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역협회가 지난 3일 무역센터에서 개최한 ‘러시아 시장 개척 및 진출전략 세미나’는 러시아에 진출하고자 하는 기업에 대한 '키 포인트'를 제시하는 자리였다. 이날 세미나에는 현지 진출에 관심 있는 제조기업, 유통기업 등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했다.
첫 번째 연사로 나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정민현 박사는 “러시아와의 교역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240억 달러 수준으로 한국 전체 교역의 3%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2020년까지 교역액 300억 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으나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로 인한 대외조건및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은 큰 제약"이라고 밝혔다. 소비·투자 심리 위축도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정박사는 또 "세계경제 성장세 둔화와 불확실성 심화로 석유 등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의 순수출 감소는 성장률 저하로 이어질 전망이지만, GDP 대비 재정적자 규모가 나아지고, 기업·가계부채의 비중도 낮아 경기침체의 발생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저성장 기조가 지속됨에 따라 올해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경제성장률을 밑도는 1.6%로 점쳤다.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오랫동안 영업활동 경력을 지닌 전명수 블라디보스토크대 교수는 러시아 시장의 특성을 크게 3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러시아 시장은 "잘만 하면 고구마줄기와 같다"고 했다. 보수적인 시장 특성 탓에 진출하기까지는 힘이 들지만 초기 마케팅 비용을 들여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오래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신제품이 출시되면 빠르게 시장에서 도태되는 다른 시장과의 차이점이자 러시아 시장만의 매력”이라고 했다.
두 번째 특성은 ‘남북한, 중국, 유럽을 잇는 물류와 교역의 중심지’라는 점이다. 그는 "아직 기업들에겐 체감이 되지 않겠지만, 현재 극동러시아와 중국 둥베이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이 플랫폼이 완전히 구축되면 우리 기업은 극동지역으로 제품을 선적해 일부는 러시아로, 일부는 중국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당장을 위해서가 아닌, 미래를 위해 들어가 자리를 잡아 놓겠단 개념으로 시장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는 러시아의 제조업 육성 정책이다. 과거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를 수출하고 필요한 제품을 수입해서 쓰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이제는 비에너지 분야를 키우겠다는 산업다각화 전략을 추진 중이어서 이에 맞는 진출 전략을 짜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와관련, 전 교수는 "공급자 위주의 러시아 시장도 빠르게 소비자 중심 시장으로 변하고 있다"며 "소비자층의 핵심을 ▷브랜드 ▷여성 ▷서민층"으로 정리했다. 그는 "러시아에서는 그쪽에서 '잘나가는 브랜드'를 구축해야 한다"며 "여성의 사회참여가 활발하고, 소비지출 의사 결정권 또한 여성에게 집중돼 있다"고 강조했다. 경제가 어렵고 힘들어도 화장품과 같은 여성용품의 소비는 줄지 않는다는 것. 전 교수는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나라의 편의점, 휴대폰 대리점만큼이나 러시아엔 피부관리샵이 많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러시아 중산층은 아직 10%에 불과하다”며 “그보다는 그 이하 층, 많은 서민층을 위한 제품을 개발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가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결국 가격 경쟁력이 중요하다는 것.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대형마트와 온라인 시장이 커지고 있는 이유라고도 했다.
특히 소비자의 반응에 민감한 대형마트들은 제품을 소싱할 때도 충분히 알아본 후 합리적인 가격을 따져 소싱하고, 컨테이너 단위로 주문하다보니 기존 수입상들이 활동하던 때와 다르게 유통시장이 대형화됐고, 골목상권은 시들해져 가는 추세라고 그는 전했다.
전자상거래 시장도 향후 5년간 연평균 18.5%의 성장세를 기록해 2023년에는 2조6000억 루블에 달할 것으로 예견했다. 또 물류, 전자결제 등 인프라가 발달함에 따라 해외 인터넷 쇼핑몰로부터 상품을 구매하는 ‘직구’ 시장도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러시아의 이같은 시장 흐름 분석을 바탕으로 전 교수는 “극동지역을 테스트베드로 삼을 것"을 적극 권했다. 지금처럼 극동지역을 물류의 거점이라고만 보지 말고 '테스트 시장'으로 보라는 뜻이다. 그는 "극동지역을 대상으로 약 1년간 3~5번에 걸친 트레이딩 후, 현지에서 어느 정도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안테나샵이나 법인 등을 세워 소비자와 직접 접촉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별다른 마케팅비가 없어도 물건이 꾸준히 팔리게 되는데, 이때 현지화를 시켜 ‘메이드인 러시아’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현지화도 “처음엔 검증된 제품을 현지에서 소분하는 정도로 시작해 점차 확대해나가는 것”을 추천했다.
전 교수는 또 “우리 기업도 적어도 러시아에 진출하기 전에 러시아어로 된 브로슈어 정도는 홈페이지에 게재해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익준 에코비스 대표는 "러시아 진출 기업의 40%가 통관 시 추가 문서 제출, 과세표준 가격 수정 요구 등의 문제를 경험한다"며 "러시아 진출에 따른 체계적인 통관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 이재영)은 신북방정책의 주요 협력 대상국인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강화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푸틴 4기 극동개발정책과 한·러 신경제협력 방향' 연구보고서를 내놨다. 정부출연연구원 답게 문재인 정부의 북방정책 방향을 조언하는 거시적인 내용이다.
이 보고서는 우리 정부가 기존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Eurasia Initiative)’ 정책에서 제시한 대 러시아 경제협력과제들을 변화된 현실에 맞게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한국의 신북방정책과 러시아의 신동방정책 간에 전략적 접점을 찾아야 하는데, 극동연방관구의 사회·경제적 구조와 특징, 산업구조를 분석해 결론을 도출했다.
그리고 5가지 새로운 협력방안을 제안했다.
첫째, 극동 연방관구의 특성을 파악하고 극동지역 9개 지방들에 대한 차별화된 경제협력 방안을 모색한다. 극동 연방관구의 사회·경제적 구조와 특징을 살펴본 결과, 한국과 극동지역 간 협력은 기간산업과 성장산업을 중심으로 추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채굴업, 수산업, 농업 등에 한국의 가공기술을 접목하여 원자재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향의 협력을 추진하고, 지역별로 특화된 산업은 보다 세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또 극동 9개 지방에 산재해 있는 경제특구(선도개발구역,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 등)의 개발 현황과 특징을 파악하고, 사회·경제적 여건에 부합하는 경제협력 부문을 선정하여 세부적인 극동지역 진출방안 및 협력사업을 구상해야 한다.
둘째, 러시아의 극동지역을 대상으로 ‘나인브릿지 플러스 알파(9-Bridge+α)’ 전략을 추진한다. 우선 러시아 정부의 주요 관심사인 경제현대화와 산업다각화, 현지화 및 수입대체산업 육성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발굴해야 한다. 그 다음 푸틴 대통령이 집권 4기 사회경제정책의 핵심 기조로 내세우고 있는 ‘러시아 시민들의 삶의 질 개선’ 부문에서 양자간 세부적인 협력방안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한국의 강점과 상호 의존적 경제구조를 활용한 극동 협력전략을 수립한다.
넷째, 극동지역을 대상으로 새로운 형태의 남·북·러 3각 협력사업을 발굴한다. 일례로 나진·하산 프로젝트 재개 여부와 세부적인 협력방안에 대한 사전 검토 및 사업 추진 계획이 필요하다. 향후 나진항과 연계한 패키지(항만 배후 산업단지, 물류 클러스터, 크루즈 관광 등)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남·북·러 3각 협력의 범위와 규모에 대한 확장 역시 가능하다.
다섯째, 지방정부 간 협력을 증진한다. 한국은 러시아와 중앙정부 간 협력뿐만 아니라 지방정부 간 협력도 증진해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