 색출해 낼까? 기독교 모럴리스트들은 영혼 깊이 박혀 있는 살의 흔적들을 찾아냈다. 제 나름 들뢰즈와 과타리 쪽에서는 몸 안에 있는 파시즘의 가장 미세한 흔적들을 추적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덫은 유머라는 덫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내몰아, 텍스트를 떠나, 문을 탕 닫고 나가라는 수많은 초대들이 있다. 종종 이 책은, 본질적인 뭔가가, 극단으로 심각한 뭔가가 일어나고 있을 때, 재미와 놀이만 있다고 믿게 만든다. 우리를 둘러싸고 으깨는 엄청난 파시즘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독재의 쓰라림으로 구성하는 작은 파시즘에 이르기까지, 파시즘의 모든 변종을 탐지하는 일 속에.
* 참조2 : 들뢰즈와 푸꼬(*) 연관 연표
1968(마흔셋) 박사학위 주 논문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9)(PUF)을 발표하고, 학위 부논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9)(Minuit)를 발표하고 다음해 출판하였다. 주 논문은 강디악이, 부 논문은 알끼에가 지도하였다.
1969(마흔넷)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Minuit)를 출판하다.
* 1969 푸꼬 지식의 고고학(L'Archéologie du savoir, 1969)
1970(마흔다섯) 스피노자(Spinoza, 1970)를 출판(PUF)하였다.
____ 비평(Critique)지(誌)에 푸꼬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에 대한 서평을 실었다. 여기에 “아마도 언젠가는 들뢰즈의 세기가 올 것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 나로서는 이 두 작품이 플라톤주의 전복으로 스토아주의를 부각시킨 것이기도 하며, 현존의 근원에서 아페이론(자연, 역능)의 실재성을 파악한 벩송에 영향으로 쓰여진 것으로 본다.
1972(마흔일곱) 들뢰즈는 가타리와 더불어 안티 외디푸스(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72)(Minuit)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서구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도식이 가족에 덧 씌여진 것을 비판하는 것이며,
*1975[마흔아홉] 푸꼬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1975)
* 1976[쉰] 푸꼬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Histoire de la sexualité, vol. 1: La volonté de savoir, 1976)
1977(쉰둘) 클레르 파르네(Claire Parnet, s.d.)[1948?]와 함께 이야기한 대화(Dialogue)를 출판(Flammarion)하다.
____ 안티 외디푸스 영어판, 서문을 푸꼬가 쓰다. “비-파시스트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안내서”, “프랑스에서 저술되어온 책들 중에 아주 오랜만에 나온 윤리학 서적”, “정치를 슬픈 정서(정념), 부정과 원한의 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책”
1978(쉰셋) 테러리즘 문제와 철학 노선의 차이로 들뢰즈와 푸꼬가 결별하다.
1980(쉰다섯) 가타리와 함께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1980)를 출판(Minuit)하다.
*1984[쉰여덟] 푸꼬 성의 역사 2: 즐거움의 활용(Histoire de la sexualité, 2: L'usage des plaisirs, 1984) Paris, Gallimard, 1984, 296 p.
*1984 푸꼬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Histoire de la sexualité, 3: Le souci de soi, 1984) Paris, Gallimard, 1984, 288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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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제1장 욕망하는 기계,
제2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 신성가족,
제3장 야생인, 야만인, 문명인
제4장 분열분석자 분석,
과거의 사실 또 사건을 현상론자는 내가 봤잖아, = 나도 거기에 있었는데, - 내가 사건을 그렇게 생각하잖아, = 그게 너의 혼자 생각이야, - 내가 그것을 과거와 미래에 연관지어 추리했잖아 = 그래 그게 너의 오관의 도움이라니깐 – 그 상식과 추리를 통한 사실(실재로은 재현)을 믿잖아. = 그래 그게 재현하면서 그 사실과 사건이 사라지고 현재의 평면 위에 너 자신이 그려 놓은 그림(파라독스)이야. 다른 사람도 파라독스야. 너의 생각 추리 재현이 맞다고 하는 것이 환상 또는 망상이기에 들뢰즈가 파라독스라고 하는 거야.
(56R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