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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새로운 피조물
2020. 1. 5. 이현래 목사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이 말이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모른다. 옛날에도 늘 좋았지만 갈수록 좋아지는 말씀이다. 늘 좋은 말씀이다. 새해마다 늘 하는 말씀인데 새해마다 늘 달라진다. 금년에는 유독이 더 달라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달라지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새로운 피조물! 이것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 생활을 두 번이나 했다. 물론 뒤엣것은 짧은 것이지만 애굽에서는 400년이니까 밤낮 똑 같은 생활, 노예생활, 피라미드 만드는 생활인데, 이것이 얼마나 지겨웠겠는가? 그뿐만 아니다. 자기들은 돌아갈 곳이 있는 백성들인데,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있는 그런 조상이 있는 백성인데, 이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좀 괜찮은데 가야될 고향이 있는 백성들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새 것을 찾게 된다. 매일 똑 같은 생활이니까 매일 잠자고 일어나면 일을 하러 가야 된다. 그것 밖에 없는 생활이다. 어쩌면 오늘 이 시대도 그런 시대가 아니겠는가? 눈 뜨고 일어나면 일하러 가야 된다.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아침이 매우 바쁘다. 아침밥을 제대로 먹고 가는 사람이 별로 없고 씨리얼 하나 먹고 같다. 미국도 그렇다. 우리나라도 점점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다. 매일 똑 같은 생활을 하니까 이런 시대에는 새로운 것이 더욱 필요하다. 살기 좋아진 것 같은데 매일 똑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이 있고 거기에 따르는 형식과 의식이 있는 백성들이다. 의식이라는 것은 거기에 아무리 의미를 부여해도 늘 하면 똑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짜내야 되고 항상 똑 같으니까 새로운 것이 없다. 종교마다 의식이 있어서 새롭게 해보려고 애를 쓰지만 새로워지는가? 속이 새로워지지 않는데 형식은 똑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교회에서 하는 것을 보니까 대단하다. 나는 시골 교회에 살아서 그렇게 해보지 않았는데, 성찬식을 하는 것을 보니까 정말 굉장했다. 큰 교회들은 차려놓은 것도 굉장하고, 교인들이나 다 새로운 옷을 입고 나오고, 거기에 봉사하는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이 다 특별한 옷을 입고 나오고 대단하다. 그렇다고 새로워지겠는가? 그날 잠깐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런 생활을 계속 했으니까 새 것이 필요한 백성들이다. 그런데 생명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매일 자라기 때문이다. 매일 자라기 때문에 어제 있던 것은 오늘 없는 것이다. 흘러가는 물이 항상 그 자리에 있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생명도 그 자리에 있지 않는다. 늘 변하고 있는데 형식과 의식만 변하지 않고 있다. 아이들은 커 가는 데 옷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난하다 보니까 줄 것이 없어서 늘 그것만 입히면 아이들이 제대로 크겠는가? 뱀도 1년에 한 번씩 허물을 벗어야 사는데, 사람은 100년, 500년을 가도 허물을 안 벗으려고 한다. 지금 기독교가 뭘 지키려고 애를 쓰는가? 500년 전의 것을 지키려고 한다. 개혁시대로, 개혁주의로 돌아가자고 한다. 개혁이 언제인 줄 알아 봤더니 500년 전 종교개혁 때다. 새로 나아갈 데가 없으니까 자꾸 옛날 것만 지키려고 생각한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하고 몰아붙인다. 새롭게 나아가야 하는데 새롭게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 옛 것을 지켜야 되니까 새 것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가서 환원한다고 한다. 환원이 어딘가 했더니 초대교회다. 초대교회가 했던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 머리에 수건을 써야 된다거나 이런 것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니 발전이 되겠는가? 아이들은 매일 자라는데 기독교는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몇 년도인지 심천에 갔을 때, 포플러가 물가에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생명은 자란다는 그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에 딱 맞아서 춘천 형제들이 여기 대구에 까지 와서 살게 되었다. 생명은 자란다. 그 말은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즉석에서 한 말이다. 계획에도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논길을 걸어서 들어갔다. 논길을 가는데 누가 와서 갑자기 내게 말씀을 하라는 것이다. 올 사람이 빠져버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하게 된 것이다. 옆에 보니까 포플러가 자라고 있다. 그래서 내가 간단하게 한 말인데, 그것이 우리 춘천 형제들이 대구까지 오게 한 말씀이 되었다. 생명은 자란다. 생명은 자라기 때문에 자유가 필요하다. 같은 옷을 계속 입을 수가 없다. 우리 피부도 계속해서 새로워진다. 매일 새로워지고 있다. 그냥 있으면 죽는다. 늙어서 순환이 빨리 안 되니까 피부가 때가 많이 낀다. 어린 아이들은 때가 안 낀다. 목욕을 안 시켜도 때가 안 낀다. 그런데 늙으면 목욕을 자주 해도 때가 자꾸 낀다. 때라는 것은 각질이다. 밖에서 묻은 것이 아니고 내 몸이 벗겨지느라고 끼는 것이다. 생명에는 이런 자유가 필요하고, 자기 속에 법이 있다. 생명 자체에 내율이 있다. 자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만히 두면 자기가 때도 벗고 다 하는 것이다. 우리가 비누를 쓰지만 안 써도 저절로 다 벗겨져 나가게 되어 있다. 계율이나 의식이나 형식이나 이런 것이 있으면 방해가 되는 것이다. 껍데기를 벗는데 방해가 된다. 자유가 있어야 생명은 자라게 된다. 우리 교회 초창기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보고서는 개판이라고 했다. 교회가 무슨 이 모양이야, 그랬다. 그런데도 왜 그냥 놓아두었는가? 그래야 벗겨질 것은 벗겨지고 이렇게 안 되겠는가? 꽉 묶어 놓으면 안 벗겨진다. 그때는 의자도 없이 맨 바닥에 앉아서 집회를 할 때니까 자고 싶은 사람은 뒤에서 자고, 껌 씹을 사람은 따로 있고, 앞에서 북새통을 치는 사람들은 앞에 있고 그랬다. 완전히 인간시장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곳에서 생명의 공급이 필요한 것이지 막아 놓고 이러니저러니 해야 되는 것이 아니었다. 생명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차츰차츰 의식이나 이런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맨날 하는 것이 똑 같네, 이렇게 되지 않겠는가? 겉으로는 말을 못하지만 속으로는 맨날 똑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법으로 죄가 용서 되었다. 이렇게 그냥 하는 것이지 자기들이 연구된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죄를 안 짓는 것도 아니니까 자연히 뭔가 새로운 것이 와야겠다는 생각을 다른 민족에 비해서 많이 한 것 같다. 그래서 어떤 기름부음 받은 자가 나타나서 새롭게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온 것이다. 성경에 보면 ‘새’ 자 붙은 것이 너무 많다. 새 언약, 새 사람, 다시 난다는 것도 새 것이고, 새 피조물, 성전도 새 성전, 새 시대,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이런 ‘새’ 자가 붙은 것이 매우 많다. 옛 것이 지나갈 때가 되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이런 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것이 공급이 되어서 새로운 생명이 들어와서 새로운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갈망이 생긴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너무 잘 살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생명을 연장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죽으면 미이라를 만들어서 그것을 보관하는 것이다. 미이라가 다른 것이 아니고 마른 명태 같다. 박물관에 가보니까 명태 말린 것처럼 생겼다. 미이라를 보관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하느라 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 너무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이니까 그것을 보존하고 싶은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와 같이 살던 사람들도 함께 끌고 들어가서 죽는다거나 이런 짓을 다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상 나그네 생활을 했다. 이것은 아닌 데, 가야 될 곳이 있는데, 우리 고향이 있는데, 조상들의 땅이 있는데, 약속한 것이 있는데, 이런 백성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한국 사람들도 뭔지 모르겠는데, 해방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 해방될 때부터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을 똑 같이 한 것이다. 국회의원은 지금이나 그때나 똑 같다. 맨날 싸우고 있다. 서로 자기가 잘한다고, 자기가 하면 잘할 것이라고 한다. 사실 잘 한 것도 없다. 그런데도 맨날 그런다. 백성들은 또 맨날 속고 있다. 혹시 이 사람이 나오면 잘할까? 저 사람들이 나오면 잘할까?’ 이렇게 속고 있다. 우리 백성들은 이상한 백성들이다. 조선시대부터 맨날 싸운다. 새 것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전도서의 기자는 말한다. 내가 다 두루 돌아보고 해 보고 했는데도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더라고 했다. 그래서 인간에게 맡겨놓으면 절망이다. 솔로몬과 같은 사람이 다 해 봤는데도 새 것이 없더라고 하니까 어찌 되겠는가? 우리는 아예 생각도 안 해야 되는데, 생각을 안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 새 언약을 세우셨다. 새 언약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밖에 있는 율법이나 계율을 지키고 의식을 따르고 이렇게 해오던 시대에서 새 언약을 세우니까 “내 법을 그들의(저희) 생각에 두고 그들의(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8:10)라고 했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속에 그것을 넣어 주겠다는 것이다. 요즘 칩을 머리에 넣어 놓으면 칩에 따라서 사람이 움직인다고 하는데 그런 식이다. 사람 마음속에 어떤 칩을 딱 넣어 놓으면 어떤 불평도 없게 만들어 버리지 않겠는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늘 즐겁기만 하고 그렇게 될 수 있다. 머리에 뭔가 잘못되면 그렇다고 한다. 머리에 뭘 다치면 계속 웃기만 하는 것도 있고, 만날 울기만 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사람 속에 앞으로 과학적으로 뭔가를 넣어 놓으면 교회 갈 필요도 없고, 절에 갈 필요도 없게 될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서 불교 방송을 보니까 명상 훈련을 했다.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지는 않았다. 아마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것 같은데 화가 날 때는 이렇게 해라, 분노가 나올 때는 이렇게 해라, 이런 것을 가르쳐 준다. 교회 와서 해도 해도 안 되는 사람은 저기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 좀 받아 오면 안 되겠는가 싶었다. 하나 배웠다. 분이 확 일어날 때, 분노조절이 안 되는 사람들은 분이 확 일어나면 일단은 스톱하라고 한다. 입으로 ‘스톱’하라고 한다. 그래서 일단 멈춰놓고 그 다음에 심호흡을 하라고 한다. 깊이 들여 마셔서 확 내 뱉으라고 한다. 그러면 속에 있는 분노가 쑥 내려간다고 한다. 그렇게 되고 나면 손끝이 부들부들 떨린다고 한다. 그러면 그때 ‘이게 무슨 일인고? 어디서부터 이런 일이 생겼는고?’ 이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훈련을 시켰다. 심리학적으로 연구한 것이다. 불교방송답게 했다. 우리 교회를 나와서 아무리 해도 말을 못 알아듣고 안 되는 사람은 가서 훈련을 받고 오면 좋겠다. 명상 훈련을 받고 오면 된다. 분노 조절이 안 된다거나 얼핏 하면 신경질이 나는 사람들은 고침을 받고 왔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하는 것은 새 것이 없다. 그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세웠다. 왜 새 언약을 세웠는가? 어떻게 하려고 새 언약을 세웠는가? 그때 들으면 그럴듯하다. “내 법을 그들의(저희) 생각에 두고 그들의(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8:10) 이제는 돌판에 있지 않고, 성전에 있지 않고, 내 속에 직접 그것을 두겠다는 것이니까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어떻게 줄 것인가는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에서는 은사를 받는 것,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령이 나에게 들어오면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 내 속에 들어온 것인가? 어떤 은사는 행하지만 하나님의 법이 내 안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 체질이 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 말이 새 언약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내 법을 그들의(저희) 생각에 두고 그들의(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8:10) 이것이 새 언약이다. 새 언약의 성취가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드러났다. 그 사람을 보면 예레미야가 말했던 새 언약이라는 것이 이렇게 성취가 되는구나. 사람 속에 이렇게 되는구나. 사람이 바뀌어져 버리는구나. 우리말로 하면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져 버리는구나.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을 보실 것이다. 사람이 180도 완전히 바뀌어서 일주일 전에 불평불만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교회에 와보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속에 하나님의 칩이 들어가서 그렇다. 자기도 이상할 것이다. 내가 어제까지 안 그랬는데 내가 누구인고? 이런 생각이 안 들겠는가? 옛날에 누군가 갑자기 굴러온 호박을 잡아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한때 그런 비아냥을 하는 소리가 있었다. 둘이 서로 잠을 자면서 이게 내가 맞느냐고 서로 꼬집어본다는 말이 있었다. 대통령을 할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호박이 덩굴째로 굴러 떨어지니까 보고 있다가 이거 남 줄 거 뭐가 있는가? 우리가 갖자고 해서 대통령이 된 것이다. 부인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기 살을 꼬집어본다고 했다. 이게 내가 맞는가?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말씀이 들어와 버리면 사람이 확 바뀐다. 바뀌니까 속에 꼭 칩을 넣어 놓은 것 같다. 전자 칩을 넣어 놓은 것 같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할 게 아닌가? 원래는 안 그랬는데 오늘 내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 이런 생각이 안 들겠는가? 예레미야에게 예언했던 그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우리 교회에 와보면 안다. 저렇게 성취가 되는구나. 저 사람을 보니까 새 언약이라는 것이 저렇게 성취가 되는구나. 저 사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딱 들어가 박혔구나. 살이 되고 피가 되었구나. 이렇게 알 수 있다. 방언 한다고 되겠는가? 입신한다고 되겠는가?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왜 새 언약을 세우셨는가? 다 안 된다는데 왜 세웠는가?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있을 줄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언약을 세웠다. 만약에 언약을 세워놓고 안 된다면 누가 그 하나님을 믿겠는가? 언약을 세웠으면 반드시 성취가 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시대에 예언했던 말씀을 그때는 사람들이 ‘저게 무슨 소리인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4절에 와서 보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 사람이 실재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 사람이 나타나고 만 것이 기독교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선천적으로 그런 사람이다. 하늘 저 편에서부터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그 말은 누구 한 사람만 가리켜서 한 말인가? 거기에는 분명 ‘저희’라고 하였다. “내 법을 그들의(저희) 생각에 두고 그들의(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8:10) 백성을 두고 한 말이지 누구 한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그러면 당연히 예수께서 그렇게 되셨으면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된다. “내 법을 그들의(저희) 생각에 두고 그들의(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8:10)고 하였다. 우리 생각으로 하지마라. 우리 생각으로 되겠는가? 안 되겠는가? 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도 안 된다. 솔로몬이 다 해보고 하는 말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더라. 내가 임금도 해 보고 별 것 다 해봤는데 해 아래 새 것은 없더라고 했는데 우리의 생각으로 이렇게 하면 새 것이 오겠다고 한다고 되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이것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 되셨으니까 우리도 당연히 되어야 한다. 안 되면 안 된다. 안 되면 하나님이 거짓말 하는 것이다. 이 언약은 생명의 언약이니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언약이다. 사람으로서는 계획도 할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언약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희랍사람들이 머리가 그렇게 좋아도 이것은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취가 되었다. 씨가 하나 만들어지면 그 다음에는 많이 퍼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씨를 만들고 우리는 농사를 지었다. 씨를 만드는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번다. 우리는 엄청나게 일만 해야 한다. 지금은 없어져 모르지만 국광이라는 유명한 사과가 있다. 그 사과는 나무 하나에 수백 상자가 나온다. 그때는 사과가 없을 때니까 사과나무 한 두 그루를 가지면 아들 대학을 보낸다고 했다. 그 정도로 보물이었다. 그런데 후지라는 부사 사과가 나왔다. 일본에서 새로운 품종이 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재빠르게 갖다 심었다. 다른 사람들은 국광이 너무 돈이 되니까 아까워서 바꿀 수가 없었다. 이 새로운 품종을 바꿔서 3~4년 키우고 나니까 사과가 굵기도 하고 달기도 한 훨씬 좋은 사과가 나왔다. 이제는 이것이 금싸라기가 된 것이다. 그때서야 사과나무를 베어내고 새로 심었다. 늦은 사람은 항상 뒷북만 치는 것이다. 대추도 그랬다. 경산에 있는 어떤 집에 가보니까 사과나무를 베고 대추를 심었다. 노인들은 결사반대하고 젊은 사람들은 싸우고 어쩌고 해서 대추를 겨우 심었다. 말린 대추가 아니라 풋 대추 조그마한 한 상자를 그때 돈으로 7만원씩에 팔렸다. 사과와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수입도 비교가 안 되고, 일도 비교가 안 되었다. 사과는 1년에 10번 이상 약을 쳐야 되는데, 대추는 그냥 한두 번만 치면 된다고 했다. 얼마나 쉬운가! 그래서 대추 농사지은 사람들이 큰돈을 벌었다. 지금은 중국에서 대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대추 값이 그렇게 비싸지 않다. 그런데 그때는 굉장히 비쌌다. 새로운 품종이 오면 빨리 갈아야 되는데, 옛 것을 생각하고 못 갈고 있다가 뒷북만 치게 되는 것이다. 씨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라는 씨가 왔다. 그런데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것만 받아들였다. 씨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그분이 하는 행동만 받아들였다. 행동을 본받아서 자기도 그렇게 해보려고 하니까 되는가? 안 된다. 예수님처럼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모방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아니라도 할 수가 없다. 여러분들도 내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하려고 해보면 되는가? 안 된다. 하물며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보고 한다고 되겠는가? 생명이 다르다. 지난번에 보니까 재미있는 말이 있다. 침팬지를 동물원에 두니까 사람들이 구경을 많이 온다. 돈이 되었는데 이 침팬지가 죽어 버렸다. 그래서 침팬지의 가죽을 벗겨서 사람이 그것을 뒤집어쓰고 앉았으면 사람들이 오겠다고 생각해서 앉아 있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보고서는 이놈도 가짜라고 했다고 한다. 진짜와 가짜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씨로 왔다. 행위로 왔으면 우리가 본받으면 된다. 그런데 행위로 오신 분이 아니고 씨로 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씨로 그렇게 왔다. 예수님이 와서 행동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것을 가르치려 오신 것이 아니다. 자기를 심으려고 왔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자기를 담보해서 새 언약을 세웠다. 내가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고 다시 세우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다, 이것은 내 피다, 이렇게 했다. 이것은 나를 먹으라는 말이다. 나를 먹으라고 자기를 담보해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의 살과 피를 먹는가? 요즘에도 성찬식을 많이 한다. 1년에 몇 번씩 하는지 모르겠는데 거룩하게 한다. 큰 교회에서 하는 것을 보니까 성대하고 거룩하게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하고 있다. 앞에 다 큰 상을 차려놓고 하얀 보를 씌워놓고 거기서 봉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얀 옷을 입고 성찬식을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예수가 내 속에 들어오는가? 천주교에서는 매주 떡을 뗀다. 그것이 예수님의 살이라고 주는 것이다. 살로 생각하고 먹으라는 것이다. 먹으면 예수님의 살이 내 살이 된다는 화체설이다. 그런데 그것을 먹는다고 예수가 되는가? 생각을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생각을 해서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오겠는가? 내가 예수님을 생각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겠는가? 수도원이나 그런 곳에서는 매일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다. 아틀란타에 가니까 어떤 형제의 어머니께서 천주교에 다니시는데 신공을 드린다고 한다. 신공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가 했더니 시간을 정해놓고 묵주신공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묵주를 돌리면서 마음속으로 예수를 생각하는 것이다. 한 시간씩 두 시간씩 약속을 해놓고 한다. 예수를 자기 속에 넣어보려고 저렇게 애를 쓰는구나. 어떻게 하면 자기 생각 속에 예수를 잡아 놓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생각 속에 예수를 어떻게 잡아 놓는가? 모르겠다. 연애를 푹 빠져서 하다보면 밤낮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연애 호르몬이 끝나면 끝나는 것이다. 연애 호르몬이 6개월인가 몇 개월 간다고 하던데, 그것이 끝나면 끝나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그렇다. 예수는 어떤 방법으로도 내가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지방교회에서 했다. 그 말을 듣고 정통인 사람들은 불경하다고 예수를 먹는다고 한다고 먹으려면 씹어 먹고 요리해야 하는데, 예수를 어떻게 씹어 먹고 요리를 하는가? 불경한 놈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죽하면 먹으라고 했겠는가? 생각해보라. 믿으라고 해도 안 되니까 먹으라고 한 것이지 믿으라고 해서되기만 하면 먹으라고 하겠는가? 아무리 잘 믿어도 안 된다. 잘 믿는다고 내 속에 들어오겠는가? 생각해보라. 멍청하게 믿지 말고 생각해보라. 나도 옛날에는 그런 사람이 부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잘 믿는가? 나는 이렇게 믿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잘 믿는가 하고 부러웠다. 그런데 이제 보니까 내가 정상이었다. 내가 믿는다고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한다고 내 속에 있겠는가? 나는 한 가지 생각을 계속 못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것만 계속 생각하고 있지 그전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떤 것을 계속 생각한 일이 없다. 못한다. 이것은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도 계속 생각난다.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고 예수를 어떻게 먹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했는데, 기독교에서는 먹을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하는가? 기념설이다. 성찬식을 하는 것은 기념하는 것이다. 고린도서인지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념하는 것과 먹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아침에 밥을 한번 먹고 그리고 그 다음에 기념만 한다. 아침식사 기념만 한다. 어느 집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었더니 너무 맛있더라는 그것만 기억을 한다. 시간이 돌아오면 스테이크 기억 식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내 속에 들어오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정성껏 하려고 한다. 성찬식에 참여하려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참석해야 되고,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먹지 말아야 하고, 사전에 이런 교육을 시킨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찝찝하면 먹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거룩한 성체인데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너희가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 말이 있다. 그렇게 정성껏 먹는다고 해서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오겠는가? 아니면 그렇다고 해서 기념이 되겠는가? 좀 생각을 해보라. 되겠는지 안 되겠는지 생각을 해보라. 내가 생각할 때, 왜 생각도 하지 않고 믿어버리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라. 그것은 안 될 일이다. 그렇게 믿는다고 그것이 내 속에 들어오겠는가? 기념한다고 들어오겠는가? 예수로 성취되었는데 이 예수를 먹었는데 먹을 방법이 없다. 살과 피를 주시며 먹으라고 했는데, 이 좋은 것을 못 먹으니 그림에 떡이다. 참 좋기는 좋은 것인데 못 먹으니 헛일이다. 못 먹는 것은 알고 보면 괴로운 것이다. 내가 지난번에 병원에서 나왔는데 밥을 먹을 수가 없다. 입에 침이 없으니까 입에서 씹을수록 떡이 된다. 안 넘어간다. 그래서 그것밖에 없으면 못 먹어서 죽는다. 그런데 묘하게 육수 국이 있어서 육수를 먹으니까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쌀보다는 고기가 훨씬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왜? 내 몸에 가까우니까 그런 것이다. 고기 국물이니까 내 몸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그 고기 국물과 같이 먹으니 넘어가서 처음에 먹고 살았다. 못 먹으면 죽는 것이다. 뻔히 보고도 이것이 밥이네, 이것이 좋은 것이네, 이렇게 해도 못 먹으면 죽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못 먹으면 죽는다. 물도 안 먹으면 열흘밖에 못 산다. 물을 먹으면 40일을 살지만 사람은 안 먹으면 죽는다. 우리가 예수를 못 먹으니 어쩌겠는가? 있기는 있는데 못 먹으니 어찌하겠는가? 먹기면 하면 내가 그분이 되고, 그분이 내가 된다는데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진 것이다. 형편으로 보면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이 되어 몰려서 죽은 것이다. 저런 참람한 놈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고 하다니, 성전을 헐라 하다니, 안식일을 범한다니, 그러니 저런 놈을 살려두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불경하는 것이다. 나쁜 놈을 저렇게 하나님을 모욕한 놈을 살려 놓으면 내가 그런 놈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죽였다. 직접적인 동기는 그렇다. 그런데 그분의 죽으심에 의해서 일어나는 결과가 결과를 보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는 예수 죽으심을 어떻게 보는가? 나를 위해 내가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되기 위해서 죽었다. 다른 사람은 지극한 사랑을 보이기 위해서 그래서 죽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기 위해서 죽었다는데, 나는 아무리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봐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겠더라. 나 때문에 죽은 것을 모르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죽었다고 하지만 어떻게 사랑을 나타내는지를 모르겠더라. 그래서 나는 그것을 못 먹었다. 그렇게 해석한 것을 내가 먹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잘 먹는데, 나는 못 먹어서 맨 마지막에 그 사람들이 못 먹은 남은 찌꺼기를 먹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내려오라는데 못 내려온 그 찌꺼기가 남았다. 이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좋으면 다른 사람이 다 가져갔다. 나 같은 사람에게 배당이 되겠는가? 사랑, 봉사, 희생 이런 것은 다 가져갔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못 먹는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고 가져간 것을 나는 안 먹어지고 못 먹어지니 어찌하겠는가? 나는 배고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은 것이 살아났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너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다른 것은 먹을 수 없었다. 좋은 음식이 많은데 밥맛이 없으면 미음밖에 못 먹는다. 그런데 미음을 먹으면 배가 계속 고프다. 미음을 한 시간 되면 고프고, 한 시간 되면 또 고프다. 먹기는 좋은데 먹고 나면 진기가 없어서 금방 배가 고프다. 보리밥이든 뭐가 되든 밥을 먹어야 든든하지 죽 먹고는 못 살겠더라. 입맛 좋고 밥맛 좋고 소화가 잘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살찐 사람에게 말하면 먹는 것이 없다거나 별로 안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안 먹고 살찌는 방법이 있겠는가? 그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먹는다. 남이 안 먹는 것을 먹고 있다. 안 먹고 살찌는 사람은 없다. 마른 사람치고 잘 먹는 사람 없다. 어떤 사람은 마른데 먹기를 잘 먹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먹고 나면 바로 배설한다. 흡수를 못하고 도로 내보낸다. 수출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살이 안 찐다. 좌우지간 사람은 위장이 좋아야 건강하고, 위장이 좋아야 잘 먹고 건강하다. 그런데 위장이 나쁘면 미음 먹어야지 죽 먹어야 된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 얼마동안 금식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무슨 주사를 주었는데 배고픈지도 모르겠고 먹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어느 날 가니까 식사가 나온다고 하여 무엇을 주나 했더니 푸르스름한 주스 50cc를 준다. 내일도 준다고 해서 내일은 뭐를 주겠지 했더니 아침에 그것을 또 50cc 준다. 그리고 저녁에 또 50cc를 준다. 50cc 늘어난 것이다. 그러고 나니까 배가 고팠다. 그래서 미음을 주었다. 뭔지 모르겠는데 주스 비슷한 것인데 그전에는 배고픈 것이 없더라. 신기했다. 그래서 차차 때가 되면 배가 고팠다. 그전에는 때가 되어도 배가 안 고프고 똥도 안 나왔다.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전혀 안 먹어 본 놈은 먹을 수 없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없고 생각이 안 난다. 그런데 그놈이 들어가니까 그때부터 식욕이 생겨서 먹기 시작했다. 아마 예수 먹는 것도 그렇지 않겠는가 싶다. 못 먹을 때는 안 먹을 때는 생각이 없다. 고기는 먹어본 놈이 먹는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렇다. 옛날에 고기가 귀해서 얼마 먹지 않았다. 일 년에 한두 번 먹으면 다행이다. 어려서 그렇게 자라서 고기 먹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 그런데 젊은 형제들은 가난해서 고기를 많이 먹지도 못했지만 어쩌다 먹으면 기운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힘이 난다고 하고, 고기 좀 먹었다고 소란스러웠다. 미국에 가서 소고기만 계속 먹다 오니까 한국 와서 밥상을 보니 푸른 초장이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다. 고기만 먹다 오니 먹을 것이 없다. 고기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예수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 예수 먹는 방법, 가장 쉽게 먹는 방법이 내려오라. 내려와 봐라. 그런데 못 내려온 그 사람이다. 왜 그런가? 내가 그 사람 안에 공감이 된다. 나도 그 사람이다. 남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겠다. 막 뛰어내리라고 조롱하는데, 못 내리고 있는 그 사람이 내가 이해가 된다. 왜? 나도 그럴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남이라고 생각하면 평생가도 못 먹는다. 남이 아니고 나다. 한 치도 안 틀리게 나다. 예수를 지금 잘못 전파한 것이 무엇인가? 신이라고 전달되었기 때문에 못 먹는다. 그리고 신이라고 안 해도 반신반인이니까 내가 먹을 수 없다. 어떻게 신을 먹겠는가? 경배는 할 수 있지만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신이라고 하고 경배를 하도록 만들어버렸으니까 먹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제사상 차린데 가보면 비닐에 싸놓은 가짜 과자가 있는데, 사람이 못 먹는 것이다. 보기만 좋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 그런데 예수가 그렇게 되어 버렸다. 보기만 과자같이 생겼지 실제로는 먹을 수 없는 과자다. 그러니까 맨날 봐야 배가 부르겠는가? 보기는 늘 그냥 본다. 매일 설교 듣는다. 그런데 내 속에 들어온 것이 없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니까 들어오지 못한다. 내가 아마 그래서 안 된 것 같다. 안된 이유를 몰랐는데 그래서 믿음이 안 생긴 모양이다. 그런데 내려오라고 그렇게 조롱함에도 불구하고 내려오지 못했다. 한번 생각해보라. 하나님 아들이거든 내려오라는데 이것이 얼마나 큰 창피이고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너 오병이어로 5천명 먹인다고 하지 않았느냐? 먹이고도 부스러기만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것이다. 너, 죽은 나사로를 나흘이 되었는데 살렸다고 했지 않느냐? 너, 갈릴리 가나에 가서 잔치 집에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소문났지 않느냐? 우리 같은 사람에게 그 말하면 아무렇지 않지만 예수에게 그 말을 하니 얼마나 창피하겠는가? 그런데도 못 뛰어내린다. 그런데 이것이 안 뛰어내린다고 전파가 되었다. 뛰어내릴 수 있는데 안 뛰어내렸다고 전파가 되었기 때문에 역시 우리는 먹을 수 없게 되었다. 확실하게 못 뛰어내렸다고 했으면 처음부터 우리도 먹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분은 충분히 내려 올수 있는 분이지 왜 못 내려오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를 구원하려고 안 내려온 것이다.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 의식이 자기도 모르게 들어있다. 왜 말씀이 도 안 들어오는지 아는가? 이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안 들어오는 것이다. 아직도 안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속에 박혀 있다. 예수님이 못 뛰어내렸다니?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왜 그런 분이 못 뛰어내리는가?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소리를 지금 하는가? 2천년 동안 없던 말을 왜 지금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안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없어야 하는데, 이것은 너무 놀라운 일이다. 예수를 신이라고 해버렸기 때문에 먹을 수 없다. 내가 이단이 될망정 확실하게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밝혀야 한다. 옛날 같으면 죽는다. 지금으로부터 5백년 전에 이런 소리를 했으면 나는 그냥 십자가까지 갈 것도 없이 돌 맞아 죽는다.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말을 하는 것이지 옛날 같으면 이렇게 마음대로 말도 못한다. 그냥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아들이고 선제적으로 원래부터 있었다는데, 그런 분에게 내가 이런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당장 죽어야지 된다. 그런 사람이 죽은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보면 백번 죽어도 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가? 그럴 줄 알았다. 그러고도 살아남기를 바라겠느냐? 이러지 않았겠는가? 바울이 희한한 말을 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1:16)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겠는가?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가 내려올 수 없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고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 교회 안에서 말해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아주 엄청나게 큰일이고, 보통일이 아니다. 옛날 같으면 우리가 다 공회에 잡혀간다. 여기 앉아있겠는가? 생각해보라. 열심당원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가 여기서 숨 쉬고 있겠는가? 우리가 먹으려면 그 예수밖에 없다. 경배하려면 그 예수가 안 되지만 우리가 먹으려면 그 예수밖에 없다. 이것은 생사를 건 문제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수 먹고 죽느냐? 아니면 예수 안 먹고 사느냐? 이것이다. 내가 기독교인만 되려면 이런 고난을 당할 필요가 없다. 이런 비난을 받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내가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어쩔 수 없다. 불교에서는 불교를 부처님에게 돌려드려야 한다는 말을 한다. 한다.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도 기독교를 예수님에게 도로 돌려줘야 한다. 본적지에 도로 돌려보내야 한다. 왜? 우리가 너무나 엉터리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약을 먹어봐도 안 들으면 그 약을 반품해야 한다. 약을 썼는데 안 낫는다면 반품해야 한다.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믿고 했는데도 안 되면 반품해야 한다. ‘내가 이것을 먹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하고 반품해야 한다. 차라리 반품하라. 믿어도 안 되는 사람은 반품하라. 그리고 먹을 예수를 받으면 된다. 먹지 못할 예수를 받아놓고 효과가 있니 없니 하지 말고 먹을 수 있는 예수를 받으면 된다. 그러면 쉽다. 나는 이것보다 쉬운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를 먹는 것보다 쉬운 것이 없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그가 죽으실 때, 자기 혼자 죽은 것이 아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나를 포함하고 죽었으니까 내가 받아들이게 된다. 그가 혼자 내가 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으면 내가 참여가 안 된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자리에 있었으니까 내가 직접 십자가를 못 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를 포함하는 그분 안에는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만민에게 분배하려고, 나를 포함하신 것이다.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한둘인가? 수없이 많다. 왜 그 사람들은 나와 관계가 없는가? 그 사람들에게는 내가 포함이 안 된다. 무덤에 있는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공수래공수거다. 인생은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수없이 있다. 그런데 나를 구속할 만큼 자격이 없으니까 내가 그 안에 포함이 안 된다. 그런데 예수는 나를 포함하고 죽었다. 그래서 우리의 구속주가 된 것이다. 나를 포함하려면 나와 똑같아야 된다. 내가 돌멩이를 먹고 내 안에 포함시키겠는가? 뱃속에 들어있어도 포함이 안 된다. 고기를 먹었으니 소화가 되어서 내 안에 있지 돌멩이를 먹어보라. 돌멩이는 여전히 돌멩이다. 콩도 생콩을 그냥 삼키면 뱃속에서 그냥 콩으로 있는 것이다. 똥을 누면 도로 콩으로 나온다. 다이어트 할 사람은 그것이 좋다고 한다. 우리 교회에서 생콩을 먹는 형제가 있다. 매일 한주먹씩 먹는데 변비도 없어지고 아주 좋다고 한다. 콩이 그냥 내 뱃속을 돌고 나온다. 내 몸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냥 뱃속을 괴롭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나온다. 나올 때 오히려 나쁜 독소를 빨아들이고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건강에 좋다고 한다. 다이어트 할 사람은 해보라. 병들 것도 아니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해보라. 한주먹씩 먹어봐라. 씹지 말고 한약 먹듯이 물로 먹고 삼켜봐라. 그러면 똥 누기도 쉽고 다이어트가 된다고 한다. 콩은 평생 먹을 생각하고 해보라. 평생 먹어도 된다. 예수도 그렇게 먹으면 헛일이다. 예수는 통째로 먹으면 헛일이다. 씹어 먹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먹겠는가? 죽으니까 삶아먹기도 하고 구워먹기도 하지 안 죽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서 방안에 들어가서 구워먹는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한다.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고 다 먹으라고 한다. 그리고 나왔다. 내려오지 못한 예수는 누구든지 먹을 수 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먹을 수 있고, 없는 사람도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차별이 없어진다. 믿음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 차별이 없어진다. 믿음의 세계도 차별이 엄청나게 많다. 엄청나게 믿음이 좋은 사람도 많다. 내가 전에는 잘 몰랐는데 C.C.C.에 가니까 일을 다 믿음으로 한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굉장히 많다. 어떤 사람은 보고를 하는데, 회관을 지을만한 좋은 땅이 하나 있는데 돈이 없으니 매일 회원들이 가서 일곱 바퀴씩 돌고 온다고 한다. 그 땅을 두고 매일 C.C.C. 회원들이 돈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하니까 또 박수갈채가 얼마나 나오는지 모른다. 그것은 보통 믿음을 가지고 못한다. 너희들 뭐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 하겠는가? 여리고성을 점령하려고 왔다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하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매일 아침마다 한다. 지금은 샀는지 안 샀는지 모르겠는데 그렇다. 어쩌면 저런 믿음을 가질 수가 있는가했다. 놀라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으면 어떤 이적이 나타난다. 나는 그것을 아직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이적이 나타나는지 죽었다 깨어나도 잘 모르겠다. 한 번도 경험을 못해봤고 해보고 싶어도 안 되기 때문에 못해봤는데 이해를 못한다. 어찌되어서 이적이 일어나는지 이해를 못한다. 거기에 나도 오랫동안 메어 있었다. 그래서 안 되어서 가장 쉬운 길, 나 같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을 찾았다. 아주 간단하다. 그분을 보고 저 사람이 나구나. 내가 저런 사람이구나. 내 허풍, 버블, 거품을 빼야 되겠구나. 나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줄 알았구나. 어디가면 나는 이런 사람이요, 이런 사람이요,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구나. 예수님 명함에 오병이어 사건 등 명함을 쓰려면 한이 없다. 그런데 그 시간에 명함이 아무 소용없다. 그런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창피해지는 것이다. 왜 내려오지 못하느냐고 물으면 그래도 나는 옛날에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사람이라고 하고 있으면 유대인들이 얼마나 미워하겠는가? 명함이 소용없게 되었다. 신분에 관계된 모든 것이 다 사라졌다. 지금 기독교가 평화를 주장하고, 평등을 주장하고 있지만 맨날 해봤자 안 된다. 능력의 세계에 어떻게 평등이 있느냐는 것이다.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목사들이 평등한 줄 아는가?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천차만별이다. 자기 가족만 두고 강대상을 두드리고 있는 목사도 있고, 50만 명을 놓고 설교하는 사람도 있다. 생각해보라.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평등이 어디에 있는가? 없다. 월급을 평등하게 준다고 해서 평등이 되겠는가? 능력의 차이가 있다. 마귀는 우리를 능력의 세계로 이끌어서 집어넣었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거기에서 부비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 안에 와야 비로소 능력의 세계가 사라지게 된다. 그렇지 않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없애려고 하면 굉장히 어렵다. 자기 아내와 아들 둘을 앉혀놓고 셋이 모여서 설교하는 목사가 능력을 무시하고 배제하고 살아지겠는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도 독종이지 보통사람이 아니다. 세계가 바꿔져야만 그것이 가능하다. 세계가 바꿔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나는 경쟁심 같은 것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혼자 살아서 경쟁을 해보지 않았다. 형제간의 경쟁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런데 목회하러 나가니까 눈이 뒤집혀졌다. 당장 능력의 표가 나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능력의 세계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예수를 시인하면 얼마나 쉬운가! 나와 똑같은 사람을 시인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예수님과 내가 이 자리에서 만나면 서로의 명함이 없어진다. 모든 것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는데 어떻게 평등이 되지 않겠는가? 거기에서는 평등하자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 한 사람만 시인하면 된다. 저 사람이 나구나. 이것만 시인하면 된다. 나는 저 사람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구나. 나는 저 사람 안에 포함된 사람이구나. 이것이 영접하는 것이다. 손오공이 부처님의 손바닥에 있는 것처럼 나는 저 사람의 손바닥에 있구나. 나는 저 사람 이상이 될 수도 없고 이하도 될 수 없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한다. 그전에 우리가 ‘예수님 믿습니다.’고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을 시인하면, 이 사람을 영접하면, 이 사람을 참사람으로 영접하면, 내가 영원히 사모할 참사람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는 말이 그 말이다. 이것은 전혀 힘들이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김*식형제가 이것을 알게 되어서 옛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랑방에 들어와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옛날에는 어찌 그렇게 이유가 많은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C.C.C.때부터 그 의문점 때문에 나를 따라왔다. 다른 곳에서는 그 의문이 안 풀려서 그랬다. 그런데 요즘에는 의문이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너무 빨리 달려간다.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 이 사람이 새사람이다. 새사람이 없다.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갓난아이가 귀엽지만 크면 도로 똑같아진다. 갓난아이에게 깨끗하고 좋다고 하지만 조금 있으면 도로 똑같이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태어난 이 사람만 새사람이다. 해아래 새것이 없더라고 했던 것에서 제외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솔로몬이 보지 못했고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이 결국 새로운 피조물이고,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구성원이 된다. 교회의 참 구성원이 된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참구성원이 될 수 없다. 교회 구성원도 제대로 안 된다. 그렇다고 교회에 오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구성이 되려면 이 사람이라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된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은 자기들 형편 때문에 새것을 구했다. 자기들 민족의 형편이 그러니까 새로운 것을 찾았다. 그리고 희랍인들은 자기들이 너무 지루하니까 맨날 해봐야 똑같은 이야기이고 논쟁 밖에 없으니까 또 새로운 것이 없나하고 찾았다. 우리민족은 왜 해방 후 지금까지 국회에서 싸움만 하고 있다. 우리 사상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대답은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 대한 대답을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생기기가 그렇게 생겼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지시한 길이 그런 길이다. 인간이 그것을 질문했기 때문에 주신 대답이 아니다. 인간이 그것을 갈망했기 때문에 주신 것도 아니다. 아무도 이것을 기도한 사람이 없다. 지구상의 어떤 사람도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해주옵소서.’ 하고 기도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십자가에서 못 뛰어내리는 그 사람 안에서 내가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고 기도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느 교회에 그런 신자가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그런 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엄청 많다. 조지뮐러 같은 사람은 고아의 아버지인데 오만번의 기도에 다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도 이 기도는 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이 사람 안에서 내가 다시 태어나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인류 가운데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독자적인 대답이지 우리의 사정에 관계된 대답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어보고 창조하였는가? 전혀 아니다. 자기의 목적 때문에 나를 창조한 것이지 나와 의논해서 창조한 것이 아니다. 나와 의논했더라면 나를 멋있게 해달라고 했을 것이다. 코도 크고, 눈도 크고, 입도 크게 만들어달라고 했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너무 잘생겨서 열등감이 생긴다. 기왕에 주문을 하려면 서양 사람같이 주문하지 메주댕이 같은 모습을 주문하겠는가?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나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인간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새로 태어난 이 사람도 내 생각과는 전혀 관계없이 온 사람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이다. 바울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내 생각에 있거나 없거나 하나님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내 소망 내 갈망이 중요하기는 해도 이것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것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가상하다고 생각 하겠지만 그것을 해답해주시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달라고 하는 것 중에서 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가 달라고 한다고 부모가 주겠는가? 이번에 뉴스를 들으니까 참 심란하다. 압구정동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학교에서 중학생이 담배를 피우니까 그것을 못하게 하려고 선생님이 가방검사를 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의 가방에서 담배가 나와서 뭐라고 하니까 아이가 엄마에게 말했고, 그 엄마가 학교를 찾아왔다. 압구정동에 사는 그 엄마가 선생님에게 ‘왜 남의 사생활을 참해했느냐?’고 했다고 한다. 압구정동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곳이다. 옛날에 한명회가 살 던 곳이다. 보통 지역이 아니다. 그 엄마가 왜 남의 가방을 뒤졌느냐고 하니까 선생님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시겠는가? 그런 여자들이 기도를 하면 잘하지 싶다. 아주 청산유수로 잘하지 싶다. 하나님은 사람의 기도를 참고만 하시는 분이지 절대로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이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해주시면 내가 망할 것만 구하게 된다. 예수님이 새로운 피조물의 씨로 왔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어떻게 생각하면 참 비참하다. 이 사람은 하나님같이 되려고 바벨로 달려가는 그 인류를 심판한다. 만일 이 사람이 맞다면 바벨로 달려가는 사람은 전부 심판되는 것이다. 두 판이다. 예수가 완전히 죽일 놈이 되든지 마땅히 죽을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바벨로 가는 사람들이 안 되는 사람이 되든지 이 둘 중에 하나다. 중간은 없다.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심판하고, 참 사람의 위치를 굳게굳게 세우고 있는 것이다. 나도 굳게 세우는 위치를 더 굳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벨로 가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말뚝을 든든히 박아놓아야 한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가 되셨다.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했다. 그렇게 되면 잘하면 바벨로 가는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안 되겠는가? 그리스도가 살아야 바벨로 가는 사람도 살아날 수 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지옥까지 내려갔다고 했다.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그분이 완전해져야 인류가 살아날 소망이 생기는 것이다. 의학이 발달하면 죽을 사람도 살아난다. 옛날 같았으면 죽었을 사람이 살아난다. 나도 옛날 같았으면 죽었다. 잠들어 버린 사람이 어떻게 깨어날 수 있겠는가? 없다. 그런데 새로운 기계가 있고,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산소를 입안에 집어넣어서 펌프질을 해서 살아낸 것이다. 옛날 같으면 살지 못한다. 그분이 잘 되어야 한다. 그분이 더 완전하고 더 확실하고 더 분명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게 된다. 의학의 발달이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갔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해져야 모든 사람이 살게 된다. 바벨로 가는 사람은 동정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갈 때까지 가야되고, 구원자가 올 때까지 갈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이 없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이 말씀이 에베소서 1장에 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지나간 모든 세대의 구원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한 가지만이 아니고 많다. 갈대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낸 것도 구원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것도 구원이고, 100살까지 기다려서 아들을 주신 것도 구원이고 다 구원이다. 이 길이 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구원의 길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 안에 와서 완성된다. 뭣 때문에 갈대아우르에서 나왔는가? 뭣 때문엘 100살이 되어야 아들을 낳았는가? 뭣 때문에 이삭은 눈이 어두워서 축복을 했는가? 이 모든 이유가 예수 안에 와야 답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답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창조 안에 있는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와서 완성된다. 그래서 그분을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8:18) 하고 묻는 말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구약시대에 예언했던 의식과 율법, 이런 모든 것이 다 예수 안에 오기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 안에 오기 위해서 왔던 것들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그 안에서 근원적인 질문인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라고 묻는 물음에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가 가능하다. 그 밖에서는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가 안 된다. 이 말이 안 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가 풀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해야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풀리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나는 모자랍니다. 나는 아직 부족합니다.’ 해서는 안 된다. 떳떳하고 당연한 위치에 있으면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게 된다. 국장이라고 당당한가? 아니면 대장이라고 당당한가? 이런 것이 아니다. 자기 위치에 있으면 당당하다. 9급이라도 자기 위치에 있으면 당당하다. 그런데 6급이라도 자기 위치를 벗어나면 당당하지 못하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 똑같다.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부정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없어진다. 소멸되고 없어진다. 근원적으로 문제가 소멸되고 없어져버린다. 죄를 용서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소멸되어버리고 만다. 모든 부정적인 문제가 원인무효가 되고 만다. 우리가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큰 축복이다. 우리가 동산에서 나온 것이 큰 문제였다. 동산을 나오니까 가시덤불이 있고, 이마에 땀이 흘러야 된다. 그런데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하늘 문이 열렸다는 말이다.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으니까 닫을 수가 없다. 문 같으면 열었다가 도로 닫을 수가 있는데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으니까 하나님도 다시 막을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확 터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옛날에는 대제사장만 1년에 한번 겨우 제단에서 나온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조심조심 들어갔다. 이제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하나님 앞에서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이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해방이 되었다. 깜깜한 방에 있다가 독방생활에서 하나님도 해방된 것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해방되기를 갈망했겠는가? 깜깜한 독방에서 혼자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런데 예수로 말미암아 휘장이 찢어졌다. 동산으로 말하면 화염검이 꺼졌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해방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그를 찾아서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다. 해방되었으니까 갈 필요가 없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안 가고 다른 곳에 성전을 지었다가 저주를 받았다. 단지파가 멀다고 핑계를 대고 다른 곳에 성전을 지었다. 그래서 저주를 받았다. 요한계시록에 가면 단지파가 빠지고 없다. 하나님을 만날 자리에 가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꼭 만날 자리에 가서 만나도록 법이 정해놓았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오실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못가면 하나님이 오시게 되었으니까 고생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고, 하나님은 해방되었다. 이것이 새 창조다. 옛 창조가 아니고 새 창조다. 지금 우리는 새 창조 안에 있다. 그러면 누구든 지다. Every, Anyone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그 사람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어려우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그 사람 안에 내가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것이 내 고향이고, 그것이 나고,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알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것도 못하겠는가? 이것도 안 되겠는가? 이것이 안 되면 뭐가 되겠는가. 시험 없이 들어오라고 하니까 내가 시험 없이 어떻게 들어가느냐고 들어가지 않은 놈도 있다. 너무 겸손해서 안 들어가는 놈도 있고, 자존심 때문에 안 들어가는 놈도 있다. 그냥 들어오라니까 놀래서 안 들어간다. 나는 그냥 들어오라니까 정말 좋았다. 나는 시험을 안 보고 C.C.C.에 들어갔다. 350명이 응시해서 50명을 뽑았는데, 내가 시험을 봤더라면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나는 기회가 없어서 시험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냥 패스했다. 그것이 나는 정말 기분 좋았다. C.C.C.에 있는 4년 동안 다른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들어왔다는 말을 한 번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시험보고 들어왔는데 나만 시험을 안 보고 들어왔다고 말하기가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김목사님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다. 무사통과 해보니까 너무 좋았다. 나 혼자 가지고 있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C.C.C.의 그 누구도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김목사님과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는 줄 생각했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가 열린 문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볼 천사가 하나도 없다. 어느 문으로 들어왔느냐고 물어볼 천사가 없다. 그것은 자기들이 모르는 길이다. 천사들은 휘장이 가려진 것만 알고 있고, 화염검으로 가려진 것만 알고 있다. 화염검으로 가린 것뿐만 아니라 그룹들로 지켰다고 했다. 이 그룹들이라는 말은 천사라는 뜻이다. 천사들이 아는 길이 있는데, 전혀 길이 아닌 길로 들어와 버렸으니까 어디로 들어왔는지 모른다. 어디로 왔는지 모르니까 물어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하나님과 무슨 특별한 빽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니까 못 물어보는 것이다. 나에게 물어보지 못한 이유가 그런 것 같다. 아무도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김목사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충주에 내려갔을 때도 감리교 판인데도 한 사람도 나에 대해서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김목사님을 믿으니까 그랬던 것 같다. 그분이 보냈으니까 아무나 보냈겠나하는 생각을 했었는지 2년 동안 아무도 내게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대구에 와서는 내가 교역자들과 상대를 하지 않았지만 충주에서는 다 상대했었는데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들어가려면 진짜 이런 길로 들어가야 된다. 이런 길로 들어가면 아무도 말을 못한다. 나에게 물어봤으면 김목사님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하면 김목사님에게 물어봐지겠는가? 우리도 만일 누가 어떻게 이 자리에 들어왔느냐고 물어보면 예수에게 물어보라고 하면, 하나님에게 물어보라고 하면 그냥 끝인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것이 새 피조물이다. 너무 재미있는 일이다. 공짜도 이런 공짜가 어디 있으며, 이런 특혜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이 우주 안에 어디에도 이런 특혜가 없다. 다 상선벌악이고 인과율의 법칙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인과율의 법칙이 있는가? 없다. 아무 것도 없는데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런 법은 우주 안에는 없고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법이 따로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고 한다. 다른 법이다. 정말 신난다. 말을 해도 신나고, 나는 너무 기분이 좋다. 내가 이런 새로운 법 안에 들어와 있구나. 새 법 안에 사람들이 모르는 법 안에 들어와 있다. 이것은 부처님도 모르는 법이다. 이런 법 안에 내가 들어와 있다. 이런 법 안에 여러분과 웃고 노래하고 박수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금년에는 우리 진짜로 잘 살아보자. 하나님이 이렇게 혜택을 주었는데 못살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런 특별한 법을 마련해 놓았는데 우리가 쭈뼛쭈뼛할 필요가 있겠는가? 막 달려가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바벨론으로 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빨리 달리는 줄 아는가? 우리가 느릿느릿하고 있으면 되겠는가? 우리는 더 달려야 한다. 뒤에서 아내가 우리가 더 달려야 한다고 한다. 이런 맛에 산다. 내가 심부름 시키면 짜증내지만 이런 말을 할 때는 아주 좋다고 한다. 여러분도 집에 가서 상대방이 짜증내거든 응수하지 말고 ‘우리가 새 법 안에 와있다. 새로운 법 안에, 새로운 피조물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보면 영락없이 박수칠 것이다. 잘 살아보자. 정말 잘 살아서 하나님이 참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보이자. 요즘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말이 있는데, 어느 정도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좋을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좋지는 못할 것이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진짜가 되도록 우리가 살아야 한다. 우리가 비실비실하면 안 된다. 여기가 어디라고 자리라고 비실비실하겠는가? 여기는 하나님이 새로 만든 자리인데 여기에 와서 비실비실하면 어디로 가겠는가? 죽은 사람도 살아날 판인데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성도가 일어났다.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살아야 한다. 머리 굴리지 말고 깊이 생각하지 말자. 깊이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 나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도 생각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머리 굴리지 말자. 괜히 에너지만 소모되고 소용도 없고 인생만 낭비되고 만다. 어떤 분에게 신년 이야기하면서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살아보자고 했다. 감사합니다.